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1장 미술의 탄생
  • 3. 미술 개념의 분화와 질서화
  • 회화
윤세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회화(繪畵)’보다도 ‘서화(書畵)’라는 단어가 전통 회화 일반을 통칭하는 보편적인 용어였다. 서화 일치(書畵一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수묵화(水墨畵)에서 그림과 글씨는 통일체로 사고되었고, ‘회(繪)’는 주로 채색화를 통칭하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채색 중심의 서양 회화가 유입되면서 글씨와 그림이 분화된 한편, ‘회’와 ‘화’가 결합된 ‘회화’가 서화를 포함한 그림 일반의 의미로 확립된다. 글씨가 그림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것은 한자를 주로 사용하던 사대부 계층이 근대 이후 해체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글씨와 그림이 한 화면에 양립할 수 없는 사실적인 서양화를 중심으로 미술 교육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글씨(書)가 미술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제4회 일본 미술 전람회에 이르러서야 ‘서예(書藝)’ 부문이 신설된 일본과 달리34)사토 도신, 앞의 글, 15∼16쪽.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는 오랫동안 글씨가 독자적인 한 부문으로 남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서부(書部)가 폐지된 것은 1932년 11회전부터이다. 이때부터 서부 대신 공예부가 신설되었으며, 서예는 이후 조선 서도전(朝鮮書道展)으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35)근대 서예와 관련해서는 이구열, 「시대 상황의 변화와 서예」, 『근대 한국 미술사의 연구』, 미진사, 1992 참고.

일본의 문전과 우리나라의 조선 미술 전람회를 비교해 볼 때 흥미로운 사실은, 일본의 문전이 일본화, 서양화, 조각 세 부문으로 구성된 데 비해, 조선 미술 전람회는 동양화, 서양화 및 조각, 서(書) 부문으로 삼분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 문전에서는 서양화와 구분되는 전통 회화를 지칭하는 말로 ‘일본화’라는 명칭을 사용한 데 비해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는 한국화가 아닌 ‘동양화’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는 점이고, 둘째, 일본의 문전과 달리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는 ‘서부’가 비교적 오랫동안 존속하였다는 점이다.

먼저 ‘동양화’와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동양이라는 개념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동양’은 19세기 말에 서양에 대한 대타적(對他的) 존재로서 스스로를 정립하기 위해 일본에서 창안된 개념으로, 이는 지리적 심상(心象)인 동시에 문화적 심상이다. ‘동양’에 대한 이 이중의 심상을 드러낸 대표적인 텍스트가 오카쿠라 텐신의 『동양의 이상(東洋の理想)』(1903)이다. “아시아는 하나이다.”로 시작되는 이 텍스트에서, 오카쿠라 텐신은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인도, 아랍, 페르시아까지를 ‘동양(East)’ 혹은 ‘동방 아시아(Easter Asia)’로 포괄하고, ‘동양의 이상’을 ‘미’로 표상하였다.36)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동양의 이상」, 최원식·백영서 엮음, 『동아시아인의 ‘동양’ 인식 : 19∼20세기』, 문학과 지성사, 1997. 즉, 서양에 대립하는 동양을 설정하고 그 중심에 ‘미술’을 놓음으로써 미적인(=이상적인) 대동아 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실현하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오카쿠라 텐신에게 ‘동양’은 서양의 타자인 동시에 서양과 대등한 이상적 ‘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서양의 동일성과 차이를 동시에 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미’였다.

이 시기의 열혈 논객(論客)이었던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미’로 포장한 이런 식의 ‘동양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37)신채호(申采浩), 「동양주의에 대한 비평」, 『대한매일신보』 1909년 8월 8일자. 나라를 그르친 자, 외국인에게 아첨하는 자, 혼돈한 무식자들이 ‘동양주의’ 운운하며 제국의 침략을 은폐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 ‘동양주의’의 정곡(正鵠)을 꿰뚫고 있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논리이다. 하지만 3·1 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적 지배를 강화하면서 ‘동양주의’는 화단(畵壇) 속으로 깊이 침투해 들어갔다.38)이에 대해서는 김현숙, 『한국 근대 미술에서의 동양주의 연구-서양화단을 중심으로-』, 홍익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1을 참고. 1922년에 설립된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동양화’ 부문이 마련된 것은 이러한 ‘동양주의’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동양화라는 용어를 사용한 대표적인 텍스트는 1920년에 발표된 변영로(卞榮魯)의 ‘동양화론(東洋畵論)’이다.

