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3장 미술과 관객이 만나는 곳, 전시
  • 2. 광복 이후 현대 화단과 미술의 변화
  • 미술계의 재편과 국전의 창설
목수현

광복과 더불어 미술계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안았다. 그것은 일제 잔재 청산과 새로운 미술계의 건설이었다. 이러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술인들은 여러 단체를 결성하여 조직 활동을 하는 한편,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미술 건설 본부가 1945년에 개최한 해방 기념 미술 전람회(解放紀念美術展覽會)나 조선 문화 단체 총연맹이 1946년 8월 20일부터 8월 27일까지 연 해방 기념 문화 대전람회 미술전(解放紀念文化大展覽會美術展) 등은 조국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기획한 전시회였다. 이들 전시회에서는 일제 강점기 동안 친일 활동을 한 것으로 인식된 작가를 배제하였으나, 광복의 의미를 실제 작품으로 잘 표현해 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작가들은 식민 잔재를 어떻게 청산해야 할지에 관한 과제를 여전히 지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미군정청(美軍政廳) 문교부에서는 문화 정책의 하나로 1947년 11월 8일부터 11월 30일까지 수묵 채색화, 유화, 조소, 공예를 망라한 조선 종합 미술 전람회(朝鮮綜合美術展覽會)를 개최하였다. 이 대규모 전 람회는 출품할 때 소속 단체를 경유하도록 함으로써 작가들을 조직적으로 소속시키는 미술계 재편 움직임과도 관련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술전의 체제나 방식이 정비되지 않은 이 전람회를 조선 미술 전람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관제(官制) 전람회로 인식하였다. 이 전람회가 1949년에 국전(國展)으로 개편되면서 국가 주최 전람회가 광복 이후에 새롭게 개편되지 못하고 조선 미술 전람회를 답습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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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기념 미술 전람회 기념사진
해방 기념 미술 전람회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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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대 미술은 국전을 통해 주도되고 형성된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162)강성원, 「미술」, 『한국 현대 예술사 대계』 Ⅱ, 한국 예술 종합 학교 예술 연구소, 시공사, 2002, 227쪽. 1949년에 개최된 제1회 국전은 조선 미술 전람회의 체제를 그대로 따라 동양화, 서양화, 조각, 응용 미술을 포함하는 공예, 서예 등 다섯 개 부문으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1955년에 건축 부분이, 1964년에 사진 부분이 추가되었다가 1969년에 국립 현대 미술관이 설립되어 국전을 주관하게 되면서 서양화부는 장르를 구상(具象)과 비구상(非具象)으로 나누어 심사하였다. 1970년에는 다시 건축과 사진 부분을 제외하고 순수 공예라는 장르를 개설하였고, 1971년에 건축과 사진은 별도의 국전으로 독립해 개최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국전의 제도 변화가 계속된 이유는 미술계에 미치는 영향 력으로 말미암아 국전 제도가 미술인들의 이해관계가 뒤엉킨 초미(焦眉)의 관심사(關心事)였기 때문이었다. 국전에서는 입선작 가운데 각 분야마다 특선작을 선정하고, 또 그 가운데 대통령상과 문교부 장관상 등을 두어 시상하였고, 이러한 내용은 각 일간지에 작품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렸다. 해마다 국전이 열리는 가을이면 경복궁 미술관은 학생 단체 관람객들로 줄을 이었다. 1969년 국전의 경우 관람객이 30만 명에 이르렀는데, 일반이 17만 명, 중고생이 13만 명이었다. 당시 국전은 미술에 문외한(門外漢)인 일반인들이 미술 작품을 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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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전 출품작 접수 광경
국전 출품작 접수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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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전 출품작 전시회장
국전 출품작 전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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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전은 심사 위원과 추천 작가 선정, 그에 따른 특선작 선정 등의 운영 방법이 고정화되면서 화단 내의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고희동과 장우성(張遇聖, 1912∼2005)을 중심으로 한 동양화, 이종우와 도상봉(都相鳳, 1902∼1977)을 중심으로 한 서양화 분야 등 심사 위원 경향이 고착화되면서 화단을 아우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국전에서 소외된 원로 작가들은 국전을 보이콧하거나 불참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특히 서양화의 경우 1950년대 중엽부터 새로운 경향으로 대두된 추상(抽象) 작품이나 엥포르멜(Informel) 계 열의 작품은 입선하기도 어렵거니와, 구상 작품 가운데에서도 인물 좌상을 수상작으로 정하는 경향이 반복되면서 국전에서 수상하려면 ‘여인 좌상’을 그려야 한다는 말이 농담처럼 떠돌기도 하였다. 국전은 점차 수상작 경향이 고착되면서 ‘국전 아카데미즘’이라는 용어가 대변하듯이 국가 전람회로서 미술계의 흐름을 적절하게 반영하거나 다양한 미술계의 요구와 변화를 폭넓게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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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전 수상자
