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2장 미술가의 자의식
  • 7. 사회적 요구와 미술가의 자아 찾기
김이순

지금까지 지난 100년간 활동했던 미술가들의 자의식을 살펴보았다. 중국의 화보나 스승의 필법을 체득하여 화가가 되었던 미술가부터 작품의 형식보다는 정신성을 강조하는 미술가, 사회 비판과 현실 참여를 목적으로 하는 미술가, 탈장르적인 활동으로 미술가라는 호칭조차 어울리지 않는 작가에 이르기까지, 미술가의 의식은 물론 미술가라는 존재의 정체성도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종횡무진(縱橫無盡)으로 변화를 거듭해 왔다.

근현대 미술가들의 자아의식 형성은 작가 개인의 문제이면서도 동시에 개인으로 한정되기보다는 미술가에 대한 사회의 요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예를 들어, 안중식이 활동하던 시대는 미술품이 실제 생활에서 소용되거나 길상적 기능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어진이나 초상화처럼 실제 삶에서 소용되는 그림에는 그것을 제작한 미술가 개인의 의식보다는 미술가의 기술적인 측면이 중요하였고, 길상적인 그림은 전통이 중요하였기 때문에 미술가의 자아의식이 투사되기 어려웠다. 또 김은호의 회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양화에서는 20세기 전반까지도 미술가의 창의성보다는 수요자의 요구가 더 중요하였기 때문에 화가의 자의식을 표출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일반인의 수요가 많았던 전통 화단에서는 화가가 창작자로 인정받기보다는 손재주가 있는 장인이라는 관념이 여전히 존재하였다. 물론 안중식이나 김은호 같은 작가가 전통 화원과 달리 사회적인 명사로 대접 받은 것을 보면 근대기 미술가의 사회적 위상에 분명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대 미술가라 하더라도 동양화를 그리던 화가에 비해 서양화를 그리던 화가는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서양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될 때 실제 생활이나 사회적 기능으로부터 독립된 상태였고, 근대 미술에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던 길상적인 기능을 서양화가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서양화를 주문하는 후원자가 드물었기 때문에 서양화가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그 대신 예술의 자율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수요자 중심에서 벗어나 작가가 자신의 미의식을 강조하고 작가의 정신세계가 반영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전통시대 문인 화가들의 의식에 이미 존재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근현대 미술가들과 달리 아마추어적이었다. 좀 더 전문적이며 근대적 의미를 지닌 미술가의 자의식은 서양화가들에게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미술가들의 자의식이 성숙해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은 공적인 미술 전시회였다. 수요자가 주문한 그림이 아니라 미술가가 자신의 의식을 투사시켜 그린 그림을 전시한 것을 보고 구매자가 선택하는 방식은 미술 작품의 주체가 수요자가 아닌 작가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작가 중심적인 미술가의 자의식은 전통 문인화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문인 화가들은 작품 매매 자체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근대시기의 전문직으로서의 미술가상과는 차이가 있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소위 ‘전위적인’ 미술가들은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였고 엘리트 의식이 강하였다.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보다 자신의 의식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에 모더니스트들은 현실 참여를 중요시하는 민중 미술가들에게 도전을 받 게 된다. 미술가들은 현실에 참여하고 민중의 모습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 민중 미술가들의 핵심적 주장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미술가들은 대중 소통이나 민중의 참여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기존의 미술가라는 개념 자체에 균열이 생겼다. 미술가는 기존 개념의 미술 작품을 제작하지 않았고, 힘들여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들은 미술의 순수함, 고상함, 낭만성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썩은 생선의 악취로 소동을 피웠지만 이것은 오히려 작가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기회였다. 작가들은 한 가지 방법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 인식의 폭을 확장시키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작가들이 결코 놓지 못할 것처럼 천착해 온 한국성이나 정신성의 문제는 더 이상 관심거리가 되지 않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고상하거나 지적인 존재로 보이는지에 대해서도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인다. 다만 고정관념이나 가치관에 도전하면서 자아를 확인하려는 욕망만은 근현대 미술가의 의식 속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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