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1장 미술의 탄생
  • 2. 근대적 미술 개념의 형성
  • 가시적 장치와 미술
윤세진

미술사가 뵐플린(Heinrich Wölfflin, 1864∼1945)이 지적한 대로, 우리의 눈은 스스로 발전하지 않는다. 즉, 우리는 세계를 보지만 모든 것을 보는 것도 아니고, 보이는 대로 보는 것도 아니다. 시대마다 특정한 ‘보기(seeing)의 방식’이 있으며, 우리는 이 시각 방식과 규칙에 따라 보도록 된 것만을,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본다. 다시 말해 계급, 성(性), 인종, 환경뿐 아니라 그 시대의 특별한 시각 장치나 테크놀로지 등에 따라 ‘보는 행위’는 끊임없이 제 한된다. ‘본다’는 행위는 이 같은 사회적 배치와 특정한 인식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시성(可視性)이란 그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르는 시각적 배치 전체를 의미한다. 특히 미술은 그 자체가 시각적 표현인 이상 가시성의 체계와 떼어 놓을 수 없다. 근대적 미술 개념은 몇 가지 핵심적인 가시 장치를 통해 확립되었는데, 박람회(博覽會), 미술관(美術館), 미술 전람회(美術展覽會)가 그것이다.

박람회는 19세기 서양의 근대 문명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생산물을 전시하는 ‘산업의 디스플레이’이자 식민 권력을 재현하는 ‘제국의 디스플레이’인 박람회는 온갖 사물을 구경할 수 있는(말 그대로 ‘박람(博覽)’) 거대한 시각의 스펙터클이었다.13)근대 박람회에 대한 연구는 요시미 순야, 이태문 옮김, 『박람회, 근대의 시선』, 논형, 2004를 참고. 특히 “동아시아와 서양 문명의 공식적인 접촉점”이었던 박람회는14)우리나라의 박람회 경험과 박람회 공간 속에서 동아시아의 이미지가 전시, 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연구는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 공간-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서양 미술 사학회 논문집』 13, 서양 미술 사학회, 2000, 75∼111쪽을 참고. ‘미술’이라는 새로운 개념과 관련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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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국 권업 박람회
내국 권업 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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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서 가장 신속하게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서양의 근대를 자국에 이식함으로써 서양과 대등해지는 동시에 아시아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1862년에 열린 런던 만국 박람회 참가를 시작으로 일본의 박람회 참가는 유럽에 자포니즘의 유행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은 1877년에 동경(東京) 우에노(上野)에서 제1회 내국 권업 박람회(內國勸業博覽會)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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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만국 박람회의 조선관
시카고 만국 박람회의 조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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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외국 박람회를 경험한 것은 1881년(고종 18)에 동경에서 열린 제2회 내국 권업 박람회였다. 이후 1883년에는 보스턴에서 열린 박람회에 비공식적으로 물품을 출품하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으로 만국 박람회에 참가한 것은 1893년(고종 30)의 시카고 만국 박람회 때였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박람회 경험이 곧바로 내국 박람회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다만 이를 계기로 ‘미술 진흥책’이라고 할 수 있는 일련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예컨대 1902년(광무 6) 9월에 농상공부령(農商工部令)으로 ‘임시 박람회 사무소 규칙(臨時博覽會事務所規則)’이 제정되어 상설 진열관에 미술품부가 마련되었으며,15)이구열, 「한불 미술 교류의 역사적 관계」, 『근대 한국 미술사의 연구』, 미진사, 1992, 148쪽. 1907년(융희 1)에는 경성 박람회(京城博覽會)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때 출품된 물품은 주로 외 국인들의 소장품이었고, 규모 면에서도 일본의 경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내외 박람회의 경험은 미술 개념이 자리 잡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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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박람회장 정문
경성 박람회장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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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박람회라는 ‘전시 공간’을 통해 미술의 독자적 영역이 가시화되었다. 이 시기 박람회 관련 기사를 보면, ‘미술품’이라는 항목이 따로 마련되어 미술이 점차 여타의 산업 기술과 구별되기 시작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오사카 박람회의 ‘한국관’에 진열된 미술품을 설명하고 “회화는 폐국(弊國)에서 고유한 미술…… 그 진열한 것은 미술관 내 10분의 7을 거(居)하나……”라고 서술한 기사라든가,16)「속 대판 박람회 한국관」, 『황성신문(皇城新聞)』 1903년 5월 4일자. “본관 원형 양옥(圓形洋屋), 인형(人形)과 미술품 장치”라고 기록한 박람회 방문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17)「박람회 소감」, 『황성신문』 1907년 9월 11일자. 미술은 박람회라는 공간 속에서 새로운 전시 가치를 획득해 갔다. 바꾸어 말하면 전시 가치를 지닌 일군(一群)의 사물들이 ‘미술’이라는 용어로 범주화된 것이다. 말은 사물을 설명하고, 사물은 말이 지닌 의미의 공백을 채운다. 이제 관람객은 말과 사물이 연결되는 새로운 기반을 갖게 된 것이다. 1907년 경성 박람회에 금불(金佛)이 출품되었다는 기사나 동경의 내국 권업 박람회에 출품된 불화에 대한 인상평 등은 ‘예배 대상’이 ‘전시 대상’으로 전환되는 배치의 변화를 단적으로 예증한다.

