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3장 미술과 관객이 만나는 곳, 전시
  • 1. 근대 미술과 전시 문화의 형성
  • 관전의 시작, 조선 미술 전람회
목수현

조선 미술 전람회는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일제 강점기 동안 해마다 한 차례씩 모두 23회에 걸쳐 열린 가장 큰 규모의 미술 공모전이었다. 조선 미술 전람회는 애당초 1921년 8월 조선 교육령 개정을 준비하던 조선 총독부가 서화 미술 교육 기관을 설립하겠다는 계획으로 발표하였다가, 예산 문제로 미술 학교 계획안을 일본 정부에서 부결하자 대신 미술 전람회로 대치한 것이었다. 1922년 설립 이후 조선 미술 전람회는 공적인 전문 미술 교육 기관이 없던 당시에 미술의 일반적인 경향을 주도하는 전람회로 자리를 잡아 나갔다. 일제는 일본의 문부성 미술 전람회(文部省美術展覽會) 체제를 본떠 ‘조선 미술을 진흥시킨다’는 명목으로 조선 미술 전람회를 설치하였으 나, 사실은 1921년에 조선인 미술가가 주축을 이룬 서화 협회 미술 전람회(書畵協會美術展覽會)가 열리고, 3·1 운동 이후 무단 통치(武斷統治) 방식으로 지배하기가 어려움을 깨닫자 통치 방식을 바꾼 이른바 문화 정치(文化政治)의 일환으로 개설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143)이중희, 「조선 미전 설립과 그 결과」, 『한국 근대 미술 사학』 15, 한국 근대 미술 사학회, 2005 하반기, 38∼42쪽 참조.

