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0권 광고, 시대를 읽다
  • 제4장 소비 대중 문화의 형성과 광고
  • 4. 고도 대중 소비 사회의 성장과 광고
  • 고도 대중 소비 문화와 광고
조성운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WTO 체제의 등장으로 자유 무역이 자리를 잡으면서 산업 전반에 걸쳐 초국가 기업의 진출이 두드러진 점, 일본의 대중 문화에 대한 제한 조치가 해제되어 일본의 대중 문화에 대한 개방 조치가 이루어진 점, 신세대가 소비의 중심축으로 탄생한 점, 통행금지 해제, 교복과 학생 머리 모양의 자율화, 경제 자율화, 해외여행 자유화 등이 이루어져 좀 더 개방적인 사회가 되었다는 점 등의 특징을 지닌다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 통행금지가 해제된 지 꼭 한 달 뒤인 1982년 2월 6일에 상영된 첫 심야 영화인 ‘애마 부인’의 개봉은 당시 한국 사회의 ‘밤 문화’를 바꾸는 획기적인 전기였다. 애마 부인은 공전의 흥행을 기록하였으며, 이러한 애마 부인의 선풍적인 흥행은 일본 NHK에서 감독 정인엽과 주연 배우 안소영을 인터뷰할 정도로 국제적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이후 안소영은 한국 사회의 섹시 코드가 되었고, 애마 부인은 시리즈물로 제작되었다. 또한 애마 부인의 제목을 모방한 이른바 ‘부인 시리즈’의 성인 영화가 뒤를 따라 제작되었다. 이와 같은 반향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 실시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시 심야 극장의 주요 관객이었던 대학생들은 낮에는 ‘전두환 타도’를 외치면서 밤에는 애마 부인의 스크린 속에 빠져들었다. 이는 전두환 정권이 의도하였던 바였다. 정치적 자유에 대한 억압적인 통제와 탄압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러한 해방감의 제공은 필수적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밖에도 어린이 대공원, 용인 자연 농원(현 에버랜드), 롯데 월드 등의 위락 단지가 대중의 놀이 공간이 되었고, 전자오락실의 등장은 학생들의 놀이 문화에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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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마 부인 포스터
영화 애마 부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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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대적 특징은 곧바로 광고에 반영되었다. 특히 광고사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1980년 12월 1일에 시작한 컬러텔레비전 방송이었다. 우리나라의 컬러텔레비전 방송은 12·12 사태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정 권이 언론의 비판 기능을 억누르고 자발적인 충성을 유도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실시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대해 『기자협회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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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텔레비전 방송
컬러텔레비전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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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텔레비전 방송
컬러텔레비전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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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전두환-노태우 중심의 쿠데타가 일어나자 한국 신문들은 경쟁적으로 미국 정부가 전두환 집권에 호의적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한 신문의 워싱턴 특파원은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비화를 공개했다. “신군부 측이 사주의 개인 비리를 들먹이며 회사를 언론 통폐합 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검토하고 있으니 미국 내 친한파 인사와 긴급 인터뷰해 기사를 보내 달라고 서울 본사에서 요청했다.”며 “고민 끝에 인터뷰 기사를 전송했다.”고 기자는 말했다. “이는 다른 신문사들도 마찬가지였다.”는 말도 덧붙였다.261) 김일, 「신문·재벌·족벌의 독점 소유부터 깨야」, 『참여사회』, 참여연대, 1988년 10월, pp.21∼22.

또한 국민에 대한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하던 이른바 ‘3S 정책’을 실행하려면 컬러텔레비전 방송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축구, 야구, 씨름 등 프로 스포츠가 도입되었다.

