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2장 미술가의 자의식
  • 4. 전위를 추구한 모더니스트
김이순

우리나라 미술가들의 서양 미술 수용은 일단 사실 재현에서 시작되었고, 인상주의적인 필치가 가미된 사실주의는 조선 미술 전람회 같은 관전(官展) 양식이 되었다. 1920년대 말 목적론적인 프롤레타리아 미술가들이 구성주의적(構成主義的) 표현을 구사하기도 하였지만 현재는 신문 삽화(新聞揷畵)나 잡지의 표지 정도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고, 순수 미술에서 전위적 경향이 나타난 것은 1930년대가 되어야 한다. 남보다 앞서 간다는 의미의 ‘전위(前衛)’라는 개념으로 언급할 수 있는 미술가는 일본에서 이과전(二科展)이나 자유 미술가 협회전(自由美術家協會展) 같은 재야적 성격의 그룹전에 참여한 작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관전풍의 아카데믹한 표현이 아닌,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하여 추상적이거나 표현주의적인 작품을 제작하였다.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일찍 서구의 모더니즘 미술을 수용하였지만,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면서 더 이상 ‘자유’라는 용어를 자유롭게 쓸 수 없었다. 더욱이 전위적인 미술 표현은 억압받았다. 우리나라의 근대 미술에서 전위적인 화풍은 일본의 전위적인 미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전위적인 작품이나 작가가 등장하는 것은 6·25 전쟁 이후 서양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근대 미술가 가운데 전위적인 의식을 가졌던 미술가로는 우선, 태평양 미술 학교(太平洋美術學校)를 졸업한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을 들 수 있다. 그는 목적론적인 미술과 아카데미즘을 모두 거부하고 순수 예술론을 지향하였다. 1935년에 그린 ‘친구의 초상’(1935)은 자신의 친구인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동시대의 화단에서는 찾기 어려운, 거칠고 표현적인 붓질로 그렸다. 실제 주인공을 닮았는지 여부를 떠나, 양식적으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1876∼1954)의 ‘파이프를 문 남자’(1900)의 영향을 받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112)김영나, 『20세기의 한국 미술』, 예경, 1998, 54쪽. 창백한 얼굴에 면도를 하지 않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인물은 우리의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현실의 세계를 직시하기보다 생각에 잠긴 듯하다. 이러한 데카당(décadent)한 모습은 인물의 외모를 재현한 것이기보다 내면 의식을 직관적인 방식으로 포착하였다. 그리고 개인의 초상이기보다는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예술가의 초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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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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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웅이 이와 같이 주관적이고 표현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조선 미술 전람회 같은 관전은 물론 후원자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그는 집안이 부유하였던 덕분에 창작의 주체로서 자유롭게 자신만의 미술을 추구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불구가 되었던 그는 오히려 자신의 신체적인 결점을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예술 표현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김환기(金煥基, 1913∼1974)는 김용준과 함께 문인적인 성향을 보인 작가이면서도 모더니즘을 추구한 전위적 작가였다. 김환기가 화단에 데뷔한 것은 일본 이과전에 출품한 ‘종달새 노래할 때’(1935)라는 작품이 입선되면서부터였다. 한복을 입은 여인이 머리에 항아리를 이고 있는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구름, 버드나무, 새알들이 보이는 지극히 낭만적이 풍토를 느끼게 하는 그림이었다.”고 언급하였듯이, 향토적이고 서정적인 정서를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단순한 형태와 큐비즘적(Cubism的) 요소는 김환기의 모더니스트로서의 방향을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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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종달새 노래할 때
김환기의 종달새 노래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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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는 1937년부터 회우(會友) 자격으로 자유 미술가 협회전에 참여하면서 전위적인 모더니스트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일본의 전위적인 작가 중에서도 그는 유럽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후 문화 학원(文化學院)에서 가르치던 무라이 마사나리(村井正誠, 1905∼1999) 같은 화가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환기의 작품 중에서 기하학적이면서도 장식적인 ‘꽃’이라는 작품은 무라이 마사나리의 ‘가을 꽃’과 소재나 구성에서 매우 비슷하다.113)자세한 논의는 김영나, 「김환기 : 동양적 서정을 탐구한 화가」, 『20세기의 한국 미술』, 예경, 1998, 352∼356쪽 참조. 그러나 광복 이후 김환기는 좀 더 풍토적이고 서정적인 미술을 구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질적으로 낭만적인 성향을 지닌 김환기는 광복 이후의 혼란스런 시대 속에서도 신사실파(新事實派)를 결성하여 순수 조형 세계를 추구하였다. 신사실파의 회원이었던 유영국(劉永國), 이규상(李揆祥), 장욱진(張旭鎭), 이중섭(李仲燮)의 미술 세계에서도 드러나듯이, 현실을 직시하고 작품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서양의 모더니즘 계통 미술을 받아 들여 서정적이고 탈정치적인 미술을 추구하였다. 특히 김환기는 전통시대 선비적인 기질을 갖고 있으면서 낭만적이고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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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항아리와 여인들
김환기의 항아리와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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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의식은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피난 열차’(1951)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피난민이 콩나물시루처럼 가득 열차에 타고 있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혼란이나 고통이 드러나지 않는다. 크고 작은 형태의 리드미컬한 배열은 음악적이기까지하다. 피난지에서 그렸을 ‘항아리와 여인들’(1951)에서 항아리를 머리에 이거나 들고 있는 반라(半裸)의 인물들은 비현실적이다. 김환기는 현실의 고통을 표현하기보다 한국적인 소재를 찾아 추상화함으로써 한국적이면서도 모던한 미술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1956년에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그는 특히 도자기에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달, 산, 사슴, 학, 매화, 항아리 같은 모티프를 추상화시켜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고자 하였다.

