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2장 미술가의 자의식
  • 6. 이단의 길을 간 미술가
김이순

앞서 살펴본 작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표현 영역이 정해져 있거나 자신의 표현 양식이 ‘트레이드마크’와 같이 형성되어 있다. 비록 지향점이 서로 다르더라도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 언어를 창안하여 반복적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살펴보려는 작가들은 하나의 양식이나 표현 방법, 표현 매체에 안주하지 않으며 표현 장르에도 구애받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우선 이승택(李升澤, 1932∼ )을 들 수 있다. 이승택이 대학 졸업 때부터 현재까지 50여 년 동안 제작한 작품을 살펴보면 동시대 작가들이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던 형식과 표현 매체를 다룬 점에서, 미술계에서 이단적(異端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단적인 의식이 가시화된 것은 1950년대 후반이다. 1958년 대학 졸업(조소과) 작품인 ‘시간과 역사’는 전체적으로 반달 모양인데, 표면에 파랑색과 빨강색 물감이 칠해져 있었고 그 위에 가시철조망이 뒤덮여 있었다. 30년이 지난 후에 평론가 오광수는 이 작품을 ‘매우 유니크한 것’이라고 평하기도 하였지만,125)오광수, 「실험 작업 30년의 의지와 변혁」, 『계간 미술』 43, 중앙일보사, 1987.가을, 99∼106쪽. 당시 학교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1958년 당시 화단은 아직 인물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미술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시작이라고 말하 는 앵포르멜 미술이 막 태동하던 시절이다. 조형적인 면에서도 특이할 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당시에 보기 드물게 남북의 이데올로기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의 주조색인 빨강과 파랑은 태극기의 색채로 우리나라를 상징하며 가시철조망은 휴전선을 암시하는 것으로, 전후 냉전(冷戰) 속에서 극한으로 치달은 남북의 대치 상황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의 횡포 속에 고통당하는 현실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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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택의 시간과 역사
이승택의 시간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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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택은 우리나라에서 터부(taboo)로 여겨 꺼리던 성의 문제를 해학적으로 다루었는가 하면, 1960년대부터 물, 공기, 불, 연기 등 비물질적인 재료를 활용해서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업을 해오고 있다.126)『Lee Seung-taek : Non-Material Works』, ICAS, 2004 도록 참조. 예를 들어 ‘바람’ 연작은 고목이나 줄에 천이나 비닐을 매달아 바람에 날리게 하는 작업인데, 이 연작의 기본 아이디어는 성황당(城隍堂)이나 고목에 매어 놓은 천 조각들, 배에 화려하게 장식해 바다에서 지내던 풍어제(豊漁祭) 깃발 등 의 펄럭임에서 왔다. 여기에는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는데, 작가는 이를 ‘무속과 비조각의 만남’이라고 설명한다.127)김미경, 『한국의 실험 미술』, 시공사, 2003, 163∼170쪽 참조. 샤머니즘에 대한 관심은 박서보, 오윤 같은 작가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승택의 특이함은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바람 자체에 대한 관심, 다시 말해 비물질이고 비가시적인 바람이나 공기의 흐름을 시각화하려는 점이다. 천이나 비닐을 재료로 사용하였다든지 바람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은 당시에는 특이한 것으로, 조각 작품은 나무, 돌, 철 같은 단단한 물질로 제작한다는 일반적인 통념을 깨뜨리는 작업이었다. 또한 이승택이 다룬 바람, 불, 물 같은 재료는 미술관이 아닌 야외에서 전시 가능한 것이다. 이제 미술관에서 벗어난 야외 작업은 흔한 일이 되었지만 당시 우리나라 미술계에서는 아직 생소했다. 이러한 작업은 결국 기존의 예술 개념이나 예술 작품에 대한 도전일 뿐 아니라 미술관의 제도권에 대한 도전, 상품으로서의 미술 작품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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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택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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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미술 개념과 제도에 대한 저항의 태도는 1990년대의 작가들, 특히 이불과 최정화 같은 작가들에서 좀 더 분명히 나타난다. 이들은 모더니즘 미술과 민중 미술이 양대 산맥처럼 우리나라 미술계를 가르고 있던 1980년대 후반기에 대학을 다닌 세대인데, 그들의 미술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승택은 재료나 아이디어의 측면에서는 이단적이고 특이하면서도 전통이라는 끈을 결코 놓지 않았다. 무속을 끌어들이거나 고드랫돌이나 항아리를 오브제로 활용하면서 여전히 전통을 중요한 요소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글로벌한 시대를 살고 있는 최정화나 이불은 우리나라 근현대 작가들이 계속 관심을 기울였던 한국성이나 전통에 대해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들은 모더니즘은 물론 민중 미술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이불은 민중 미술을 거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민중 미술이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방식상의 한계가 너무나 명백히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방식은 현실적이 아니라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그 자체가 아이러니와 패러디의 상태라고 봅니다. 따라서 이들처럼 진지한 모습을 보이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저는 이러한 태도가 일면 낭만적인 데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차가운 비판의 형식을 띠지만 그 속에는 낭만적이고 멜랑꼴리한 부분들이 끈적거리며 남아 있습니다.128)박찬경, 「인터뷰 Lee Bul, 패러디적, 아이러니적, 현실에 대한 패러디와 아이러니」, 『공간』 76, 공간사, 1997.2, 80∼81쪽.

