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3장 미술과 관객이 만나는 곳, 전시
  • 1. 근대 미술과 전시 문화의 형성
  • 박물관 진열장에 놓인 역사 유물들
목수현

조선 총독부 박물관은 이후 고적 조사(古蹟調査)를 통해 발굴된 고고학 유물 등을 전시하면서 일제가 조선 역사를 시각적으로 펼쳐 보이는 전시장으로 기능하였다. 또한 건물뿐 아니라 박물관 주위의 경복궁 일곽에는 지방 곳곳에서 옮겨 온 탑, 부도 등을 진열하여 야외 전시장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조선시대 임금의 집무 공간이었던 수정전(修政殿)에는 일본 오타니 탐험대(大谷探險隊)가 중앙아시아에서 수집해 온 벽화 등도 전시되어 있었다. 조선 총독부 박물관은 1920∼1930년대에 경성을 방문하는 이들이 들르는 주요 관광 코스의 하나로 설정되었다. 지방에서 수학여행을 오는 학생들이나 일본에서 조선으로 오는 관광단은 으레 조선 총독부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이 박물관의 관람객은 일본에서 온 여행객이나 단체 학생이 주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경성 전차 지도는 경복궁과 조선 총독부 앞을 돌아가도록 표시되어 있으며, 조선 총독부 박물관을 관광 코스의 하나로 소개하고 있다.135)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경성과 인천, 수원, 개성의 관광을 안내한 소책자에는 경성 시내 유람 일정을 예시한 것이 있는데, 경성을 1일 관광할 때 경성역 → 남대문, 상공 장려관(商工奬勵館) → 조선 신궁(朝鮮神宮) → 남산 공원 → 경성 신사(京城神社) → 은사 과학관(恩賜科學館) → 영락정(永樂町) → 장충단 공원(奬忠壇公園), 박문사(博文寺) → 동대문 → 종로 4정목 → 경학원(經學院) → 창경원(동·식물원) → 조선 총독부 → 경복궁, 박물관 → 덕수궁 → 미쓰코시 백화점 → 본정(本町) 순으로 하도록 소개하고 있다( 『京城』, 朝鮮總督府 鐵道局, 1938,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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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박물관의 야외 전시
조선 총독부 박물관의 야외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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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전의 유물 전시
수정전의 유물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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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 있던 조선 총독부 박물관 외에 경주·부여·공주에도 분관(分館)이 세워졌다. 경주 분관은 1926년에, 부여 분관은 1939년에, 공주 분관은 1940년에 세웠다. 한편 평양과 개 성에도 부립(府立) 박물관을 설립하였다. 각 지방 박물관은 해당 지역의 문화재를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므로, 경주 분관은 신라의 문화를, 부여와 공주 분관은 백제 문화를, 평양 부립 박물관은 낙랑(樂浪)과 고구려 문화를, 개성 부립 박물관은 고려 문화를 주로 보여 주는 성격이 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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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분관
경주 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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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분관
부여 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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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박물관의 설립은 창경궁(昌慶宮)에 세운 제실 박물관(帝室博物館)이 먼저였다. 이 박물관은 순종 황제가 1907년(융희 1) 경운궁(慶運宮, 뒤에 덕수궁(德壽宮)으로 개칭)에서 창경궁으로 이어(移御)한 뒤, 창경궁의 전각을 헐어 내고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만든 시설이다. 이들 시설을 1909년(융희 3) 11월부터 일반에 공개하면서 창경궁은 왕궁에서 공공 전시장으로 탈바꿈하였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박물관의 명칭은 이왕가 박물관(李王家博物館)이 되었다.

서구나 일본의 경우 왕실의 컬렉션이 박물관으로 변모하는 것은 공공 박물관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이다. 영국의 대영 박물관(The British Museum)이나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Musée de Louvre)이 그러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왕가 박물관은 궁궐의 전각을 활용하여 마련하였으나 소장품 수집은 왕실 전래품(傳來品)이 아니라 외부에서 구입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소장품의 성격은 다소 다르다고 하겠다. 이왕가 박 물관은 주로 도자(陶瓷), 불상, 회화의 명품을 중심으로 수집한 미술 박물관의 성격이 짙었다. 1932년 무렵 동물원, 식물원을 포함하여 관람할 수 있는 창경원의 입장료(入場料)는 대인 10전, 소인 5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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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가 박물관
이왕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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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가 박물관 본관 전경
이왕가 박물관 본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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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적인 동원에 의해 관람이 이루어진 조선 총독부 박물관과 달리 이왕가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왕가 박물관은 뛰어난 소장품이 많아서 특별전 등에 출품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를테면 1938년에 경성 부민관(府民館)에서 열린 조선 명보 전람회(朝鮮名寶展覽會)에는 이왕가 박물관이 소장한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등이 출품 전시되기도 하였다. 이왕가 박물관에서는 개관 직후인 1912년에 소장품 가운데 667점의 사진을 수록한 『이왕가 박물관 소장품 사진첩(李王家博物館所藏品寫眞帖)』을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박물관 소장품 도록이다.136)이왕가 박물관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목수현, 「일제하 이왕가 박물관의 식민지적 성격」, 『한국 근대 미술과 시각 문화』, 조형 교육, 2002, 239∼264쪽 참조.

