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1장 미술의 탄생
  • 4. 미술 담론의 공간
  • 비평 공간의 형성
윤세진

헤르만 바우어(Hermann Bauer, 1929∼ )에 따르면, 대중이 없던 시대에는 미술 비평(美術批評)이 존재하지 않았다. 비평은 한 개인이 대중을, 즉 집단적이고 익명적인 독자층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 미술 비평이 탄생하려면 전시 체계, 관객, 출판 매체라는 세 요소가 전제되 어야 한다.55)헤르만 바우어, 홍진경 옮김, 『미술 사학의 이해』, 시공사, 1998, 48∼50쪽. 이런 점에서 비평은 철저하게 근대적 제도의 산물이다. 물론 근대 이전에도 특별한 감식안(鑑識眼)을 가진 이들이 서(序), 발(跋), 평(評), 기(記), 서(書) 등의 형식으로 남긴 다양한 비평적 텍스트가 존재하기는 하였다. 하지만 이런 텍스트는 ‘독자 대중’이 아니라 특정한 독자들에게만 열려 있었으며, 또 각 시대마다 코드화된 비평의 기준은 있었지만 매체라는 공적 공간이 요구하는 어떤 ‘표준적 코드’를 생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근대 비평과는 다른 지평 위에 놓여 있었다.

미술관이나 전람회는 모든 대중에게 열려 있지만, 감식안을 가진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 작품에 대한 어떤 기준이나 규범을 잘 알지 못한다. 때문에 대중은 작품을 보기 전에 작품을 ‘읽게 해 줄’ 텍스트를 요구한다. 이런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 바로 매체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각종 전람회 비평은 전람회에 대한 비평가 개인의 ‘사적(私的)인’ 평가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렸다는 이유로 공공성(公共性)을 획득한다. 단순한 인상 비평(印象批評)일지라도 작품을 보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적 비평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인상 비평을 넘어 일련의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개인적인 취미 판단에 의존하는 감상과 달리, 비평은 객관적인 분석과 서술을 요하는 근대적 글쓰기의 일환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미술 비평이 급증한 것은 1920∼1930년대였다. 이 시기에 출판 산업이 비약적으로 확대되면서 신문과 잡지가 널리 보급되었을 뿐더러 조선 미술 전람회와 각종 전람회처럼 안정적인 비평의 생산을 가능케 하는 일련의 제도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비평은 주로 전람회 소개나 새로운 미술관에 대한 시론(時論) 등이며, 작품에 대한 평도 인상 비평이 주를 이루었다. 일간지에 실린 초기의 전시 비평이 주로 작품의 단점을 논하거나 간략한 감상을 기술하는 데 그쳤다면, 김찬영은 비평이 “일개의 독립한 예술적 작품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비평 또한 하나의 창작이라는 요 지의 글을 발표하였다.56)김찬영, 앞의 글. 하지만 ‘비평도 창작’이라는 주장 외에는 비평의 구체적인 요건을 제시하지도, 적극적인 비평 활동을 전개하지도 못하였다. 나름의 미학적인 입장과 이념을 견지하고 본격적인 비평 활동을 개진한 인물은 김복진, 김용준, 윤희순(尹喜淳), 고유섭(高裕燮) 등이다.57)근대 비평에 대해서는 최열, 『한국 근대 미술 비평사』, 열화당, 2001을 참고. 사회주의, 민족주의, 심미주의 등등 옹호한 이념은 각기 달랐지만, 이들은 이론과 실천으로 무장한 ‘미술 전문가’로서 근대 미술 담론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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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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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은 기존의 미전(美展) 비평이 인상 비평이나 순간 비평에 그치고 있다면서 “보다 더 작품에 대한 태도를 경건히 하여, 작품에 숨은 미를 해부하여 다시 이것을 구성해 놓는 그런 비평”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58)김용준, 「화단 개조」, 『근원 김용준 전집(近園金瑢俊全集)』 5, 열화당, 2002, 28쪽. 김용준이 생각하는 비평이란 작품 속에 내재된 어떤 본질적 측면(‘미’)을 포착하는 보편 지성(普遍知性)의 활동이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김용준은 ‘화가와 화론가(畵論家)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관점에서 독자적인 비평 주체를 규정하기도 하였다. 김용준이 제시한 비평의 요소들, 즉 객관적인 비평 태도와 전문적 비평 주체, 그리고 비평가의 시대적 지향성은 근대적 비평이 성립하기 위한 요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이른바 ‘조선 미술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여러 논객이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이 시대에는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작가들이 제기한 계급 문제, 식민지 현실 속에서 드러나는 민족과 향토성 문제, 동양주의, 예술 지상주의 등이 복잡하게 뒤얽히면서 다양한 비평이 생산되었다. 예컨대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이 촉발한 ‘향토색 논쟁(鄕土色論爭)’은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193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는 작품을 둘러싼 복잡한 비평의 지형도(地形圖)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김용준이나 윤희순은 향토색의 본질을 민족성이 아닌 실감(實感)의 차원에서 찾을 것을 주장하였고, 김복진을 위시한 카프 작가들은 향토색을 논하는 이들의 부르주아적 감상을 비판하였으며, 심영섭은 ‘아시아주의’적 관점에서 향토색을 재현할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조선 미술 전람회의 식민주의가 가세되면서 ‘향토색’을 둘러싼 논쟁은 다양하고 모호한 분기점을 갖게 되었다. 그 시비를 떠나, 이런 식의 다양한 미술 비평이 매체를 통해 발표되고 다른 분야와 접속함으로써 비평은 점차 전문화·입체화되었으며, 미술 작품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미술에 대한 안목과 관점을 심어 줄 수 있었다. 미술이 무엇인가 하는 초기의 담론에서 벗어나 ‘미술은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가’라는 가치 문제를 촉발하면서, 비평이라는 담론의 장은 작품의 의미를 복수화(複數化)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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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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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비평 공간은 구체적인 미술 작품을 둘러싸고 당대의 다양한 관점이 가장 첨예하게 맞서는 미술의 최전선(最前線)이며, 대중이 미술 담론을 가장 직접적으로 접하는 학습의 장으로 기능한다. 비평은 늘 현재적이지만, 그 현재는 과거의 가치와 아직 오지 않은 가치가 공존하는 뜨거운 잠재태(潛在態)로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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