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3장 미술과 관객이 만나는 곳, 전시
  • 3. 미술관을 벗어난 미술, 일상을 담는 미술
  • 비엔날레와 대형 기획전의 성행
목수현

민중 미술의 역사화(歷史化)에 종지부를 찍듯이 1990년대 중반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 1995년에 시작된 광주 비엔날레(Gwangju Biennalle)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우리나라는 광주 비엔날레를 비롯해 부산 국제 비엔날레, 통영 트리엔날레(Triennalle) 등 대규모 국제 미술제를 전국 곳곳에서 개 최하는 국가가 되었다. 두 해마다 국제전을 한 번씩 개최한다는 뜻인 비엔날레는 서구 국가에서 먼저 시작된 세계 미술 축제이다. 유서 깊은 베니스 비엔날레는 1895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처음 개최되어 100년이 넘는 연륜을 지니고 있으며, 미국 휘트니 미술관이 개최하는 휘트니 비엔날레, 1951년 브라질에서 창설된 상파울로 비엔날레 등 미술의 국제적인 교류가 이루어진 지는 오래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파리 청년 작가 비엔날레에 참가한 이래로 베니스 비엔날레, 인도 트리엔날레 등에 참여해 왔으나 그것은 참가 미술인들의 관심사에 머물 뿐 일반인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1990년대에 들어 외국의 비엔날레에 참가하는 것에서 나아가 비엔날레를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미술 시장의 확대, 비약적인 경제 성장, 문화 수요의 확산 등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1980년대 민주화 항쟁을 상징하는 도시인 광주에서 대규모 문화 행사를 개최함으로써 인식의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뜻도 들어 있었다.

확대보기
제1회 광주 비엔날레
제1회 광주 비엔날레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제1회 광주 비엔날레
제1회 광주 비엔날레
팝업창 닫기

광주 비엔날레는 우리나라에서 개최한 첫 비엔날레라는 점뿐만이 아니라, 전시 기획 방식, 전시된 작품 경향, 전시와 축제의 결합 등 많은 측면에서 전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첫해인 1995년에는 9월 20일부터 2개월 동안 광주 중외 공원 문화 벨트의 특설 전시관에서 열렸고, 본전시(本展示)인 국제 현대 미술전에는 ‘경계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세계 50개국 90여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었다.181)2007년까지 총 6회를 이어온 광주 비엔날레는 1997년 제2회전에서는 ‘지구의 여백’, 제3회에서는 ‘人+間’, 제4회에서는 ‘멈춤, P_A_U_S_E, _止_’ 등의 주제로 개최되었다. 작가가 임의로 작품을 제작하여 출품하는 일반 공모전과 달리, 일정한 주제를 먼저 정하고 그것을 실행시킬 커미셔너를 선정한 다음 커미셔너가 작가들을 가려 뽑아 주제에 맞는 작품을 제작하여 출품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전시 작품들은 개별 작가의 개성이 담긴 작품이지만 전시는 하나의 주제를 향해 수렴되므로, 관객은 하나의 주제에 다양한 해석과 실천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제1회 광주 비엔날레에서는 본전시 외에도 증인으로서의 예술전, 광주 5월 정신전 등 6개 특별전과 기념전으로 한국 근대 회화 명품전 등 3개 전시가 열려 모두 13개의 전시가 관객을 맞이하였다. 그 밖에도 행사 기간 동안 민속, 무용, 음악, 연극 등의 부대 행사도 벌어졌다.182)광주 비엔날레, 『’95 광주 비엔날레』, 삶과 꿈, 1995. 광주 비엔날레의 공식 홈 페이지는 http://www.gb.or.kr이다. 광주 비엔날레 전시관 신축과 이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182억 원의 예산이 들었다.

