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4장 미술과 시장
  • 3. 광복 이후의 미술 시장
  • 개발 경제 시기 미술 시장의 활성화
  • 화랑가의 형성과 동양화 붐
권행가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만을 본격적으로 취급하는 화랑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이다.261)김기창, 「급증하는 화랑」, 『중앙일보』 1969년 9월 15일자. 인사동과 관철동 주변에 동양화만을 취급하는 화랑이 10여 개 이상 들어서기 시작하다가 반도 화랑 직원이었던 박명자(朴明子)와 한용구(韓鎔求)가 1970년 현대 화랑을 개관한 것을 필두로 명동 화랑(1970), 서울 화랑(1970), 조선 화랑(1971), 진 화랑(1972), 동산방 화랑(1976), 선 화랑(1976), 송원 화랑(1977) 등이 생겨났고, 이때부터 인사동은 새로운 화랑가로 자리 잡았다.

미술 시장이 확대되면서 1976년 미술품 유통 질서를 자리 잡는다는 취지하에 12개의 화랑이 모여 한국 화랑 협회(韓國畵廊協會)를 발족시켰는데, 1978년 회원은 26개로 증가하였다. 당시 협회 회원 자격은 현대 화가의 기획전을 열고 현대 작가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화랑으로, 고서화를 전문으로 취급하거나 기획전을 열지 않는 화랑은 제외되었다. 이러한 화랑의 성격 규정은 기존에 고미술품과 동시대 작품을 뒤섞어 취급하던 매매 형태에서 고미술상과 화랑의 역할 분리를 명확히 하고자 한 것으로, 화랑을 중심으로 동시대 작품들을 매매하는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됨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들 화랑 중에서 실질적으로 연 10회 이상의 기획전이나 초대전을 갖는 경우는 많지 않았으며, 영세성으로 인해 기획전이나 초대전을 하더라도 작가와 전속 계약을 하거나 자유 계약을 하여 화상의 의도에 맞게 특정 작가의 작품을 구입한 후 매매하는 형태가 아니라 위탁 판매(委託販賣)를 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던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262)「화랑가를 말한다」, 『화랑』 4권 4호, 현대 화랑, 1976.겨울, 40∼49쪽 ; 「화랑 협회 재출발과 화랑가 문제」, 『화랑』 7권 1호, 현대 화랑, 1979.봄, 26∼32쪽. 그렇다 하더라도 미술 시장이 유례없는 호황을 누린 1970년대 후반에는 화랑이 비 온 뒤 죽순(竹筍)이 솟듯 생겨 화랑 협회에 소속된 화랑 이외에 화랑 표구 협회(畵廊表具協會)에 소속되어 단순히 매매만 하는 화랑도 100여 개에 달하였다. 심지어 커피 값을 300∼400원 받던 다방이나 옷 가게에서도 작품을 거래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동시대 작품 시장은 화랑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 있었다고 할 수 있다.263)「화랑가 고객 늘자 변태 영업/다방·양품점서 화상 겸해」, 『중앙일보』 1978년 3월 18일자.

확대보기
1970년대 인사동 화랑가 지도
1970년대 인사동 화랑가 지도
팝업창 닫기

1966년에서 1979년까지는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고도성장이 이룩된 시기이다. 2, 3차에 걸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 운동을 통해 도시는 전면적인 재개발이 진행되었다. 도심 재개발 정책에 따라 청계천 복개 공사와 3·1 고가 도로, 세운 상가 등이 건설되면서 이 지역은 서울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주거 및 상업 시설로 각광받았는가 하면, 1970년대에는 과밀한 도시 환경 개선을 위해 본격적으로 영동 지구, 잠실 지구, 강남 지구를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개발 호조와 맞물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자 아파트 투기 붐이 절정에 달해 일명 복부인(福婦人)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면서 부동산 투기로 돈을 모은 졸부(猝富)가 속출하였다. 당시 일반 샐러리맨의 월급이 40∼50만 원 하는데 이상범의 산수화 대작이 2,000만 원을 호가하는 상황이 되자 미술품을 사는 행위는 졸부들의 비정상적인 소비 행태로 사회적 비난거리가 되었다. 1979년 『중앙일보』에 실린 ‘졸부들의 행진 : 소비 혼돈 시대’란 기사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확대보기
졸부들의 행진
졸부들의 행진
팝업창 닫기

