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4장 미술과 시장
  • 2. 일제 강점기의 미술 시장
  • 동시대 작가들의 미술 시장
  • 공적 전람회에서의 작품 판매
권행가

일제 강점기는 작가가 공적 전람회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고 그것이 언론 매체를 통해 보도됨으로써 작품 가격이 곧 작가의 인지도와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 시기이다. 그 시작은 1915년에 개최된 조선 물산 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였다. 조선 물산 공진회는 국가적 규모의 공적 전람회를 통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판매한 첫 번째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 총독부가 시정(始政) 5주년을 기념하고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다분히 정치적 목적으로 개최한 이 전람회에는 여러 산업, 수공업 물품뿐 아니라 신구 서화도 따로 미술관에 전시되었다.234)조선 총독부는 미술품 진열을 위해 일본의 내국 권업 박람회 미술관 방식을 따라 1915년 9월 공진회 미술관을 경복궁 내에 건립하였다. 이 미술관에는 낙랑시대,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고미술품을 진열하였는데 당시 출품된 미술품은 공진회가 끝난 후 연구 자료 명목으로 되돌려 주지 않았다. 동시대에 활동하던 한국인과 일본인 화가가 출품한 작품들은 공모전 형식으로 심사를 거쳐 미술 분관인 경성전(慶成殿)과 응지당(膺址堂)에 전시하였다(강민기, 「조선 물산 공진회와 일본화의 공적(公的) 전시」, 『한국 근대 미술 사학』 16, 한국 근현대 미술 사학회, 2006, 45∼78쪽 참조). 당시 일본인과 조선인이 출품한 작품은 모두 151점이었는데, 정치적 배려가 있었던 탓인지 조선인 출품작 57점은 모두 통과되었다.

조선 물산 공진회 기간 동안 전시장을 찾은 일본인 황족 간인노미야 코토히토신노(閑院宮 載仁親王, 1865∼1945)는 경성 여자 고등 보통학교의 자수 병풍(150원)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총 900여 원 정도에 구입하였는데, 공진회 측에서는 이것이 작가들에게 대단한 영광이라고 선전하였다.235)강민기, 앞의 글, 54쪽. 그리고 이왕가(李王家)에서도 총 2,000원의 거금을 들여 입상작들을 구입하였다. 이것은 일본 측에 비해 이왕가에서 두 배가 넘는 비용을 작품 구입에 사용한 것인데, 특히 일본인 작가 마시즈 슌난(益頭峻南, 1851∼1916)의 ‘위진팔황도(威振八荒圖)’를 150원이라는 거금에 구입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참고로 1915년에 정미 가격이 1석에 약 12원이었고, 김은호(金殷鎬, 1892∼1979)가 1912년 시천교(侍天敎) 교주 김인국(金演局)의 초상화를 그려 주고 받은 236원으로 원서동의 여덟 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하였다고 하니, 마시즈 슌난의 작품 값은 상당한 가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236)김은호, 『서화 백년』, 중앙일보사, 1977, 64∼65쪽.

조선 물산 공진회는 일반 대중들에게 미술품을 산업 물품과 마찬가지의 상품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황족과 이왕가가 출품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고, 그 가격이 언론에 공개됨으로써 작가의 명성 이 곧 작품 가격과 동일시되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한 행사였다고 할 수 있다.

확대보기
김은호의 축접미인도
김은호의 축접미인도
팝업창 닫기

그러나 실질적으로 공적 전람회가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공식적인 장으로 정착하게 된 것은 서화 협회전(書畵協會展)과 조선 미술 전람회였다. 1921년 창립 당시 서화 협회는 휘호회, 전람회, 의촉 제작(依囑制作), 도서 인행(圖書印行), 강습(講習)을 주요 사업으로 정해 두었다. 의촉 제작이란 작품 제작 의뢰가 있으면 제작을 해주는 것으로, 서화 협회가 전람회와 도서 출판, 미술 교육뿐 아니라 작가와 고객을 연결하는 중개 역할까지 담당하고자 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매년 개최되는 전람회를 통해서도 작품을 매매하였으며 판매액의 2할은 서화 협회의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특별 회원과 명예 회원 제도를 두어 이들에게는 서화를 재료의 실가(實價)로 청구하거나 전람회에서 서화를 특별 매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주었다.237)조정육, 「근대 미술사에서 서화 협회의 성과와 한계」, 『근대 한국 미술 논총』, 학고재, 1992, 202∼204쪽 부록 서화 협회 규칙 참조. 이 특별 회원과 명예 회원은 실질적으로 후원을 위해 각계 인사를 추대한 것으로 당시 대한제국 관료 출신부터 실업인, 금융인, 의사, 자산가 등이 포함되어 서화 협회와 당시 수장가들과의 연계를 보여 준다.

