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2장 미술가의 자의식
  • 2. 근대 동양화가의 자의식
김이순

근현대 미술가들의 다양한 의식 세계를 대번에 알 수 있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동시대의 미술가들이라 하더라도 전공 분야와 미술가가 받은 교육에 따라 의식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통 화단(畵壇)의 화가와 일본 유학을 다녀온 서양화가 사이에는 창작 활동의 방식뿐만 아니라 자아 인식에 있어서도 차이가 컸다.66)근대기에는 전통 수묵화(水墨畵)를 그리던 화가와 서양화를 그리던 화가를 부르는 호칭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어 1910년대 전반기의 신문을 보면, 서화 협회(書畵協會) 교수진이었던 강필주(姜弼周, ?∼?)와 강진희(姜璡熙, 1851∼1919)는 ‘화사(畵師)’로 언급하고 있는데 비해, 고희동을 비롯한 서양화가들은 ‘화가’로 언급하고 있어, 동양화가와 서양화가를 바라보는 사회적인 인식이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윤세진, 「근대적 미술 담론의 형성과 미술가에 대한 인식」, 『한국 근대 미술과 시각 문화』, 조형 교육, 2002, 84쪽 참조). 이를테면 김은호(金殷鎬, 1892∼1979)는 근대 전통 화단의 대가(大家)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고 개인 화숙(畵塾)을 통해 제자를 많이 양성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유화(油畵)를 그리던 미술가들과 달리 자신의 의지나 자의식이 반영된 작품을 제작하기 어려웠다. 수요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그림을 주로 제작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근대기에 수요가 별로 없던 서양화를 그리던 화가는 좀 더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은 동양화로 전공 분야를 바꾸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우선 근대기에 활동한 동양화가들을 통해 전통 화원에서 근대적 미술가로 의식이 전이(轉移)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화원에서 미술가로 이행하는 과정을 잘 드러내는 작가로 안중식(安中 植, 1861∼1919)을 들 수 있다. 안중식은 조선시대 말엽에 태어나 대한제국기와 일제 강점기에 걸쳐 살았던 인물인 만큼 그의 활동은 우리 미술계의 과도기적인 상황을 보여 준다. 그는 어진 화사(御眞畵師)로 활동하거나 일반 주문에 응하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같은 개화 지식인들과 교유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적인 명사로 대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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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
안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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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의 생애나 사승(師承) 관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고 초기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미술가로서의 자아 인식 변화나 형성 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렵다. 때문에 행적과 남긴 그림을 통해 그가 남긴 미술가의 사회적 위상과 자의식을 추정해 보고자 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안건영(安健榮, 1841∼1876)67)홍선표, 「조선 말기 화원 안건영의 회화」, 『고문화』 18, 한국 박물관 협회, 1980.6, 29쪽.과 장승업(張承業, 1843∼1897) 같은 조선시대 마지막 화원에게서 그림을 배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68)자세한 언급은 박동수, 『심전 안중식 회화 연구』,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 박사 학위 논문, 2003 참조 그리고 20세가 되던 1881년(고종 18)에 조석진(趙錫晉, 1853∼1920)과 함께 청나라 톈진(天津)에 가서 약 1년 동안 기계 설계도를 그리는 기술과 제도(製圖)를 익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수직(郡守職)을 수행하는 등 관직에 머물기도 하였으며 1902년에는 주관 화사로서 어진 제작에 참여하였다.69)안중식은 어진 제작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종4품의 벼슬을 받았고, 어진 참여의 대가로 통진 군수를 하사받아 봉직하기도 하였다. 19세기 초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도화서 화원의 신분이 상당히 격상되었다. 19세기 전반기까지는 도화서 화원으로 출세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종6품 정도였으나 20세기 초에는 종1품까지 올라갔던 기록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성희, 「1920년대 한국 전통 화단의 변천 과정에 관한 연구」, 『근대 한국 미술 논총』, 학고재, 1992, 240∼244쪽 참조. 1911년부터 작고할 때까지는 서화 미술회 강습소(書畵美術會講習所)에서 그림을 가르쳤다.