컬러텔레비전 방송의 도입과 함께 전두환 정권은 언론 통폐합과 한국 방송 광고 공사를 설립하여 언론 및 방송에 대한 통제에 적극 나섰다. 그 결과 신문은 전국 28개사에서 중앙지 6개사, 경제지 1개사, 지방지 8개사의 17개사로 통폐합되었으며, 방송에서는 동양 방송과 동아 방송이 한국 방송 공사(KBS)로 통합되었고, 문화 방송(MBC)은 각기 독립 법인으로 제휴해 왔던 21개 지방 계열사에서 각각 51%의 주식을 인수해 지방 방송망으로 계열화하였으며, MBC 주식의 65%를 KBS가 인수하도록 하였다. 또 기독교 방송은 종교 방송만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합동 통신사와 동양 통신사를 통합하여 연합 통신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한국 방송 광고 공사를 설립하여 방송 광고의 대행, 언론 기관·단체 및 언론인의 지원 등 공익사업, 방송 광고물의 조사 연구, 방송 광고 자료·정보의 국제 교류, 기타 공사 목적 달성에 필요한 부대사업을 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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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야구 응용 광고
프로 야구 응용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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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바탕 위에서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정권은 KBS의 방송망을 이용해 이른바 ‘공익 광고’를 방영함으로써 자신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국민에게 직접 전달하여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는 당시 방송된 공익 광고가 다룬 주제 중 ‘질서’가 가장 많았던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 부합하는 최초의 공익 광고는 1981년 공익 광고 협의회가 KBS를 통해 방송한 것이었다. 본래 공익 광고는 한 나라의 정치·경제·사회 등의 특수한 상황에서 극복해야 할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의 행동 준거를 촉구할 목적으로 태동하였다고 한다.262) 양성기, 「한국 사회의 문화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른 공익광고 표현에 관한 연구」,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2003, p.7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5·18 민주화 운동 이후 사회 안정을 절대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정권의 필요에 따라 이 시기에 언론 통폐합과 함께 공익 광고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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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 광고
공익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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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대중 의식 조작의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특히 올림픽의 개최는 곧 선진국이라는 등식은 당대 사람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곧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은 ‘질서와 화합’의 축제이며 ‘질서와 화합’은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온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질서와 화합’이란 결국 대중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층이 요구하는 하나의 방향으로 이끈다는 의미인데, 전두환 정권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 다음 광고 카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말, 이런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아요.”

왜 버스가 오면 줄도 안 서고 서로 먼저 타려고 야단일까?

왜 아무 데나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버릴까?

빨간 불인데도 마구 길을 건너고,

누가 보든말든 큰 소리로 노래하고 떠드는 사람들

정말 이런 것만은 보고 싶지 않아요.

서로 양보하고 조금만 남을 생각해 준다면 좋을텐데……

질서는 바르고 편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대학생과 민주화 운동 진영을 중심으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이 대중의 정치적 각성을 오도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컬러텔레비전 방송의 시작은 광고의 측면에서는 일대 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식품, 화장품, 패션 등 색상 효과가 큰 분야는 컬러텔레비전 광고를 통해 구매 욕구를 자극하여 신상품 개발, 시장 확대 등을 꾀하였다. 광고에 나오는 상품이나 출연자의 의상이 컬러 화면에 걸맞게 화려해졌다. 이와 동시에 일반 국민 역시 다양한 방면에서 색조에 대한 관심과 욕구가 증대하였다.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는 연예인의 의상이나 색상에 대한 일반 대중의 반응은 매우 빨랐다. 이에 따라 기업의 신상품 출시 주기는 더욱 빨라지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경향에 특히 민감히 반응한 것은 화장품업계였다. 흑백텔레비전에서는 표현할 수 없던 색을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직접 소비자에게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평양 화장품을 예로 들면 1982년에서 1986년 아시안게임까지 20편의 텔레비전 광고를 만들어 방영하였다. 이에 따라 화장품 광고 모델은 아름답고 청순한 이미지의 여성 연예인이 독점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화장품 모델은 곧 최고의 스타라는 등식이 성립하였다.

이처럼 컬러텔레비전 방송은 우리나라 광고계에 큰 변화를 몰고 왔지만 광고업계의 입장에서 보면 컬러텔레비전 방송의 결정은 매우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컬러 시대에 맞는 환경적·기술적 준비를 미처 갖추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광고 감독인 강한영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1980년 12월 첫 컬러 방송이 시작되면서 방송계, 광고계, 특히 필름 제작팀들은 초비상 상태에 돌입했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갑자기 시행된 컬러 방송에 기대보다는 불안감이 앞섰다. 대부분의 제작팀들은 거의 몇몇 극장용 35밀리 광고 필름을 제작한 경험밖에 없었으므로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263) 신인섭, 『광고로 보는 한국화장의 문화사』, 김영사, 2002, p.121.

