•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4장 소비 대중 문화의 형성과 광고
  • 3. 대중 문화의 형성과 광고
  • 대중 소비 문화와 광고
조성운

한국 사회에서 광고가 하나의 산업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경제 성장에 따라 한국 사회가 대중 소비 사회로 이행하면서 소비를 확대하기 위하여 광고의 중요성과 효용성을 더욱 절감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970년대에는 각종 매체를 통한 상품 광고도 더욱 활발히 이루어졌다.

표 ‘경제 성장과 광고비’에서 볼 수 있듯이 1970년대에 광고비가 급증한 것은 1976년 이후의 일이다. 그 까닭은 이 시기에 고도의 경제 성장이 이루어져 개인 소득이 증가하였고, 소득 증가는 소비 증가로 이어져 상품 광고가 큰 폭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국민 총생산(GNP)에서 광고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1970년대 중반 약 0.7%에 이르게 되었고, 이후 완만한 상승세를 그렸다.

<표> 경제 성장과 광고비
연도 GNP(경상 가격) GNP성장률
(%)
광고비
(억원)
GNP 대비
광고비(%)
조원 개인당(달러)
1968 1.58 167.4 13.3 92 0.58
1970 2.55 223 8.9 127 0.57
1972 3.86 304 7.0 190 0.53
1974 6.75 481 8.7 330 0.69
1976 12.14 700 15.5 935 0.69
1977 18.12 1,028 12.7 1,203 0.74
1979 31.25 1,662 6.5 2,186 0.74
1980 37.20 1,605 -5.2 2,753 0.76
✽신인섭·서인범, 『한국 광고사』, 나남 , 2005, 286쪽.
<표> 매체별 광고 구성비
연도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기타
1970 46.8 6.5 20.6 14.1 12.0 100
1972 35.9 7.7 15.6 24.6 16.2 100
1974 32.0 4.5 22.9 34.5 6.1 100
1976 33.7 3.8 15.8 32.5 14.2 100
1977 31.4 3.1 14.5 34.1 17.9 100
1979 34.9 3.7 13.8 28.9 18.7 100
1980 35.9 3.9 12.5 29.8 17.8 100
✽신인섭·서인범, 『한국 광고사』, 나남, 2005, 286쪽.

표 ‘매체별 광고 구성비’에서 볼 수 있듯이 광고 시장에서 신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감소되고 텔레비전의 비중은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텔레비전의 보급이 1970년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던 사실과 관계가 깊다. 1979년과 1980년 텔레비전 광고 구성비가 감소한 것은 10·26 사태의 결과 소비가 위축되었기 때문이라 분석된다. 그러나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합한 방송의 광고 비중은 이미 1972년에 신문을 능가하고 있다. 단순히 통계로만 본다면 이미 1970년대 초반에 한국 사회에서 방송이 차지하는 지위는 전통적인 광고 수단이라 할 수 있는 신문을 비롯한 인쇄 매체를 뛰어넘었던 것이다. 이는 대중이 신문이나 방송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던 신뢰성을 고려한다 하더라도 방송이 신문을 제치고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방송 광고료가 광고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점증하였다. 1977년에는 신문 광고료가 377억 원, 텔레비전 광고료가 409억 원으로 신문과 텔레비전 광고비가 역전되는 현상이 일시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251) 신인섭·서인범, 앞의 책, p.346 표 6∼32.