그가 활동한 시기에 도화서 제도가 없어졌기 때문에 국가 소속 화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진 제작에 참여하거나 왕실에서 필요한 미술품을 제작하였으며 귀족이나 부호(富豪)의 요구에 따라 작품을 제작하였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직업 화가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전통 화원과 같은 장인적(匠人的) 화가로 보기는 어렵다. 안중식은 서화 미술원이라는 근대 개념의 미 술 교육 기관에서 전문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또한 전통 화원과 다르게 오세창 같은 개화 지식인과 어울리면서 친밀한 교류를 하였다. 이는 이미 20세기 화단에서 전통적 개념의 화원이나 문인 화가의 구별이 없어졌고,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안중식의 미술가로서의 자아 인식은 그림에서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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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의 탑원도소회지도
안중식의 탑원도소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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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의 초기 화풍은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작품을 보면 191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의 양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드러난다. 예를 들어 1910년 이전에 그린 그림은 대부분 『점석재총화(點石齋叢畵)』(1876),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1888∼1897) 등에서 볼 수 있는 정형화된 화보풍(畵譜風) 내지는 장승업의 화풍을 계승하고 있다.70)최경현, 「19세기 후반 상해에서 발간된 화보들과 한국 화단」, 『2008년 하계 학술 발표문』, 한국 근현대 미술 사학회, 2008, 14쪽 참조. 그러나 1910년대에는 점차 정형에서 벗어난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 한 예로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를 들 수 있다. ‘탑원도소회지도’라는 화제(畵題) 바로 옆에 “1912년 정월 초하룻날 밤에 탑원 주인 위창(葦滄)에게 그려 준다.”라는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 오세창에게 그려 준 그림임을 알 수 있다. 탑원은 돈의동에 살던 오세창의 저택 당호(堂號)이고, 탑골 공원의 숲과 멀리 원각사지 10층 석탑으로 보이는 탑이 표현되어 있어, 오세창의 집에서 가졌던 모임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71)이구열, 『안중식(安中植)』 한국 근대 회화 선집-한국화 7, 금성 출판사, 1999, 111쪽. 근경에 표현된 누각의 기하학적 체계나 실경적인 표현은 전통 회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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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의 영광 풍경
안중식의 영광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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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에 토대를 둔 표현은 1915년에 그린 ‘영광 풍경(靈光風景)’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72)한시(漢詩)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영광 풍경을 사진을 찍듯이 묘사하였다기보다는 영광의 풍경을 실제로 보고 이를 토대로 화면을 구성하는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원경에 있는 산의 표현은 화보풍의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자연스러워 영광의 실경에 가까운 표현으로 여겨진다. 이 작품은 영광에 사는 부호로 서화 애호가(愛好家)인 조희경, 조희양 형제의 초대를 받아 영광에 직접 가서 그려 준 그림이다. 그림을 후원하는 방식은 여전히 전통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양식적으로는 관념적인 화풍에서 벗어나 있다. 안중식은 서화 미술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화보의 모사(模寫)뿐 아니라 자유로운 사생(寫生)을 유도하였으며,73)안중식의 제자였던 노수현(盧壽鉉, 1899∼1978)은 “심전(心田) 선생은 산을 그리려면 산을 많이 보아야한다고 하여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을 답사하였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조용만, 『1930년대의 문화 예술인들』, 범양사, 1987, 289쪽. 이 시기에는 자신도 대상을 직접 관찰하고 꼼꼼하게 그렸다.74)안중식은 체화정(棣花亭)에서 내려다보이는 영광의 모습을 제발(題跋)에 일일이 적고 있다. 예를 들어 정자의 앵두나무 꽃, 여염집, 누각, 동산과 옥토, 수로, 거주자들을 언급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구열, 앞의 책, 121∼122쪽 참조. 18세기 진경 산수화(眞景山水畵)에서 주로 금강산 같은 명승지를 다루었던 것과 다르게 일상적인 장면을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안중식이 이러한 실경 산수를 그린 것은 의뢰자의 요구가 어느 정도 반영되었겠지만 미술가 스스로 이러한 그림을 그릴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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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의 백악춘효