이러 배경 때문에 방송 광고의 컬러화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보다 늦은 1981년 4월 1일에 시작되었다. 방송 광고의 컬러화 결과 1980년 100대 광고주 가운데 방송 광고비 순위 12위이던 금성사가 1987년에는 5위로, 삼성 전자는 15위에서 7위로 뛰어올랐다.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광고가 증가하는 것에 비례하여 광고에 대한 규제가 본격화되었다. 1976년 4월 소비자 보호 단체 협의회가 조직된 이후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비자 보호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벌어졌으며, 공정 거래 위원회의 설치로 기업의 입장에서도 소비자의 권익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따라서 광고주의 입장에서도 과장 광고보다는 간결하고 명쾌하게 제품을 알릴 수 있는 광고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광고에는 인상적이고 감성적인 구어체의 카피가 소비자 관여가 낮은 제품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이어서 광고 속에 나타나는 이 시기의 사회 문화적 특징을 개별 광고 사례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1980년대에는 이른바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일부 고위층이나 부유층의 전유물로만 여기던 자동차가 생활필수품화하면서 ‘마이카(my car)’, ‘오너드라이버(owner driver)’라는 말은 시대의 코드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자동차의 증가는 일가족이 자가용을 타고 떠나는 여름 피서를 보편화하였고, 명절 때 고속도로에는 귀성길에 오른 수많은 자가용으로 인해 교통 대란이 일어나곤 하였다. 또 도시 근교로 가벼운 여행을 떠나는 ‘드라이브’의 개념도 확립되었다.

아울러 자동차의 보급과 확산은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국민적인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도 일조하였다. 1977년 현대 자동차의 ‘한국의 포니 드디어 대량 수출 개시’라는 광고는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상징하는 것처럼 항구의 선착장에서 대기하는 포니 자동차의 흑백 사진을 실었다. 그러나 1986년 “완벽한 테스트만이 한 차원 높은 차(車)를 만듭니다.”라는 포니 엑셀의 광고는 자동차 테스트장에서 포니 엑셀의 성능을 시험하는 컬러 사진을 크게 실어 품질에 대한 시각적인 접근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것은 1970년대의 물량 위주의 성장이 1980년대를 거치면서 기술 위주의 성장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반영한다. 동시에 자동차 수출국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함으로써 이를 국가적 자긍심으로 연결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 축구, 야구, 씨름 등의 프로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1980년대는 문자 그대로 ‘스포츠의 시대’였다. 이러한 스포츠 열풍은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절정으로 치달았다. 당시 스포츠는 단순히 관전하는 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여 즐기는 것으로 생활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그에 따라 스포츠 의류 및 스포츠화 관련 제품 광고가 큰 폭으로 늘어났다. 당시 나이키사는 스포츠 관련 제품 광고의 대표 주자였다. 나이키사는 세계적인 테니스 선수인 존 매켄로와 마라토너 살라자르 등이 나이키 제품을 신는다며 광고하였다. ‘누가 나이키를 신는가’라는 광고의 카피는 다음과 같다.

