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4장 미술과 시장
  • 2. 일제 강점기의 미술 시장
  • 동시대 작가들의 미술 시장
  • 전시장 밖에서의 미술품 매매
권행가

1937년 잡지 『조광(朝光)』에 실린 ‘화단인 언파레이드’라는 글에는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 미술가들의 삶의 방식이 흥미롭게 묘사되어 있다. 이 글에 의하면 작가들이 작품을 판매하여 먹고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대부분 교육계에 종사하거나 신문사 삽화가 등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서양화가는 “조선 미술 전람회나 서화 협회전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작품이 팔리는 것이 아니면 명사의 소개장을 들고 부리나케 다녀야 일 년에 몇 폭 팔기가 어려우니 자기 재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반면에 동양화가는 병풍이라든가 큰 요릿집 같은 곳에서 받는 주문으로 때때로 목돈이 들어오고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작품을 그려 주고 큰돈을 받기도 하여 서양화가들에 비해 사정이 나았다.”249)우령생(牛鈴生), 「화단인 언파레이트」, 『조광(朝光)』 3권 2호, 조선일보사 출판부, 1937.2, 200∼203쪽. 이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 강점기 동안 서양화 작품을 판매하거나 주문을 받아 생활할 수 있는 화가는 극히 드물었다. 왜냐하면 앞서 보았듯이 미술 수요 계층 자체가 한정적이었고 미술품 유통 구조가 체제화되어 있지 않은 까닭도 있지만 더 기본적으로는 서양화에 대한 대중의 낮은 인식과 전통적인 서화 애호 취향의 잔존, 그 밖에 앞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화 자체가 한식(韓式) 가옥의 구조에 어울리지 않는 탓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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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동양화가들은 조선 후기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여러 통로를 통해 작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가령 휘호회는 각 지방의 유지, 관료 등인 후원자를 만나는 사교의 장이자 작품 판매 장소로 활용되었다. 그뿐 아니라 선물용, 기념, 집안 장식, 소장 등을 목적으로 한 서화 주문을 지속 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일본처럼 적극적인 후원자 계층이 두텁지는 않았지만 동양화가들 중에는 후원을 받는 작가도 있었다. 가령 고종 때 내부 협판(內部協辦)을 지낸 이봉래(李鳳來)의 아들로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서화 골동 수집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용문(李容汶)은 서화 협회를 후원하였을 뿐 아니라 김은호, 변관식(卞寬植)의 일본 유학을 도왔으며 이도영, 오일영(吳一英),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도 후원해 주었다. 또 같은 서화 협회 명예 회원이던 호남의 거부 백인기(白寅基)도 허백련을 후원하였으며, 미국 유학을 다녀온 관료의 아들로 맴퍼드 상회 양복점을 운영하던 이상필(李相弼)도 이상범, 이용우(李用雨), 조각가 김복진(金復鎭), 서양화가 이승만(李承萬)을 도왔다.250)최열, 앞의 책, 131∼132쪽.

김은호는 동양화가들 중 후원, 주문 제작, 판매 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가장 윤택하게 생활한 작가이다. 김은호가 작품 판매를 통해 경제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가 조석진, 안중식의 직계 제자이자 조선 왕실의 마지막 어진 화사라는 명성 탓도 있었지만 고종과 순종뿐 아니라 민영휘(閔泳徽) 같은 친일 귀족에서부터 시천교 교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정용(影幀用) 초상화 주문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화기 이후 일본인 영업 사진관의 국내 진출로 사진이 초상화를 대체하기 시작하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초상화 수요가 있었고, 오히려 그 수요가 일반인에게까지 확산되면서 초상화 미술 시장이 형성되고 있었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동양화가 서양화에 비해 미술 시장에서 더 많이 상품화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고서화 수장가들의 수집 대상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가령 경성 미술 구락부에서 발간한 도록에 의하면 조선 미술관의 오봉빈, 박창훈, 함흥의 김명학(金明學), 이병직(李秉直) 같은 수장가의 소장품 중에는 조석진, 안중식, 이도영, 김은호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251)김상엽, 황정수, 앞의 책, 246∼269쪽 경매 도록에 실린 개화기 이후 작품들 참조. 1940년 오봉빈이 조선 미술관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기획한 십명가 산수 풍경화전 역시 이러한 고미술 시장과의 연계 속에서 근대기에 동양화 를 매매하는 미술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주는 대표적 예이다. 판매된 동양화 가운데 인기 품목은 수묵 산수화(水墨山水畵), 도석 인물화(道釋人物畵), 미인도 등이었다. 당시 십명가로 불린 고희동(高羲東), 허백련, 김은호, 박승무(朴勝武), 이한복, 이상범, 최우석(崔禹錫), 변관식, 이용우, 노수현은 실질적으로 광복 이후부터 1970년대 동양화 붐 시기까지 가장 인기 있는 대가급 작가로 자리 잡았을 뿐 아니라 집중 조명을 통해 근대기 동양화 화단의 맥을 형성하는 작가로 미술사 속에 자리매김한다는 점에서 일제 강점기 동양화 시장의 취향이 광복 이후까지 이어져 왔던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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