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1장 미술의 탄생
  • 1. 미술의 탄생
윤세진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말과 사물』 서문에서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의 어느 소설에 나온다는 중국의 한 백과사전을 인용한다. 푸코가 인용한 보르헤스의 구절은 이렇다.

동물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황제에게 속하는 동물, 향료로 처리하여 방부 보존된 동물, 사육 동물, 젖을 빠는 돼지, 인어, 전설상의 동물, 주인 없는 개, 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광폭한 동물, 셀 수 없는 동물, 낙타털처럼 미세한 모필(毛筆)로 그릴 수 있는 동물, 기타, 물 주전자를 깨뜨리는 동물, 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1)푸코, 이광래 옮김, 『말과 사물』, 민음사, 1997, 11쪽.

이 동물 분류를 보면서 웃음이 절로 났다면, 그것은 이 ‘이상한’ 분류 가 우리의 사고 기반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사물들이 어떤 기반 위에서 특정한 질서에 따라 배치되어야 하는데, 저 분류에서는 “존재들이 병치될 수 있는 ‘장소’, 무언(無言)의 기반”2)미셸 푸코, 앞의 책, 13쪽.이 제거된 것이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레디메이드(readymades, 기 성품)는 보르헤스의 글과 비슷한 웃음을 유발한다. 뒤샹에게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물을 ‘미술’로 만드는 힘, 즉 그것을 미술이라고 인식하게 만드는 그 기반에 대한 물음이다. 왜 어떤 변기(便器)는 ‘변기’이고, 어떤 변기는 ‘미술품’인가, 그 경계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뒤샹은 “이것이 미술이다.”라는 정의가 아니라 “이것도 미술일까?”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가 전제하고 있는 미술의 기반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미술의 이 ‘기반’을 밝히는 데 있다. 미술이 탄생하게 되는 기원의 공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현재의 미술 인식을 가능하게 한 물적·정신적 토대를 탐사하고, 그럼으로써 미술을 좀 더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개념이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작동하려면 가시적(可視的)인 장치가 필요하며 특정한 방식으로 담론화(談論化)되어야 한다. 미술관과 미술 교육은 미술에 대한 인식을 정립시킨 중요한 가시성(可視性)의 장치로서 근대 미술에 관한 담론의 중심을 형성하였다. 미술 일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자리를 잡아 가면서 미술 내부에서도 개념의 분화 및 새로운 질서화(ordering)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아울러 그 각각을 사유하는 새로운 언어적 집합, 즉 담론이 형성된다. 미술 비평, 미학, 미술사 연구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 장치와 담론의 기틀이 형성됨으로써 우리는 과거와는 다른 기반 위에서 미술을 사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근대 미술은 ‘근대’라는 역사적 단계에 존재하였던 미술이라기보다는 근대적 제도와 인식의 새로운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사에서 ‘근대’라는 시기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1910년 전후를 하나의 기점으로 보고자 한다. 대략 이 무렵에 ‘순수 미술’의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전문적인 미술가 집단이 생겨나고 미술 교육 강습소 등이 설립되면서 미술의 위상이 이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 ‘기원(起源)’의 시공간에서 시작하여 이후 미술에 대한 근대적 인식이 정립되는 과정을 다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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