나이키는 냉엄한 프로의 세계에서 정상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선택한 승리의 스포츠화입니다. 테니스의 슈퍼스타 존 매켄로, 마라톤 세계 기록 보유자 알베르토 살라자르, 그리고 미국 프로 야구의 두 거목 마이크 머크와 스티브 칼톤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지금 승리의 쾌감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정상급 프로 선수들이 선택한 승리의 스포츠화 나이264) 이낙운 엮음, 『한국 우수 카피 선집―카피 이처럼 쓰라』, 나남, 1992, pp.453∼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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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광고
나이키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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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 ‘누가 나이키를 신는가’, ‘왜 나이키를 신는가’, ‘누가 나이키를 찾는가’로 이어지는 나이키 광고의 기획 의도는 전문 운동 선수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제품이 출시되자 청소년층을 중심으로 한 일반 소비자들에게 엄청나게 판매되었다. 당시 이루어졌던 교복 및 두발 자유화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나이키와 맞서 국제 상사의 프로 스펙스는 ‘한국인의 체형에 맞는다’는 콘셉트로 경쟁하였다. 이 밖에도 아디다스, 아식스, 미즈노, 퓨마, 월드컵, 까발로 등 국내외의 신발 브랜드가 계속 탄생하면서 스포츠화 광고 시장은 비약적으로 신장하였다. 특히 나이키와 프로 스펙스의 광고전은 마치 1960∼1970년대에 펼처진 미원과 미풍의 광고전을 연상시킬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처럼 브랜드 스포츠화가 본격적으로 경쟁하자 주요 소비층인 청소년 사이에서는 이런 운동화가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나이키나 프로 스펙스 운동화를 갖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였으며, 고무신이나 일반 운동화에 매직으로 나이키 상표를 그려 넣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같은 브랜드를 소유함으로써 동질감을 느끼려는 심리와 유명 브랜드의 착용이 마치 신분 상승인 것인양 느끼게 한 풍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급속한 경제 개발의 결과 발생한 소외 의식과 계급 간의 격차를 그러한 방식으로 해소하려 한 청소년기의 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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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스펙스 광고
프로 스펙스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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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경쟁 과정 속에서 국내 프로 스포츠의 스타를 모델로 한 광고가 등장하였다. 또한 스포츠화에서 시작한 스포츠 브랜드의 열풍은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거치면서 아디다스, 슬레진저, 엑셀, 위크 엔드, 반도 캐주얼 등과 같은 스포츠 웨어에도 영향을 끼쳐 시장이 크게 확대되었다.

또한 1986년에는 아시안 게임과 한국팀의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을 소재로 한 ‘최선을 다할 때 모두가 승리자. 30억 아시아인의 대합창이 잠실벌을 뒤흔든다(프로 스펙스)’, ‘지난밤 피로하셨죠? 월드컵 피로 서울에서 풉시다(우루사)’ 등의 광고가 등장하였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커뮤니케이션 올림픽(삼성 반도체 통신)’, ‘신기록의 현장을 본다. 그 함성을 듣는다(인켈)’, ‘서울에 모두 모였습니다. 금호 타이어가 수출되는 나라들(금호 타이어)’ 등과 같이 스포츠 이벤트와 제품을 연계한 광고가 등장하여 본격적인 스포츠 마케팅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스포츠 마케팅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절정에 이르렀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 경제는 반도체, 컴퓨터, 생명 공학 등의 첨단 산업과 기계, 전기, 전자, 자동차, 화학 등의 고기술·고부가가치 산업에 중점을 둔 발전 전략을 채택하였다. 한편 전통적인 노동 집약적 산업은 업종 전환, 해외 진출, 기술 집약적인 산업으로의 방향 전환 등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이러한 산업 구조의 급속한 재편은 광고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럭키 금성의 테크노피아와 삼성의 휴먼테크 광고는 당시 테크놀로지 지상주의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광고는 차가운 테크놀로지와 휴머니즘의 만남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테크놀로지 지상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한국적인 정서와 인간미를 광고에 담으려고 하였던 경향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경향의 광고 사례로는 다시다의 ‘고향의 맛’ 시리즈, 프로 스펙스의 ‘김기창 화백 일러스트레이션’, 쌍용 건설의 ‘오늘은 속이 불편하구나’, 대우 전자의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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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테크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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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방망이 소리

어제 내린 비로 개울물 소리가 한결 드높다.

피라미를 좇고 있는 벌거숭이들을 저만치 쫓아내고

동네 아낙들이 빨래를 한다.

땀 젖은 옷을 빠는 큰 올케 모시 적삼이 또 땀에 젖는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대우 전자 제공입니다.

기적 소리

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떤 사람은 가슴 설레던 신혼여행 때를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 때의 추억을 더듬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저 기적 소리에서 한 맺힌 이산가족들의 아픈 사연을 읽는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대우 전자 제공입니다.