동양 내지 한국적 정서를 모던한 조형 언어로 표현하려는 의지는 뉴욕 시기(1964∼1974)의 추상 작품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작품 제목에서 구체적인 이미지를 드러내는 요소가 사라지고 ‘봄의 소리’, ‘산울림’, ‘대기의 음향’에서처럼 추상적인 개념을 점, 선, 면 같은 조형 요소로 표현하였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같은 철학적 명제의 작품은 김환기의 낭만성과 추상성, 그리고 동양성이 결합되어 있다. 점을 찍어 표현한 작품은 점의 번짐에서 수묵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점을 하나하나 찍는 자세 또한 구도자적인 자세로 온갖 상념을 담아내기 위한 태도였다. 뉴욕에서 1970년대에 제작한 추상 작품은 동양적 사고와 우주관을 담아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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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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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가 일생 동안 관심을 갖고 추구한 것은 한국적 내지는 동양적 서정성을 화폭에 옮기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파리에 갔을 때조차도 “서구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문을 잠그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였을 정도로 우리 것, 한국적인 정서를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요컨대 서구적인 모더니즘의 언어를 수용하여 전통시대 선비가 가지고 있던 낭만성이나 정신성을 자연을 통해 노래하면서 동양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담아내려고 하였다. 고희동은 서양화를 포기하고 동양화를 그림으로써 동양의 선비로서의 정체성을 찾았고, 구본웅은 유화로 괴석을 그림으로써 문인적인 정체성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김환기는 유화를 주된 표현 매체로 사용하고 서양의 모더니즘적인 추상을 추구하면서도 우리나라의 자연을 담아내는 색채, 그리고 수묵화 같은 표현 효과를 통해 한국적 정서를 찾아낸 모더니스트였다.