1921∼1936년까지 매년 개최된 서화 협회전에서 판매된 작품과 작품 가격, 구매자의 명단 같은 구체적인 자료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어느 정도의 판매가 이루어졌는지는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서화 협회전 초기에는 전시의 선전적 효과와 대중적 관심을 모으기 위해서인지 언론에 판매된 작품과 가격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가령 1회인 1921년 서화 협회전에서는 출품작 100여 점 중 10여 점이 매약(賣約)되었고 그 중 김은호의 ‘축접미인도(逐蝶美人圖)’가 300원에, 이도 영(李道榮, 1884∼1933)의 ‘수성고조(壽星高照)’가 150원에 판매되어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238)일기자(一記者), 「서화 협회 전람회의 초일」, 『동아일보』 1921년 4월 2일자. 2회에는 출품작 110여 점 중 이도영의 ‘금계’가 가장 고가(高價)로 팔렸고 김은호의 ‘미인도’가 다음으로 높은 가격이었다고 보도되었으나 구체적인 작품 가격은 알려지지 않았다.239)「호성적의 서화전」, 『동아일보』 1922년 4월 1일자. 서화 협회전의 경우 이후로는 작품 매매에 대한 특별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실질적으로 조선 미술 전람회에 비해 서화 협회가 언론의 관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기록에 남지 않은 탓도 있으나, 1930년대로 갈수록 작가들도 조선 미술 전람회에 치중하면서 서화 협회전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저조해진 탓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240)1927년 제7회 서화 협회전부터는 협회 측에서 작가들에게 작품 가격을 기록해 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보아 매매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총독부가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서화 협회가 설립된 1921년에 개최한 조선 미술 전람회는 서화 협회전에 비해 작품 매매에 관한 문제를 좀 더 본격적이고 분명하게 제도화시켰다. 조선 미술 전람회는 일본의 관전(官展)인 문부성 미술 전람회(文部省美術展覽會, 이하 문전(文展))의 체제를 모델로 하여 만든 것으로, 미술 전람회 규정 중 제5장 매약과 반출에 관한 건 역시 문전의 체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제5장 매약 및 반출

제28조 진열품은 본회에서 매약 계약을 취급함. 출품인이 본회를 거치지 않고 매매 계약을 하고자 할 때에는 본회의 승인을 거칠 것

제29조 진열품을 구매코저 하는 자는 대금을 사무소에 낼 것

제30조 즉시 대금을 지불치 않을 때는 수부(手附)로써 매매 계약을 할 수 있음. 수부 금액은 대가(代價)의 3분의 1이상으로 함. 전 항의 매주(買主)가 폐회 후 7일 이내에 잔여 대금을 지불치 않을 때는 매수(買收)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여 수부금은 당해 출품인의 소득으로 함

제31조 매매 계약을 한 때에는 출품찰(出品札)에 그것을 첩지(貼紙)함

제32조 출품인이 진열품의 대가를 변경코자 할 때는 그 뜻을 사무소에 제출할 것

제33조 출품인이 출품 및 대금 수령을 위하여 특별히 대리인을 둔 경우는 그 주소와 이름을 기록하여 사무소에 제출할 것

제34조 진열품은 개회 중 반출할 수 없음

제35조 출품의 반출 기한은 폐회 후 7일 이내로 함. 만일 기간 내에 반출치 아니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회에서 상당한 조치를 할 것임

제36조 진열품 중 매약된 것은 폐회 후 전조(前條)의 기간 내에 매주에게 그것을 반출할 것. 전항의 경우에는 대금 수령증을 제시하여 자기가 매주인 것을 증명해야 함

확대보기
해설서 양식
해설서 양식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해설서 양식
해설서 양식
팝업창 닫기

이 규정에 의하면 조선 미술 전람회는 출품자의 작품 매매와 계약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므로 출품자가 전람회를 통해 작품 매매 계약을 하거나 개별적으로 판매하는 경우에는 전람회 측의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미 계약이 된 작품은 매약이 되었다는 표시를 붙인 채 전람회 기간 동안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따로 화상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작품 가격은 미리 작가가 정하여 제출하되 가격을 바꿀 경우는 전람회에 미리 알리면 되었다. 전람회 측은 그 가격에 따라 작품을 판매해 주며 전람회장에서 판매가 된 경우에는 대금을 받아 작가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작가가 출품할 때 제출하도록 되어 있는 양식 중 해설서 양식은 일본의 문전 양식을 그대로 따라 부명(部名), 작품 제목, 출품인 주소, 이력 등과 함께 가격을 기입하도록 되어 있었다.241)전람회 측에서는 만일 작가가 팔기를 원하지 않을 경우 대가란(代價欄)에 비매품임을 명시하도록 하였다. 『朝鮮美術覽會圖錄』, 朝鮮寫眞通信社, 1922, 附錄, 朝鮮美術展覽會規定 참조. 이것은 실제 어느 정도 지켜졌는지 알 수 없으나 작가가 작품을 출품할 때 작품 가격까지 미리 정하고 기 록을 한 상태로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확대보기
이유태의 여인
이유태의 여인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그림엽서로 제작한 이유태의 여인
그림엽서로 제작한 이유태의 여인
팝업창 닫기

