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4장 미술과 시장
  • 1. 조선 후기 이후 새로운 미술 시장의 대두
  •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미술품 유통 공간의 형성
권행가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미술품이 상품화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사실 미술품의 수요는 조선 전기 안평 대군(安平大君, 1418∼1453)의 컬렉션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래전부터 있어 온 것이다. 그러나 서화(書畵)나 옛 기물(器物)을 수집하는 것이 하나의 문화가 되고 시장을 통해 상품으로 생산, 소비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즉 17세기부터이다.190)조선 후기 미술 시장에 관해서는 강명관, 「조선 후기 서적의 수입, 유통과 장서가의 출현」,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 공간』, 소명 출판사, 1999, 254∼276쪽 ; 강명관, 「조선 후기 경화 세족과 고동 서화 취미」, 같은 책, 277∼316쪽 ; 강명관, 「조선 후기 예술품 시장의 성립」, 같은 책, 317∼340쪽 ; 박효은, 「17∼19세기 조선 화단과 미술 시장의 다원성」, 『근대 미술 연구』, 국립 현대 미술관, 2006, 121∼150쪽 ; 박효은, 「18세기 조선 문인들의 회화 수집 활동과 화단」, 『미술 사학 연구』 233·234, 한국 미술 사학회, 2002.6, 139∼185쪽 ; 홍선표, 「조선 후기 회화의 애호 조류와 감평 활동」, 『조선시대 회화사론』, 문예 출판사, 1999, 231∼254쪽. 물론 이 시기에 작가, 화랑, 고객의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익명의 대중을 상대로 작품을 판매하여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작가군(作家群)이 형성되고,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자층이 광범위하게 확대되며, 그러한 상행위(商行爲)가 이루어지는 시장 공간이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이전과 다른 미술 시장의 형태가 대두하기 시작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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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 대군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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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그림 감상
김홍도의 그림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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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미술 시장의 형성이 가능하였던 배경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그에 따른 유통 시장의 확대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서 1708년(숙종 34)까지 단계적으로 실시된 대동법(大同法)은 현물 위주의 국가 재정을 화폐 경제로 전환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금속 화폐의 유통과 함께 소공업(所工業)과 농업 생산력이 증가함으로써 전국적으로 상업 유통 시장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한양은 18세기 전반 인구가 3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하면서 중세적인 왕도(王都)에서 상업 도시로 급격히 변모해 갔다.191)고동환, 「17세기 서울 상업의 동요와 재편」, 『서울 상업사』, 태학사, 2000. 상품 경제가 발달하면서 사회적으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경제적 잉여의 발 생으로 인해 왕공사대부(王公士大夫)의 지배 계층 이외에 지주, 중소 상인, 소규모 수공업자, 광공업자 등 중간 지배 계층이 탄생하면서 신분 질서가 전반적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미술 시장과 관련하여 볼 때 이것은 미술품을 소비하는 계층이 확대되면서 미술품 유통 시장 역시 발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종대(高宗代)에 저술된 것으로 알려진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의하면 한양에서 서화를 판매하던 곳은 서적포(書籍鋪), 책사(冊肆), 서화사(書畵肆)로, 시전(市廛)과 독립된 포사(鋪肆)라는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다.192)『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권2 , 서울 특별시사 편찬 위원회, 1956, 67∼68쪽. 이것은 18세기 이래로 시전 상업 외에 점포 상업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서화를 취급하는 상점이 독립적으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전이란 1412년(태종 12)에 왕실, 관아, 사대부를 위해 도성 안에 설치한 상설 유통 시장으로, 국역(國役)을 내는 대신 특권을 누렸던 봉건 상단(封建商團)을 말한다. 조선 초기에는 한양에는 종루(鐘樓)를 중심으로 동서쪽으로 뻗어 있는 길과 남대문 방향으로 나간 길에 T 자 모양으로 시전 행랑(行廊)이 들어서 있었다. 시전이 궁궐, 관아, 사대부를 대상으로 한 기존의 시장이라면 포사는 한양의 인구 증가와 소비 확대로 일반 소비자의 수요가 많아지자 이들을 상대로 하여 곳곳에서 생겨났던 신흥 점포들이다. 조선 후기 한양에는 종로의 시전 이외에 남대문과 서소문 밖 이현(梨峴, 현재 종로 4가 동대문 시장)과 칠패(七牌, 현재 서소문 밖 봉래동 부근)에 형성된 난전(亂廛)이 한양 3대시를 이루고 있었으며, 그 밖에 수많은 점포 상점이 곳곳에 생겨나는 등 상품 유통 시장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들 점포 중 서화사는 종각에서 남대문 방향으로 대광통교(大廣通橋) 서남쪽 개천 변에 주로 위치하여 각종 그림과 글씨를 판매하였으며, 책사는 정릉동 병문(屛門)과 육조(六曹) 앞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 제자백가류(諸子百家類)를 판매하였다.193)『동국여지비고』 권2 , 서울 특별시사 편찬 위원회, 1956,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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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대지도 중 광통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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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언제부터 광통교 주변에 서화 상점들이 들어섰는지 알 수 없으나 1790년경(정조 14) 강이천(姜彛天)의 ‘한경사(漢京詞)’에 “한낮 광통교 기둥에 울긋불긋 걸렸으니, 여러 폭의 비단은 병풍을 칠 만하네. 