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1장 미술의 탄생
  • 3. 미술 개념의 분화와 질서화
  • 조각과 공예
윤세진

우리나라 조각사의 맥을 이어 온 것은 불교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이후 불사(佛寺) 조성과 불상 조상이 위축되면서 서화가 중심을 차지하였고, 더욱이 조각은 순수한 감상의 대상으로서보다는 실용성과 예배 가치가 중시된 까닭에 ‘순수 미술’로 제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또 전통적인 서화가들이 미술이라는 새 옷을 입음으로써 근대적으로 변모한 데 비해 조각가는 여전히 ‘장인(匠人)’이나 ‘공인(工人)’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서양 조각은 사실적인 인체상(人體像) 위주였기 때문에 내용과 기법 모두에서 전통 조각과 자연스럽게 융합되기 어려웠다.46)한국 근대 조각에 대해서는 김영나, 「한국 근대 조각의 흐름과 성격」, 『20세기의 한국 미술』, 예경, 1998과 김이순, 「한국 근대 초상 조각」, 『한국의 근현대 미술』, 조형 교육, 2007을 참고. 이런 이유 때문에 조각은 회화에 비해 순수 미술로 자리를 잡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조각부’가 따로 마련되지 않고 서양화부에 포함되었다가 14회 때부터 공예부로 흡수되었던 사정도 근대 조각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짐작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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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진의 삼년전
김복진의 삼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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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서양적인 의미의 ‘조각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인물은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이다. 김복진은 동경 미술 학교를 졸업한 당시 최고의 엘리트로서, 교육과 평론 활동을 겸하면서 목조나 석고로 인체상을 제작하였다. 1930년대에는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하였는데, 비록 지속적이지는 않았지만 장인에 의해 이루어지던 불상 조상을 서양 조각을 전공한 조각가가 제작하였다는 점에서, 근대 미술이 전통과 접속한 긍정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47)김영나, 「한국 근대 조각의 흐름과 성격」, 『20세기의 한국 미술』, 예경, 1998, 154쪽.

조각과 마찬가지로, 공예도 순수 미술적인 측면보다는 실용성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조각이 갖고 있는 실용성과 달리 공예는 자국의 산업 진흥과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19세기 말에 유럽에서 일었던 자포니즘의 중심에 있던 것은 가구나 도자기 등을 비롯한 일본의 공예품이었고, ‘공업 예술’의 준말인 ‘공예(工藝)’라는 용어 역시 문명과 산업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신조어였다.48)근대의 공예 개념 대해서는 최공호, 『한국 근대 공예사 연구 : 제도와 이념』, 홍익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00을 참조.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장지연(張志淵, 1864∼1920)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발표한 ‘공예가일발달(工藝可逸發達)’, ‘논공예장려지술(論工藝奬勵之術)’ 등의 글을 통해 공예품을 제작하는 장인을 ‘창조물의 제작자’로 인식하는 한편,49)장지연(張志淵), 「공예가일발달(工藝可逸發達)」, 『황성신문』 1904년 4월 25일자. 국가의 자강(自强)을 위해서는 공예가 중요함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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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진의 미륵불
김복진의 미륵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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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모양 은잔과 오얏꽃 은잔
꽃 모양 은잔과 오얏꽃 은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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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에는 금공, 목공, 도공 등 재료에 따른 명칭이 있었을 뿐 ‘공예’라는 말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공예라는 용어가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1881년(고종 18) 이헌영(李憲永)의 일본 견문 기록인 『일사집략(日槎集略)』에서이다. 처음에는 ‘공예’가 수공예와 기계 공예 모두를 포괄하였으나, 1908년(융희 2)을 전후하여 수공예와 기계 생산이 구분되자 수공예만을 따로 지칭하기 위해 ‘미술 공예’라는 개념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공예품 제작이 이원화되기 시작하였다. 1907년에 설립된 관립 공업 전습소(官立工業傳習所)는 도기, 염직, 목공, 금공, 응용 화학, 토목의 여섯 개 전공을 둔 근대적 기술 교육 기관으로 공예의 기계화를 추구한 반면, 1908년 설립된 한성 미술품 제작소(漢城美術品製作所, 1911년에 이왕직 미술품 제작소로, 1922∼1937년까지는 주식회사 조선 미술품 제작소로 개칭)는 황실 공예품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수공예의 흐름을 주도하였다.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공예부가 개설된 것은 1932년 11회전부터로, 이는 공예를 순수 미술의 영역에 포함시켰음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서부가 폐지되고 공예부가 신설되었으며, 14회부터는 서양화부에 포함되어 있던 조각이 공예부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조선 미술 전람회가 순수 미술 전람회였던 만큼, 공예부에서는 기술적 측면보다는 의장(意匠)을 중심으로 공예를 순수 미술화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도리어 공예를 이원화(二元化)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기술 중심의 전승 공예로, 또 한편으로는 조형성 중심의 미술 공예로 이원화됨으로써 실용성과 조형성이 어우러지는 공예의 본질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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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립 공업 전습소의 실습 장면
관립 공업 전습소의 실습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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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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