한편, 조선 미술 전람회 측은 1925년부터 즉매 제도(卽賣制度)를 도입하여 대중을 상대로 한 작품 판매를 좀 더 적극적으로 진행시켰다.242)「미전 즉매회 설치」, 『조선일보』 1925년 5월 22일자. 즉매 제도란 전시장에 따로 설치한 즉매점에서 입선 작가들에게 출품하도록 한 소품 위주의 작품 대여섯 점을 직접 대중들에게 판매해 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즉매점에서는 관람객을 상대로 전람회를 선전하고 상품화하기 위한 여러 방안의 하나로 입선작들을 그림엽서로도 제작하여 8매 1세트로 판매하였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매년 평균 1,000여 점의 출품작 중 매매된 작품은 평균 50여 점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주로 특선작(特選作)을 중심으로 일본 궁내부와 이왕가, 그리고 간헐적으로 조선 총독부가 구입을 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다.243)한국 미술 연구소 편, 『조선 미술 전람회 기사 자료집』, 시공사, 1999 참조. 작가의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 심사 위원을 통해 작품의 가치를 인정받고, 그 작품을 다시 궁내부와 이왕가가 매입하고 그것을 언론이 대서특필(大書特筆)하는 시스템은 조선 미술 전람회를 작가에게 최고의 영광과 금전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창구(窓口)로 만들었다. 궁내부와 이왕가는 일본인 작가와 조선인 작가의 수를 적절히 배분하여 구입함으로써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였으며, 문화 후원자로서의 상징적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왕가가 매년 조선 미술 전람회를 통해 구입한 작품은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된 일본과 한국 근대 미술 컬렉션의 토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관객의 입장에서 이러한 조선 미술 전람회의 풍경은 어떻게 보였을까? 다소 길지만 1932년 ‘조선 미전 만평(朝鮮美展漫評)’을 인용해 보자.

조선 미전도 벌써 십일회째가 되었다. 수많은 유무명의 화가들이 심혈을 다하여 만들어 놓은 작품을 진열하여 세상 사람에게 발표할 기회라고는 일 년에 한두 번 5월에 들어서 이 조미전이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하여 나의 예술의 독자성은 이러한 것이외다…… 좋거든 꼭 좀 와 주십시오 하고 저마다 몇 백 원씩, 몇 천 원씩 값을 내어 놓는다.

조선 사람이 멋을 몰라서 그런지 그림에 대한 감상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요, 작품을 단 한 개라도 살 돈이 은행 담구녁을 뚫기 전에는 가망이 없는 것도 사실, 설사 거저 준다 해도 갖다 걸어 놓을 데가 없는 것도 사실, 더구나 수백 원짜리 양화 같으면 오막살이 집 천정과 벽을 뜯어내도 모셔 놓을 수 없는 형편이다. …… 사과 한 개, 여자의 나체 한 개를 철학적으로 표현하였다 하더라도 대중에게는 그러한 것이 무관한 일밖에 되지 않는다. …… 대중은 무심하고 화가는 존귀한 상아탑을 버리고 간판쟁이로 미끄러질 수도 없고 끼가 화가이니 작품은 안 만들 수 없고 요행으로 팔릴지도 모르니 발표는 해야 되겠고 여편네 때 묻은 속옷을 잡혀서라도 화포와 채색을 사서 독특한 수완으로 사과와 술병을 그려 다행히 입선은 되었더라도 사 줄 놈이 없다. 궁내성, 총독부, 이왕직 같은 데서 조선 미술을 장려하는 의미로 맞돈 주고 사 주기 전에는 할 일 없다. 전람회 끝나고 집으로 모셔다가 골방 구석에다 두니 몇 천 원짜리 작품인들 그 무슨 면목일고?244)화가생(火歌生), 「제11회(第十一回) 조선 미전 만평(朝鮮美展漫評)」, 『제일선(第一線)』 6, 개벽사, 1932.7, 96∼99쪽.