이처럼 광고비가 증가하면서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기존의 신문과 함께 주요한 광고 매체로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이와 함께 광고 상품에도 변 화가 나타났다. 1969년 10대 광고주 중에는 해태 상사와 락희 화학(럭키 화학)을 제외한 동아 제과, 한일 약품, 한독 약품, 유한 양행, 종근당, 영진 약품, 일동 약품, 한국 화이자 등 여덟 개 업체가 제약 회사 혹은 제약업을 겸하는 회사였다.252) 합동광고사, 『합동광고』, 1970년 4월, p.41. 일제 강점기 광고 업계의 경향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이다. 그러나 1976년에는 태평양 화학, 대한 항공, 한국 화장품, 금성사, 해태 제과, 럭키, 동아 제약, 대한 전선, 제일 제당, 롯데 제과가 10대 광고주로 등장하였다. 현재 우리나라 최대의 기업인 삼성 전자는 같은 해에 11위의 광고주였다.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주요 광고주가 완전히 탈바꿈하여 제약 회사로는 동아 제약이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253) 한국능률협회, 『현대경영』, 1978년 5월, p.16 및 1979년 5월, p.22. 이러한 현상은 경제 성장에 따른 우리나라 산업 구조의 재편성에 따른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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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화장품 광고
1970년대 화장품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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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와 1970년대 광고계의 주요한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60년대는 5·16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 정권이 추진한 근대화 정책을 반영한 광고가 등장하였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알리기만 하면 상품이 팔리던 시대였으므로 광고는 대부분 신상품 정보를 ‘고지(告知)’하는 수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일부 물리적 편익 외에 심리적 편익을 제시하는 형태의 광고가 제작됨으로써 소비자를 ‘설득’하기 위한 ‘좀 더 근대적’인 형태의 광고가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제약 광고가 주류를 이루었고 1960년대 말부터 라디오, 선풍기 등 국산 가전제품의 광고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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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선풍기 광고
1960년대 선풍기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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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 시기의 광고에는 당시 자리 잡기 시작하던 산업 자본주의의 영향에 따라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계층·계급 의식이 형성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진로 소주의 광고 선전용 노래(CM song) 가사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보너스’라는 메시지를 통해 서민 대중의 애환을 표현하였으며, ‘최고 경영자 당신에게, 비나폴로’와 같은 광고는 ‘경제 개발의 주역’으로서의 경영자에 대한 존경과 동경을 표현하였다.

셋째, 이 시기 광고에는 전후 베이비 붐(baby boom)과 함께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고조된 자녀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었다. 이러한 관심은 분유 회사가 주최한 우량아 선발 대회를 통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비락을 먹으면 단단해진다, 비락 우량아’, ‘정말 대장감이죠? 비오비타’, ‘우리는 젖 먹을 때부터 원기소’ 등과 같이 어린이 건강과 관련된 상품 광고가 두드러지게 증가하였다.

