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4장 미술과 시장
  • 2. 일제 강점기의 미술 시장
  • 고미술품 시장
  • 경매 시장
권행가

판매와 구입 방식을 보면 조선 후기가 증여나 중개인을 통한 구입 또는 지전이나 병풍전 같은 시장을 통한 직접 구입의 방식이었다면, 일제 강점기는 경매 시장을 통해 미술품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이전 시기와 다른 가장 큰 차이라 할 수 있다. 1922년 창립되어 1945년 광복 때까지 운영된 경성 미술 구락부(京城美術俱樂部)는 고미술품을 경매한 대표적 단체이다.219)이하 일제 강점기 경성 미술 구락부에 대해서는 김상엽·황정수 편저, 『경매된 서화』, 시공사, 2005 참조 우리나라에 일본인을 통해 경매 제도가 들어온 것은 경성 미술 구락부 설립 이전부터이나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이 시기이다. 골동 경매를 알선하는 회사 법인인 경성 미술 구락부는 남촌 소화통(현재 퇴계로 프린스 호텔 자리)에 있었는데, 고려청자 도굴 붐에 편승하여 골동의 원활한 유통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창립 당시의 주주 85명 가운데 조선인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 조선 내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조직이었다.

경성 미술 구락부의 경매는 출자를 한 회원 즉 주주들만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구매자는 회원인 골동상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경매에 참여 할 수 있었다. 경매회(競賣會)는 거의 매월 열리다시피 하였으며 그때마다 경매 도록(圖錄)이 발간되었다. 경매가 열리기 전날이면 세화인(世話人)이라 불리는 골동상이 이 경매 도록을 가지고 고객을 찾아가 낙찰 가격을 의논한 후 경매회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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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미술 구락부
경성 미술 구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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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경매는 우선 회원인 골동상이 경매에 앞서 비공개적인 교환회(交換會)를 열어 작품을 서로 구입하기도 하고 가격을 조정하기도 한 후 다시 그 물품을 각자 자신의 고객에게 개인적으로 팔거나 경매를 통해 즉매(卽賣)하는 이중적 구조로 진행되었다. 많은 작품을 최저 가격에 입수할 수 있는 교환회를 기반으로 해서 업자 간에 매매 가격을 예측하고, 조정한 후에 일반에게 개별 판매하거나 입찰과 즉매에 의한 공동 판매를 하는 이러한 폐쇄적인 상법은 실제 동경 미술 구락부(東京美術俱樂部, 1907년 설립)의 경매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것은 에도(江戶) 시대부터 전해 오는 일본 특유의 영업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의 경우 미술상들의 조합은 있지만 교환회 같은 업자들만의 시장 은 없다. 즉 서양에서는 경매에 의한 공개 옥션(auction)이 활발히 진행되지만 골동 상인과는 별개인 전문인들이 상설적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이들은 경매에 붙이되 입찰에는 들어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즉 옥션에서는 골동 상인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참가자가 된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조합을 중심으로 비공개 업자 시장과 일반인을 상대하는 소매 시장이라는 이중 구조가 고미술뿐 아니라 일본화, 서양화, 외국 회화 전문 업자들의 판매 방식으로 정착하여 제2차 세계 대전 후까지도 지속되었다.220)仲田定之助, 「展覽會とギァラリ」, 『日本美術の社會史』, 里文出版, 2003, 425∼430쪽.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국내에 정착된 경매 제도는 서양의 경매 시장이 아니라 일본 특유의 폐쇄적인 상거래 방식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되었으며, 따라서 공정한 가격 형성과 조선인의 참여는 쉽지 않았던 상황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편 1938년 함흥에서는 김영선(金英善)이 자본금 5,000원을 출자하여 함흥 미술 구락부(咸興美術俱樂部(株))를 설립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경매 시장이라기보다는 골동업자들 간의 교환회 개최에 목적을 둔 단체였다.221)中村資良,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 東亞經濟時報社,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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