앞의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같은 광고는 기업의 이미지를 높이려는 목적에서 제작되었지만 소재를 ‘우리 것’에서 찾은 것은 산업 사회로 변화하면서 상실해 가고 있는 우리의 전통 가치 및 어린 시절의 추억을 자극하여 소비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1980년대 후반은 1987년 시장 개방 및 1988년 해외여행 자유화, 담배 시장 개방 등이 잇따르면서 한국 시장이 외국 자본에 개방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외국의 유명 브랜드가 한국 시장에 진출하였으며 외국어로 된 브랜드가 자연스러워졌다. 이에 국산 역시 외래어로 된 상품명을 쓰기 시작하여 브랜드로 국산과 외산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1987년 광고 시장이 부분 개방되어 외국계 광고 회사가 진출하였고, 1989년 광고 표현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외국인 모델의 사용과 해외 로케(location)가 허용되었다. 그에 따라 저우룬파(周潤發), 왕쭈히언(王祖賢), 소피 마르소, 케니 로저스 등 외국의 유명 연예인이 국내 상품의 광고 모델로 등장하였으며, 해외 현지 촬영을 통해 제작한 광고는 표현이 좀 더 화려해지는 등 광고의 차별화가 시작되었다. 이 밖에도 1981년부터 시작된 경제 불황을 반영한 ‘삼성 자동판매기 한 대가 아빠 봉급을 앞질렀어요(삼성)’, ‘몸이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지 않습니까?(그랑페롤)’, ‘이코노 컬러를 자신 있게 권하는 열 가지 이유(이코노 TV)’ 등과 같은 광고도 나왔다. 이러한 광고에서는 감성적 소구보다는 ‘프로 스펙스가 달리기 기록을 단축한 이유’, ‘고려 은단이 99.9% 순은으로 싸여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프라그를 제거하는 브렌닥 스’ 등과 같이 이성적인 소구로 제품의 차별적 장점을 많이 강조하였다.