넷째, 소비 욕구를 부추기는 매개체로서 애니메이션과 시엠송 같이 대중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기법이 광고에 사용되어 광고가 또 하나의 대중 문화로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진로 소주의 두꺼비, 닭표 간장의 닭미오와 꼬끼오 같은 애니메이션, 당시 유행하던 차차차 리듬을 사용하며 대중의 정서를 담은 진로의 시엠송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섯째, 1970년대는 고도 경제 성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자 한편으로 경제 성장에 따른 자신감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성장의 그늘에서 신음하는 소외 계층이 탄생하여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경향 역시 광고에도 반영되었다. 즉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새마을 운동과 경제 개발의 분위기 속에서 ‘둘러보면 밝은 모습들, 만나보면 좋은 사람들, 사람들이 좋다 OB가 좋다’와 같이 희망과 번영의 이미지를 가진 광고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급격한 경제 성장에 따른 부작용도 적지 않아 일부 부유층에 의해 사치 풍조가 점차 확산되었고 두 차례에 걸친 유류 파동(oil shock)은 대중의 소비를 극도로 위축시켰다. 이에 따라 건전한 소비와 건전한 생활을 강조하는 공익 광고, 즉 공익 캠페인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이유는 1970년대 들어와 식품, 전자 기기, 섬유 등 제2차 산업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이들 기업이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상품 광고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96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국내 총광고비의 70%나 점유하던 의약품 광고 비율이 1978년 10.7%, 1979년 10.4%로 크게 감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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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의 경품 광고
미원의 경품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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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의 경품 광고
미풍의 경품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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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미원과 미풍의 라이벌 상품 광고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특정한 상품의 시장을 잠식하거나 이를 지켜내기 위한 광고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도 그 이유의 하나였다. 1963년 원영 산업을 인수해 미풍이라는 브랜드로 조미료 사업에 진출한 삼성 그룹은 조미료 업계의 선두 주자인 미원을 경쟁 상대로 광고전을 전개하였다. 삼성 그룹은 조미료 봉투 다섯 장을 모아 오면 스웨터나 금반지를 경품으로 주는 파격적인 행사 등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파상적인 공세를 펼쳤으나 미원과의 시장 쟁탈전에서 패배하였다. 미풍의 도전을 뿌리친 미원은 오히려 조미료는 곧 미원이라는 고정관념을 소비자에게 심어 주어 조미료 시장에서 확고한 아성을 구축하였다. 이는 재벌 그룹의 문어발식 경영에 맞서 싸워 중소업체가 거둔 승리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나라의 산업사나 광고사에 획기적으로 기록될 만한 큰 사건이었다. 아울러 재벌 그룹의 문어발식 경영 혹은 확장에 대한 대중의 자각을 불러일으킨 사건이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미원은 조미료 싸움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동남아시아 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의 ‘원조’ 조미료 아지노모도와 시장 쟁탈전을 벌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미원과 미풍의 광고전을 떠올리게 하는 미원의 복합 미원과 제일제당의 아이미의 광고, 성에가 낀다, 안 낀다로 다툰 삼성 전자와 금성사의 냉장고 광고는 광고전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전자 산업의 발전과 함께 가전제품의 광고 시장이 크게 신장하였다. 가전 업체들의 광고전은 신문 윤리 위원회의 경고까지 받 을 만큼 치열하였다. 이렇게 가전제품 광고전이 격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전 산업이 기술 집약적인 산업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가전 시장 쟁탈을 위한 기술 개발은 한때 가전제품은 일제(日製)라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 놓을 만큼 발전하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수출 상품으로 도약하였다.254) 오늘날 우리나라는 신상품의 라이프 사이클이 가장 짧은 국가 중의 하나이다. 이는 새로운 기술과 디자인의 채용에 대한 소비자의 반응이 즉각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상품판매 전략의 일환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그리하여 가전제품의 시장 반응을 확인하기 위한 신제품을 가장 먼저 출시하는 시장으로서 우리나라의 소비자가 주목받는다고 한다. 특히 오늘날에는 핸드폰, 개인 휴대 정보 단말기(PDP), 디지털 멀티미디어 방송(DMB) 같은 첨단 디지털 제품 시장을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선도하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소비자가 상품을 신뢰할 수 있을 정도의 화면을 선보여 상품을 사고 싶은 욕망을 확대 재생산하려 한 1970년대의 텔레비전 광고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태평양의 타미나 ‘플루트’편, 부광 약품의 코코코 코리투살 ‘재채기’편, 해태 음료의 써니텐 ‘흔들어 주세요’편, 농심의 농심 라면 ‘형님 먼저 아우 먼저’편, 빙그레의 ‘주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편, 삼아 약품의 코코시럽 ‘권투’편, 대한 전선의 원투제로 냉장고 ‘잉어’편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이 소리가 아닙니다. 저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라고 한 보령 제약의 광고는 일제 강점기 이래 꾸준히 생산된 상품의 신뢰성과 함께 용각산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수작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광고가 활발하였던 상품으로는 코카콜라, 펩시콜라, 아이스크림, 라면 등이 있다. 1960년대에 볼 수 없었던 이러한 제품의 광고는 경제 개발의 결과 일어난 산업 구조의 변화 및 재계의 변동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서구의 개방적인 문화에 대립하면서 우리의 전통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을 담은 광고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10월 유신을 단행하면서 박정희 정권이 의도한 바가 광고에 반영된 것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1970년대에는 경제 성장에 따른 소외 문제가 한국 사회의 주요한 의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영자의 전성시대’나 ‘별들의 고향’과 같은 소외 문제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가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여 삼성, 대우, 럭키 금성(현재 LG) 등의 대기업은 제품을 알리기 위한 광고만이 아니라 기업 이미지 광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기업 이미지 광고를 시작하였다. 물론 일제 강점기에도 기업 광고가 없지는 않았다. 1920년대 물산 장려 운동을 배경으로 한 ‘우리 살림 우리 것으로’라고 외쳤던 1925년의 경성 방직의 광고, 의약품의 오용과 남용 방지에 관한 1926년 유한 양행의 광고는 우리나라 기업 광고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려는 목적보다는 민족 운동의 차원에서 제기되었기 때문에 현대적인 의미의 기업 광고라고 보기 어렵다. 이렇게 보면 1970년대에 이르러야 현대적 의미의 기업 광고가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품을 판매하려면 먼저 소비자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는 기업 이미지를 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1970년대에 대기업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는 전태일 분신 자살 사건과 같이 기업의 거대화에 따라 파생된 소외 계층 문제가 기업의 이미지에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따라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광고 표현의 흐름도 자연히 산업화 시대의 대중 문화를 형상화하는 쪽으로 집중되었다. 예를 들면 삼성의 ‘향토 문화 시리즈’, 금성사의 신년 인사 광고, 창립 기념 광고, 대외 수상 소식 광고들이 그것이다. 또 유한 양행은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의 전통을 부각시키는 광고를 하였다.

