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1장 미술의 탄생
  • 2. 근대적 미술 개념의 형성
  • 미술 개념의 탄생
윤세진

모든 것의 역사에는 탄생의 순간이 있다. 탄생은 자연스러운 진화나 변형의 결과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무언가가 돌연히 나타나 새로운 세계를 낳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미술’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경위는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미술 개념이 탄생하는 과정을 추적하기 위하여 먼저 20세기 초에 ‘미술’이라는 단어가 어떤 맥락(脈絡)에서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자.

애급(埃及)의 미술(美術) 중 가히 칭도(稱道)할 자(者)는 건축물이니…… 조각(雕刻) 및 회화(繪畵)의 술(術)은 상차극조(尙且極粗)한 중(中)에 채색(彩色)의 시용(施用)은 교승(敎僧)의 일(一)한 법(法)이 유(有)하야…….3)「만국 역사(萬國歷史)」,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5년 9월 2일자.

미술계 서광(曙光) 이종찬 씨는 미국 핑함 미술 학교에서 다년(多年) 유학(留學)하야 동판(銅版) 연판(鉛版) 조각법과 오색 사진(五色寫眞) 오색 도서(五色圖畵) 인쇄법을 졸업 귀국하였는데 천연당(天然堂) 사진사(寫眞師) 김규진(金圭鎭) 씨와 협동 영업하기 위하야 해소용(該所用) 기기(器機)를 미국에 셔 무래(貿來)하야 내월(來月) 중순경에 개업한다는데 차등(此等) 기술(技術)은 한국에 초유(初有)한 미술(美術)이라더라.4)「잡보」,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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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영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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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인용문은 세계 각국의 문물을 소개하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5년 기사로, 여기서 ‘미술’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건축, 조각, 회화를 포함하는 ‘시각 예술’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인용문은 같은 신문의 1910년 기사인데, 여기서 미술은 사진술 같은 ‘새로운 기술’의 의미에 가깝다. 실제로, 우리나라 1세대 서양화가 중 한 사람인 김찬영(金瓚永, 1893∼1960)은 “나의 직업이 미술이란 말을 들은 순사군(巡査君)은 크게 ‘술(術)’ 자에 의심을 품고 순사군이 가로되 ‘미술은 요술의 유(類)인줄 알거니와 그러한 것을 배우려고 유학을 하였나.’라고 하니 나는 몸에 소름이 끼쳤다.”라고 회고하기도 하였다.5)김찬영(金瓚永), 「작품에 대한 평자적 가치」, 『창조(創造)』 9호, 창조사, 1921.6. 1910년대 말만 해도 일반인에게 미술은 이처럼 아직 낯선 용어였다. 그런가 하면 “공업가(工業家) 기업가는 직업적 미술적(美術的)으로 풍력(風力)과 수력(水力)을 인(因)하며…… 기기묘(其奇妙)한 기예(技藝)와 미술(美術)을 일반 인민에 개유교회(開牖敎誨)하야…….”라는 구절에서처럼 미술은 기술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6)옥동규(玉東奎), 「실업(實業)의 필요(必要)」, 『서우(西友)』 8, 서우 학회, 1907, 28∼29쪽. 이처럼 1910년대 초까지 ‘미술’이라는 말은 때로는 시각 예술로, 때로는 새로운 기술로, 때로는 예술 일반을 의미하는 말로 혼용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미술’이라는 말이 문헌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880년대 무렵부터이다. ‘미술’이라는 단어 자체가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새롭게 불쑥 나타난 사건이 었던 셈이다. 어떤 단어가 새로 만들어지는 경우는 대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새로운 사물이나 사건을 명명(命名)해야 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적·인식적 변화에 따라 개념을 새롭게 체계화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 경우이다. 그런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서구 문명과 접촉하며 생겨난 일련의 번역어(飜譯語)는 개념과 인식 체계 자체에 중요한 단절(斷絶)을 만들어 낸다.

동아시아에서 ‘미술’이라는 단어는 서양의 ‘파인 아트(fine art)’에 대한 번역어로 성립하였다.7)일본에서 ‘미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형성과 역사적 배경에 관한 논의는 기타자와 노리아키(北澤憲昭)나 사토 도신(佐藤道信) 같은 선행 연구자들이 시작하였다(北澤憲昭, 『眼の神殿』, 美術出版社, 1989와 佐藤道信, 『「日本美術」 誕生』, 講談社, 1996을 참고). ‘미술’이라는 신어(新語)를 처음 사용한 것은 가장 적극적으로 서양의 근대 문명을 흡수한 일본이었다. 일본은 서양의 문명을 흡수하고 내국에서 박람회를 유치할 목적으로 1873년에 열린 빈 만국 박람회(Wien萬國博覽會)에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였는데, 여기서 출품 목록에 표기된 독일어 ‘쿤스트게베르베(Kunstgewerbe, 미술 산업)’를 ‘미술’로 번역하였으며, 이후 ‘미술’은 ‘쇠네 쿤스트(Schöne Kunst)’와 ‘빌덴 쿤스트(Bilden Kunst)’의 번역어로도 통용되었다. 이 같은 단어들에 대응하는 기존 한자어가 없는 상태에서 대체로 박람회에 전시한 시각 예술품을 지칭하는 말로 ‘미술’이라는 신조어(新造語)를 만들어 낸 것이다.