조선 총독부 박물관과 이왕가 박물관의 소장품은 광복 이후 국립 박물관으로 이관되어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 소장품의 주요 근간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이 두 박물관은 우리나라 박물관의 뿌리가 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정한 공간에 역사적·문화적 문화재를 모아서 보여 주는 박 물관 형식은 분명 근대적인 것이다. 박물관의 전시품은 유적에서 발굴한 유물을 역사와 공간을 넘어 우리 앞에 내어 놓거나, 수장가의 벽장에 모셔 두었던 서화를 유리 진열장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문화재’라는 개념으로 재편성된 것들이다. 이러한 분류와 전시의 경험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제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물관의 전시가 어떤 주체에 의해서 어떤 의도를 지니고 누구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인가에 따라서 성격은 매우 달라질 수 있다. 근대기에 식민지 경험을 하거나 외국의 침탈을 겪은 나라에서는 근대의 경험이 주체적인 힘이 아닌 외부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신들의 역사나 현재를 주체적인 시각으로 펼쳐 보일 수 없었다. 이는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를 비롯해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공통된 현상이었으며,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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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가 박물관 소장품 사진첩』
『이왕가 박물관 소장품 사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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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박물관은 전시 물품을 소재(素材)에 따른 분류와 더불어 역사적인 체제를 따라 진열하였다. 로비와 여섯 개의 진열실, 그리고 수정전에 유물을 전시하였는데, 그 내용은 표 ‘조선 총독부 박물관의 전시실 구성’과 같다.

조선 총독부 박물관의 이러한 전시 구성은 일제가 전파시킨 『조선사(朝鮮史)』의 체제에 준하여 만든 『조선 미술사(朝鮮美術史)』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 논리는 조선이 역사적으로 중국과 만주의 문화를 받아들여 고대에는 발전을 이루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답보(踏步)하여 패망하였다는 식민 사관(植民史觀)을 근간으로 수립한 것이었다. 따라서 문화적으로 발전하였다고 평가하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유 물을 전시하는 비중은 컸으나, 시기적으로 가깝고 상대적으로 유물의 양도 많은 조선시대의 유물은 오히려 비중도 작고 평가도 낮게 하였다.137)조선 총독부 박물관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목수현, 「일제하 박물관의 형성과 그 의미」, 서울 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0 및 최석영, 『근대의 박람회와 박물관』, 서경 문화사, 2001 참조. 그러므로 조선 총독부 박물관의 전시는 조선이 과거에는 불교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유교 문화가 지배하면서 점차 쇠퇴하였다는 논리를 유물을 통하여 보여 주려 한 것이었다.

<표> 조선 총독부 박물관의 전시실 구성
실별 전시 내용 실별 전시 내용
제1실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제2실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 고분 출토품 및 유물, 금은주옥(金銀珠玉)의 장신구, 고분 출토 금관(金冠), 목관(木棺), 옹관(甕棺), 무기류, 도기, 벽화 모사도(壁畵模寫圖) 등
제3실 고려시대의 도자기, 불상, 불구(佛具), 장신구, 조선시대의 도기, 칠기, 목조품 등 제4실 낙랑·대방 시대의 봉니(封泥), 한경(漢鏡), 누금 세공(鏤金細工)한 무기
류, 동기(銅器), 도기, 칠기 등
제5실 석기, 골각기, 동기, 토기, 동검, 창, 거울, 조선시대 활자 제6실 회화 및 전적류, 벽화 모사도
수정전 오타니 컬렉션 중앙아시아 벽화 및 불상, 미라 등 로비 통일신라시대 석불, 석굴암 부조상 재현 전시

그러나 관람객에 따라 그 보고자 하는 인상은 매우 달랐을 것이다. ‘한결’이라는 필명(筆名)의 교사는 1923년 봄에 학생 140명을 인솔하고 경복궁과 조선 총독부 박물관을 견학한 방문기를 통해 찬란한 영화(榮華)를 지녔던 조선시대의 역사가 낡은 건물로 남은 것을 한탄하는 한편, 박물관에 진열된 전시품 가운데 특히 활자를 주목하며 고려시대에 주조된 활자가 서양의 활자보다 앞섰음을 일깨워 유구한 역사적·문화적 자부심을 되새기기도 하였다.138)한결, 「경복궁 박물관을 보고서」, 『동명(東明)』 39호 및 40호, 1923년 5월 27일자 및 6월 3일자. 반면 일본인을 위한 안내서에는 주로 신라 금관이나 불상, 고려시대의 도자기 등 그들의 관심을 끌 만한 유물을 소개하고 있다.139)『新版大京城案內』, 京城都市文化硏究所, 1936,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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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박물관의 로비
조선 총독부 박물관의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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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박물관 제3전시실
조선 총독부 박물관 제3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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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박물관 제4전시실
조선 총독부 박물관 제4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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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박물관에 진열된 유물은 전통 사회에서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 ‘박물관’이라는 맥락에 놓임에 따라 감상 대상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것은 무덤 안에 껴묻은 부장품(副葬品)이거나, 사찰에 모셔 놓은 예배 대상물 또는 실생활에 쓰던 기물이었으나 시간과 공간의 이동이라는 외피(外皮)를 거쳐 관람의 대상으로 변모하였다. 이것은 ‘전시’라는 방식이 가져다준 사물에 대한 인식 방법의 변화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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