부동산 투기나 장사 운이 터져 하루아침에 졸부가 된 이들은 우선 집을 옮기고 큰 공간을 채우기 위해 책방에 가서 호화 장정의 전집류를, 가구점에서 티크, 자개 가구를, 외제 냉장고에, 피아노를 들여놓아도 벽이 채워지지 않는다. 여기서 시작한 것이 미술품 투기이다. 처음에는 장식용으로 한두 점 샀지만 값이 나날이 뛰어 부동산보다 더 재미가 나게 되고 졸지에 대가의 개인전 출품작을 몽땅 사버리는 일조차 서슴지 않았다.264)「졸부들의 행진 : 소비 혼탁 시대」, 『중앙일보』 1979년 1월 15일자.

이러한 신흥 부자들의 미술품 투기 양상은 1970년대 후반에 부동산 경기 및 증권 시장이 침체 기미를 보이자 부동 자금이 골동품과 미술품으로 몰리면서 더더욱 고조되었다.265)「골동품, 그림 값 급등, 부동산 증시 침체로 부동 자금 몰려」, 『중앙일보』 1978년 9월 6일자. 도자기를 비롯한 골동품, 우표, 동전 등의 상품 가격을 올리기 시작한 것은 외국인이 먼저 시작하였으나, 시중 부동 자금(浮動資金)도 외국인들의 투자 패턴에 가세하여 민화나 제주도 절구통 같은 민예품까지 가격이 10배가량 뛰어올랐으며 골동품 가격이 상승하자 그림 값 역시 같이 동반 상승하였던 것이다.266)「골동품, 그림 값 급등」, 『중앙일보』 1978년 9월 7일자.

일명 ‘동양화 붐’의 시대라 불리는 미술 시장의 호황이 시작된 것은 1974년 중반부터이다.267)그러나 작품이 시장에서 잘 팔리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66년경부터 예고되고 있었다. 1966년 허백련, 김기창과 박래현 부부전을 비롯하여 프랑스에서 귀국한 남관과 김흥수 개인전 등 중견 작가의 전시가 여러 군데에서 열렸다. 이때 허백련은 45점 출품 중 40점, 김흥수는 43점 출품 중 30여 점, 남관은 28점 출품 중 20여 점, 박상옥은 개장 첫날 15점이 팔려 미술 시장의 호황을 예고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아직 대작보다는 15∼30호 정도의 소품 위주로 판매되었고 호당 평균 3,000원, 허백련의 경우 화선지 전지 반절에 5만 원 정도를 호가하였다. 당시 주요 고객층은 은행, 사업가, 국회의원 순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김기창과 박래현 부부전에서 각각 15점씩의 추상화를 선보였는데 이들 작품은 팔리지 않고 대신 전시장 옆에 따로 마련한 화조도(花鳥圖), 산수화 쪽으로 고객이 몰렸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시 고객의 취향이 여전히 추상화보다는 구상화, 실험적 작품보다는 전통적 양식의 작품을 선호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잘 팔리는 그림」, 『서울신문』 1966년 12월 6일자 ; 「풍성한 송년 화랑 : 연말 재정 금융의 긴축으로 울상을 하면서도 작품 매매는 좋은 편」, 『중앙일보』 1966년 12월 10일자). 일부 유명 작가를 중심으로 작품 가격이 상승하고 애호가와 수집가가 증가하면서 어떤 경우에는 한 작품에 매약되었다는 표시를 나타내는 빨간 딱지가 여러 개 붙어 마치 상품처럼 작품을 대량 생산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주요 구매층이었던 재벌급 실업가, 의사, 변호사, 회사 중역 이상 등 신흥 부르주아지와 그 부인들은 주로 전통적인 산수화나 세필 채색화, 인물화, 미인도를 선호하였다. 반면 서양화에 대한 선호도는 낮아 서울은 6 대 4, 지방은 좀 더 보수적이어서 8 대 2 정도의 비율로 동양화가 더 잘 팔려 이 시기를 동양화 붐의 시대라 부르게 된 것이다.