미술관에 출품한 각종 화본(畵本)에 특히 진귀품 일종이 있으니 관세음보살이 청룡을 타고 출현하는 한 폭이 있었는데, 백호방광(白毫放光)과 진주영락(眞珠纓絡)이 왼손에 실월마니주(實月摩尼珠)를 쥐고 오른손에 버들가지를 쥐었으니 영롱황홀하여 진가(眞假)를 가히 불변할지라 그 값은 2,500원에 달하고……18)최영년, 「동경 권업 박람회 성황」(2), 『황성신문』 1910년 6월 23일자.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표현을 빌면, 불상이나 불화의 가치는 전시(展示) 가치에 앞서 의식적(儀式的) 가치를 갖는다. 아니, 그것의 ‘미’는 예배 대상으로서의 가치 속에 분리할 수 없는 상태로 내포되어 있다. 말하자면, 아름답기 때문에 숭배되는 것이 아니라 숭배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앞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있어야 할 물리적 공간에서 떨어져 나온 불화는 이제 미적인 대상으로 묘사되고 향수된다. 이와 동시에 일정한 화폐 가치(2,500원)를 지닌,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된다. 감상품이자 상품으로서의 미술. 이것이 박람회라는 공간 속에서 탄생한 미술의 운명이었다.

박람회와 함께 근대 미술의 독자적 영역을 확립한 또 하나의 가시적 장치는 박물관(博物館)이다. 사물을 특정한 배치에 따라 분류하고 진열한다는 점에서 박람회와 박물관의 메커니즘은 유사하다. 하지만 박람회가 전시 공간인 동시에 상품을 진열하는 산업 공간인 데 비해, 박물관·미술관은 순수한 전시 공간으로 일정한 질서에 따라 사물을 배열함으로써 사물에 역사성을 부여한다.

토니 베넷(Tony Bennett)에 따르면, 박물관·미술관 같은 ‘전시 복합체(展示複合體)’는 특정한 사물의 배치와 시각의 기술을 통해 시선을 통제하고, 역사를 가시화함으로써 지식을 통제하는 근대적 규율 장치이다.19)박물관의 정치학에 대해서는 Bennett, Tony, The Birth of the Museum : history, theory, politics, London : Routledge, 1995를 참고. 미술관이라는 제도는 미술품을 특정하게 배치함으로써 ‘공적 기억(역사)’을 만들어 내고, 그 결과 미술에 강력한 규범과 권력을 부여한다. 즉, 사람들은 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미술’이라는 전제(前提)된 개념으로 작품을 바라보거나 작품을 보면서 미술 개념을 확인하며, 사회적으로 승인된 그 질서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박물관·미술관은 유물과 작품을 수집해 놓은 근대 이전의 컬렉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근대적 시각 제도이다. 특정 계급의 기호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집한 사물을 특정인들에게만 공개하는 사적 공간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해야 할 공적 기억을 가시 화하는 사회적 공간인 것이다. 때문에 미술이 미술로서의 위상을 객관적으로 정립하는 데 있어 박물관·미술관은 필수적인 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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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홍화문
창경궁 홍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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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가 박물관 본관
이왕가 박물관 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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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가 박물관 대온실
이왕가 박물관 대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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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수금실
창경궁 수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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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미술관이라는 용어 역시 ‘뮤지엄(Museum)’을 번역한 신조어로, 원래 박물관은 박람회장을, 미술관은 공업관·농업관 등과 함께 박람회장에 마련된 산업관(産業館) 중 하나를 지칭하였다. 그러다 점차 박물관은 주로 고미술을 전시하는 곳으로, 미술관은 당대 산업을 진흥하는 공간으로 기능이 분화된다.20)佐藤道信, 「近代史學として美術史學の成立と展開」, 『日本美術の水脈』, 東京, ぺりかん社, 1993, 154쪽. 그리고 이 같은 개념의 분화가 정착된 결과, 지금도 박물관은 유물 보관과 고미술 전시를 주로 하는 역사적 공간인 데 비해, 미술관은 순수한 미술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다르게 인식되고 있다.