안중식의 백악춘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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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의 백악춘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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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에 그린 ‘백악춘효(白岳春曉)’ 역시 실경적인 산수화이다. 현재 구성이 거의 같은, 여름본과 가을본 두 점이 있는데, 백악산(북한산)을 배경으로 광화문(光化門)과 경복궁(景福宮)을 그렸다. 화면의 구성은 근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과 원경을 올라다보는 시점을 복합적으로 사용하고 있어 아직 일관성 있는 서양식 원근법(遠近法)을 구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대상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처리되어 현실감이 있다. 게다가 같은 대상을 계절을 달리해서 그렸다는 점은 인상주의 화가가 같은 대상을 시간, 날씨, 계절을 달리해서 표현하였던 방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대상을 객관적이고 실증주의적으로 바라보는 근대적 시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75)여름본은 이왕가의 요청으로 덕수궁 미술관(창덕궁 박물관의 후신)에 소장되었다가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이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박동수, 앞의 글, 83∼84쪽 참조. 그러면서도 ‘백악춘효’는 작가의 주관적 의식이 반영 된 작품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작품은 1915년에 조선 총독부가 일제 시정 5주년을 기념하는 공진회(共進會)를 개최하면서 경복궁을 훼손하자 이왕직(李王職)에서 옛 궁궐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존하기 위해 주문한 것인데, 안중식의 역사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주장이 있다. 우선 작품의 제목인 ‘백악춘효’는 ‘백악의 봄 새벽’이라는 뜻인데, 여름과 가을 경치에 이러한 제목을 붙인 것은 ‘백악의 봄과 새벽이 다시 오기를 바란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광화문을 굳게 닫힌 모습으로 묘사한 점이나 광화문 앞을 촬영한 당시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완전히 배제되어 적막하게 표현한 점은 나라 잃은 슬픔을 투사(投射)한 그림으로 읽을 수 있다.76)이구열, 「안중식의 「백악춘효」와 친일파 미술 상인의 자백」, 『우리 근대 미술 뒷이야기』, 돌베개, 2005, 109∼112쪽 참조. 그렇다면 1915년경이면 이미 주문자의 요구를 넘어서 미술가 역사 의식이나 감정을 작품에 투사하는 근대적인 미술가의 자의식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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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 자화상
김은호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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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은 당대의 사회적 명사(名士)로 대접받았다. 1918년 7월에 조석진(趙錫晉, 1853∼1920), 오세창, 이도영(李道榮, 1884∼1933), 고희동과 함께 금강산 탐승(探勝)과 사생 여행을 다녀왔는데, 이 사실이 당시 신문에 보도될 정도였다.77)『매일신보(每日申報)』 1918년 7월 26일자. 서화 미술회 강습소에서 안중식에게 그림을 배운 김은호가 사회 명사로 대접받는 스승을 보고 화가로서 자부심을 느꼈다고 회고하고 있듯이,78)이구열, 『화단 일경(畵壇一境) : 이당 선생(以堂先生)의 예술(藝術)과 생애(生涯)』, 동양 출판사, 1968, 35∼36쪽. 안중식은 오세창 같은 명망 있는 개화 지식인들과 어울리며 저명인사(著名人士)로 대접을 받았다. 또한 그 사회적 위상에 걸맞게 사회적 책무도 게을리 하지 않은 엘리트 지식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식은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의 한 사람인 오세창과 가깝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잡혀가 고초를 당한 끝에 결국 11월 2일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작고하자 『매일신보(每日申報)』는 ‘조선 예술계의 거장 안심전(安心田, 심전은 안중식의 호) 화백 장절(壯絶)’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이는 안중식 스스로가 사회적 책무를 다하려 노력한 결과이면서도 동시에 미술가에 대해 사회적 인식과 위상이 크게 변하였음을 의미한다. 화원 신분이었던 안중식은 말년에 이르러 스스로를 전문인이자 엘리트로 인식하였고 사회도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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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호의 춘향상
김은호의 춘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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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식에게서 그림을 배운 김은호(金殷鎬, 1892∼1979)는 미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어느 정도 형성되었을까? 김은호는 서화 미술회 강습소에 들어가 안중식과 조석진에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서화를 배운 세대이다. 그리고 1925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3년간 일본화를 공부하였으니, 당시 동양화가로는 최고의 교육을 받은 셈이다. 또한 자신의 화숙을 통해 김기창(金基昶, 1913∼2001), 장우성(張遇聖, 1912∼2005), 이유태(李惟台, 1916∼1999), 조중현(趙重顯, 1917∼1982), 안동숙(安東淑, 1922∼ ) 같은 근현대 동양화 화단의 중추적 역할을 한 대가들을 길러 내어 20세기 동양화 화단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김은호는 1912년에 서화 미술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순종의 어진을 그릴 정도로 재주가 출중하였고, 최제우(1913), 윤덕영(1914), 충무공(1950), 이율곡(1966), 신사임당(1966) 등 명사와 위인의 공식 초상화뿐 아니라 춘향(1939), 논개(1955) 같은 이상적인 여성상을 도맡아 제작하였을 정도로 인정받는 화가였다. 근대 화가 중에서 보기 드물게 그림 재주만으로 경제적 여유를 누린 인물이다.

