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4장 미술과 시장
  • 3. 광복 이후의 미술 시장
  • 원조 경제 시기 미술 시장의 재편
권행가

광복 이후 미군정기, 6·25 전쟁기, 미국의 원조를 받았던 전후 복구 시기를 거치는 동안 미술계는 혼란기를 수습하고 새로운 화단 구조와 체제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대 작가들을 위한 미술 시장은 여전히 침체 상태였다. 반면에 고미술계는 오히려 뜻하지 않은 활황을 맞이하였다. 광복 이후 일본인 서화 수집가들이 본국으로 급히 돌아가면서 처분하려고 내놓은 물건이 시장에 넘쳐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 밝은 사람들은 길거리에서도 좋은 물건을 싼값에 구입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서화 골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수집에 열을 올렸다. 일례로 김환기가 6·25 전쟁 때 피난을 가면서 우물 속에 파묻었다가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는 도자기들도 이 무렵 수집한 것이 많았다.

자연히 골동 상점도 증가하여 기존의 일본인 골동상이 모여 있던 명동 일대뿐 아니라 인사동, 관훈동, 견지동, 공평동까지 골동 상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골동 상점은 그곳에서 일을 봐 주던 조선인에 넘어가는 경우도 많았다.252)황규동, 「해방 후의 골동 서화계」, 『월간 문화재』 1권 2호, 월간 문화재사 1971.12, 57∼59쪽. 그뿐 아니라 일본인 미술 경 매 시장의 중심 공간이었던 경성 미술 구락부도 미군정청(美軍政廳)이 접수하였다가 1946년 ‘미술가의 집’이란 이름으로 조선 미술가 협회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미술품 교환회는 계속 열렸다. 즉 1946년 골동상들이 모여 한국 고미술 협회(韓國古美術協會)를 조직하고 경성 미술 구락부에서 일본인들이 하던 경매 방식 그대로 교환회를 개최함으로써 일본의 경매 문화는 광복 이후 한국 고미술상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 고미술 협회가 1956년 대한 고미술 협회(大韓古美術協會)로 이름이 바뀐 이후에는 고미술품 감상과 교환회가 좀 더 빈번히 개최되었다.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 등으로 동시대 미술 시장이 한껏 위축되었던 1961년에도 거의 매월 한두 차례의 고미술품 전시회가 이루어질 정도로 활성화되었다.253)이때 전시회는 3일 동안 개최되는데 처음 이틀 동안은 감상회, 마지막 3일째는 경매가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경매 거래가를 보면 1962년 1월 22일 경매에서 장승업의 ‘노안도(蘆雁圖)’ 18만 5000환, 김홍도의 ‘운기도(雲起圖)’ 20만 5000환, 조석진의 ‘산수도’ 6,000환, 고희동의 ‘추부도’ 1만 환이었다. 이처럼 미군정기와 이승만의 자유당(自由黨) 시절을 지나는 동안 고미술품 거래가 활성화되었던 것은 새로운 고객으로 등장한 미군이나 고관에게 줄 선물용으로 많이 판매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좀 더 기본적인 까닭은 고미술품 거래에 대한 법적 조치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사회적 혼란을 타고 무질서한 도굴, 해외 반출, 음성적 거래 등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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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승의 김성수 초상
김인승의 김성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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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하는 화랑도 새로이 등장하였다. 대양 화랑(1947), 대원 화랑(1948), 천일 화랑(1954) 같은 화랑이 일본인들의 상업적 중심지였던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 일시적으로 문을 열었고, 백화점 부속 화랑으로는 1930년대에 개관하였던 화신 화랑, 중앙 백화점 화랑(구 조지야 백화점 화랑), 동화 백화점 화랑(구 미쓰코시 백화점 화랑)이 새로 영업을 시작하였 다. 그러나 이들 화랑은 모두 화상이 중개하여 기획하고 작품을 팔아 주는 영업 화랑이 아니라 대관(貸館) 화랑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나마 대양·대원·천일·중앙 백화점 화랑은 이내 문을 닫아 1960년대까지 작가들이 실질적으로 개인전을 열 수 있었던 곳은 동화 백화점 화랑이나 1948년 문을 연 미국 공보원, 1957년 개관하여 무료로 대관해 준 중앙 공보관 화랑 같은 곳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도 국내에는 엄격히 말해 화상이 중개가 되어 움직이는 본격적인 유통 구조가 성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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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봉의 코스모스
