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2장 미술가의 자의식
  • 3. 근대 서양화가의 자의식
  • 치열한 작가 정신의 소유자들
김이순

김용준이나 김종영처럼 선비 기질을 창작의 태도로 밀고 나갔던 미술가가 있는가 하면, 철저하게 미술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미술가로 서 강한 자긍심(自矜心)을 가졌던 이들이 있었다. 첫 번째 예로 나혜석(羅蕙錫, 1896∼1946)을 들 수 있다. 1913년에 진명 여자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 동경 여자 미술 학교(東京女子美術學校)에 입학하여 1918년에 졸업하고 귀국한다. 1919년 3·1 운동 때는 김활란(金活蘭) 같은 선구적인 여성들과 함께 집회를 열었다가 옥고를 치렀는가 하면, 1921년에 시작된 서화 협회전에 유화 작품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1921년 3월에 경성일보사(京城日報社) 내청각(來靑閣)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는 나혜석이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뛰어넘어 경성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가진 첫 번째 개인전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107)이구열, 「근대 여류 화가의 등장과 활약」, 『근대 한국 미술사 연구』, 미진사, 1992, 378∼379쪽 참조. 1910년대에 동경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왔던 고희동, 김관호(金觀鎬, 1890∼1959), 김찬영(金瓚永, 1893∼1960)이 전공을 동양화로 바꾸거나 아예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였던 사실과는 대조적이다. 나혜석은 소설을 쓰기도 하였지만 유화를 결코 포기하지 않고 평생 그림을 그린, 근대기 최초의 전문 서양화가였다.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만주(滿洲)에 머무는 동안에 외교관 부인으로서, 어머니로서 분주한 생활을 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려 조선 미술 전람회에 출품하였다. 이를 두고 당시 남성 작가들은 “야심이 앞선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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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자화상(?)
나혜석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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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현대 미술사가들 중에는 나혜석의 페미니즘적인 의식이 그의 미술 작품에 표현되지 않은 점에 대해 의아해 하거나 언행일치(言行一致)가 되지 않던 작가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혜석의 의식 세계를 면밀히 검토하면 여성의 인권에 대해 매우 진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자신은 “내가 그림 없이 어찌 살 라구.” 혹은 “그림을 제해 놓으면 실로 살풍경이고 내가 그림이오, 그림이 내가 되어, 그림과 나를 따로따로 생각할 수 없는 상태”라고 토로하면서 평생 붓을 놓지 않았다.108)「나혜석, 미전 출품 제작 중에」, 『조선일보』 1926년 5월 20일자. 그리고 “여성도 사람이외다.”라고 하며 여성도 전문인으로 활동하면서 사람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나혜석은 선구적인 페미니스트였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혜석은 교양과 덕을 쌓기 위한 방편으로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고, 더구나 소일거리로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다. 창작 활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고 드러내려 하였다.109)이 점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이순, 「화가로서의 나혜석 연구에 대하여」, 제10회 나혜석 바로 알기 심포지엄, 나혜석 기념 사업회, 2007, 3∼18쪽 참조. 일제 강점기에 유화를 그리는 여성 화가가 전업 작가로 살아가기에는 아직 사회적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혜석은 동시대의 어떠한 미술가보다도 치열하게 작품에 몰두하였고 자의식이 강했던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다는 점에서 전문 미술가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던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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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에서 찍은 나혜석 사진
화실에서 찍은 나혜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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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가 되어서야 미술가 스스로 자신이 남과 다른, 선택 받은 존재 로 인식하고 미술에 전념한 미술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순수 미술의 개념은 이미 1915년이면 이론적으로 논의되지만 실제 미술가들 사이에서 미술가로서 자기 인식이 본격적으로 표출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나서였다.110)미술 담론 속에서는 1915년의 안확의 글에서 공업이나 산업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순정 미술’을 구별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전 기술로서의 미술과 구별되는 ‘정신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자세한 언급은 윤세진, 앞의 글, 2002, 63∼70쪽 참조. 그러나 작품상으로 이러한 인식이 분명히 반영되어 나타난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미술가의 자화상을 통해서 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물론 1910년대에도 자화상이 제작되었지만 작가로서의 자의식이 직접 표현되지는 않았다. 일단 1930년대에는 이전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화가가 자화상을 제작한 사실은 미술가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관심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전의 자화상과 달리, 자화상 속에 미술가로서 자신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경우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황술조(黃述祚, 1904∼1939)의 ‘자화상’(1930), 서동진(徐東辰, 1900∼1970)의 ‘팔레트(palette)의 자화상’에서 화구(畵具) 속에 자신을 그려 넣는, 독특한 아이디어는 자신과 화구를 혼연일체(渾然一體)로 표현한 것이며 미술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그림에 몰두하는 모습은 김주경의 ‘가을의 자화상’에서 작가의 창작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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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술조의 자화상