이불(LEE BUL, 1964∼ )은 사회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만 민중 미술의 표현 방식은 시대적인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였다고 평하였다. 그는 내용은 물론 형식과 방법론에서도 전통에 관심이 없으며 자유롭게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기성 의 가치관’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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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의 수난 유감
이불의 수난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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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의 자유로움은 도발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낙태’(1989)에서 자신의 알몸을 공중에 매달고 행한 퍼포먼스(performance)는 그를 기억하기에 충분하다. 자신의 알몸을 드러내는 퍼포먼스는 이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1960년대 후반에 정강자(鄭江子, 1942∼ )가 블루머(bloomer)만 걸친 채로 ‘투명 풍선과 누드’(1968) 같은 해프닝을 벌였을 때 여성이 대중 앞에서 옷을 벗었다는 사실 자체가 흥밋거리였다. 하지만, 이불이 알몸으로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고통을 감수하는 모습은 관객을 충격에 빠뜨렸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몸에 가하는 폭력을 자신의 몸을 통해 ‘전사(戰士)’처럼 고발하려는 것이 의도였는데, 이처럼 알몸으로 퍼포먼스를 할 때조차도 여성의 몸이 대상화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1990년에는 기괴하고 그로테스크(grotesque)하기 조차한 옷을 입고 김포 공항에서 일본 나리타(成田) 공항, 그리고 도쿄 시내를 활보하는 ‘수난 유감-당신은 내가 산보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알아?’라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내용은 차지하고라도 작가의 대담성과 그로테스크한 형상은 작가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이불이 국제적인 미술가로 이름을 알린 계기는 날생선에 시퀸(sequin)을 장식한 ‘화엄’을 뉴욕 현대 미술관 초대전에 출품하면서부터이다. ‘화엄(華嚴 Majestic Splender)’은 날생선을 반짝이는 싸구려 시퀸으로 장식한 작품으로, 미술관 관계자들을 당황하게 만들 만큼 도발적인 작품이었다. 날생선에 시퀸을 꿰매는 행위는 페미니즘(feminism)에서 언급하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가학성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화려하던 생선이 썩어 가면서 생기는 역겨운 냄새로, 뉴욕 최고의 고상한 전시 공간을 들어서기 괴로운 공간으로 전락시켜 버린 것이다. 이는 미술관 문화와 정통 미술사의 권위주의를 전복하려는 것이었다. 날생선, 시퀸, 플라스틱, 비닐 등은 전통의 미술에서 본다면 미술 작품의 재료가 될 수 없으며, 고상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재료를 가지고 다양한 방법과 형식으로 장르를 넘나들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이불은 미술 대학 조각과를 졸업하였지만, 그를 조각가로 부르지 않는다. 그에게는 행위 예술가, 설치 작가, 패션 디자이너, 수예가, 수선공, 분장사 등 다양한 호칭이 따라 붙는다. 그러나 그가 작품을 통해 던지는 질문은 매우 근본적이고 진지하다. 여성 문제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관심이며, 기존의 질서나 이데올로기, 상투성(常套性)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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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의 화엄
이불의 화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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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최정화(崔正化, 1961∼ )의 작품 역시 기성의 미술 개념으로는 읽기 어렵다. 기존 미술 개념에서 본다면 도저히 미술가가 될 수 없는 ‘정체불명(正體不明)의 작가’이다. 그는 미술 대학 회화과를 졸업하였지만 화가로 보기는 어렵다. 그는 이불과 마찬가지로 기성의 개념들을 전복하려는 데 관심이 있는데, 이불보다 더 키치적(kitsch的)이고 반미학적이다. ‘퍼니 게임(Funny Game)’에서 과속 차량을 줄이기 위해 눈속임으로 도로 변에 세워 놓는 경찰 모형 마네킹을 전시장에 ‘작품’으로 갖다 놓았다. 또한 ‘플라스틱 파라다이스’(1997) 같은 작품에서는 재래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색채의 싸구려로 취급되는 물건들을 미술관에 쌓아 놓았다. ‘세기의 선물’(2000)에서는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합성수지로 재현해 놓은 탑이 ‘세기의 선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권위와 감시의 주체이어야 할 경찰이 전시장에 ‘가짜 경찰’, 즉 마네킹이 되어 구경거리가 되었는가 하면, 민족의 상징처럼 엄숙해야 할 문화재가 싸구려 금빛으로 요란하게 만들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매우 키치적이다. 