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4장 미술과 시장
  • 3. 광복 이후의 미술 시장
  • 개발 경제 시기 미술 시장의 활성화
  • 호당 가격제와 이중 가격제, 작가 직거래 관행
권행가

1970년의 미술 시장 호황 때는 일부 부유층 고객과 유명 작가가 시장 흐름을 주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1970년대 미술 시장의 활황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세계 미술 시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1960년대부터 뉴욕의 크리스티(Christie’s), 런던의 소더비(Sotheby’s) 같은 세계 미술 시장에서는 자본가, 은행가, 대기업가의 참여가 대거 증가하면서 회화뿐 아니라 공예, 중국 자기까지 최고가를 갱신하였다. 그리고 1970년대에는 일본과 석유 수출로 부를 축적한 중동의 신흥 부자들의 구매력이 증가하면서 전후 최고의 미술품 경매 붐이 일어났다.272)「전후 최고의 붐 미술품 경매」, 『중앙일보』 1972년 11월 6일자. 그러나 우리나라는 작품 가격을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경매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작품 가격 형성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이 속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문제가 작가 스스로 자기 작품의 가격을 결정한다는 것과 호당 가격제이다.

호(號) 개념은 캔버스의 규격에 따라 작품 가격을 산정하는 것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이 회화의 가장 균형 있고 합리적인 구도로 도입한 이래 모든 서양화 캔버스의 국제적 관례가 되어 왔다. 1호는 보통 우편엽서 크기로 여겨지는데, 같은 호라도 F형(인물형), P형(풍경형), M형(해변형)에 따라 폭이 다르다. 국내에서는 명확히 계산하지 않은 채 우편엽서 크기 정도로 사용해 왔다. 원래 동양화는 화선지 전지, 반절, 3분의 1, 6분의 1로 규격을 표시하였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점차 호당 가격으로 통일되어 갔다.273)최홍근, 앞의 글, 179∼186쪽.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있는 독특한 가격 산정 방식이라 할 수 있는 호당 가격제는 작품의 질에 따라 작품 가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크기에 따라 작품 가격을 정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작가는 질과 상관 없이 작품을 양산하게 되었으며, 고객의 쪽에서도 작품의 질보다 작가의 명성이나 화력(畵歷)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결과를 낳았다. 동시에 작가의 화력이 작품 값 결정에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비슷한 화력을 가진 작가의 작품 값이 함께 상승하고 말았다. 결국 팔리지도 않는데 작가들은 자존심 경쟁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작품 가격을 계속 올리고 대신 실제로는 그보다 낮은 가격으로 거래하는 이중 가격제 구도가 심화되었다.

이러한 이중 가격제와 호당 가격제의 문제는 화가들이 화랑을 거치지 않고 직접 고객에게 작품을 직거래하는 관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던 문제라 할 수 있다. 즉 일부 유명 작가가 화랑을 통해 거래할 경우 판매 가격의 30%를 화랑에 수수료로 주어야 하는 관행을 피하려고 자신의 작업실에서 고객과 직거래를 함으로써 화랑의 중개 기능을 무력화시켰다.274)1990년대 초에 화랑이 원로와 중진 작가는 30%, 중견과 신예 작가는 40%, 특별 계약, 전속 작가는 50% 마진을 취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규일, 「그림 값, 어제와 오늘」, 『뒤집어 본 한국 미술』, 시공사, 1993, 231∼232쪽. 작가의 직거래 관행과 이중 가격제, 호당 가격제는 1990년대까지 지속된 우리나라 미술 시장의 고질적인 관행으로, 미술 시장에 대해서 논할 때마다 미술 경매 시장의 필요성과 유통 질서의 확립, 작품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비평가나 미술사가의 양성, 미술 저널리즘의 발달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단골 메뉴처럼 반복되어 왔으나 시장의 구조를 단시일 안에 바꿀 수는 없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