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4장 미술과 시장
  • 2. 일제 강점기의 미술 시장
  • 고미술품 시장
  • 고미술품 유통 구조
권행가

1930년 무렵에 한 상인이 장호원 쪽 객줏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 고양이가 핥고 있는 밥그릇이 자세히 보니 고려자기 대접이어서 주인집에 슬며시 고양이를 사겠다고 하면서 밥그릇까지 끼워서 5원에 사온 후 일본인 골동상에게 150원에 되팔았다는 일화(逸話)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민간인들에게 고미술품이란 고양이 밥그릇으로나 쓰던 일상 용기 이상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208)송원, 「내가 걸어온 고미술계 30년」, 『월간 문화재』 3권 1호∼11호, 월간 문화재사, 1973.1, 12∼13쪽. 이러한 조선의 실용기(實用器)들을 미술품으로 상품화시키기 시작한 것은 앞서 보았듯이 개화기의 외국인 특히 일본인들이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에 의해 고미술품의 새로운 유통 시장이 형성되면서 골동업계에 종사하는 여러 유형의 업자가 출현하였다. 조선 후기의 수장가들이 주로 문인 지향적 관심에서 중국산 서화 고동류를 수집의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조선의 고미술품, 특히 고려자기나 조선의 백자 같은 도자기류나 금속 공예 등의 공예품을 대거 수집하여 유통시켰다. 이 시장을 주도한 것은 물론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 골동상들이었다. 이들이 시장의 한 축을 형성한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조선 후기 문인 지향적 관심의 연결선상에서, 혹은 일본에 대응한 민족적 취지에서, 혹은 경제적 이유에서 고미술품 시장에 참여한 조선인들이 시장의 또 다른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는 이들 조선인과 일본인의 이중 시장 구조 속에서 고미술품 유통 시장의 기본 틀이 마련된 시기라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고미술품의 유통 방식은 주로 도굴, 수집, 직접적인 매매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당시에 고미술품 유통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여러 용어가 생겨났는데, 가령 도굴꾼은 땅을 판다는 의미에서 ‘호리다시(掘出)’, 한국인 동자(童子)를 거느리고 시골집들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물 건을 사오는 일본인 골동상은 ‘가이다시(買出)’라 하였다. 가이다시는 처음에 일본인이었으나 점차 한국인으로 바뀌었다. 가이다시 위로는 중간 상인 역할을 하는 거간(居間)이 있고 그 위로 골동 상인인 좌상(坐商)이 있는데, 거간이나 좌상 중에는 상당한 감식안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조선 내의 일본인은 골동 상인을 통해 물건을 구입하는 데 비해 조선인은 주로 중간 상인인 거간이나 가이다시를 통해 물건을 구입하여 일본인들이 무시하기도 했다고 한다.209)박병래, 『도자 여담(陶瓷餘談)』, 중앙일보사, 1974, 42∼46쪽.

1910년경 일본인들의 고미술품 수집은 비단 도자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문화재에 걸쳐 이루어졌다. 1910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는 이러한 일본인들의 문화재 약탈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논설이 실렸다.

대개 나라의 보배라 하는 것은 나라의 영광을 보전하는 기구가 되며 나라의 정신을 발전케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라…… 이 한국은 세계에서 오래된 나라이라 금궤(金櫃)와 석실(石室)에 감추어 둔 보배가 적지 아니할 뿐 더러 들에 묻혀 있는 것도 있어서 국민이 두 손으로 공경하여 받들어도 가(可)한데…… 긴 채찍을 들고 반도 강산에 횡행하는 저 일인(日人)이 백 가지 이익을 다 취하다가 필경에는 나라의 보배까지 손을 대어서…… 한국의 나라 보배가 필경 얼마 안 가서 모두 동경 박람회나 오사카(大阪) 고물상점의 물건이 되고 말지니 이것이 어찌 애석치 않은가? …… 원컨대 동포는 지금이라도 나라 보배를 보존하여 지키는 데 유의하여 나라의 광영을 보존하며 나라의 정신을 발전케 할지어다.210)「나라의 보배 없어지는 한」,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2일자.