그러나 김은호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부친은 아들이 화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한때 만석꾼이었던 집안의 2대 독자인 김은호가 그림에 관심을 두는 모습을 보고 “이놈아, 기껏 환쟁이가 될 테냐. 앉으면 그림만 그리고……”라는 호통을 쳤다고 한다. 자기 아들이 ‘환쟁이’가 되는 것은 당치도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79)이구열, 앞의 책, 1968, 35쪽. 근대기에 미술가가 되려고 하였을 때 집안의 반대에 부딪힌 것은 비단 김은호만 경험한 것이 아니었다. 이종우(李鍾禹, 1899∼1981), 김복진(金復鎭, 1901∼1940), 이인성(李仁星, 1912∼1950) 같은 근대 미술가는 말할 것도 없으며, 이대원(李大源, 1921∼2005)은 미술가가 되려고 하였을 때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서 법대를 졸업하고 나서야 비로소 화가가 될 수 있었다.

김은호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그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내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남이 원하는 그림을 많이 그렸어. 옛날에는 내게 그림을 청(請)하면 아무개 대감 집에 있는 무슨 그림을 그려 달라고 못 박아 부탁해서 그 청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 더러 내가 새로운 그림을 그려 주면 무엇으로 해달라고 우겨서 바꿔 간 예도 많아. 그땐 그림을 예술 작품으로보다는 장식품으로 여겼던 것 같아…… 그 시대의 추세 때문에 내가 끌려갔던 것 같아. 지금부터라도 내 그림을 그려야지.80)이규일, 『한국 미술 졸보기』, 시공사, 2002, 170∼172쪽.

김은호가 화가로 살아가면서 ‘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근대 화단의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서화 협회 전람회(書畵協會展覽會)나 조선 미술 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같은 공식적인 전람회를 통해 작품을 발표하여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미술가로서의 자율성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전통적인 관념을 지닌 수요층이 있던 동양화 화단에서는 미술가와 수요자의 관계가 봉건적(封建的)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대가였던 김은호조차도 동양화에 대한 당시 사회적 인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분명 김은호는 전통 화원과 구별되는 미술가로서의 자아의식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실제 창작 활동을 할 때 자아의식을 드러내기는 어려웠다. 근대기의 미술 작품 수요자는 새롭게 형성된 권력층이나 신흥 부유층이었는데, 이들은 여전히 생활 주변을 장식하는 화려한 그림이나 기복적(祈福的) 내용의 세화(歲畵)를 요구하였다. 김은호는 수요자의 요구에 부응하는 그림을 그리다 보니 결국 자신의 의식 세계를 반영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1920년경에 접어들면 전통 화단에 변화가 일어난다. 1919년과 1920년에 안중식, 조석진 두 대가가 잇따라 세상을 떠난 일은 전통 화단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이들의 타계는 물리적으로 전통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 무렵에는 이미 미술이나 미술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미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1920년에 일본 유학생 변영로(卞榮魯)가 『동아일보(東亞日報)』에 발표한 ‘동양화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대정신(時代精神)은 모든 예술의 혈(血)이며, 향(香)이며 색(色)이다. 어디 호발(毫髮)만큼이나 시대정신이 발현된 것이 있으며, 어디 예술가의 굉원(宏遠)하고 독특한 화의(畵意)가 있으며, 어디 예민한 예술적 양심이 있는가? 단지 선인(先人)의 복사요, 모방이며, 낡아 빠진 예술적 약속을 묵수(墨守)함이다. 서양에서는 모든 그림이 다 화가 자신의 표현이 아님이 없다. 분방한 상상력과 선인의 방식을 무시한 대담한 표현력과 창조력의 결정이 아님이 없다. 그리고 또 그네들의 화제(畵題)는 모두 우리가 일일(日日) 이문목도(耳聞目睹)하는 현실 세계에서 취한다. 명나라 의상인지 당나라 의상 인지, 고고학자가 아니면 감정도 할 수 없는 옷을 입고…… 오수(午睡)를 최(催)하고 있는 초인적인 선관(仙官)의 그림이나 그러한 종류의 미인도나 혹은 천편일률(千篇一律)의 산수도나 그리지 아니하는가.81)변영로, 「동양화론」, 『동아일보』 1920년 7월 7일자.

