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4장 미술과 시장
  • 1. 조선 후기 이후 새로운 미술 시장의 대두
  • 개항 이후 외국인 수요와 ‘조선’ 미술품의 상품화
권행가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조선 진출이 가속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조선 내에서도 개화 정책에 따라 서구의 근대화된 문물을 수용하기 위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양인 화가가 직접 국내에 들어오는가 하면, 사진 기술, 박람회, 미술관, 박물관 등과 같은 새로운 기술과 체제의 도입으로 시각 문화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미술 시장은 기본적으로 조선 후기적 유통 구조가 지속되고 있었으나, 이전과 다른 몇 가지 양상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첫째 국내에 들어온 서양인이나 일본인 같은 외국인들이 새로운 수요층을 형성하였다는 점, 둘째 이들로 인해 ‘조선’의 미술품이 적극적으로 상품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점, 셋째 반상(班常) 구별의 철폐, 도화서의 해체 이후 화원이나 서화가가 근대적 의미의 미술가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미술 유통 구조에 적극적으로 편입해 들어가기 시작한 시기라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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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근의 주리 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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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이후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들 중 미술품을 적극적으로 사들인 사람은 주로 서양인과 일본인이었다. 이들의 구매 목적은 단순히 관광 기념품용에서부터 경제적 이익을 위해 혹은 민속적·인류학적 연구 자료 수집 등으로 일정하지 않았는데, 주로 조선의 물품을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사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동시에 내국인들은 이들 새로운 수요자를 대상으로 조선의 물품을 적극적으로 상품화시키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1880년대 이후 서양인들이 구입하여 현재 스미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National Museum of Natural History)을 비롯한 서양의 여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의 풍속화첩(風俗畵帖)들이다. 김준근은 원산, 부산 등 개항장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조선 풍속화첩을 제작하여 팔았던 화가로, 새로운 시장 수요에 응해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제작자 유형을 보여 주는 예이다. 현재 1,000여 종이 넘는 조선 풍속도가 외국 박물관에 산재해 있고, 그것들은 직접 그린 것뿐 아니라 판화(版畵)에 채색을 가한 작품도 다량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이러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관광 상품용 풍속도가 대량 생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01)하인리히 F.G 융커, 이영석 옮김, 『기산 : 한국의 옛 그림-풍경과 민속-』, 민속원, 2003 ; 조창수,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기산 풍속도(箕山風俗圖)」, 『고미술』 21, 한국 고미술 협회, 1989 봄, 44∼52쪽 ; 박효은, 「기산 풍속도의 미술사적 해제-한국 기독교 박물관 소장본을 중심으로-」,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조선 풍속도』, 숭실 대학교 한국 기독교 박물관, 2008, 113∼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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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박물관 소장 한국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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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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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양인들 중에는 이러한 풍속화첩뿐 아니라 조선의 수공예품을 단순히 관광 기념용이 아니라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대량 구입해 간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 일례로 현재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우리나라 관련 미술품은 1883년(고종 20)부터 1885년까지 조선의 광산 사업 조사차 파견되었던 미국 해군 장교 버나도(J. B. Bernadou, 한국명 번어도(蕃於道))와 스미소니언 박물관 연구원 주이(Pierre L.Jouy)가 여러 지방을 돌면서 광범위하게 수집해 간 것이다.202)이광린, 「스미소니안 박물관의 한국 유물」, 『개화당 연구』, 일조각, 1973. 이들이 수집한 물품 중에는 회화, 공예품을 비롯한 각종 민속자료(民俗資料)가 포함되어 있어 일종의 민속학적·인류학적 자료 수집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미국인 선교사이자 외교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알렌(Horace N. Allen, 한국명 안연(安連), 1858∼1932), 1887년(고종 24)부터 1903년까지 프랑스 공사로 근무하면서 수집한 조선 물품을 파리 기메 박물관(Musée Guimet)에 기증한 빅토르 콜랭 드 플랑 시(Victor Collin de Plancy, 1853∼1922), 민속학 연구를 위해 국내에 들어와 2,000여 점의 조선 민속자료를 수집해 간 샤를 바라(Louis-Charles Varat, 1842∼1893) 등은 이 시기에 미술 시장에서 새롭게 형성된 고객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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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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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들이 개항기에 일시적 고객의 역할에 그쳤다면, 이 시기 국내에 들어왔던 일본인들은 이후 우리나라 미술 유통 구조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들어와 도굴(盜掘)이나 밀거래(密去來)를 통해 고미술품을 매매하기 시작한 것은 1870년대부터 있었다고 하나 본격화된 것은 대체로 청일 전쟁(淸日戰爭, 1894∼1895) 이후 조선에 들어와 사는 일본인이 증가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은 일상의 실용물이나 부장품, 특히 도자기류를 상품화시키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러일 전쟁(露日戰爭, 1904∼1905) 때부터는 일본인들이 고려청자(高麗靑瓷)를 찾기 위해 개성을 중심으로 고려 고분을 도굴하는 일이 극심해졌다. 