근래 가장 많은 것은 도화서의 솜씨로다. 많이들 좋아하는 속화(俗畵)는 산 듯이 묘하도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18세기 후반에는 이미 이곳에 서화 상점이 들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194)방현아, 「강이천과 한경사」, 『민족 문학사 연구』 5, 민족 문학사 연구소, 1994.7, 209쪽 ; 홍선표, 「조선 후기 회화의 새 경향」, 『조선시대 회화사론』, 문예 출판사, 1999, 312쪽 ; 강명관, 「조선 후기 예술품 시장의 성립」,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 공간』, 소명 출판사, 1999, 338쪽. 원래 광통교 주변은 궁궐이나 관아, 양반 사대부가를 상대로 중국산 비단이나 면포 등을 파는 시전이 있던 곳이었는데, 18세기 후반에는 도화서(圖畵署) 화원이 그린 풍속화를 판매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한편 1890년(고종 27) 주한 프랑스 공사관 통역으로 부임해(1890∼1892년 체재) 우리나라의 도서를 연구한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1935)이 전국을 다니면서 조선 서적을 모았는데, 장이 서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난전에 내다 파는 서적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나 질 좋은 서적과 그림은 종각에서부터 남대문에 이르는 거리에 즐비하게 늘어선 상점에서 구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의 서 화 상점들은 1890년대까지도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195)모리스 쿠랑, 김수경 옮김, 『조선 문화사 서설』, 범장각(凡章閣), 1946, 4∼5쪽. 모리스 쿠랑은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가 한국에 첫 프랑스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1887∼1890년과 1896∼1906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 체류할 당시 그의 보좌관이었다. 모리스 쿠랑은 드 플랑시 대사의 뜻을 받아 한국 서적을 조사하고 그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한국 서지 목록(Bibliographie Coréenne)』과 『한국 행정 체제(Le système d’administration de la Corée)』 등의 저서를 집필하였고, 그 밖에도 한국 유적과 문학 목록들을 작성하는 등 한국을 학술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최초의 프랑스 인 한국학 학자이다. 그리고 이후 다시 언급하겠지만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현재의 명동과 충무로 지역이 고미술품의 새로운 중심 상권으로 떠오르기 전까지 이 지역은 서화 판매의 중심지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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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도(冊架圖)
책가도(冊架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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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화된 미술품의 유통 공간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증가함으로써 생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미술품에 대한 수요를 대거 유행시킨 첫 주자는 18세기 서울에 살면서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소비문화를 주도하던 경화 세족(京華世族)이었다.196)흔히 벌열(閥閱)이라고도 불리는 경화 세족은 서울에 살면서 정치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문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노론(老論) 일파였던 안동 김씨(安東金氏), 청송 심씨(靑松沈氏), 풍양 조씨(豊壤趙氏), 경주 김씨(慶州金氏), 대구 서씨(大邱徐氏), 풍산 홍씨(豊山洪氏), 반남 박씨(潘南朴氏), 의령 남씨(宜寧南氏), 연안 김씨(延安金氏) 등이 이 시기 대표적인 경화 세족이다(강명관, 「조선 후기 경화 세족과 고동 서화 취미」,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 공간』, 소명 출판사, 1999, 279쪽). 가성각(嘉聲閣)이라는 서화 고동(書畵古董) 소장처를 운영하던 청송 심씨 심상규(沈象奎, 1766∼1838), 완위각(宛委閣)을 가지고 있던 경주 이씨 이하곤(李夏坤, 1677∼1724), 남공철(南公轍, 1760∼1840) 등은 이 시기 서화 고동을 수집한 대표적 수장가들이었다. 이들은 치열한 권력 투쟁의 장본인이었으나 문화적으로는 한양 근교의 경치 좋은 곳에 별장(別莊)이나 거대한 저택을 짓고 그 속에 장서처 (藏書處)나 서화 고동 소장처를 두고 이들을 감상하는 문화를 즐겼다. 이들이 방대하게 수집하였던 서화 고동 소장품을 보면 주로 중국산 수입품이 많았다. 즉 서화는 고비 탁본(古碑拓本), 고서첩(古書帖), 화본류(畵本類) 등을 포함한 중국산 서화가 주를 이루었고, 고동도 오늘날 대표적 골동품인 우리나라 도자기류보다는 중국 고대의 종정류(鐘鼎類), 주대(周代) 청동기 출토품이나 모조품, 그 밖에 와당(瓦當, 주로 한나라 때 기와), 벼루 등 서재(書齋) 관련 문방구류를 수집하였다. 당시 북경에는 유리창(琉璃廠)이나 융복사(隆福寺) 같은 유명한 서화 고동 판매처가 이미 형성되어 있어서 조선 사신들이 북경에 체류하는 동안 필수적으로 들르는 관광 코스이기도 하였는데, 이곳에서 직접 사오기도 하였고 중간 상인을 통해 구입하기도 하였으며 중국 지식인과의 직접 교류를 통해 대량으로 들여오기도 하였다.197)강명관, 「조선 후기 경화 세족과 고동 서화 취미」,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 공간』, 소명 출판사, 1999, 305쪽.

