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3장 미술과 관객이 만나는 곳, 전시
  • 3. 미술관을 벗어난 미술, 일상을 담는 미술
  • 거리로 나온 그림들, 민중 미술
목수현

1980년대에 들어 기존 미술계의 방식에서 벗어나 미술이 일종의 문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폭넓게 확산되었다. 미술이 미술 제도 안에 안주하며, 전시장의 흰 벽에 걸려 조명을 받았을 때에야 가치가 인정되거나 상업적으로 거래되는 일종의 투자 상품으로 여겨지는 데에서 벗어나, 사회와 삶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적인 문제점을 제시하며 발언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작품이나 해프닝 등을 통해 현실 비판적인 발언을 한 작가가 없지 않았지만, 작가 개인 또는 소규모 단체의 일회성 발언에 그쳤다면 1980년대 민중 미술은 사회 전반의 민주화 운동과 함께 움직여 미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내었다.

미술의 소재도 장식적인 것에서 벗어나 현실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미술이 전시장에 찾아오는 관람객뿐 아니라 생활의 현장에서 일상과 함께 숨 쉴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캔버스 위에 머물지 않고 벽화, 걸개그림, 다량 제작 할 수 있는 판화 등으로 넓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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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헌의 꿈과 기도
김정헌의 꿈과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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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壁畵)는 일상에서 손쉽게 미술을 만날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에 1980년대에 새롭게 주목을 받았다. 특히 민중 미술에서의 벽화는 상업 빌딩이나 대형 극장 같은 공공 공간을 장식하는 것보다는 일상의 거리에서 삶의 모습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생활 벽화를 지향하였다. 벽화 작업이 해당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교감을 반영한 예로는 김정헌(金正憲)이 공주 교도소 담에 그린 ‘꿈과 기도’(1985)를 들 수 있다. 공주 교도소 운동장 담에 30m 길이로 그린 이 벽화는 모내기, 가을걷이 등의 고향 모습과 평화로운 일상을 꿈꾸는 처녀의 모습을 배치한 작품이었다. 이러한 작업은 작가들이 생활하는 공간 주변에서도 이루어졌다. 유연복은 자신의 집 담에 ‘상생도(相生圖)’(1986)를 그렸고, 김환영·남규선 등이 신촌역 앞 자취방 벽에 합동으로 ‘통일의 기쁨’(1986)을 그리기도 하였다. 미술 대학생들은 자신이 다니던 학교 건물에 ‘하나’(경기 대학교, 1988), ‘청년’(경희 대학교, 1988) 등을 그려 일상에서의 미술 운동을 실천하였으며, 더 나아가 농촌의 마을 회관이나 산업체 등에 벽화 작업을 하기도 하였다. 공주 대학교 학생들은 충남 홍성의 마을에 ‘농민’(1987)을 그렸으며, 공동 창작 집단 ‘가는 패’는 경 북 봉화에 ‘떠나는 길’(1987)과 한독 금속 노동조합 건물에 ‘노동자’(1988)라는 벽화를 그렸다. 이러한 활동은 관객이 전시장으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영위하는 일상 속으로 미술이 찾아가고자 하는 현장 미술 또는 지역 미술 운동의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미술은 전시라는 개념을 벗어나서 일상에서 함께 호흡하는 미술로서 존재 방식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또한 미술 생산의 측면에서도 미술이 엘리트 작가 개인의 창작물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이 함께 작업해 내는 생산물이라는 생각에서 작가들이 공동으로 창작하기도 하였고, 전문 미술인과 미술을 애호하는 대중이 협동하여 작업하기도 하였다. 1982년 결성한 미술 동인 ‘두렁’은 공동 창작으로 1980년대 초반의 세태를 만화경(萬華鏡)처럼 들여다보듯 하는 ‘만상천화(萬像千畵) 1, 2’(1983, 1984), 걸개그림 ‘조선 민중 수난 해원탱정(朝鮮民衆受難解寃撑幀)’, ‘서울 풍속도’(6폭 병풍) 등을 제작하였으며, 미술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 교실을 열어 미술 문화 운동의 확산을 꾀하였다. 광주 지역의 화가들은 ‘일과 놀이’가 서로 소통하는 미술을 꿈꾸면서 미술의 지역 문화 운동을 추진해 시민 판화 교실 등을 열어 일반 시민들에게 판화 작업을 가르쳐 ‘시민 미술 학교 판화 달력-삶과 함께’ 등을 제작하였다. 이들 작업은 미술 전문인이 아닌 일반인도 미술 작업을 일상 속에서 나눌 수 있으며, 그 결과물 또한 하나뿐인 작품이 아니라 대량 복제 매체로 제작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미술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180)국립 현대 미술관 편, 『민중 미술 15년, 1980∼1994』, 삶과 꿈, 1994, 23∼27쪽.