국전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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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전을 관람하는 박정희 대통령
국전을 관람하는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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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에 들어 국전에 대한 미술계의 반발은 점차 확대되었고, 1957년 제6회 국전에 이르자 김은호, 변관식(卞寬植, 1899∼1976), 최우석 등은 국전이 ‘공정을 잃은 심사’였다며 신문에 국전의 폐해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163)김은호는 「선배의 도의를 찾자」는 글을 『서울신문』에, 변관식은 「공정을 잃은 심사」를 『연합신문』에, 최우석은 『조선일보』에 각각 기고하였다. 이구열, 『근대 한국화의 흐름』, 미진사, 1984, 184∼185쪽. 이러한 국전의 고착화 경향에 반발한 작가들 가운데에서는 단순히 국전에 불참하는 데에서 나아가 낙선전(落選展)을 개최하여 적극적인 거부를 대외적으로 표명하기도 하였다. 첫 낙선전은 1954년 제3회 국전 전시 기간 중인 11월 11일부터 11월 15일까지 화신 백화점 화랑에서 정진철(鄭鎭澈, 1908∼1967), 김화경(金華慶, 1922∼1979)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56년에는 박서보(朴栖甫, 1931∼ ), 김영환(金永煥, 1928∼ ) 등의 작가들이 동방 문화 회관 화랑에서 고답적(高踏的) 형식의 작품만을 대접하는 국전을 반대하고 현대 미술 운동을 내세우며 4인전(四人展)을 열기도 하 였다. 1960년에는 국전이 열리고 있는 덕수궁의 바깥 돌담을 전시장 삼아 작품을 거리에 내건 전시회 두 건이 반국전 운동을 선언적으로 보여 주었다. 김정현(金正炫, 1915∼1976), 김형대(金炯大, 1936∼ ) 등 주로 서울 대학교 미술 대학생 10여 명은 덕수궁 서쪽 담에 10월 1일부터 10월 15일까지 벽전(壁展)이라는 이름으로 40여 점의 작품을 내걸었고, 윤명로(尹明老, 1936∼ ), 김봉태(金鳳台, 1937∼ ) 등 서울 대학교와 홍익 대학교의 졸업생과 재학생 12명으로 구성된 60년전(六十年展)은 10월 5일부터 10월 15일까지 덕수궁 북쪽 담에 30여 점을 전시하였다. 정식 전시장이 아닌 가두의 벽에 작품을 걸었으며,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국전을 반대하는 뚜렷한 이유를 내세웠기에 언론의 많은 관심을 받아 전시 광경을 보도한 신문도 있었다.164)『서울신문』 1960년 10월 6일자. 이런 가두 전시회를 연 작가들이 대학을 갓 졸업하거나 재학 중인 미술 학도로 6·25 전쟁 이후에 미술을 시작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전후파(戰後派)’로 지칭하며 그들의 신선한 행동에 주목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일반 관객들은 이들의 추상 표현주의 작품에 대해 “도무지 무슨 그림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165)방근택, 「벽전 창립전을 보고」, 『서울신문』 1960년 10월 10일자. 이후 1963년에 서울 대학교 미술 대학생들이 덕수궁 중화문(中和門) 앞에서 국전 기간 동안 낙선전을 가진 것을 비롯해, 1967년 10월에도 젊은 동양화가들이 제16회 국전 동양화부 낙선전을 갖는 등 국전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었다.166)이규일, 『화단 야사-뒤집어본 한국 미술-』, 시공사, 1993, 111∼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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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주의 온실의 여인
이의주의 온실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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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여러 난관에 부딪쳤던 국전은 제도를 보완하여 1960년 제9회 전시부터 추상 미술을 수용하는 등 변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국전의 제도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술 전시에 더 이상 유일하거나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이러한 큰 흐름은 신문사를 중심으로 민간 공모전이 다양하게 개최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1970년 한국일보사에서 한국 미술 대상전(韓國美術大賞展)을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미술인 단체인 한국 미술 협회(韓國美術協會)가 주최하여 무심사로 파격적인 발표 형식을 지닌 앙데팡당전(Independant展), 대형 미술 전람회 형식인 서울 현대 미술제 등이 개최되었다. 또 1970년대 이후 미술계가 활발해져 백양회(白陽會)나 묵림회(墨林會) 등의 단체전이 열리고, 해외 전시인 베니스 비엔날레, 상파울로 비엔날레, 파리 청년 작가전 같은 국제전 참가도 이루어졌다.167)이인범, 「미술」, 『한국 현대 예술사 대계』 Ⅳ, 한국 예술 종합 학교 예술 연구소, 시공사, 2005, 277∼278쪽. 따라서 국전의 권위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고 국전 무용론(無用論)이 제기되면서 국전은 1981년 30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문화 공보부 주관이었다가 문예 진흥원으로 이관된 국전 업무는 민간 기관인 미술 협회가 주최하는 대한민국 미술 대전(大韓民國美術大典)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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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전 전시 광경
벽전 전시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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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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