키치적인 물건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을 연상시키지만 최정화의 작품은 워홀의 작품처럼 조형적으로 다듬어지거나 조화롭지도 않다. 고상함이나 순수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제프 쿤스(Jeff Koons, 1955∼ )에 더 가깝다. 최정화는 전략적으로 미술품의 조형성과 순수 예술 자체에 대해 부정하고 미술이나 미술가에 대한 전통 개념을 부정하면서 물질문명(物質文明)의 허구를 드러내기 위해 대중문화(大衆文化)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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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의 플라스틱 파라다이스
최정화의 플라스틱 파라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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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의 작업은 1990년대 우리나라 현대 미술을 잘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우리 미술계는 전통적인 개념에서 일탈하려는 노력의 연속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미술 제도, 미술가, 순수 미술, 디자인 등의 개념이나 원리는 끊임없이 뒤틀리고 전복되는 과정에 있다. 혼란스럽고 유치해 보이는 물건들을 통해 현대 사회의 무질서와 혼돈의 상태를 보여 주고 있는데, 이처럼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것은 현대 문화의 일반적 현상이나 코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최정화는 미술에 관한 신비화나 고상함의 고정관념을 전복한다. 그리고 미술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들을 선택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 대중문화의 우위 현상이 지배적인 담론(談論)이 형성되면서, 더 이상 문화에서 순수와 상업의 구분이 무의미해져 관객은 이전의 감수성과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2006년 일민 미술관에서 열린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은 원래 최정화 의 개인전으로 기획되었으나 그는 여러 작가를 초대하였다. 그가 초대한 작가들은 잡다한 물건을 들고 나와 늘어놓아 그룹전 형식이 되었기 때문에 그를 전시 기획자로 보기도 한다. 최정화는 미술 대학 회화과를 졸업하였지만 그를 화가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스로도 ‘화가’가 아니라 ‘시각 문화 간섭자’라고 자칭한다.129)최정화에 대해서는 임근주, 「생을 깨우치도록 사물을 부리는 요승 : 최정화」, 『크레이지 아트, 메이드 인 코리아』, 갤리온, 2006, 183∼203쪽 참조. 그는 또한 앤디 워홀처럼 디자인에 관심이 있다. 편집 디자인부터 세트 디자인, 인테리어, 건축 등에 이르기까지 잡다한 분야에 간여하며 ‘최정화 스타일’의 디자인을 생산한다. 그런데 그가 실행한 디자인은 조잡하고 유치하며 세련되지도 고상하지도 않다. 디자인의 원리나 원칙을 전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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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화의 세기의 선물
최정화의 세기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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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은 물론 최정화와 같이 1990년대에 활동한 작가들의 특징은 더 이상 한국적인 것이나 민족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88 서울 올림픽 이후 우리나라는 국제화에 대한 관심의 증대와 함께 1990년대에 세계적으로 유행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탈민족주의 담론이 유행한 것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 기존의 미술 개념이나 미술가의 의식에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 그리고 순수 미술과 비순수 미술, 회화와 조각 등과 같은 기존의 정의나 개념은 무의미해졌고, 미술가들은 공들여 미술 작품을 제작하는 데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는다. 이들은 이전 미술가들이 상상하기 어려웠던 재료, 즉 날생선, 싸구려 물건이나 액세서리 등 키치를 넘어 반문화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오브제를 자유롭게 작품에 활용하면서 기존의 고정관념에 도전하고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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