서구의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도 한국인 혹은 동양인으로서의 정서를 표현하려는 의지는 박서보(朴栖甫, 1931∼ )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박서보는 김환기에게서 교육을 받은 세대로, 우리나라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첫 세대이기도 하다. 김환기가 조선 미술 전람회를 외면하였듯이 박서보 역시 국전의 아카데미즘을 거부하였으며, 기성세대의 미술에 저항하는 전위적 모더니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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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의 원형질
박서보의 원형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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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가 전위적 모더니스트로 부각된 것은 1950년대 후반에 반국전(反國展) 선언을 했던 현대 미술가 협회(現代美術家協會)에서 앵포르멜 미술(Art Informel)을 주도하면서부터이다. 그 후 1960∼1970년대에 현대 미술의 흐름을 주도해 나감으로써 식민지시대 미술가의 소극적이고 탈정치적인 이미지나 은둔적이고 선비적인 이미지를 벗어 버렸다. 그는 타고난 언변(言辯)으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면서 기성세대의 미술과 질서를 거부하고 전복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114)자신의 미술 세계를 언급한 대표적인 글로는 김영주·박서보, 「추상 운동 10년 그 유산과 전망」, 『공간』 14, 공간사, 1967.12 ; 박서보, 「현대 미술과 나(1-2)」, 『미술 세계』, 미술 세계사, 1989.10∼11 등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미술계를 떠난 사회 현실이나 정치에 관심을 두었던 것은 아니다. 철저히 미술의 범주 안에서 전위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이후에 등장하는 민중 미술가가 갖고 있던 현실 저항 의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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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의 묘법
박서보의 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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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에 일본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세대가 프랑스 파리에 대한 환상을 갖고 1950년대에 앞을 다투어 도불(渡佛)하였듯이, 박서보 역시 파리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었고 1960년대 초에 파리에 체류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서구의 앵포르멜 미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선구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한국성’ 내지는 ‘동양성’이라는 화두(話頭)를 들고 나와 서구가 아니라 동양으로 시선을 돌렸다. 즉 ‘묘법(描法)’시리즈를 통해 노장 사상(老莊思想)을 수용하며 전통을 현대화하려고 하였다. 박서보 스스로 “정신 전통의 재발견과 현대적 방법론이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되어 독자적인 한국의 현대 미술”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다.115)박서보, 「현대 미술과 나(2)」, 『미술 세계』, 중앙일보사, 1989.11, 106쪽. 김환기가 항아리, 학, 매화, 달, 사슴 등과 같이 소재적으로 선비와 관련된 모티프를 현대적인 언어로 조형화하면서 동양의 정서를 반영한 모더니스트로 성장해 나갔다면, 박서보는 ‘묘법’ 시리즈에서처럼 모노톤(monotone)과 무목적적(無目的的) 선긋기 같은 추상적인 언어를 노장 사상이나 ‘자연과의 합일’ 같은 철학적이고 정신적인 개념과 통합시켰다. 그리고 “예술성을 작가 자신의 인격, 천분(天分), 교양 등에 관련된 문제”라고 언 급한 적이 있으며, ‘묘법’ 시리즈는 ‘나를 비우기’ 위한 작업으로, “옛 선비가 위대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 난(蘭)을 친 것이 아니라 수신(修身)을 위해 난을 쳤듯이 나 역시 옛 선비의 삶을 살고저 했었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116)박서보, 「현대 미술과 나(2)」, 『미술 세계』, 중앙일보사, 1989.11, 109쪽. 그가 선비적인 문인 화가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볼 수 없다.

그러면서도 박서보는 작품의 매매에서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그림을 선물로 주고받는 전통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고희동과는 전혀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 예술가 자신들이 예술 작품을 돈과 바꾸면 순수성을 잃는 것인 양 인식해 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화가도 ‘그림이 팔려야 먹고살고 재투자’할 수 있는데 작품을 판매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예술과 실생활의 관계를 떼어 놓아야 예술의 순수성 내지는 고고함을 지켜내는 것인 양 그릇 인식되었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경제적으로 피폐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는 “이조의 쟁이들이 이상이나 파먹고 살던 비생활인이었으니…… 양반 댁 다락 문짝에 환이나 치고 족자나 병풍에 양반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대상을 그려 주고 다니는 사랑방 식객(食客)으로만 여겨 왔으니……”라고 지적하며 현대에도 미술 작품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117)박서보, 「작가 정신의 타락」, 『월간 중앙』, 중앙일보사, 1975.3, 373쪽.

요컨대, 박서보의 경우 전통이나 정신성을 강조하는 태도는 선비적이지만 미술 작품의 유통 방식과 관련해서 좀 더 현실적인 요구를 하였다. 미술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분명히 정신 활동이지만 미술가의 비현실적이고 보헤미안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는 순수 예술성을 지향하는 모더니스트였으면서도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성공한 작가였다. 하지만 모더니스트의 순수 예술성에 대한 의지는 1980년대 민중 미술 작가들로부터 강한 도전을 받게 된다. 정신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스트의 엘리트적인 작가 의식은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을 위한 예술”로, 즉 사회 현실이나 민중의 삶과는 동떨어진 미술로 평가받으면서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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