현재 서양에서 ‘파인 아트’는 일차적으로 회화·건축·조각 등의 시각 예술, 즉 미술을 의미하지만, 광의적으로는 문학·음악·무언극(無言劇)·무용까지를 포함하는 ‘순수 예술’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양에서 이런 식으로 개념이 정립된 것은 18세기 중반 이후의 일이다.

‘아트(art)’가 유용한 손재주가 아니라 인문적 교양의 하나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르네상스시대 이후의 일이다.8)르네상스시대 이후의 변화된 미술과 미술가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김영나, 「르네상스 미술가와 미술 교육」, 『미술사 논단』 2, 한국 미술 연구소, 1995, 81∼113쪽과 이은기, 「장이에서 미술가로」, 『미술사 논단』 2, 한국 미술 연구소, 1995, 119∼147쪽을 참조.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회화론(繪畵論)이 나오고 아카데미(Académie)가 등장하는 등 르네상스시대에 이르러서야 오늘날 우리가 ‘미술’이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작업들이 어느 정도 체계화된다. 하지만 르네상스시대의 미술 자율성이란 미술의 절대적이 고 보편적인 자율성이라기보다는 중세의 장인적(匠人的)이고 수공업적(手工業的)인 작업 방식으로부터의 자율성, 혹은 ‘종교’라는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구속으로부터의 자율성을 의미하는 상대적인 자율성이었다는 점에서 미술은 지금과 같은 독자적 개념으로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러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전반적인 논의와 함께 샤를르 바뙤(Charles Batteux, 1713∼1780)가 회화, 조각, 음악, 시, 무용을 ‘파인 아트’로 범주화함으로써 ‘파인 아트’는 순수한 예술 개념으로 자립하게 된다.9)서양에서 미술 개념의 전체적인 변천 과정에 대해서는 W.타타르키비츠, 손효주 옮김, 『미학의 기본 개념사』, 미진사, 1990을 참조. 유럽에서 ‘미(美)’를 ‘진리’와의 연관 속에서 독립적인 지식으로 연구하는 ‘미학(美學)’이 탄생한 것 역시 이 무렵이다.

일본의 경우, 미술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던 당시에 미술은 일반적으로 ‘예술’의 의미로 통용되었다. ‘미술’이라는 번역어에 부가된, “서양에서는 음악, 그림, 조상(彫像), 제작 기술, 시학(詩學) 등을 미술이라고 한다.”라는 주석(註釋)이나, 1877년에 출간된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의 미학책 『미묘학설(美妙學說)』에 나오는, “서양에서 지금 미술(美術) 가운데 드는 것은 화학(畵學), 조상술(彫像術), 공장술(工匠術)이지만, 나아가 여기에 시가(詩歌), 산문(散文), 음악(音樂)을, 또 중국(漢土)에서는 서(書)도 이런 종류에 들어……”라는 구절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그러다가 미술이 시각 예술에 한정된 의미로 인식된 것은 동경 미술 학교가 설립된 1887년 이후의 일이다. 예술의 의미로 통용되던 ‘미술’이 시각 예술만을 지칭하게 된 데는 중요한 원인이 있다. 사토 도신(佐藤道信)을 비롯한 여러 논자가 강조하듯이, 미술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수출 산업으로 고려되었다. 즉 19세기 중반 유럽에 불어 닥친 자포니즘(Japonism)의 중심에 있던 것은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와 공예품을 비롯한 미술품이었으며, 이를 통해 서양인에게 비서양(非西洋)은 ‘미적 시선’으로 포착되었다. 특히 근대 일본의 미술 담론을 주도한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1862∼1913)이 미술을 일본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으로 자리매김함에 따라 미술은 예술 중에서도 특히 시 각 예술을 지칭하는 말로 한정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일본에서 만들어 낸 번역어 ‘미술’을 우리나라에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개념상의 혼란이 일어났다. 국가 주도하에 서양 문명을 이식(移植)하는 과정에서 개념을 창안하고 정립하였던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는 ‘미술’이라는 낯선 개념을 맥락 없이 한꺼번에 수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기술의 의미가 강했던 ‘미술’의 의미가 현재와 같은 ‘순수 미술’ 개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10년대이다.