이 글은 조선 미술 전람회에 출품하는 작가들의 현실과 유리된 작품 세계를 다분히 힐난조로 비판한 글의 일부인데, 작가가 작품을 판매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현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즉 미술품 감상 문화 자체가 사치스러울 정도로 경제 상황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실질적으로 작가가 작품을 판매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는 조선 미술 전람회였다. 그러나 관 주도적인, 나누어 주기식 제도는 실질적으로 조선인 작가 편에서도, 일본인 작가 편에서도 충분한 보상이 되지 못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작가들을 관전 양식에 종속시키는 폐단을 가져왔다.

사실 이처럼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볼 수 있는, 관전의 미술 시장으로서의 기능, 작가의 관전에 대한 종속 현상과 이로 인한 관전형 미술의 양산 같은 현상은 비단 조선 미술 전람회만의 특징이 아니라 그 모태가 된 일본의 문전, 더 나아가 일본의 모델이 된 프랑스 19세기 전반기까지의 살롱전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특징이다. 서양에서도 19세기에 시민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국가 주도의 관전이 된 살롱전이 작가의 유일한 등용문(登龍門)이자 미술 시장의 역할까지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인상주의를 비롯한 현대 미술이 발달한 까닭은 이러한 관전으로서의 살롱전에 대한 작가들의 반발뿐 아니라 살롱전이 민전(民展)으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전람회가 열리고, 적극적으로 현대 미술가를 후원하고 작품 시장을 형성시켜 준 화상과 화랑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245)김현화, 「19세기 ‘르 살롱(Le Salon)’과 현대 미술의 태동」, 『서양 미술 사학회 논문집』 13, 서양 미술 사학회, 2000 상반기, 35∼69쪽 ; 사토 도신(佐藤道信), 「근대 일본 관전(官展)의 성립과 전개」, 『한국 근대 미술 사학』 15, 한국 근현대 미술 사학회, 2005, 7∼24쪽. 반면 일제 강점기의 경우 고미술품 시장에만 소비가 집중되었고, 동시대 작품들은 조선의 미술 문화를 발달시 킨다는 명목으로 궁내성과 이왕가, 조선 총독부에서 관례적으로 구입하는 것을 제외하면 작품 판매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작가들의 조선 미술 전람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 후반이 되면 조선 내 작가들 사이에서도 조선 미술 전람회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과 함께 관전으로부터 벗어나 미술품의 수요를 확대시키고 특수 계층의 범주를 벗어나 미술 문화를 대중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가령 서양화가 김주경(金周經, 1902∼1981)은 심사 위원 제도에 의해 작가를 서열화하고 사회적 감투를 제공하는 조선 미술 전람회를 예술 추구의 장이 아니라 작가들에게 씌워 줄 관을 만들어 파는 점포 즉 미술 시장이라고 신랄한 비판을 가하였다. 아울러 서화 협회전 같은 민전이나 개인전을 활성화하거나, 각종 건축물에 작품을 장식하게 하여 관객과 작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게 한다거나, 학교·공원·교회 같은 공공장소에 그림을 설치하여 일반 대중의 감식력을 양성하는 등을 통해 대중의 구매력과 감식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작가들도 있었다.246)「조선 신미술 문화 창정 대평의」, 『춘추(春秋)』 2권 5호, 조선 춘추사, 1941.6, 154∼167쪽. 물론 이러한 제안이 실질적으로 현실화된 것은 광복 이후의 일이다.

한편 그룹전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하는 1920년대 후반부터는 단체전 전람회 규정에도 작품의 매매에 관한 사항이 명시되면서 작품 매매 방식도 좀 더 체제화되기 시작하였다. 가령 김관호가 주축이 되었던 평양의 삭성회(朔星會)는 1928년 전람회 규정에 작품 매매 시 작품 가격의 2할을 회에 내도록 명시해 두었다.247)「사주년 기념 삭성 전람회」, 『조선일보』 1928년 4월 11일자 ; 최열, 앞의 책, 230쪽. 또 1929년에 결성된 녹향회(綠鄕會)는 전람회 규정 7조에 매매 시 2할을 회에 낼 것과 작품 출품 시 번호, 명제, 종별, 촌법(寸法), 비고, 해설과 함께 가격까지 기록할 것을 밝혀 두었다.248)「제1회 녹향회 전람회」, 『조선일보』 1929년 5월 14일자 ; 최열, 앞의 책, 251쪽. 이러한 예는 작가 자신이 작품 가격을 미리 정하고, 전시회장이 익명의 고객을 대상으로 한 작품 판매의 장이 되는 방식이 1920년대 후반부터 일반 단체전에도 도입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