경화 세족의 서화 수집 풍조는 명나라 말기에 유행하던 심미적(審美的)이고 탈속적(脫俗的)인 문인 문화가 조선에 파급된 것이다.198)명말 문인 문화와 조선 후기 회화 애호 풍조에 대해서는 홍선표, 「조선 후기 회화의 애호 풍조와 감평 활동」, 『조선시대 회화사론』, 문예 출판사, 1999, 231∼254쪽 참조. 19세기에 들어 서면 이러한 경화 세족의 서화 소비 풍조는 비양반 출신의 중서층(中庶層)과 시정(市井)으로까지 퍼지면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경화 세족의 문화가 18세기 이후 한양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높은 수준의 물질적 소비문화 속에서 형성된 양반 사대부들의 문화였다면, 19세기에 들어 서화 고동의 새로운 수요자로 등장한 계층은 기술직 중인(中人)과 경아전(京衙前)을 중심으로 한 여항 문인(閭巷文人)들이었다.199)홍선표, 「조선 말기 여항 문인들의 회화 활동과 창작 성향」, 『조선시대 회화사론』, 문예 출판사, 1999, 324∼361쪽. 이들은 양반 못지않은 문식(文識)과 경제력을 갖춘 중간 계급으로, 역관(譯官) 출신의 염상(鹽商)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김한태(金漢泰, 1762∼?), 천죽재(天竹齋)라는 고동 서화 수장처를 별도로 가지고 있던 오경석(吳慶錫, 1831∼1879), 중인 출신의 서화가이자 수준 높은 서화 감식가였던 전기(田琦, 1825∼1854), 역관 출신으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이자 서화가였던 이상적(李尙迪, 1804∼1865)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200)강명관, 「조선 후기 예술품 시장의 성립」, 『조선시대 문학예술의 생성 공간』, 소명 출판사, 1999, 320쪽. 기술직 중인들의 서화 수장열이 높아지자 위조품을 파는 상인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며, 이러한 취미는 감식안(鑑識眼)을 갖추지 못한 상민 부호(常民富豪)에까지 확산되었다. 그뿐 아니라 이 시기에는 수요가 더욱 확대되어 일반 서민들까지도 집치레용 그림을 사다 치장하는 풍조가 유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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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석
오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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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하였듯이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 신윤복(申潤福, 1758∼19세기 초) 이래로 18세기 후반부터 광통교 부근 상점에서 도화서 화원이 그린 풍속화가 판매되고 있었다. 광통교 부근에서 판매된 서화류는 양반가에서 흘러나온 구장품(舊藏品)도 있었지만 화원이 주문에 따라 제작한 것이 아니라 판매용으로 대량 제작한 작품이 많았다. 이것은 궁정(宮廷) 위주의 상층 고급 수요를 담당하던 화원이 민간의 수요가 증가하자 관의 속박을 떠나 시전 상인, 부농(富農), 도시 유흥가, 향촌(鄕村) 등을 상대로 그림 을 그려 판매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이 시기에는 화원뿐 아니라 미술품을 제작하여 서화 상점에 내다 파는 것을 업을 삼는 서화가라든가 유랑 화공(流浪畵工), 무명 화공(無名畵工)이 등장하는 등 미술품 제작자의 층 역시 확대되었다. 조선 후기에 풍속화와 민화(民畵)가 발달한 것은 이와 같은 미술 시장과 수요가 확대되면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조선 후기 미술 시장의 발달은 상품 유통 경제가 가장 발달하였던 한양의 도시 문화 속에서 꽃핀 문화 변동의 한 양상이었다. 조선 후기는 상품 경제의 발달과 신분 질서의 변화와 함께 미술품 소비 계층이 저변화되고 주요 생산자인 화원이 관의 속박에서 벗어나 민간의 수요에 응하면서 주문이나 단순한 여기용이 아니라 판매를 위한 상품으로 제작하고, 이러한 미술품을 거래하는 공간과 중간 상인이 등장하는 등 미술품의 상품화가 진행되는 초기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현대의 고미술품 수집이 대개 자본주의적 논리 즉 투자와 이윤의 논리에 의해 지배된다면, 이 시기는 소장가가 문인이자 서화가로서 그들 자신이 창조자인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 현대 소장가의 성격과 다른 점이다. 판매 공간도 화랑이나 경매 시장처럼 미술품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지전(紙廛), 향전(香廛), 병풍전(屛風廛) 등에서 다른 물품과 함께 판매되었다는 것은 아직 업종에 따라 시장의 명확한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던 상황을 보여 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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