위대한 예술가는 시대정신(時代精神)을 잘 통찰하고 이해하여 그것을 자기 예술의 배경으로 하고 근거로 하여 결국은 모든 시대사조(時代思潮)를 초월하는 영원불멸의 ‘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독자는 잠깐 동양화를 보라. 특히 근대의 조선화를. 어디 휘호만큼이나 시대정신을 발현된 것이 있으며, 어디 예술가의 광원(廣遠)하고 독특한 화의(畵意)가 있으며, 어디 예민한 예술적 양심이 있는가를. 단지 선인(물론 그네들은 위대하다)의 복사이며, 모방이며, 낡아 빠진 예술적 약속을 묵수(墨守)함이다. 적어도 현금(現今) 불란서 빠리 살롱 회화 전람회 벽의 현화(懸畵)를 보라. 모든 그림이 모두 다 화가 자신의 표현이 아님이 없다. …… 그리고 또 그네들의 화제(畵題)는 모두 다 우리가 왈왈(曰曰) 이문목도(耳聞目睹)하는 현실 세계에 취한다.39)변영로(卞榮魯), 「동양화론(東洋畵論)」, 『동아일보』 1920년 7월 7일자.

변영로의 텍스트에서 동양화는 ‘화가 자신을 표현하는’ 서양화에 비해 낙후되고 진부한 모방으로 폄하되고 있다. 서양과의 차이를 통해 동양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오카쿠라 텐신의 ‘동양주의’와는 달리, 우월한 서양에 대해 타자화(他者化)된 개념으로서 ‘동양’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변영로가 비판하는 것은 ‘동양의 회화’가 아니라 ‘조선의 회화’이다. 조선화는 ‘예술적 양심’과 ‘시대정신’을 결여한 낡은 예술이라는 인식은, 자국의 회화(일본화)를 통해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이를 서양화와 대등한 지위에 올려놓으려 한 일본의 경우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변영로는 신채호처럼 ‘동양주의’ 자체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일부인 조선 회화의 낙후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동양화 비판론은 표면상으로는 ‘동양주의’와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동양’이라는 개념 속에서 조선화를 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동양’이라는 도식하에 다양한 민족적 차이를 제거해 버린 ‘동양주의’의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변영로가 동서양의 대립 구도 속에서 동양화의 낙후성을 비판한 반면, 심영섭(沈英燮)은 아세아주의의 맥락 속에서 미의 이상을 예찬하였다.

장구한 동안의 도화방랑(道化放浪)의 생활에서 나(自由魂)는 다시 진화 완성의 평화로운 대조화, 그 정익(靜謚)한 초록 동산으로 나물 캐는 소녀의 적(笛) 소리를 찾아 영원히 돌아가면서 있다. 여기에 나의 지대한 환희가 있으며 표현과 창조가 있다. 이것이 아세아주의이며 그 주의의 미술이다. …… 나는 서양의 상대적, 객관적, 해부적, 퇴폐적, 방랑적, 상지유물문명(尙知唯物文明)의 진보 진화 사상의 생활 원리에 대하여 동양의 절대적, 주관적, 본능적, 창조적, 고향적, 무지, 무명, 무욕, 무위의 진화 완성의 사상의 생활 원리를 가지고 바꾸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한다.40)심영섭(沈英燮), 「아세아주의 미술론」, 『동아일보』 1929년 8월 21일자.

동양의 정신을 서양의 물질문명에 대립시키면서 동양적인 것을 찬미하는 이런 유의 레토릭(rhetoric)은 1920년대 이후의 미술 담론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이는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에 ‘동양’ 혹은 ‘아세아’라는 개념을 통해 정치적·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했던 일본의 대동아 사상(大東亞思想)과 맞물리면서 파시즘적인 논리를 내면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41)이 시기 화단의 동양주의에 대해서는 김현숙, 앞의 글을 참조. 또 ‘동양’이라는 모호한 심상 속에서 동양적인 것이 조선적인 것과 착종(錯綜)되면서 ‘향토색’ 논쟁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동양화’라는 개념은 단순히 매체나 표현 기법 등에서 ‘서양화’와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복잡한 역사적 콘텍스트 속에서 산출된 개념이다.