동양화 중에서는 육대가(六大家)라 불리는 이상범, 김은호, 변관식, 노수현, 박승무, 허백련이 가장 인기가 높았고, 서울에서는 그들의 제자 세대인 김기창, 장우성, 박노수, 천경자도 오대가 못지않게 팔렸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전혀 매매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김동수, 송수남, 송영방, 이규선, 이종상, 임송의, 하태진 같은 40대 작가도 서울에서는 매가가 있었으나 지방에서는 무명 취급을 받았다. 이것은 서울의 경우 실험적 성향이 보이는 작가가 적으나마 인정을 받은 반면, 지방은 좀 더 전통적이고 남화적(南畵的) 경향을 선호한 탓이다.

확대보기
미술의 상품화 풍자화
미술의 상품화 풍자화
팝업창 닫기

서양화는 매기가 없다가 197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서서히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나 주로 유화 작품만 팔렸다. 그리고 양식은 서울과 지방 모두 극단적인 추상보다 사실적 작품이나 화려하고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반추상이 선호되어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권옥연, 박영선, 박항섭, 변종하, 윤중식, 최영림 등이 비교적 인기를 누렸다.268)이구열, 「동양화 부움은 계속될까?」, 『계간 미술』 창간호, 중앙일보사, 1976, 42∼48쪽 ; 최홍근, 「그림 값」, 『계간 미술』 3호, 중앙일보사, 1977.여름, 179∼186쪽 ; 정중헌, 「화가, 화랑, 고객」, 『화랑』 5권 3호, 현대 화랑, 1977.가을, 31∼45쪽.

확대보기
이상범의 추경산수
이상범의 추경산수
팝업창 닫기

작고 작가는 가장 가격이 비싸서 박수근 그림은 1960년대 초에 3, 4호가 2,000원이었으나 1978년에는 호당 100만 원 이상, 이중섭은 호당 200만 원, 이인성은 호당 100만 원 이상, 도상봉과 김환기는 호당 30만 원을 호가하였다. 동양화는 화선지 전지가 수작(秀作)이면 이상범은 1,500만 원, 변관식은 1,000만 원선에 형성되었다.269)「오늘의 한국 화단 이대로 좋은가 <5> : 그림 값」, 『중앙일보』 1978년 10월 4일자. 1976년 국립 현대 미술관의 작품 구입비가 1,000만 원이고 문예 진흥원 예산이 600만 원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보면 한 점에 1,000만 원이 넘는 작품 가격은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될 만도 하였다. 더구나 1971년 소득세법 개정 당시에 정부가 문화 예술인을 장려하는 차원에서 예술가의 수입에 대한 면세 조치를 해주었기 때문에 한 달에 7만 원 봉급을 받는 봉급생활자도 갑근세(甲勤稅)를 내야 하는데 전시회 한 번에 1,000∼2,000만 원 수입을 올리는 고소득 작가는 전혀 세금을 내지 않았다.270)「고소득 예술인 과세 방침 어떻게 하나, 예술계 반응」, 『중앙일보』 1976년 8월 10일자 ; 「소득 높은 예술가들 방위세 외면」, 『중앙일보』 1979년 8월 8일자 ; 「예술인 과세에 멍군장군」, 『중앙일보』 1979년 9월 3일자. 결국 이에 대한 사회적 비판 여론이 비등(沸騰)하면서 고소득 예술인에 대한 과세 문제가 거론되었다. 그리고 1979년 화랑에 대한 세무 조사가 실시되면서 화랑가는 더 이상 호경기를 이어 가지 못하게 된다. 반면 작 가들은 화랑과 무관하게 고객과 직거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품 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271)「화랑에 손님이 없다」, 『한국일보』 1979년 4월 19일자 ; 「불황병에 시달린 상반기 화랑가」, 『한국일보』 1979년 7월 13일자.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