확대보기
크쵸의 잊기 위하여
크쵸의 잊기 위하여
팝업창 닫기

광주 비엔날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치른 대규모 국제 미술제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끌었지만, 특설 전시장에 전시된 작품들이 회화, 조각 등 전통적인 장르에서 벗어나 영상과 오브제를 이용한 다양한 설치물이 주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전시의 새로운 향방을 제시하였다. 제1회 광주 비엔날레 본전시에는 설치 미술 작품이 80% 이상을 차지하였는데, 이는 1990년대 이래 세계 미술의 새로운 동향이기도 하였다. 대상을 받은 쿠바 작가 알렉시스 크쵸(Alexis Kcho)의 작품 ‘잊기 위하여’는 낡은 조각배 주위에 수많은 맥주병을 늘어놓은 것이었으며, 우리나라 작가 전수천(全壽千)의 작품도 논의 일부와 누에고치, 텔레비전 모니터 등으로 구성한 것이었다. 미술은 곧 그림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우리나라 작가 서정태(徐政泰)의 작품 등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뿐이었고, 진열대 위에 온갖 약품을 늘어놓은 것이 있는가 하면, 터치스크린으로 작가의 얼굴을 맞추어 가는 퍼즐 게임 같은 것도 있어, 일상의 물건인지 작품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것도 많았다.

사실 이처럼 일상 물품이 미술 작품으로 변모하는 것은 이미 20세기 초에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의 ‘변기(便器)’ 같은 작품에서 선보인 것이었지만, 이는 미술사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작품을 만나는 관객들의 첫 반응은 “이게 미술이야?” 하는 것이었고,183)김옥조, 『비엔날레 리포트』, 다지리, 2001, 19쪽 참조. 이어폰 해설을 통해 작품을 아무리 쳐다봐도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다.184)『영남일보』 1995년 9월 27일자. 현대 미술의 경향이나 광주 비엔날레의 주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일반 관람객에게 광주 비엔날레에 전시된 다양한 설치 작품은 편안하게 감상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관람객 수효만 보아도 광주 비엔날레는 유례없는 성과를 달성하였다. 제1회 때는 2개월의 전시 기간 동안 163만 명이 다녀갔는데, 평일에는 2∼3만 명, 휴일에는 8만 명 정도가 몰려들었다.185)『무등일보』 1995년 10월 1일자 및 『광주일보』 1995년 10월 2일자. 물론 관람객 수효의 많음이 곧 관람의 질적 향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고, 관람객은 유치원생, 초등학생을 포함한 학생과 농촌에서 온 단체 관광객 등이 주를 이루었다. 또 자발적 의지와 관계없이 동원된 학생 단체 관람객 가운데는 전시장에서 질서를 제대로 지키지 않아 작품을 훼손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186)조성관, 「광주 비엔날레-관객 동원에 성공한 제1회 비엔날레-」, 『월간 미술』 1995년 12월호, 중앙일보사, 80∼81쪽. 그것은 우리 전시 문화가 관람객들에게 작품을 감상하는 훈련을 제대로 해오지 않았던 결과이기도 하다.

광주 비엔날레는 전시 입장권 가격이 대폭 상승하였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장을 열었다. 물론 드넓은 광주 중외 공원에서 13개 전시를 보고 각종 문화 공연까지 즐길 수 있는 것이지만, 1인당 1만 원을 호가하는 입장권 금 액은 이후 대규모 전시의 입장권 상승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이는 수많은 볼거리와 놀이 기구를 제공하는 명목으로 고가의 입장권을 판매하는 놀이동산과 같은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광주 비엔날레는 공식 상품 지정 등으로 광고 협찬비를 거두기도 하였는데, 이 또한 88 서울 올림픽이나 93 대전 엑스포에서 보였던 상업적 면모를 미술 행사에 적용시킨 첫 사례이기도 하다.