이 논설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일본인의 조선 고미술품 도굴과 판매, 일본으로의 반출이 심각해지자 조선 측에서는 고미술품을 국가의 정신과 영광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따라서 반드시 보존해야 할 나라의 보배로 인식 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0년대는 이른바 ‘고려청자광(高麗靑瓷狂) 시대’라 하여 일본인들이 개성에서 경상북도 낙동강 유역까지 도굴을 하여 갔으며, 1920년대는 경주 고분, 경남 양산 고분, 충남 공주 송산리 고분 등 전국적 규모로 도굴이 확산되어 ‘대난굴(大亂掘)의 시대’라 불렸다.211)김상엽, 「일제 강점기의 고미술품 유통과 거래」, 『근대 미술 연구』, 국립 현대 미술관, 2006, 151∼172쪽 참조. 이후 1931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1930년대 중반부터 만주 특수로 호황기를 맞이하자 자본가들의 고미술품 수집은 더욱 열기를 더하였다. 초기의 대규모 도굴로 시장에서 고려청자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자 1930년대 이후에는 조선 백자가 서서히 값이 오르면서 유통되었다. 때문에 1930년대 이후에 활동한 수집가들 사이에는 대거 백자 취향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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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총 발굴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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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적으로 보면 일제 강점기 고미술 시장은 경성, 평양, 대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세 도시는 일본인 자본가가 많이 살고 거래도 활발하여 전국 고미술품의 집산지(集散地)가 되었다.212)김상엽, 「한국 근대의 고미술 시장과 경매」, 『경매된 서화』, 시공사, 2005, 619쪽 특히 경성은 고미술품 거래가 가장 활발했던 도시로, 1930∼1940년대에 남촌(南村)을 중심으로 많은 골동상이 활동하고 있었다.213)남촌은 본정과 명치정을 아우르는 일본인 상업 지역을 말한다. 원래 남촌이란 말은 상업 공간인 종로를 중심으로 그 북쪽에 고관대작들이 사는 곳을 북촌, 종로 남쪽의 가난한 선비나 하급 관리가 사는 곳을 남촌이라 한 데서 유래하였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남산 기슭에 일본 영사관이 들어선 후 일본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고 총독부가 이 일대를 개발하여 도로를 정비하고 양옥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상업 지역으로 형성된 곳이다. 의사이자 조선 백자 수장가인 박병래(朴秉來)의 회고 에 의하면 1930년대 중반 남촌의 본정(本町, 현재 충무로)과 명치정(明治町, 현재 명동)에만 12개의 골동상점이 있어서 퇴근 후 이들 상점을 둘러보는 것이 일과였다고 한다.214)박병래, 앞의 책, 37쪽. 그는 그 중에서 명치정의 천지 상회(天池商會)와 동고당(東古堂), 요시다(吉田), 회현동의 구로다(黑田), 본정의 마에다(前田) 등이 대표적 골동상이었다고 기억하였다.

그러나 1935년에서 1940년 동안 경성부에서 조사한 경성의 물품 판매업 조사(物品販賣業調査)에 따르면 골동상의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215)『物品販賣業調査』, 京城府, 1935·1937·1939·1940 통계 참조. 이 조사는 경성부에 소재하는 점포 중에서 세금을 납부하는 점포 4,500여 종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총 32개 업종 중 30번째 항목이 고물, 골동류 점포들이다. 물론 이 항목에는 고도구(古道具), 고착(古着), 고본(古本), 골동, 고금물(古金物)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 서화·골동류보다 광범위한 고물 관련 업종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는 하다. 그런데 업종별 일람을 보면 개인이 운영하는 점포가 1935년에는 일본인 73개, 조선인 107개에서 1940년에는 일본인 83개, 조선인 296개로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이 더 많으며 증가율도 조선인 측이 월등히 많아 세 배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년간의 매상고별(賣上高別) 조사에서도 1935년과 1937년은 비슷하다가 1940년이 되면 3,000원 미만은 일본인 25개, 조선인 134개, 1만 원 미만이거나 이상인 경우는 일본인 49개, 조선인 119개로 조선인 측이 많다.

그리고 지역별 분포를 보면 남부(황금정, 영락정, 명치정, 태평통 등)가 가장 많아 1935년 124개, 1940년 164개이고, 그 다음으로 북부(관훈정, 서대문, 공평동, 인사동, 종로, 내자동, 혜화동 등)가 1935년 18개, 1940년 69개이다. 서부(중림동, 죽첨정동, 아현정, 홍제정, 의주통 등)에는 1935년 20개, 1940년 48개 점포가 있었고, 동부(효자동, 원남동, 종로, 숭인동)에도 1935년 9개, 1940년 42개 점포가 있었다. 이를 통해 볼 때 골동상이 박병래의 회고대로 남촌에 가장 많이 모여 있었으나 북촌과 서부 지역, 동부 지역에도 고물이나 골동을 취급하는 상점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전체 업종별 매상을 보면 32개 업종 중 식음료, 주류, 곡류, 화장품과 약품류 다음으로 고물, 골동업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이 조사는 1935년에서 1940년까지의 상황만을 보여 주나 일제 강점기 고물과 골동 시장이 유통 판매업 중에서 4, 5위의 매상을 올렸던 업종이었으며, 처음에는 일본인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말기로 갈수록 조선인의 시장이 급격히 증가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조선인 골동상 가운데 가장 유명하던 골동상점은 배성관 상점(裵聖寬商店)과 이희섭(李禧燮)이 운영하던 문명 상회(文明商會)였다. 그 밖에 최초의 골동상점으로 중구 소공동에 위치하였던 동창 상회(東昌商會), 서울시청 앞에서 김수명(金壽命)이 운영하던 우고당(友古堂), 소공동에서 서양화가 구본웅(具本雄)이 운영하던 우고당(友古堂), 1944년 서양화가 김환기(金煥基)가 잠시 운영했던 종로 화랑, 당주동에서 오봉빈(吳鳳彬)이 운영하던 조선 미술관(朝鮮美術館) 등이 있었다.