조선 미술 전람회는 1922년 처음 개설될 당시 동양화, 서양화 및 조각, 서(書)의 3부로 나누어 모집하였으나 1932년에 서 및 사군자 부를 폐지하고 공예부(工藝部)로 대치하였는데, 이는 미술 장르에 대한 인식이 이동하는 전환을 보여 준다. 전통 사회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던 서가 제외되고 사군자도 동양화부에 포함되어 은연중에 비중이 낮아지면서 서가 미술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 미술의 개념들이 서구적인 미술 장르로 전환되어 가는 것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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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 전람회 입상 기사
조선 미술 전람회 입상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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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복의 엉겅퀴
이한복의 엉겅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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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 전람회는 조선 총독부 문화 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문화 행사가 많지 않던 당시에 많은 화젯거리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매일신보(每日申報)』를 비롯해서 『동아일보(東亞日報)』, 『조선일보(朝 鮮日報)』 등의 신문은 개막을 전후하여 매년 대서특필(大書特筆)하여 보도하였다. 전시 반입 광경에서부터 전시 작품을 날마다 게재하는가 하면, 입상작(入賞作) 및 수상작(受賞作)이 발표되면 명단은 신문 전면에 걸쳐 보도하였고, 특선(特選)을 수상한 작가들의 인터뷰도 자세히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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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관호의 호수
김관호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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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에 이한복(李漢福, 1897∼1940)이 그림 ‘엉겅퀴’와 글씨 ‘전문(篆文)’이 각각 동양화부와 서부의 2등에 입상하자 『동아일보』와 『매일신보』 등에서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144)『동아일보』 1924년 5월 31일자 및 『매일신보』 1924년 5월 31일자. 동경 미술 학교(東京美術學校) 일본화과를 졸업하고 휘문 고등 보통학교와 보성 고등 보통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27세의 청년 이한복이 화단에 등단하는 계기는 바로 조선 미술 전람회였다. 이해에는 나혜석(羅蕙錫, 1896∼1948)도 ‘초하(初夏)의 오전(午前)’, ‘추(秋)의 정(庭)’ 등을 출품하여 서양화부에서 4등을 하였고, 중앙 고등 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용준(金瑢俊, 1904∼1967)도 ‘동십자각(東十字閣)’을 출품해 입상하여 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당시 작가들은 전문적인 미술 교육 기관이 없는 조선에서 조선 미술 전람회를 이처럼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등용문(登龍門)으로 여겼다. 입상작 가운데 주목을 받는 작품은 신문에 게재되기도 하였는데, 다만 여성의 벗은 몸을 그린 작품은 예외였다. 1916년 일본의 문부성 미술 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하여 조선 미술계의 기린아(麒麟兒)로 떠오른 김관호는 1923년 조선 미술 전람회에 ‘호수’를 출품하였는데, 일본인 도오다 가즈오(遠田運雄)의 ‘나부(裸婦)’와 더불어 전시는 가능하나 촬영은 금지하는 처분을 받았다.145)『동아일보』 1923년 5월 11일자. 왜냐하면 당시 풍속이나 관념으로 볼 때 벗은 몸 을 드러내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런 세태를 반영하여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나체화를 작품으로 감상하지 못하고 낯뜨거워하는 모습을 풍자한 만화가 잡지에 실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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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체화 관람 태도를 풍자하는 만화
나체화 관람 태도를 풍자하는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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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행사가 드물던 당시에 조선 미술 전람회는 특별한 볼거리였으며, 학생 등의 단체 관람이 많았다. 제1회전인 1922년에 개장 이틀째인 6월 3일의 관람객은 단체와 개인을 합하여 3,000명이 넘었다.146)『동아일보』 1922년 6월 4일자. 입장객 가운데 원산 중학교 생도들은 개장 전인 오전 8시 반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고, 오후에는 진명 여학교 생도와 개성 호수돈 여학교 학생 등이 단체로 관람을 하였다. 첫해인 1922년이나 둘째 해인 1923년 모두 20일 간의 공개 기간 동안 약 3만여 명이 관람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광복 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大韓民國美術展覽會, 이하 국전(國展))로 이어지는 미술 전람회의 단체 관람 행렬은 이미 이렇게 시작되었으며, 이것은 미적 감각이 국가 전람회가 주도하는 아카데미즘 양식으로 길들여지는 것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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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 전람회 단체 관람
조선 미술 전람회 단체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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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 전람회는 입장료를 받았는데 1922년의 경우 어른 20전, 어린이 10전이었고 학생이거나 단체는 5전씩이었다.147)1930년대에 전차 삯이 5전, 커피가 비싼 경우 15전, 보통 10전은 하였던 것에 견주면, 전시 관람료는 학생들에게도 그리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을 듯하다. 그런데 상설전이 아니었던 탓인지 전시 공간에 대한 배려는 충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초반에는 영락정(永樂町, 현재의 중구 저동) 조선 총독부 상품 진열관에 서 개최되다가, 장곡천정(長谷川町, 현재의 소공동)에 있던 조선 총독부 도서관을 거쳐 1930년부터 경복궁의 구 조선 물산 공진회 건물을 이용하여 열었다. 정기적인 대규모 전람회가 꾸려진 지 10년이 지나도록 전용 전시장 하나 변변히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독립적인 조선 미술 전람회 전시장인 조선 총독부 미술관이 경복궁 후원에 마련된 것은 1937년에 이르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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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조선 미술 전람회가 열린 상품 진열관
제1회 조선 미술 전람회가 열린 상품 진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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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미술 전람회는 조선인만을 위한 공모전은 아니었다. 작품을 출품할 수 있는 자격이 조선에 6개월 이상 거주한 자였으므로, 거주한 지 6개월이 넘은 일본인도 출품할 수 있었다. 실제로 출품자의 면면을 보면 70% 가까이가 일본인이었으며, 특히 서양화와 조각에는 일본인의 비중이 높았다. 이 때문에 진보적인 잡지인 『개벽(開闢)』 1924년 7월호에서는 해마다 각 부의 출품 인원 가운데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을 비교하여 조선 미술 전람회가 일본인들의 잔치일 뿐이고 조선인들은 들러리를 서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기도 하였다.148)『개벽(開闢)』 1924년 7월호, 70∼73쪽. 필자인 우급생(友及生)은 이 글에서 조선인들의 미술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미술 학교의 설립이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첫해에는 291명이 430점을 출품하여 171명의 작품 215점이 입선(入選)하였으며, 출품작은 해마다 늘어 1930년대에는 1,000점을 넘어섰다. 심사 방식은 출품작 가운데에서 심사 위원의 심사를 거쳐 입상작을 결정하고, 그 가운데에서 특선 및 수상작을 뽑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창덕궁(昌德宮)이나 조선 총독부에서는 이렇게 뽑힌 작품 가운데 일부를 높은 가격에 구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작가들에게 조선 미술 전람회에 입선하고 또 특선 등의 상을 받는 것은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작품을 판매하는 다시없는 기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들은 입상작 의 경향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며, 전해에 수상한 작품과 작풍(作風)이 유사한 작품이 다음해에 유행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수상작을 결정하는 것은 심사 위원들에 의해서였는데, 조선 미술 전람회의 심사 위원은 일본 제전(帝展) 심사원이나 동경 미술 학교 교수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1930년과 1931년에는 서 및 사군자 부에 원로 서예가 김돈희(金敦熙, 1872∼1937)가 심사 위원으로 참여하였으나 1932년에 서부가 없어지면서 그나마 조선인이 참여하는 길도 막혀 버렸다. 1937년에 이르러서야 ‘참여원(參與員)’ 명목으로 김은호(金殷鎬, 1892∼1979)가 심사원단에 참여하였으나 이는 실질적인 결정 권한은 없는, 말뿐인 참여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미술 전람회의 입상은 일본인 심사 위원들의 성향에 따라 결정되었고, 입상작에 나타난 경향은 조선 화단의 향배(向背)를 좌우하였다. 특히 동양화부에서는 전통적인 수묵 산수화보다는 일본화가 비중 있게 다루어졌으므로 조선 화단의 일본화적 경향을 심화시키는 데에 조선 미술 전람회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서양화부에서도 일본 외광파(外光派)의 경향을 띤 작품이나 조선 향토색(鄕土色)을 보이는 작품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말하자면 조선 미술 전람회를 통해 조선 화단은 일본 화단의 경향을 노골적으로 습득하고 반영하는, 미술의 일본적 감성을 펼치는 장으로서 기능하였다는 지적을 면할 수 없다.

또한 회를 거듭하면서 조선인 가운데에서도 동양화에서는 이상범(李象範, 1897∼1972)이나 김은호, 서양화에서는 이인성(李仁星, 1912∼1950)처럼 특선을 도맡아 하는 이른바 ‘특선 작가’가 배출되었다. 이는 작가 개인 차원에서 보면 영광이겠으나 조선 미술 전람회나 조선 화단이 고착화되는 경향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조선 미술 전람회 개최 초기에 대거 응모하던 조선인 화가들도 제도의 불합리성이나 일본인 심사원들의 일본화 취향 등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1930년대에 들어서는 참가하지 않는 사람도 점차 늘어났다. 따라서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전위적(前衛的) 작 품 경향을 띤 작가나 현실주의적 작품을 하는 작가에게 조선 미술 전람회는 더 이상 조선 화단을 진작(振作)시키는 전람회로서의 대표성을 띠지 못하였으며, 조선 총독부가 주도한다는 점에서도 조선 미술 전람회를 거부하는 작가도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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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
이인성의 가을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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