도상봉의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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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 작품을 판매하기는 여전히 어려워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도 잘 팔리는 작가도 한 달에 한 작품을 겨우 파는 정도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작가는 대략 300여 명으로 추산되었는데, 이 중에서 작품을 판매해서 생활을 할 수 있는 작가는 동양화가 30여 명, 서양화가 50여 명 내외에 지나지 않았다.254)「그림. 전람회. 돈」, 『서울신문』 1959년 4월 25일자. 판매되는 작품의 유형을 보면 동양화가 중에는 이상범, 김기창(金基昶), 이응노(李應魯), 김정현(金正炫), 박노수(朴魯壽)의 수묵화나 수묵 담채화 혹은 김은호, 장운상(張雲祥)의 미인도가 서울과 지방에서 골고루 잘 팔리는 편이었고, 서양화의 경우 추상화(抽象畵) 계열은 거의 팔리지 않는 대신 김인승(金仁承)의 초상화나 도상봉(都相鳳)의 정물화처럼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구상화(具象畵) 정도가 판매되었다.255)「팔리지 않는 전람회」, 『서울신문』 1958년 5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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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부대 PX의 초상화부
미군 부대 PX의 초상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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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하게 작품 판매만으로 생활하기 어려웠던 작가들은 대부분 미군 초상화가, 미군 부대의 사인페인터(Sign painter), 각종 잡지 표지화·신문·국정 교과서의 삽화가, 각 기업에서 만들어 내는 달력 그림 그리기 등의 생계형 직업과 국전이나 각종 단체전 등을 통한 작품 활동을 병행하였다. 이로 인해 작가들 사이에서는 “해방 전에는 사양(斜陽) 귀족이나 지주들이 그림을 곧잘 사 주었는데 요즘의 신흥 부자들은 그림을 알아주지 않는다. …… 화상도, 현대 회화 컬렉터도 없는 상황에서 학교나 기관들이라도 그림을 사 주어야 하는데 서울 시내에 대건물과 일류 주택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있지만 여간해서는 건축비의 몇 백분지 일이 되는 값의 그림 한 장을 실내 장식으로 사들이지 않는 풍토”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도 하였다.256)「팔리지 않는 전람회」, 『서울신문』 1958년 5월 2일자.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1950년대 후반으로 오면서 점차 미술 시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문 기사 속에 작가의 호당(號當) 작품 가격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기사화되 기 시작하였다는 것 역시 이러한 관심을 말해 준다. 가격이 일정하지는 않고 실질적인 판매가와 작가의 호가(呼價) 사이에 차이가 있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동양화가의 경우 김은호, 이상범 같은 대가급은 소품(1척 4방)이 5∼10만 환, 중간 크기의 작품(1척 5촌, 2척)은 10∼15만 환, 화선지 전지(全紙, 40호) 정도의 대작은 20∼35만 환, 이류급 작가는 소품이 2만∼4만 환, 중작이 5∼8만 환, 대작이 10만 환 내외로 호가되었다. 한편 서양화의 경우 중견급은 호당(12㎝×10㎝) 1만 환, 30∼40호는 호당 7,000∼8,000환, 50호는 호당 4,000환을 호가하는 정도였다.257)5·16 군사 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는 1962년 화폐 개혁을 단행하여 화폐 단위인 환(圜)을 원(圓)으로 바꾸었다. 이때 화폐 가치가 10분의 1로 압축되었으므로 1958년 호당 만 환은 1962년 이후 1,000원 정도의 가치로 보면 된다. 참고로 1958년 쌀 한 가마니(80㎏) 가격은 1,311원이었다(한국은행 경제 통계국, 『숫자로 보는 광복 60년』, 한국은행, 2005, 84쪽, 주요 상품 가격 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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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화랑