변영로는 전통 회화의 관념성과 전통을 답습(踏襲)하는 미술가의 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답습하여 그림을 그리다 보니 표현력과 창조력이 없어 시대에 맞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서양에서는 모든 그림이 다 화가 자신의 표현이 아님이 없다.”라는 언급으로 보아, 일단 변영로는 서양 문화에 경도(傾倒)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시대정신’이라는 생각과 화가 자신의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은 전통 화단에서 찾아볼 수 없던 새로운 인식이자 이미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비록 전통 화단에서는 ‘시대정신’이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지만,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미술과 미술가에 대한 근대적인 의식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미술품을 향유하는 이의 인식 변화가 뒷받침되어야 하였는데, 동양화를 애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전히 전통적인 의식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양화가들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김은호 자신은 미술 작품을 와유물(臥遊物)이나 장식물이 아니라 창작물 내지는 근대적인 감상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수요자의 요구에 따르다 보니 작품에 실제로 나타난 화풍이나 내용은 그러한 단계에까지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 동양화를 그리는 미술가들이 특정 주문에 예속되기보다 창작을 담당하는 근대적인 화가로서 독창성이나 개성을 중시하는 미술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하였다.

김은호의 화맥(畵脈)을 이어간 화가로 장우성(張遇聖, 1912∼2005)을 들 수 있다. 장우성은 채용신(蔡龍臣, 1850∼1941)이 그린 사실적 초상화에 매료되어 화가가 되려고 결심하였고 김은호에게서 채색 세밀화를 배웠기 때문 에 그의 광복 이전 그림은 김은호의 화풍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1932년에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해빈소견(海濱所見)’이라는 작품으로 입선(入選)하면서 화가로 첫발을 들여 놓은 이후, ‘귀목(歸牧)’(1935) 같은 채색 인물화로 기량을 발휘하였다. 1941년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는 ‘푸른 전복(戰服)’으로 총독상을 받았으며, 1942년에는 ‘청춘 일기(靑春日記)’로, 1943년에는 ‘화실(畵室)’로 창덕궁상을 잇따라 수상하여 관전풍(官展風)의 채색 인물화로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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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의 귀목
장우성의 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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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이 근대기에 제작한 인물화는 김은호의 인물화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화실’(1943)에서는 새로운 요소가 보인다. 우선 주목할 수 있는 점은 미술가가 창작 활동을 하는 공간인 화실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인데, 이는 창작 활동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표현된 화가의 모습은 자화상(自畵像)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장우성의 미술가 에 대한 인식을 읽을 수 있다. 덥수룩한 수염에 파이프를 손에 든 화가가 명상에 잠겨,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는 모습은 창작을 위해 고뇌하는 이미지이다. 즉 미술가는 창작의 주체로서 일반인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라는 근대적인 예술가상이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화가의 창작 방식에도 변화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미술가들이 화보나 스승의 체본(體本)을 놓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대상물을 보고 표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양화에서도 꽃병이나 인물을 모델로 놓고 직접 관찰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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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의 푸른 전복
장우성의 푸른 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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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의 화실