1990년대는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 정부와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탄생함에 따라 가시적인 민주화 조치가 이루어져 한국 사회는 대내외적으로 좀 더 개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또한 수출 1,000억 불을 기록하고 1인당 국민 소득이 8,000달러를 돌파하는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다소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이래 계속된 소비 성향의 고급화 추세는 소비자 욕구의 패션화·다양화 경향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이러한 소비 성향의 변화는 대중 문화에도 크게 영향을 끼쳐 대중 문화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특히 1990년대 후반에 시작한 텔레비전 홈쇼핑 방송과 인터넷 쇼핑은 소비를 더욱 증가시켰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쟁취하였다는 희망 속에서 90%에 가까운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개혁과 초일류 국가를 지향한다는 ‘신한국의 건설’을 이루지 못하고 국가 부도 위기를 맞아 이른바 IMF의 관리 체제에 들어가 수많은 실업자를 양산하였다. 이에 따라 투자와 소비가 극도로 위축되어 한국 경제는 이후 수년 동안 큰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대의 광고에는 이러한 시대적 성격이 반영되었다. 김영삼 정부 초기에는 신한국의 기치를 반영하여 대우의 ‘탱크주의’, 삼성의 ‘세계 일류의 꿈’, LG의 ‘고객을 위한 가치 창조’, 현대의 ‘기술의 현대, 세계의 현대’ 등과 같이 세계화와 초일류 기업 지향의 기업 홍보 광고가 제작되었다. 이는 수입 개방과 함께 국내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초우량 기업 이미지를 구축해야 할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IMF 체제하에서는 가난했지만 따뜻했던 과거를 배경으로 한 복고풍의 문화가 유행하였다. 광고 역시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대응하여 만화 영화 ‘짱가’의 주제가를 부활시킨 데이콤 국제 전화 광고, 권투 선수 홍수환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의 삼성 전자 기업 광고,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한번……”이 란 대사와 함께 1960년대 영화를 모방한 OB 라거 맥주 광고, 국민 체조 음악을 배경으로 한 케토톱 광고 등 복고풍이 많았다. 또한 “손이 가요 손이 가 새우깡에 손이 가요”, “맛동산 먹고 즐거운 파티”와 같이 옛 시엠송이 다시 광고에 사용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소비자의 소득이 감소함에 따라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현실적인 구매 패턴이 나타났다. 이러한 소비 행태의 변화에 따라 광고도 이전의 추상적, 이미지 중심적 광고가 아니라 상품의 특징이나 장점을 구체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으로 제작되었으며, 세일·가격 파괴·경품 제공 등과 같은 절약형 광고도 나왔다. 또한 무역 수지 적자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은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국산 제품 소비를 촉구하는 광고를 제작하였다. 대표적인 예로는 ‘달러를 신고 계십니까?(프로 스펙스)’, ‘웃어라 경제야!(삼성)’, ‘코리아 파이팅(삼보)’ 등이 있으며, 심지어는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조선 사람, 조선 것’과 같은 물산 장려회 궐기문(物産奬勵會蹶起文)을 이용한 광고까지 나왔다. 더욱이 불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광고 매체에도 영향을 미쳐 신문에서는 변형 사이즈, 3도 컬러 광고 등이 도입되었고, 텔레비전에서는 획일적인 15초에서 벗어나 5초에서 60초까지 광고 시간의 길이를 탄력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경제적인 변동에 따라 광고 시장이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1980년대에 오렌지족이 있었다면 1990년대에는 X 세대가 탄생한 시기였다. X 세대는 보통 1972년에서 1976년 사이에 출생한 사람들로, 기존 질서를 거부하며 소비와 유행에 상당히 민감하지만 과거의 젊은 세대들과는 패턴이 전혀 다른 미스터리한 세대를 일컫는다. 이후 수년 동안 기업들도 이들 X 세대의 문화를 광고에 반영하였다. X 세대 신드롬의 다른 한 축에는 처녀 같은 젊은 기혼녀들을 일컫는 ‘미시족’ 신드롬도 있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가부장제하에서 개인적 삶을 희생하거나 희생을 강요받았던 과거의 어머니와는 전혀 다르게 소비 시장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들은 젊은 감각을 통해 적극적인 사고를 하였고 자기를 능동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남성과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미시족을 전면에 내건 광고로는 ‘내 아기는 다르다!’고 외치며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어머니의 활동적인 모습을 담은 분유 스텝 로얄의 광고, 아모레 마몽드의 ‘세상은 지금 나를 필요로 한다’, 드봉 뜨레아의 ‘늘 애인 같은 아내’, 에스콰이어 미네라인의 ‘원만한 것? 나는 싫어!’, 까슈의 ‘나만의 세계’ 등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90년대 초반에는 과거 냉전과 발전의 논리에 밀려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한국적인 것’, ‘전통 문화의 가치’, ‘고향’, ‘자연’과 같이 우리의 전통적인 정서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쏠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대중 문화에도 영향을 끼쳐 1993년에는 판소리를 주제로 한 영화 ‘서편제’가 그 당시까지 한국 영화사상 최대의 흥행을 기록하였고 이어 문화 체육부는 1994년을 ‘국악의 해’로 지정하였다. 또한 정부는 1997년을 ‘문화유산의 해’로 선포하는 등 전통 문화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광고에도 영향을 미쳐 판소리 명창 박동진을 모델로 한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라는 솔표 우황청심원 광고는 대중의 사랑을 크게 받았다. 이 밖에도 경동 보일러와 제일제당의 ‘고향의 맛 다시다’ 등의 광고에서도 효와 고향이라는 전통적인 가치와 향수를 자극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2000년대에는 2000년에 열린 남북 정상 회담을 계기로 남북 통일에 대한 기대가 팽배하였으며, 2002년에 개최한 월드컵은 길거리 응원 문화를 낳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포옹하는 사진은 남과 북의 화해의 상징으로 이해되었으며 향후 남한의 북한 지원이 민족 통일이나 민족 화해를 위하여 자연스런 일로 인식되었다. 또 2002년 월드컵 응원단인 붉은 악마는 붉은색을 상징 색으로 삼아 붉은색은 곧 공산당의 상징이라는 인식을 붉은색은 곧 축구라는 인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한국 사회 의 기성세대가 붉은색에 대해 갖는 인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최소한 젊은 세대는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광고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인물, 어투, 의복 등에서 북한 소재를 활용한 10여 편의 광고가 등장하였다. 양말업체 싹스탑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 위원장을 패러디하여 ‘백두에서 한라까지’란 카피를 담았으며, 그 밖에도 북한 의상·북한 사투리·분홍색 진달래꽃을 사용하는 ‘2% 부족할 때’의 광고, 영화 ‘공동 경비 구역 JSA’를 본뜬 인터넷 포털 다음의 판문점 광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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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우리는 광고를 통해 한국 근대사의 성격을 찾아보았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광고가 상품을 좀 더 많이 판매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상업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것이지만 광고 내용 속에는 당시 사회의 특징과 성격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통해 한국 근현대 사회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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