1977년 수출 100억 불 달성을 계기로 현대, 삼성, 럭키, 대우 등 국내의 대기업은 해외 광고에 투자하기 시작하여 1977∼1984년까지 해외 광고비가 2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 밖에도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을 알려 주는 광고로는 ‘대우의 일터에는 해가 지지 않습니다’, ‘세계 곳곳을 우리의 장터로-선경’, ‘최고 수준의 기술과 품질로 세계에 진출한 롯데’, ‘기술 개발과 해외 시장 개척에 앞장서 온 현대’ 등이 있 다. 이러한 해외 광고는 우리나라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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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기업 광고
1980년대 기업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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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는 우리나라 텔레비전 광고의 성장기였으며, 광고가 사회 문화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이 급속히 확대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방송 광고에서는 시엠송이 크게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시엠송이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라디오 방송이 확대된 1960년대 이후이며, 본격적인 텔레비전 시대가 열린 1970년대에는 광고의 주요한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1973년 오리온의 줄줄이 사탕, 동아 제약의 오란C, 빙그레의 투게더 아이스크림, 해태의 브라보콘 아이스크림 등의 시엠송은 강한 호소력으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불리고 있다. 이러한 시엠송은 감성적인 카피와 더불어 소비자의 인기를 끌었으며 대중 음악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도 하였다.

이런 현상은 통기타 가수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윤형주, 김세환, 송창식, 이장희, 코코 브라더스, 서유석, 조영남, 김도향, 김준, 이석, 김인순, 정종숙 등 통기타 가수들은 대부분 시엠송을 직접 부르거나 제작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김도향과 윤형주는 직접 광고 기획사를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많은 시엠송 히트작을 작곡하였다. 이들이 제작한 시엠송은 과거에 연호(連呼)를 위주로 했던 시엠송과는 달리 현대적인 감각을 띠고 있었다.

송창식이 부른 “엄마 아빠도 함께 투게더 투게더∼”라는 투게더 아이스크림 시엠송, “열두 시에 만나요 브라보콘 둘이서 만납시다 브라보콘 살짝쿵 데이트 해태 브라보콘”이라는 브라보콘 아이스크림 시엠송, “산뜻한 그 맛∼, 목말라 애타게 찾는…… 산뜻한 그 맛∼ 오직 그것뿐 코카콜라∼”라는 코카콜라 시엠송, “아빠 오실 때 줄줄이 엄마 오실 때 줄줄이 우리 집 은 오리온 줄줄이 사탕 난 먹고 싶은 거야”라는 줄줄이 사탕 시엠송, 이은하가 부른 “비너스 비너스∼ 아름다운 화운데이션”이라는 속옷 광고 시엠송,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 드려요 오-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런 눈동자여 오오오 오란C” 하던 동아 제약의 오란C 시엠송 등은 상품이 갖는 특색과 개성, 연인 사이의 사랑과 가족 사이의 따뜻한 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당시 시엠송의 특징은 소비자에게 친근하고 따뜻한 감정을 느끼게 하여 제품에 대한 인식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당시 시엠송은 단순하고 명쾌한 리듬과 멜로디를 채택하였으며, 상품의 특징을 간단명료하게 전달하는 가사를 사용함으로써, 소비자가 쉽게 기억하고 따라 부를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소비자가 해당 상품을 인지하고 소비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특히 투게더 아이스크림, 브라보콘 아이스크림, 코카콜라처럼 대중에게 친근한 시엠송으로 광고한 상품은 오늘날까지도 시판되고 있는 장수 제품이 많으며, 꾸준한 판매량을 유지하고 있다. 실제 어떤 제품의 경우 시엠송의 계약이 만료된 지 오래되었지만 지금까지도 회사가 시엠송을 부른 가수에게 매달 일정한 사례금을 지급하는 예도 있다. 이는 그만큼 회사와 제품의 인지도를 높이는데 시엠송이 기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라 할 것이다.