특히 1906년 3월(광무 10) 초대 통감에 취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려청자 수집열을 촉발시킨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에 진출한 가장 오래된 골동상인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는 1906년 충무로에 상점을 개설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고려청자 수집을 도왔다고 전해진다.203)이구열, 『한국 문화재 수난사』, 돌배개, 1996(초판, 1973), 219∼230쪽 이들이 불러일으킨 도자기 수집열은 이후 조선 미술의 성격을 규정하는 잣대로도 작용하였다는 점, 나아가 이들에 의해 체제화된 미술품 유통 방식은 일제 강점기에 본격적인 미술 시장으로 정착하였다는 점에서 서양인보다 더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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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전후의 골동품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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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환 서포 및 품지상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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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환 서포 및 품지상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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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술품이 어떤 방식으로 유통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서양인들의 기록과 1890년대 신문 광고를 통해서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가령 버나도가 당시 조선인이 집안 장식을 위해 상점에서 민화를 많이 샀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보아 거리의 상점에서 서양인들이 풍속화첩 같은 것은 손쉽게 구입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04)조창수, 「스미소니안 미 국립 박물관(美國立博物館) 소장 한국 민화(民畵)」, 『미술 자료』 30, 국립 중앙 박물관, 1982.6, 57쪽. 또한 모리스 쿠랑도 광통교 일대에서 서화를 팔고 있던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광통교 주변의 미술품 시장이 189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900년 『황성신문(皇城新聞)』에 광고를 낸 정두환 서포(鄭斗煥書鋪)는 이 시기 서화 상점의 형태를 보여 주는 구체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정두환 서포는 종로에서 1880년대부터 지전을 운영해 오다가 1900년 서포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다시 1910년부터는 정두환 품지상(品紙商)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서화와 지물뿐 아니라 정부 발행 교과서와 도량형기(度量衡器)를 취급하였다.205)『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10년 6월 4일∼26일자, 정두환 품지상 연속 광고 ; 『동아일보』 1925년 12월 15일자 ; 최열, 『한국 근대 미술의 역사』, 열화당, 1997, 82쪽. 이후 1920년대에는 서포가 아니라 지물상(紙物商)으로 알려졌 던 것을 볼 때 조선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지전, 서포, 지물상 등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영업을 계속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기본적으로는 서화만을 전문으로 하는 상점이기보다는 지전에서 서화를 취급하는 조선 후기적 특징이 지속된 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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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서화관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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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1906년 한성 대안동(大安洞)에 서화가인 수암(守巖) 김유탁(金有鐸)이 개설한 수암 서화관(守巖書畵館), 1908년 해주의 한창 서화관(韓昌書畵館), 같은 해 10월 한성에 최영호(崔永鎬)가 개설한 한성 서화관(漢城書畵館), 1909년 경성 북부 장동(壯洞)에 김학진(金鶴鎭)이 개설한 한묵사(翰墨社) 등은 정두환 서포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 준다. 가령 1908년에 동현(銅峴)에서 문을 연 한성 서화관에는 조석진(趙錫晋)이 화사(畵師)로 참여하여 서화를 주문·제작·판매하였으며, 한묵사에서는 일제 강점기 최고의 서화 감식가였던 오세창(吳世昌)과 고종의 어진 화사(御眞畵師)였던 안중식(安中植), 이도영(李道榮), 김가진(金嘉鎭) 등이 모여 서예 작품과 그림을 주문 판매하였다.206)『황성신문(皇城新聞)』 1909년 6월 11일자 ; 최열, 앞의 책, 82쪽. 광통교의 서화 상점에 화원들이 그림을 내다 판 것은 이미 18세기 후반부터였으므로 이 자체를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도화서가 해체되고 왕조 역시 멸망한 이후 조석진, 안중식 같은 어진 화사와 오세창 같은 여항 문인 출신의 개화 지식인이 자신의 이름을 광고하면서 서화를 주문 판매하는 유통 시장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이후 일제 강점기에 교육자·수집가·감식가로 서화계를 이끌어 간 중심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시대적 변화를 보여 주는 예라 할 수 있다. 즉 이 예들은 지물포나 종이 가게와 겸하는 종합상(綜合商)이 아니라 초기 단계이긴 하지만 서화 전문 유통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 속에서 주문 제작하는 작가층이 확대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이들 상점을 통하여 서화를 구입하는 이외에 도자기류 같은 골동 품은 좀 더 비공식적 방법으로 거래되었다. 가령 1894년(고종 31) 한성에 와서 한성 법어 학교(漢城法語學校) 교사를 역임하다가 광복 이후까지 우리나라에 남아 골동품을 수집하였던 에밀 마르텔(Emile Martel, 한국명 마태을(馬太乙))은 플랑시와 알렌이 조선 골동품을 수집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사고 싶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였는데 몇 해가 지나자 그의 집에 골동품을 보자기에 싸들고 은밀하게 팔러 오는 사람들이 생겨 싼 가격에 물건을 구입하곤 하였다고 한다.207)小坂貞雄, 『外人の觀たる朝鮮外交秘話』, 朝鮮外交秘話出版會, 297∼299쪽 ; 이구열, 앞의 책, 205∼211쪽. 이것은 조선에 들어와 있던 일본인들의 골동품 유통 시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또 하나의 음성적 시장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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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마르텔
에밀 마르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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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대규모 수장가들이 주로 중국 수입품을 수집하였다면 개항 이후 외국인들의 미술품 수집은 수집하는 주요 대상이 조선의 미술품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물론 앞서 보았듯이 조선의 서화, 민화에 대한 조선인의 수요는 민간 시장을 중심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특징은 서화나 민화류뿐 아니라 밥그릇, 수저, 가구 같은 일상의 물건까지 수집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는 점, 이러한 것들이 상품으로서뿐 아니라 외국인들의 시선으로 본 민속학적·자연사적 자료의 대상이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렇지만 이 시기 서양인과 일본인의 미술품 수요는 국내 미술 시장의 발달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보다는 전국을 돌면서 민간인들과 직접적인 거래를 통해 수집하거나 도굴, 밀거래 같은 음성적인 상거래(商去來)를 통해 이루어지는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조선인들에게 이런 경험은 일상의 물건을 상품으로 질적 전환을 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으며, 결국 많은 조선인이 고미술품 시장에 뛰어드는 배경이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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