이처럼 현장 중심의 민중 미술은 노동 운동이나 시위 현장에서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특히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열기 속에서 많은 현장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최병수(崔秉洙)의 ‘한열이를 살려 내라’나 최민화(崔民花)의 ‘그대 뜬 눈으로’는 시위 중에 최류탄 파편을 맞아 목숨을 잃은 연세 대학교 학생 이한열의 모습을 담아 시위 현장에서 앞장세운 작품이었다. ‘가는 패’는 1987년 노동법 개정 전국 노동자 대회의 연단에 크게 구호를 외치는 노동자의 모습을 담은 ‘노동자’를 내걸었다. 이들 그림은 집회 현장에서 가장 강력한 상징으로 인식되었으며, 집회를 보도하는 언론 등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1987년 6월 항쟁의 상징적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이때의 미술은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라 현장에서 모인 사람들의 상징이었으며, 소통의 표상이었다. 1980년대의 민중 미술이 현실 속의 소재를 가지고 현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대중과 함께 소통하는 미술을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이러한 거리의 미술은 전시라는 개념을 버림으로써 폭넓은 관객과 만남을 이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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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 내라
최병수의 한열이를 살려 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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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미술이 처음부터 많은 사람의 호응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미술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서구의 고전적인 미술 개념에 익숙해 있는 일반 대중은 사회적인 발언이 강한 주제와 형태적으로도 매끄럽고 세련된 표현보다는 거칠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듯한 형식 등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미술품이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유리장 너머의 아름다운 세계를 그린 것이라면, 1980년대 전반을 풍미한 사회 분위기와 대학가, 노동계를 중심으로 점차 확산된 민중 미술은 현실주의적 소재가 지니는 공감을 점차 얻어 낼 수 있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의 시위 과정에서 최류탄을 맞고 숨진 이한열을 그려 낸 ‘한열이를 살려 내라’ 같은 작품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시위대를 결속할 뿐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도 공권력의 억압에 대한 저항심을 일깨우는 데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이는 미술과 관객이 감상되고 소비되는 데에서 나아가 삶의 내용을 반영 하고 또 미술이 삶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이전 시대와는 다른 미술과 관객의 관계가 설정된 것이었다.

1994년 과천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열린 민중 미술 15년-1980∼1994전은 1980년대를 풍미하며 기존의 권위에 저항한 민중 미술의 역사를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역사적으로 정리한다는 의의를 띠는 한편, 전시장 미술에서 벗어나 사회와 삶과 맞닥뜨렸던 민중 미술이 공공 전시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는 점에서 ‘민중 미술의 박제화’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던 민중 미술의 역사적 의미가 재조명되는 계기가 되었다. 민중 미술은 1990년대에 들어서는 이전과 같은 힘과 무게를 지니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나라 전반에 사회 민주화가 확산되고 세계적으로도 소련 붕괴에 따라 냉전 체제가 무너진 것과 같은 사회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민중 미술에서 채택한, 삶의 현장에서 미술과 만나는 다양한 방식은 일상생활 속으로 좀 더 깊숙이 퍼져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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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미술 15년-1980∼1994전 포스터
민중 미술 15년-1980∼1994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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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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