한편 1973년 제1차 유류 파동과 1979년 제2차 유류 파동을 겪으면서 범국민적 소비 절약 운동과 함께 건전한 생활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광고 방송의 심의 규정이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남용하는 풍요보다 절약하는 미덕 찾자’, ‘엄마 아빠 물자 절약 집안 튼튼 나라 튼튼’, ‘사치 낭비 몰아내고 저축으로 생활 유신’과 같은 공익성 메시지 광고가 전개되었으며, ‘휴지는 휴지통에’, ‘과음을 삼갑시다’ 등의 건전 소비 캠페인 구호를 광고에 삽입하도록 의무화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유신 정권은 에너지 소비를 절약함과 동시에 국민들 에게 위기의식을 불어넣어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는 마치 일제 강점기 말에 전시 동원 체제의 문구를 광고에 삽입하도록 하였던 것과 같은 발상이어서 유신 정권의 반민족적 특성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 시기의 이러한 광고를 공익 광고라 부르기에는 미진한 감이 없지 않다. 단순히 상품 광고에 공익 목적의 문구를 삽입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지금 보기에는 조악한 수준의 광고 표현이지만 미의식의 발현으로 화장품 광고에서 메이크업 개념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태평양 화학의 아모레 타미나 모이스트 메이크업의 신문 광고 ‘그대 곁에 내 곁에’편을 보면 훨씬 세련된 레이아웃에 모델의 연출력까지 돋보인다. 더구나 ‘가을 하늘을 닮은 당신의 모습’ 같은 감성적인 카피를 통하여 우리나라 화장 문화의 새로운 형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광고의 개념이 단순한 ‘고지’ 차원에서 소비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설득’ 차원으로 발전한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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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주앙 광고
마주앙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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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더불어 와인 광고도 소비자의 고급 문화 취향을 고양시키고 있다. OB 맥주의 마주앙 신문 광고 ‘값진 와인, 마주앙’편은 연극과 같은 문화생활 후에 연인과 정겨운 술자리를 만드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이를테면 막걸리나 소주에 취하던 이전 방식과는 달리 음주 문화도 고급스런 이국 취향의 스타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광고는 물론 1970년대 이래의 경제 개발의 결과를 반영한 것이었으나 고소득 계층이 즐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광고의 대상은 고소득 계층 이 아니라 차상위 계층이었다. 고소득 계층은 이미 이와 같은 생활을 즐길 정도의 여유가 있었으므로 소비의 대상을 확대하여 이를 욕망하던 차상위 계층을 새로운 소비자로 포섭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신분 상승을 바라던 소시민들에게 상당한 호소력을 발휘하였다.

포니 자동차의 수출은 우리나라에 자동차 문화를 환기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현대 자동차의 포니 신문 광고 ‘대량 수출 개시’편은 수많은 포니 자동차를 선적하는 장면을 실어 우리 자동차도 세계 시장에 진출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는 당시 우리 국민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주기도 하였다. 자동차를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지구상에 몇 나라밖에 되지 않는다는 정부와 언론의 선전은 이러한 자부심을 더욱 부추겼다. 이러한 선전은 군사 독재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도 하였으나 이면에는 앞으로 다가올 자동차 문화에 대한 대중의 욕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도 알 수 있다. 당시에 유행하던 ‘마이카(my car)’라는 말은 샐러리맨(salaried man)의 가장 큰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광고의 메시지도 우리도 살만큼 되었으니 각자 자기 자동차를 갖는 것이 소비 대중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필요충분조건인 것처럼 새로운 욕망, 곧 소비 심리를 자극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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