현재 외환은행 남대문 지점 자리에 있던 배성관 상점은 지방에서 가전 물품(家傳物品)이나 땅에서 파낸 물품을 팔기 위해 들고 오는 사람들이 으레 찾던 일종의 만물상 같은 곳이었다.216)주인 배성관이 갓을 쓰고, 머리가 둘 달린 기형 송아지 박제품을 간판 삼아 상점에 걸어 두어 지방에까지 유명하였다고 한다. 지방에서 가전 물품(家傳物品)이나 땅에서 파낸 물품을 팔기 위해 들고 오는 사람들은 으레 배성관 상점을 찾아가 팔았기 때문에 상점 내부는 걸어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서화, 박제품, 장신구 등이 쌓여 있어 일종의 만물상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박병래, 앞의 책, 33∼37쪽). 이에 비해 시청 뒤 무교동에서 문명 상회를 운영하던 이희섭은 일제 강점기 최고의 골동상이자 거간으로 주로 공예품을 수집, 판매하여 거금을 벌었다. 특히 그는 전국 각지를 돌며 수집한 도자기, 목공(木工), 고동기(古銅器), 칠기(漆器), 불상 등의 공예품을 가지고 1934년부터 1941년까지 5회에 걸쳐 일본에서 조선 공예 전람회(朝鮮工藝展覽會)를 개최함으로써 일본 시장을 직접 개척하기도 하였다. 이 전시는 당시 고공예품(古工藝品)에 대한 복고적 취향이 일본의 고미술 감상가들 사이에 유행하던 상황 속에서 나온 것으로, 조선 공예의 시장성을 간파한 이희섭이 전개한 상행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나 결과적으로 조선 미술품의 해외 유출 통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217)『조선 공예 전람회 도록(朝鮮工藝展覽會圖錄)』 1∼5권, 경인 문화사, 1992(복각판) ; 송원, 「내가 걸어온 고미술계 30년 : 해방 전후 일본인 수집가들과 문명 상회(文明商會)」, 『월간 문화재』 3권 2호, 월간 문화재사, 1973.2, 16∼29쪽.

반면 오봉빈이 1929년 광화문 210번지에 있던 빌딩의 한 칸을 50원에 월세로 빌려 창설한 조선 미술관은 1930년 고서화 진장품전(古書畵眞臧品展)을 개최하는가 하면 1931년에는 이왕가 박물관(李王家博物館)과 조선 총독부 공동 후원으로 동경에서 조선 명화 전람회(朝鮮名畵展覽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의 고미술 시장은 주로 도자기나 목기류 같은 골동품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상대적으로 서화는 관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봉빈의 조선 미술관은 여러 번 서화전을 열어 서화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1940년에는 개관 10주년 기념전으로 십명가 산수 풍경화전(十名家山水風景畵展)을 개최하는 등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까지 기획전 형식으로 전시, 판매하는 화랑의 역할까지 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골동상과 차이가 있다.218)오봉빈은 1930년대에 고서화 수장가들의 거래를 담당하던 대표적 서화상으로, 단순히 판매만 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네 차례에 걸쳐 고서화전을 기획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고서화 전람회를 통해 고서화 수집가들의 작품을 모아 외부에 공개하고 그 가치에 대한 공적 여론을 형성시킴으로써 실질적으로 1930년대 고서화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취향을 만들어 내는 토대 역할을 하였다(이구열, 「한국의 근대 화랑사 : 오봉빈의 조선 미술관」, 『미술 춘추(美術春秋)』 2∼4, 1979∼1980 여름 ; 김상엽, 「조선 명보 전람회(朝鮮名寶展覽會)와 조선 명보 전람회 도록」, 『미술사 논단』 25, 성강 문화 재단, 2007, 177∼200쪽 ; 『朝鮮名畵展覽會目錄』, 國民美術協會, 東京,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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