1915년에 『학지광(學之光)』에 발표된 안확(安廓)의 ‘조선의 미술’은 그러한 변화를 보여 주는 텍스트이다. 안확은 조선의 미술을 회화, 조각, 도기, 칠기, 건축, 의관 무기(衣冠武器)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 후, “이상(以上)의 유품(遺品)을 미술안(美術眼)으로 관(觀)하고 다시 개괄적(槪括的)으로 언(言)하면 소위(所謂) 순정 미술(純正美術)에 속할 자(者)는 회화(繪畵), 조각(彫刻)이오, 기타는 미술적(美術的) 의장(意匠)을 표한 준미술(準美術) 혹 미술상(美術上) 공예품(工藝品)이라 할지니라.”라고 하여, ‘파인 아트’에 해당하는 ‘순정 미술’을 기타 ‘준미술’과 구분하고 있다.10)안확(安廓), 「조선의 미술」, 『학지광(學之光)』 제5호, 재일본 동경 조선 유학생 학우회, 1915, 48∼49쪽. 말하자면 감상을 위한 순수 미술과 실용적 물건에 미술을 응용한 응용 미술(혹은 실용 미술)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미술을 정신의 표현으로 보거나 미술품의 가치는 사상의 표현에 달려 있다고 한 점, 또 미술을 민족 문화(民族文化)의 패러다임 속에서 사고하는 것은 미술에 대한 인식의 비약적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미술은) 심미심(審美心)의 감성이 발달함이니, 고로 백반(百般)의 공업(工業)이 발달하야 일용(日用) 만물의 편리를 향(享)함은 미술적 사상(美術的思想)에서 종출(從出)함이라. …… 미술 공예의 성쇠는 국가치란흥폐(國家治亂興廢)에 반수(伴隨)하는 것이라 고로 천하가 승평(昇平)하야 문학이 융성하는 시대에는 미술도 역진흥발달(亦振興發達)하고 문학이 쇠약하고 국가가 분 란(紛亂)한 시대에는 미술도 역수퇴보위미(亦隨退步萎微)하나니…… 미술의 여하(如何)를 관(觀)하면 능히 기국(其國)의 영락을 추측할지오 우(又) 미술이 발달하면 공예가 융성함은 물론이오 덕성을 함양함이 유(有)하니……11)안확, 「조선의 미술」, 『학지광』 제5호, 재일본 동경 조선 유학생 학우회, 1915, 47쪽.

미술을 ‘공업의 발달’이나 ‘일용 만물의 편리’와 연관시키는 것은 미술을 기술이나 산업의 일환으로 사고하는 이전의 인식과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미술을 국가의 운명과 동일시하는 사고는 ‘미술을 통한 국가의 부강’을 외치던 1900년대의 담론과는 다른 지점에 놓여 있다. 안확이 이 텍스트를 쓴 때는 ‘조선’이라는 국가가 부재하는 국권 상실의 시기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문명’이 아니라 민족의 ‘문화’였다. 인류사적 진보와 보편성을 강조하는 문명 개념에 비해, 문화는 “개개의 인간들이 만들어 낸 산물 또는 한 민족의 특성이 표현되어 있는 예술 작품이나 저술, 종교적·철학적 체계와 관련”된 개념이다.12)니시카와 나가오, 한경구·이목 옮김, 『국경을 넘는 방법』, 일조각, 2006, 161쪽. 때문에 문화 개념은 국가가 위기에 처한 상황일수록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빛을 발한다. 안확은 일본, 인도, 중국, 희랍의 미술을 차례로 논한 후에, 그것과는 변별되는 “조선 미술사상의 동기”를 단군시대에서 찾는다. 근대에 탄생한 ‘미술’ 개념을 가지고 민족을 호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미술은 단순한 기술도, 공업도, 신문명도 아니다. 미술은 민족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것이자 민족 문화의 정수로서 새로운 위상을 부여받게 되었다.

요컨대, 미술이라는 단어는 기존의 회화, 조각, 공예 등을 자연스럽게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박람회라는 근대성의 공간에서 서양의 개념 범주(槪念範疇)를 번역함으로써 탄생한 신조어이다. 그런데 이렇게 탄생한 말이 기존 사물에 대해 규정력을 갖기 시작한다. 기존 사물들은 이제 미술이라는 개념 체계에 따라 새롭게 배치된다.

‘미술’이라는 개념이 탄생하기 전에 서화(書畵)와 상(像), 도자기 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개념은 부재하였다. ‘예술(藝術)’이라는 개념이 있기 는 하였지만, 이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아우르는 사대부의 교양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미(美)’를 공통으로 하는 유사성의 집합이 아니었다. 근대 이전에는 서화는 서화대로, 조상은 조상대로 나름의 기능과 미학을 가지고 계승되어 왔다. 예컨대, 사대부의 교양으로 기능한 서화의 경우에는 화공(畵工)의 기예(技藝)와 구별되는 문자향(文字香)이나 서권기(書卷氣)가 강조되었고, 사찰에 모신 불상이나 탑 등의 조각물은 미적 향유(享有)의 대상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예배의 대상이었다. 조각상에 비해 회화는 상대적으로 감상 가치가 두드러지지만, 회화도 사대부의 여기(餘技)로 제작되는 서화냐 화원(畵員)들이 실용적 목적으로 제작한 회화냐에 따라 가치 평가의 기준이 달랐다. 이처럼 상이한 제작 목적, 기능, 가치를 갖던 전통적 사물의 배치가 ‘미술’이라는 개념과 함께 새로운 배치로 전환된 것이다.

미술은 근대 문명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동시에 ‘미’라는 보편적 가치와 민족의 정체성을 담지(擔持)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현실인 동시에 영원한 신화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기반, 이러한 배치의 전환을 추동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미술 개념이 새로운 기술에서 미의 재현으로 변환할 수 있었던 근본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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