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1장 미술의 탄생
  • 4. 미술 담론의 공간
  • 미학과 미술사 연구
윤세진

일본의 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1902∼1983)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면, 아름다운 ‘꽃’이 있을 뿐 꽃의 ‘아름다움’ 같은 것은 없다. 즉, ‘미’는 실체화할 수 없다. 그런데 미학은 이 ‘미’를 실체로 추상화함으로써 성립한다. 어떤 사물을 미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 사물의 다른 부분은 괄호에 넣고 그것을 대상화함을 의미한다. 예컨대, 불상을 미적으로 바라볼 때는 법당(法堂)에서 그것을 바라볼 때의 경외감(敬畏感)은 잠시 뒤로 미루어 두어야 한다. 이처럼 사물을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미적 태도는 과학적 태도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과학적 태도를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59)가라타니 고진, 박유하 옮김, 「미의 지배」, 『작가』 9, 민족 문학 작가 회의, 1997, 177쪽. 이에 비해, 전통적인 화론(畵論)은 창작 원리에서부터 기법, 감상평, 작품의 소장, 역사 등을 망라하지만 ‘미’를 추상화해서 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대 미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기반 위에 서 있다. 미를 ‘과학적으로’ 추상하고 설명할 수 있을 때만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근대 미학의 핵심이다.

서양에서는 18세기에 바움가르텐(Alexander Gottlieb Baumgarten, 1714∼1762)과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미학을 하나의 ‘과학(science)’으로 정립하기 시작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미술 사학이 성립된다.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 1717∼1768)은 회화론, 건축론 같은 이전의 미술 이론이나 전기, 비평 등에서 벗어나 유파(流派)와 양식(樣式)에 따라 통시적(通時的)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미술사를 서술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알로이스 리글(Alois Riegl, 1858∼1905)과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ölfflin)의 양식사적 연구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처럼 미술 비평과 미학, 미술사가 서로 삼투(渗透)하면서 미술에 관한 근대적 담론이 형성되었다.

일본에서 미학 과목이 처음 개설된 것은 1881년 동경 대학에서였다. 이 당시는 심미학(審美學)이라는 과목으로 강의가 개설되었다가, 이후 심미학 미술사로, 1891년에는 미학 미술사로 개칭되었다.60)일본과 한국의 근대 미학사에 대해서는 김문환, 「한국 근대 미학의 전사」, 『한국학 연구』, 고려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1992를 참고. 우리나라의 근대 미학·미술사 연구는 일본의 미학·미술사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경성 제국 대학의 미학·미술사 강의는 동경 대학 계보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으며, 그 적자가 바로 고유섭(高裕燮, 1905∼1944)이다.

확대보기
『조선 미술사』
『조선 미술사』
팝업창 닫기

우리나라에서 미술을 처음으로 사적(史的) 차원에서 서술한 글로는 박종홍(朴鍾鴻)이 『개벽(開闢)』에 발표한 ‘조선 미술의 사적 고찰’(1922)이 있다. 하지만 이는 전통 미술을 연대기적(年代記的)으로 서술한 텍스트일 뿐 ‘과학’으로서의 미술사 텍스트로 보기는 어렵다. 시간을 관통하는 일정한 코드와 미적 논리의 질서를 결여하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식민지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으로서의 미술사 서술을 시작한 것은 조선에 들어온 외국인이었다. 1929년에 독일인 안드레아스 에카르트(Andreas Eckardt, 1884∼1971)가 기술한 『조선 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는 리글의 양식사적 관점에서 한국 미술사를 서술한, 서양인이 쓴 최초의 미술사였다. 에카르트의 『조선 미술사』는 간략히 조선사를 서술한 다음, 이어 건축, 조각과 불탑 미술, 불교 조각, 회화, 도자기, 도자기 이외의 수공품에 대한 각론을 기술하고, 조선 미술의 특질을 논하는 것으로 끝난다. 에카르트는 절제, 단순함, 조화 등을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조선 미술의 고유한 특성으로 거론한 후, “조선 자신의 강함을 가지고 다양한 각도에서 동아시아에서 가장 고전적인 예술품을 제작하였다.”고 조선의 미술을 예찬하였다.61)안드레아스 에카르트, 권영필 옮김, 『조선 미술사』, 열화당, 2003, 376쪽.