조선 미술 전람회와 달리 일본의 문전에서는 ‘동양화’ 대신 ‘일본화’ 부문이 마련되었다. ‘일본화’라는 용어는 1890년경에 성립하였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국가로서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 고양되면서 야마토에(和繪), 카라에(漢畵) 등의 전통 용어를 ‘일본화’로 대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본화’는 서양화에 대한 대타적 개념인 동시에 국가적 정체성을 내포한 개 념이었다. 이는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이라는 네이션(nation)을 아시아나 동양과 동일시할 수 있었던(동양=아시아=일본) 일본의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일본과 사정이 달랐다. ‘조선’이라는 네이션을 상실한 상태에서는 ‘조선화’라는 용어가 성립될 수 없었다. 조선이 일본(=동양)의 일부인 이상 ‘동양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대학의 회화과는 서양화와 동양화로 양분되었으며, 아직까지도 전통 회화를 ‘동양화’로 일컫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동양화나 서양화라는 용어는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인식이 공유되면서, 1970년대 이후 미술사 연구에서는 한국화 혹은 수묵화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좀 더 일반적이다.42)안휘준, 『한국 회화의 이해』, 시공사, 2000, 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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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문전과 달리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는 서부(書部)가 오래 존속하였다는 점도 특이하다. 일본에서는 1882년 내국 회화 공진회(內國繪畵共進會)에서부터 회화가 서와 분리되면서 회화가 그림의 정식 명칭으로 사용되었으며, 1903년 내국 권업 박람회부터는 서(書)가 미술의 영역에서 사라졌다. 이와 달리 조선 미술 전람회에는 1회부터 11회전까지 10년간 서부가 존속하였다. 이는 1910년대에 설립된 서화 단체의 주축 멤버가 당시의 세력가들이었고, 이들이 조선 미술 전람회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43)이 문제와 관해서는 이가라시 코이치, 「조선 미술 전람회 창설과 서화」, 『한국 근대 미술 사학』 12, 한국 근대 미술 사학회, 2004를 참고. 서부는 11회전을 끝으로 폐지되었으며, ‘서도(書道)’ 혹은 ‘서예(書藝)’라는 별도의 명칭으로 이후로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근대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양화의 본격적인 유입이다. 고희동을 필두로 동경 미술 학교에서 유화를 전공한 서양화가들이 배출됨으로써 서양화 화단이 형성되었는데, 서양화가 유입되면서 기술뿐 아니라 서양화의 장르 또한 새롭게 형성되었다. 역사화, 풍속화, 종교화, 동물화, 정물화, 자화상, 풍경화, 나체화 등은 전통 회화에는 없던 장르인데, 이는 단순한 용 어상의 문제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동서양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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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풍경화(landscape painting)는 전통적인 산수화(山水畵)와 달리 인간의 시선에 의해 시각적으로 전유(專有)되고 대상화된 자연을 재현한 것으로, 풍경화의 성립은 새로운 표현 기법의 변화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시선의 변화를 동반한다. 또 서양의 나체화 역시 우리의 전통적 신체관(身體觀)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양의 나체화는 인간의 신체를 미의 원형으로 사고하는 인간 중심주의(人間中心主義)의 산물인 데 비해, 전통 회화에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양의 나체화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체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대중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단적인 예로, 김관호가 ‘석모(夕暮)’라는 작품으로 일본의 문전에서 특선을 하였을 때, 이광수는 “군이 조선인을 대표하여 조선의 미술적 천재를 세계에 표하였음을 다사(多謝)하노라.”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지만,44)이광수, 「문부성 미술 전람회기」, 『매일신보(每日申報)』 1916년 11월 12일자. 당시의 사고방식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나체화였기 때문에 작품 사진은 신문에 실리지 못하였다.45)근대 나체화의 전개와 이에 대한 반응에 대해서는 김영나, 「한국 근대의 누드화」, 『20세기의 한국 미술』, 예경, 1998, 115∼142쪽 참고. 화가의 자화상 역시 미 술에 대한 근대적 인식이 전제되기 전에는 출현하기 어려운 장르이다. 사대부적인 교양이 아니라 그림 그리는 일 자체를 하나의 업(業)으로 인식할 수 있을 때, 즉 화가로서의 자의식이 성립된 후라야 자화상이라는 장르가 등장할 수 있다. 1910년대의 여러 서화 단체가 미술을 근대적 관점에서 인식하였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경우 자화상을 남기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아직 ‘화가’로서의 자의식보다는 선비 의식이 강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근대 미술은 단순히 기존의 전통 미술을 포괄한 것이 아니라 중세적 인식의 패러다임과는 다른 패러다임 속에서 전통 미술의 의미와 기능을 변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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