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4장 미술과 시장
  • 2. 일제 강점기의 미술 시장
  • 동시대 작가들의 미술 시장
  • 휘호회, 개인전을 통한 매매
권행가

흔히 우리나라 근대기 화랑의 효시를 1913년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개설한 고금 서화관(古今書畵館, 석정동(石井洞), 현재 소공동 입구)으로 본다. 김규진은 대한제국 궁내부(宮內府) 관리이자 영친왕(英親王)의 서화 교사이기도 하였으며, 사진술을 도입하여 직접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을 운영하는 등 근대 전환기 서화가의 새로운 변화를 보여 준 대표적 인물이다. 그가 천연당 사진관 옆에 개설한 고금 서화관은 서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기 위한 공간을 마련하고 고객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뿐 아니라, 동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작가와 고객을 중개하는 화상적(畵商的)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박물상적(博物商的) 상점과도, 앞서 언급한 조석진의 한성 서화관 같은 부류와도 달랐다. 즉 그는 서화관을 통해 자신의 작품뿐 아니라 각처의 명성 높은 서화가의 작품과 고서화를 위탁 판매하고자 하였다.228)그는 신문 광고를 통해 신구 서화가 일반 애호가뿐 아니라 혼인이나 회갑 잔치 등의 선물로, 또는 사교상의 선물로 이용될 수 있음을 선전하고 있으며 서화가들의 경우 자신의 작품 판매를 원하면 샘플용으로 2∼3점 보내 줄 것을 명기하고 있다(『매일신보(每日申報)』 1913년 12월 12일자 고금서화관 광고). 그러나 그가 1921년에서 1923년 사이에 기록한 일기에 의하면 총 47건 주문 받은 중 7건을 제외한 40건이 모두 편액(扁額)이나 간판용 글씨이고 가격이 20∼50원대인 것으로 보아 광고만큼 다양한 거래 행위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229)김소연·김한기 옮김, 「김규진의 『해강일기(海岡日記)』」, 『미술사 논단』 16·17, 성강 문화 재단, 2003, 385∼428쪽. 결국 고금 서화관은 1914년에 분점을 평양에 개설하면서 1920년 무렵까지 지속되긴 하였으나 본격적인 화랑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하고 말았다.230)이구열, 「한국의 근대 화랑사 1」, 『미술 춘추』 창간호, 한국 화랑 협회, 1979, 1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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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 서화관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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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 강점기에는 화상이나 화랑이 본격적으로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으며, 서화를 취급하는 상점에서 판매가 되더라도 신구(新舊) 서화를 같이 취급하여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뚜렷한 상업적 공간이 없었다. 현재 우리에게 일반화되어 있는 화랑(畵廊)이라는 용어는 원래 갤러리(gallery)의 일본식 번역어로, 일반적으로 화상이 경영하는 상업적인 공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일본에서 전통적으로 상점을 지칭하는 동(洞), 옥(屋), 장(莊), 당(堂), 사(社) 대신 화랑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24년에 개설된 화랑 구단(畵廊九段)부터이다. 그러나 다이쇼기(大正期, 1912∼1926)까지는 화랑, 화방(畵房) 등이 혼용되다가 1930년대 이후에야 화랑이라는 용어가 갤러리를 지칭하는 일반 용어로 정착되었다.231)瀨木愼一, 「日本における畵廊の歷史」, 『日本美術の社會史』, 里文出版, 2003, 450∼452쪽.