에카르트의 『조선 미술사』가 나올 무렵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의 『조선과 그 예술(朝鮮とこの藝術)』(1922)과 세키노 다타시(關 野貞, 1867∼1935)의 『조선 미술사(朝鮮美術史)』(1932)가 출간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인의 한국 미술사 연구는 1902년부터 이루어진 조선 고적 조사 사업(朝鮮古蹟調査事業)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62)이와 관련해서는 조선미, 「일제 치하 일본 관학자들의 한국 미술 사학 연구에 관하여」, 『미술 사학』 3, 미술 사학 연구회, 1991을 참고. 세키노 다타시는 이른바 ‘실증주의’의 기치 아래 심미적 견해나 미술사적 방법론을 배제한 채 조선 미술을 사적(史的) 자료로 다루었다. 이런 점에서 심미적이고 다소 감상적이기까지 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서술과는 차이가 있다. 특히 세키노 다타시의 『조선 미술사』는 삼국시대에 싹튼 미술이 통일 신라에서 절정을 이루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쇠퇴의 길을 걸어 지금에 이르렀다는 일제의 식민 사관(植民史觀)을 전형적으로 드러낸 텍스트이다.

확대보기
고적 조사 광경
고적 조사 광경
팝업창 닫기

우리나라 사람으로 미술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인물은 고유섭이다.63)고유섭에 대해서는 김영애, 「미술사가 고유섭에 대한 고찰」, 동국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1989 ; 김임수, 『고유섭 연구』, 홍익 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1991 ; 목수현, 「한국 고미술 연구에 나타난 고유섭의 예술관」, 서울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1991 ; 김영나, 「한국 미술사의 태두 고유섭 : 그의 역할과 위치」, 『미술사 연구』 16, 미술사 연구회, 2002를 참조. 그는 경성 제국 대학에서 우에노 나오테루(上野直昭, 1882∼1973)의 지도를 받아 미학, 미술 이론, 서양 미술사를 배웠고, 그 밖에도 중국과 일본의 미술사를 공부하는 등 미술사 전반에 관한 기초 과정을 마스터한 후 수많은 조선 미술사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33년부터는 개성 박물관 관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텍스트에는 미술사의 보편적 담론과 한국적 미에 관한 담론 그리고 그것이 학문적으로 체계화되는 과정 모두가 녹아들어 있다.

확대보기
고유섭
고유섭
팝업창 닫기

독일의 미학자 콘라드 피들러(Konrad Fiedler, 1841∼1895)의 이론을 정리한 학사 논문 ‘예술적 활동의 본질과 의의’를 필두로 미학과 예술학 관련 저술을 하던 그가 우리나라 미술사를 서술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절실한 것은 ‘체계’를 세우는 일이었다.

우리는 고대의 미술을 있는 그대로 감상도 하지마는 고대의 미술을 다시 이해하려고 연구도 하고 있다. 이때 감상은 고대의 미술을 각기 분산된 채로 단독 단독의 작품 속에 관조(觀照)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극히 개별적인 활동에 그치나, 연구는 잡다한 미술품을 횡(공간적)으로 종(시간적)으로 계열과 순차를 찾아 세우고 그곳에서 시대정신(時代精神)의 이해와 시대 문화에 대한 어떠한 체관(諦觀)을 얻고자 한다. 즉 체계와 역사를 혼융시켜 한 개의 관(觀)을 수립코자 한다.64)고유섭, 「고대 미술 연구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 1937, 『고유섭 전집』 4, 통문관, 1993, 304쪽.

체계를 세우고 기억을 선별하여 거기에 선적(線的)인 질서를 부여하기. 그럼으로써 미술은 학문(과학)이 되고, 미술품은 시공간의 객관적 구현물이 될 수 있었다. 체계와 보편을 세우기 위해 개별적 차이를 동일성의 평면 위에 배치하는 것이 근대 지식 담론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고유섭의 미술사 연구야말로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결과물이었던 셈이다. 이후로도 비 평가 윤희순이 『조선 미술사 연구』(1946)를, 김용준이 『조선 미술사 대요』(1949)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의 비평을 역사적 지평으로 확장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엄밀한 체계를 통해 미술사를 학문으로 정립하고자 했던 고유섭을 뛰어넘지는 못하였다. 고유섭의 미술사 방법론은 광복 이후의 제1세대 미술사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