황술조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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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의 팔레트의 자화상
서동진의 팔레트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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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로서의 자의식이 분명하게 표현된 예는 1940년대의 자화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술가로서의 확고한 신념이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는 예로는 붓을 들고 이젤(easel) 앞에 앉아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문신(文信, 1923∼1995)의 ‘자화상’(1943)을 들 수 있다. 이젤 앞에서 앉아 있거나 서 있는 화가의 이미지는 이미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즈(Diego Velasquez, 1599∼1660)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우리나라 화가도 1940년대 이후 종종 이젤 앞에 팔레트나 붓을 들고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고, 이는 화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보이는 일반적인 형식이 되었다. 문신의 자화상에서 입을 꽉 다물고 우리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매에는 ‘미술가는 비범한 존재’라는 자의식이 담겨 있다. 결국 그는 광복 이후 미술에 전념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나는 작가 대열에 합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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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의 자화상
문신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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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로서 확신에 차 있는 이미지의 대표적인 예로는 이쾌대(李快大, 1913∼?)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1948∼1949)을 들 수 있다. 팔레트와 붓을 들고 다부지게 서서 확고한 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은 미술가라는 존재에 대해 강한 자부심과 함께 선구자적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이쾌대가 광복 서너 해 전에 그린 ‘자화상’(1942)에서 명료하지 않은 윤곽선과 뭉갠 듯한 표현적인 붓질과 불안정한 시선으로 비스듬히 우리를 바라고 있는 모습과 판이하게 다르다. 광복 이후 이쾌대는 낭만적이고 보헤미안적(Bohemian的)인 미술가의 의식에서 벗어나, 현실을 적극적으 로 극복하는 미술가로 변신코자 노력하였음은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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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이쾌대의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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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의 자화상
이쾌대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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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미술인들이 주로 은둔, 자기만족, 허영, 이러한 휴식의 생활에서 허덕이는 자화상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고 싶지는 않다. …… 이것은 단순히 복잡한 현실에만 그 책임을 전가할 수 있을까. 정열의 고갈과 패기의 상실이 가장 가까운 원인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우리들의 형편으로는 남보다 몇 십 배, 몇 천 배의 노력이 필요함은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111)이쾌대, 「고갈(枯渴)된 열정(熱情)의 미술계(美術界)」, 『민성(民聲)』, 고려 문화사, 1949.9.

이쾌대가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갖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그는 미술가의 적극적인 삶과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고 있다. 이 자화상에서 화가는 손에 유화 용구인 팔레트를 손에 들고 있지만 붓은 수묵화용이며 중절모를 쓴 채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 말하자면 동양과 서양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고희동이나 김용준처럼 유화를 포기하지 않았 으며, ‘군상(群像)’ 같은 대작을 통해 전문 미술가로 자신의 이미지를 굳혔다. 우리 화단에서도 1940년대에 들어서면 고희동이 처음 유화를 배워 왔을 당시와 같은, 서양화가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불확실성은 없었다. 미술가는 여기(餘技)나 취미 생활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선구적인 전문가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눈을 크게 뜨고 팔을 걷어붙이고 당당하게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이쾌대의 모습은 이전의 어느 화가보다도 진지하고 전문인으로서 자신감에 차 있으며, 해방 공간에서 미술가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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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의 군상
이쾌대의 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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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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