우리나라 근대 미술관의 역사는 이왕가 박물관(李王家博物館)에서 시작된다.21)우리나라 박물관의 성립과 역사에 대해서는 목수현, 「일제하 박물관의 형성과 그 의미」, 서울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0을 참고. 이는 일제가 창경궁(昌慶宮)에 식물원, 동물원과 함께 만들어 놓은 공간으로, 여기에는 조선 왕실에서 소장하던 골동 서화(骨董書畵)와 출처를 알 수 없는 유물들이 일본인의 취향에 따라 전시되었다. 이들의 역사 의식에 따라 고려시대의 도자기와 신라의 금속 공예, 불상 등이 주로 전시되고 조선시대의 유물은 배제되었고, 박물관 견학은 창경원을 ‘유람’하는 코스 중 하나였다. 이처럼 유물의 선택과 배제에 따라 기억(역사)을 창안하고, 박물관을 유원지(遊園地) 시설화함으로써 조선의 역사를 폄하(貶下)한 일제의 정책은 ‘박물관의 정치학’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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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박물관
조선 총독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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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에 개설된 조선 총독부 박물관(朝鮮總督府博物館)은 조선 총독부의 주관하에 의도적으로 설립되었다. 1915년에 일제가 조선을 식민 통치한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경복궁(景福宮)에서 개최한 시정 5년 기념 조선 물산 공진회(施政五年記念朝鮮物産共進會)에서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각종 물품을 비롯해서 1,000점이 넘는 고미술품이 진열되었는데, 이는 “조선이라는 역사의 과거화(過去化)와 일본에 의한 새로운 역사의 현재화(現在化)를 시각적으로 펼쳐 보인 하나의 이벤트였다.”22)목수현, 앞의 글, 43쪽. 이 공진회가 끝난 후 미술품 을 전시했던 미술관이 조선 총독부 박물관으로 바뀜에 따라 조선의 역사는 가시화되었으며, 일제의 대대적인 고적 조사 사업(古蹟調査事業)을 통해 이 가시성은 ‘과학성’을 담지하게 된다. 고적 조사 사업을 통해 대대적으로 유물을 발굴, 조사하여 여기에 논리적 질서를 부여하고, 이를 박물관에 가시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제국의 지배를 정당화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가시화된 역사 속에서, 관람객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동일한 문화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민족’으로 호명된다. 박람회 공간 속에서 미술이 보편적인 문명의 담지체였다면, 박물관이라는 공간 속에서 미술은 민족 문화와 역사의 담지체로서 더 공고하게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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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물산 공진회장도
조선 물산 공진회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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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람회 및 박물관과 함께 좀 더 대중적 차원에서 미술을 실감(實感)하게 한 장치는 미술 전람회였다. 박물관이 고미술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가시화하였다면, 미술 전람회는 현재의 미술을 진작(振作)시킴으로써 근대적 시각 방식과 미술 인식을 뿌리내리게 한 제도였다고 할 수 있다. 미술 전람회는 크게 미술 단체가 주도한 전람회와 국가가 주도한 전람회로 나눌 수 있다. 1910년 무렵부터 옛 서화나 골동품을 모아 전시하는 전람회나 휘호회(揮毫會), 혹은 학생들이 만든 도화(圖畵), 습자(習字), 수예품(手藝品) 등을 전시한 전람회 등이 열리면서 전람회는 대중적으로 미술품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서화 미술회(書畵美術會), 서화 협회(書畵協會) 등 미약하게나마 미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갖춘 미술 단체가 결성되면서 대규모 미술 전람회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1916년에는 서양화 1세대 중 한 사람인 김관호(金觀鎬, 1890∼1959)의 개인 전람회가 평양에서 열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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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 전람회
조선 미술 전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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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1922년에는 총독부가 주도하는 미술 전람회인 조선 미술 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가 개최되었다. 조선 미술 전람회는 일본의 문부성 미술 전람회(文部省美術展覽會, 이하 문전(文展))를 조선에 이식한 제도이다. 프랑스의 살롱전을 본뜬 일본의 문전은 1907년부터 시작되었으며 일본화, 양화, 조각 세 부문으로 나누어 전시를 열었다.23)사토 도신, 「근대 일본 관전의 성립과 전개」, 『한국 근대 미술 사학』 15, 한국 근대 미술 사학회, 2005, 7∼35쪽을 참고. 이에 비해 조선 미술 전람회는 서양화, 동양화, 조각, 서(書), 공예 등의 분야를 통합하거나 폐지하는 과정을 여러 차례 거치면서 1944년까지 존속하였고, 이를 통하여 미술의 하위 범주들이 체계화되었다. 조선 미술 전람회는 언론 매체를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되었으며, 미술을 경험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대중들은 이런 매체와 전시를 통해서 근대 미술에 대한 식견을 갖출 수 있었다.

요컨대, 박람회, 박물관, 전람회 같은 근대적 시각 제도는 새롭게 탄생한 미술 개념의 내포(內包)와 외연(外延)을 형성하는 중요한 계기였으며, 이를 통해 새로운 ‘보기(seeing)’의 규칙이 형성되었다. 근대 미술은 그것을 미술로 보고 인식하게 만드는 일련의 장치들에 의해 살과 뼈를 얻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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