확대보기
광주 비엔날레 관람객
광주 비엔날레 관람객
팝업창 닫기

광주 비엔날레가 과연 성공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경이적인 관람객 수효를 두고 성공적이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관 주도의 비엔날레가 지니는 경직성과 전시 전문가의 부족이 고질(痼疾)로 지적되어 오기도 하였다. 한편 전시 성격의 측면에서 보면 제1회 전시가 제3세계 작가를 대거 초청함으로써 서구 비엔날레와 차별성을 나타내었으나, 제2회부터는 커미셔너나 전시 작가의 선정이 광주 비엔날레만의 독창성을 보여 주지 못하였다는 지적이 있었다. 또 광주 지역에서는 전통적 문화 고장인 광주의 정체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족스러운 목소 리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게다가 서구의 미술 경향을 따라가는 전시 성격은 서구 현대 미술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과의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 제기도 계속되고 있다.187)「광주 비엔날레, 나는 이렇게 보았다」, 『월간 미술』 1995년 10월호, 중앙일보사, 84∼89쪽 및 「‘미술의 해’와 한국 미술 국제화의 반성」, 『월간 미술』 1995년 12월호, 중앙일보사, 96∼103쪽. 제1회 광주 비엔날레 때에는 광주 비엔날레가 지역 미술인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못하고, 민주화 항쟁의 상징 도시 광주의 정체성을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한 점을 비판하는 ‘안티 광주 비엔날레’가 망월동 묘역 일곽에서 열리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옥조, 앞의 책, 208∼222쪽 참조.

이 같은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광주 비엔날레의 개최는 지방 도시에서도 국제 문화 행사를 주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이미 1981년부터 민간단체인 부산 미술 협회(釜山美術協會)가 주최해 온 부산 청년 비엔날레는 광주 비엔날레의 자극을 받아 지역 미술제에서 탈피하고자 1998년 국제 아트 페스티벌로 규모를 확대하였다.188)부산 비엔날레는 처음 명칭이 부산 비엔날레였으나 국제적인 행사는 아니었으며, 부산 국제 아트 페스티벌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해외 작가를 초청해 규모를 확대하면서 국제전으로 탈바꿈하였고, 2002년부터는 다시 부산 비엔날레로 명칭을 바꾸어 개최하고 있다. 부산 비엔날레의 경과에 관해서는 김옥조, 앞의 책 197∼202쪽 및 http://www.busanbiennale.org 참조. 2002년부터는 기존 부산 청년 비엔날레, 바다 미술제, 야외 조각 심포지엄을 통합하고 국제 학술 세미나, 국제 미술 시장 등의 행사를 치르며 부산 비엔날레로 거듭나 광주 비엔날레에 못지않은 국제 행사로 발돋움하고 있다. 또 1999년부터 2007년까지 5회를 치른 청주 국제 공예 비엔날레, 경기도 광주·이천·여주 등지에서 개최하는 세계 도자기 엑스포와 함께 2001년에 출범한 세계 도자 비엔날레 등 각종 비엔날레가 지방 각 시도에서 열리고 있다.189)청주 국제 공예 비엔날레 홈페이지는 http://www.cheongjubiennale.or.kr/이며, 경기도 세계 도자 비엔날레 홈페이지는 http://www.wocef.com이다.

우리나라에서 개최하는 국제 비엔날레와 더불어 2000년대에 들어서는 각종 대형 기획전도 성행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의 기획전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인상파(印象派), 피카소 등 주로 서구의 명화(名畵) 중심으로 진행되어 세계 미술의 동향을 폭넓게 섭렵하기에 부족하였으며, 이러한 기획전조차도 명성에 걸맞은 충실한 내용이 아니라는 지적도 많았다.

21세기는 그 어느 때보다 시각 문화가 활성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미술을 비롯한 볼거리에 대한 관심이 더욱 늘어나고, 인터넷을 비롯해 미술에 관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도 많아졌으며, 공공 미술관뿐 아니라 화랑에서도 크고 작은 여러 기획전을 마련해 서구뿐 아니라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미술을 비롯해 동시대 미술을 관람할 수 있는 기 회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전시의 홍수 가운데에서 관람객들은 잘 선정된 주제, 짜임새 있는 구성, 삶과 미술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 주는 작품을 감상하기를 원하고 있다. 또한 초등학교부터 박물관과 미술관을 견학하는 기회가 많아졌을 뿐 아니라 다양한 책자와 여러 가지 매체를 통해 다양한 시각으로 미술을 읽어 내는 눈도 높아지고 있다. 이제 관객은 단순히 주어진 전시를 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전시에 참여하거나 새로운 미술을 요청하는 능동적인 존재가 되고 있다. 오늘날은 미술이 관객과 소통하며 함께 호흡해 나가야 하는 시기이며, 전시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장이 되어야 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