우리나라에서도 지전, 서포, 서화관 등 여러 용어가 혼재하다가 1930년대에 미쓰코시 백화점(三越百貨店, 1932년 개점), 화신 백화점(和信百貨店, 1934년 개점), 미나카이 백화점(三中井百貨店, 1938년 개점), 조지야 백화점(丁子屋百貨店, 1941년 개점) 내에 화랑이 생기면서 화랑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었다. 그러나 이들 백화점 화랑은 단순히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빌려 주는 대관(貸館) 화랑의 성격을 넘어서지 못하였으며, 그나마 전시를 위한 중심 공간이 된 것도 1940년부터였다. 따라서 작가는 휘호회를 통해 후원자나 지인에게 사적으로 작품을 매매하거나 주문 제작하거나 공적인 전람회 를 통해 직접 매매하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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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 화랑
화신 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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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서 1920년대 사이에 동양화가들의 화회(畵會)나 휘호회를 통해 작품을 판매한 방식을 살펴보면 현재의 모습과는 매우 다른,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 주어 흥미롭다. 가령 1913년 경성 서화 미술회(京城書畵美術會)에서는 교수진과 학생들의 작품을 단 하루 동안만 전시하였는데, 이날에 귀족층과 사회 명사, 애호가들을 초대한 후 대청마루와 큰 방의 벽면을 가득 채운 작품들을 보여 주고 그 가운데 원하는 것을 적당한 가격을 받고 주었다. 또 다른 예로 1922년 김성수(金性洙), 송진우(宋鎭禹) 등의 발기로 이루어진 허백련 화회(許百鍊畵會)에서는 적당한 크기의 그림 한 폭씩을 받는 회비 명목으로 입장료를 A급은 25원, B급은 15원을 받는다고 신문에 광고를 내고 회원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에 열린 조선 미술 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입장료가 어른 20전, 학생과 소인 10전인 것을 감안해 보면 이 가격은 단순한 입장료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들은 전람회가 사회 명망가나 단체의 발기에 의해 이루어지고 익명의 대중을 상대로 공개, 매매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작품을 살만한 회원을 모집하고 작품 가격을 받은 후 전시회에 모셨다는 점에서 현대의 개인전과 다른 과도기적 형태를 보여 준다.232)이와는 조금 다른 형태이긴 하나 1925년과 1929년 개최된 ‘변관식 화회(卞寬植畵會)’의 경우에도 미리 입장료를 낸 회원들에게 추첨 방식을 통해 작품을 배정받게 한다거나 전람회장의 모든 작품을 족자로 된 지본(紙本)은 20원, 견본(絹本)은 25원에 팔았다. 그 밖에 1923년 ‘이상범 노수현 2인전(李象範盧壽鉉二人展)’, 1927년 조선 서화 협회가 운영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마련한 ‘백폭 서화 즉매회(百幅書畵卽賣會)’ 등에서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품이 매매되었다(이구열, 「한국의 근대 화랑사 5 : 8·15 이전의 전람회 형태와 장소」, 『미술 춘추』 6, 한국 화랑 협회, 1980.가을, 46∼47쪽 참조).

서양화가들은 개인전에서 작품을 판매하는 일 자체가 어려워 이처럼 회원제라든가 추첨으로 작품을 일괄 판매하는 형식을 보기 어렵다. 단 서양화 도입 초기에는 작품 판매에 관한 신문 보도를 찾을 수 있다. 가령 1916년 평양 재향 군인회 연무장(演武場)에서 열린 김관호(金觀鎬, 1890∼1959)의 개인전에서 출품작 50점 중 많은 수가 판매되었으며, 1921년 최초의 여류 화가인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의 개인전에서는 출품작 70여 점 중 20여 점이 판매되었고, ‘신춘’이란 작품은 치열한 경쟁 끝에 350원이라는 높은 값에 팔려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1928년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이종우(李鍾禹, 1899∼1981)의 개인전에서는 ‘누드’가 300원, ‘모부인상(某婦人像)’이 김연수(金年洙)에게 500원, 그 밖의 다른 작품은 유억겸(兪億兼) 연희 전문학교 교감에게 200원에 팔렸다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참고로 1920년 연말에 조선 총독부에서 집계한 쌀값 통계를 보면 정미(精米) 중간급 1석(144㎏)이 42원 98전이었다.233)「1920年 月平均 穀價」,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20, 第3編 第64-60表. 즉 쌀 한 가미(80㎏) 값으로 환산하면 쌀 한가마니가 23원 8전 정도이므로 나혜석의 ‘신춘’은 약 17가마니, 이종우의 ‘모부인상’은 1928년까지의 물가 상승분을 계산하지 않고도 21가마니 값에 해당하니 일반 서민에게는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전에서 작품을 성공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경우는 김관호, 나혜석, 이종우처럼 사회적 지명도가 있고 해외 유학을 갈 수 있었던 부유층 작가들에 국한되었다. 서양화가들은 대부분 전시회를 통해 작품을 판매하는 일이 드물었던 것이 당시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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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우의 모부인상
이종우의 모부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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