반도 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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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이처럼 1950년대 후반에 미술 시장과 그림 가격에 대해 직접 거론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반도 호텔에 개관한 반도 화랑의 미술품 판매 및 운영 상황과 관계가 있다. 반도 화랑은 주한 미군과 사절(使節)의 부인들 단체인 서울 아트 소사이어티(Seoul Art Society)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협조로 개설된 화랑이다. 목적은 반도 호텔을 드나드는 내·외빈들에게 국내 작가의 작품을 판매함으로써 작가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반도 호텔 1층 로비 한구석의 6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공간의 제약 속에서 최대한 많은 작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초기에는 서양화는 10호, 동양화와 서예는 화선지 3절 이내의 소품으로 제한하였으며, 전시 기간도 2개월을 초과하지 않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작품 가격은 작가가 사전에 등록하도록 하였으며 전시 도중에는 임의로 가격을 인상할 수 없었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반도 화랑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출품작은 대부분 거의 같은 크기였으며 가격도 10호 기준으로 3만 환 을 넘지 않도록 한정되어 있었다.258)반도 화랑의 판매 실적과 판매 작가들 명단, 구체적인 운영 과정에 대해서는 이구열, 「한국의 근대 화랑사 : 반도 화랑」, 『미술 춘추』 9, 한국 화랑 협회, 1981년 여름 및 『미술 춘추』 11, 1982년 5월 ; 기혜경, 「반도 화랑과 아세아 재단의 문화계 후원」, 『근대 미술 연구』, 국립 현대 미술관, 2006, 223∼239쪽 참조. 1958년 쌀 한 가마니(80㎏) 가격이 1,311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3만 환은 화폐 개혁(貨幣改革) 이후의 가치로 환산하면 3,000원 즉 쌀 두 가마니 정도의 가치밖에 되지 않았다.259)한국은행 경제 통계국, 앞의 책, 84쪽. 그 때문에 작가의 경력과 상관없이 작가 생활을 갓 시작한 사람이나 몇 십 년의 경력을 가진 대가의 가격이 일률적으로 책정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작가들로부터 나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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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의 나무
박수근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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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 화랑의 고객층은 초기에는 외국인이 주를 이루었으나 내국인이 점차 많아지는 추세를 보여 국내 수요도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을 기탁한 작가들 중에서 판매가 된 작가를 보면 동양화가로는 이상범, 박노수, 장운상, 김화경, 천경자, 최우석, 이유태 등이었고, 서양화가로는 도상봉, 손응성, 김인승, 김흥수, 박득순, 박수근, 장리석, 박영선, 문학진, 김종하, 이대원 등이었다. 이 중 박수근(朴壽根, 1914∼1965)처럼 한국적·향토적 소재를 취한 작품은 주로 외국인에게 인기가 있었다.

흔히 반도 화랑은 우리나라 현대 미술사에서 화랑의 시초라 여겨지기도 하나 엄밀히 말해 미국의 문화 원조 가운데 한 가지로 아세아 재단의 후원으로 운영된 비영리 기관이었다는 점에서 1970년대 이후의 화랑 체제와는 다른 시대적 특수성을 지닌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반도 화랑이 현대 미술품을 판매하는 국내 유일의 상설 화랑이었으며, 이 공간을 통해 작가들이 작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고객의 취향, 작품의 상품화, 작가 간의 호당 가격 경쟁, 외국인의 시선을 전제한 한국성 등에 대해 의식하기 시작한 계기로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 가 있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 화랑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이 시기부터이다. 그러나 천일 화랑이나 반도 화랑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시기의 화랑은 일부 선각자적(先覺者的)인 개인이나 공공 기관의 지원에 의해 미술에 대한 계몽적 역할을 담당하던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일반 미술 애호가가 형성되지 않은 단계였다는 점에서 1970년대 이후의 미술 시장과 구별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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