장우성의 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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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장우성은 서울 대학교 교수로 있던 김용준(金瑢俊, 1904∼1967)과 함께 ‘조선화(朝鮮畵)’의 길을 개척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채색 인물화를 포기하고 수묵화를 그리게 된다. ‘성모자상(聖母子像)’에서처럼 인물화를 그리되 묵선(墨線)을 강조하고 색을 쓰지 않거나 수묵 위주의 묵죽(墨竹)을 구사하는 등 사군자(四君子)를 주로 그렸다. 1950년대 중반에는 학, 산, 달과 같은 전통적인 모티프(motive)를 간략화시켜 반추상적(半抽象的)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양식은 오히려 서양화가 김환기(金煥基, 1913∼1974)가 당시에 구사하던 표현 양식과 유사하다. 이는 미술가의 주관을 중시하는 현대 미술가의 인식을 수용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현대 문학』에 기고한 다음과 같은 글에는 장우성의 변화된 의식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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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의 성모자상
장우성의 성모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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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동양화는 사실주의가 아니고 표현주의와 인격과 교양의 기초 위에 초현실적 주관의 세계를 전개하는 것이 동양화의 정신이다. 그리고 함축과 여운과 상징과 유현(幽玄), 이것이 동양화의 미다. 사의적(寫意的) 양식에 입각한 수묵 선염(水墨渲染)에 선적(禪的) 경지는 사실에 대한 초월적 가치와 표상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자기를 표현하는 것, 그것을 평면 위에 조형함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 회화 예술이요 불변의 철리(哲理)일 것이다.82)홍선표, 「‘탈동양화(脫東洋畵)’와 ‘거속(去俗)’의 역정 : 월전 장우성의 작품 세계와 화풍의 변천」, 『근대 미술 연구』, 국립 현대 미술관, 2004, 125쪽 재인용.

이러한 언급은 그가 광복 이후에, 그 이전에 그리던 사실적인 채색화에서 벗어나 표현적인 수묵화로 전환하게 된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그는 수묵화만을 진정한 의미의 동양화로 보았으며, 사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회화 예술이라고 여겼다.

사의성을 강조하는 장우성의 예술관은 1961년에 서울 대학교 교수직을 떠나 재야 작가로 활동하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전통 선비 정신과 문인화 이념 을 계승하여 ‘신문인화(新文人畵)’를 구축하려 하였다. 그가 강조하는 먹의 조화와 간일(簡一)한 표현은 현대 미술의 추상적인 양식과도 상통하여 전통 문인화를 새롭게 계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전통적인 모티프뿐 아니라 현재 자신이 경험하는 소재내지는 시사성이 있는 내용을 풍자적이거나 비판적인 시각으로 다루었다. 예를 들어 ‘오염 지대(汚染地帶)’(1979)에서 죽어 가는 학을 간일한 묵선으로 표현하였으며, 화면의 오른쪽에 인간의 이기적인 개발로 대자연이 오염되어 모든 생명체가 죽어 가고 있음을 한탄하는 내용의 화제를 적어 놓았다.83)홍선표, 앞의 글, 129쪽 재인용. ‘태산이 높다 해도’(1998) 같은 말년의 작품은 더욱 간일한 화풍으로 나갔는데, 광복 이후 김용준이나 김환기와 교류하면서 형성된 문인화에 대한 집착을 말년까지 놓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화제를 한자가 아닌 한글로 적어 ‘한국적’ 문인화를 이룩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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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의 오염 지대
장우성의 오염 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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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우성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화풍을 수용하여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는 일본화풍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전통 문인 화가의 정신과 서양의 모더니즘(modernism) 양식을 혼합하여 신문인화를 창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창작 태도에서 선비 정신을 계승한 문인 화가로 남기를 원하였던 작가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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