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4장 미술과 시장
  • 3. 광복 이후의 미술 시장
  • 1990년대 이후 미술 시장의 다양화
권행가

우리나라 미술 시장의 역사를 보면 처음으로 미술 시장이 호황을 누리면서 미술품의 상품성이 인식된 시기는 1970년대 말이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980년대 말부터 1991년경까지는 제2차 호황기였으며, 다시 10여 년이 지난 2007년을 전후한 시기는 제3차 호황기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미술 시장이 대략 10년을 주기로 호황을 맞이해 온 것을 알 수 있다. 세 차례에 걸친 미술품 시장의 호황을 거쳐 오면서 미술품은 이제 일부 부유 계층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까지도 투자의 대상을 넘어서 천문학적인 차익을 기대할 수 있는 매력적인 투기의 대상으로 자리 잡아 왔다. 아울러 민중 미술과 제도권 미술이 대립하던 전두환 대통령의 제5 공화국을 지나 제6 공화국 이후 국제화·세계화가 통치 슬로건이 되면서 시행된 여러 법적·제도적 변화로 인해 미술 시장의 구조 역시 변화되어 왔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하여 2008년까지 미술 시장은 그 어떤 시기보다 급격히 달라졌다. 즉 국내 화랑의 해외 진출과 아트 페어(art fair)의 성장, 시장의 양극화, 청년 작가의 부상, 경매 시장의 부흥, 갤러리 사업의 확장과 변신, 고객층의 다변화 등 이 시기는 기존의 미술 시장 구조를 넘어서 국제화·다양화의 방향으로 진행된 첫 시기라 할 수 있다.

국내의 화랑들이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린 것은 1990년대 초반 미술 시장의 불황을 타개하려는 일종의 자구책(自救策)이었다. 1980년대 후반 증권 시장의 침체로 투자 자본이 미술품으로 대거 이동하면서 그림 가격이 다시 서너 배가량 뛰어올랐다. 이런 분위기를 쫓아 강남의 청담동, 신사동과 강북의 인사동, 동숭동 등지에 자고나면 화랑이 생긴다고 할 정도로 신설 화랑이 많이 생겨 미술 시장은 이상 과열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278)1980년대 초 화랑 협회에 소속된 화랑이 30개 내외였는데 1986년 아시안 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여 1991년에는 65개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 그러자 정부는 과소비 투기 대상 근절책이라는 미명하에 국세청이 화랑에 대한 세무 조사를 단행하였으며, 1990년 ‘서화·골동품 양도 차익 과세법’을 입법하여 1993년부터 시행하려 했다.279)서화 및 골동품 거래 차익에 대해 40∼60%의 양도 소득세를 부과하는 것으로, 1996년부터 양도 소득세 대신 일시 소득세를 신설하여 종합 소득세로 전환하였다가 미술계의 반발로 2001년으로 시행이 연기되었으며, 이 법은 결국 2003년 폐지되었다. 금융 실명제(金融實名制)의 실시와 함께 미술품에 대한 양도세(讓渡稅) 부과는 미술품과 투기 상품을 같은 차원에서 취급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소장자들이 자신의 신분 노출을 꺼리거나 작품 유통을 원치 않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작가와 고객 간의 편법 거래를 부추기는 등의 부작용을 낳아 결국 1990년대 미술 시장을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와 더불어 1989년부터 해외 미술 시장이 개방되면서 1990년부터 세계 최대의 경매 회사인 소더비나 크리스티 같은 해외 업체가 국내에 지점을 개설할 수 있게 되었으며, 1997년부터는 모든 미술품의 소매 유통업 자체가 개방되어 외국 화랑이 국내에 직접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280)해외 미술 시장 개방은 당시 미술계의 우루과이 라운드(Uruguay Round)라 불렸다. 1989년 7월 상공부가 수입 자유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그 품목에 회화 등의 미술품을 포함시켰다. 이어 1990년에는 조각, 조상 등을 개방하였으며 1991년 1월 1일부터 회화, 데생, 파스텔, 판화 등의 수입을 허용하였고, 1992년에는 모든 미술품 수입을 전면 자유화하였다(이규화, 「미술품 수입 자유화를 맞는 미술계」, 『월간 미술』 2권 12호, 중앙일보사, 1990.12, 130∼132쪽). 세무 조사, 양도 소득세법 등에 발이 묶인 화랑들은 이러한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길을 찾아 나섰다. 내부적으로 미술 시장의 유통 구조를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자 1990년대 중반부터 세계 3대 아트 페어인 파리 FIAC, 바젤 아트 페어(Art Basel), 시카고 아트 페어(Art Chicago)를 비롯하여 쾰른 아트 페어(Art Cologne), 마이애미 아트 페어(Art Miami), 동경 아트 페어 등에 진출함으로써 탈출구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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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한국 국제 아트 페어(KIAF) 전경
2007년 한국 국제 아트 페어(KIAF)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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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시장 진출과 함께 국내에서도 KIAF(한국 국제 아트 페어), 서울 아트 페어,281)1986년부터 한국 화랑 협회가 주최하는 미술제로 각 화랑들이 작가를 선정하여 공동 전시를 하면서 거래하는 상업적 목적을 띠는 것으로 일종의 미술 견본 시장이다. 1990년대 이후 유명 작가의 고가 작품 대신 청년 작가의 중저가 작품을, 대작 위주에서 소품 위주로, 여러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는 경향으로 가면서 미술 시장의 대중화를 지향하고 있다. 한국 현대 미술제, 서울 국제 판화 미술 페스티벌, MANIF(서울 국제 아트 페어) 등 대형 아트 페어가 매년 개최되는 등 미술 시장은 전체적으로 대중화·저변화·국제화의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282)최병식, 『미술 시장과 경영』, 동문선, 2005, 56∼57쪽, 도표 8 한국의 국제 아트 페어 참가 기록 참조. 2008년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MANIF전 타이틀이 ‘김 과장 전시장 가는 길’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화랑들은 아트 페어를 통해 기존의 미술품 호당 가격제와 이중 가격제, 작가와의 직거래 관행 등의 유통 구조 개선을 위한 정찰제를 도입하고 상대적으로 값싼 청년 작가의 작품을 대거 전시함으로써 미술 시장을 일부 부유층 중심에서 김 과장으로 대표되는 중산층으로 확대시키고자 하였다.

1990년대 이후 미술 시장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경매 제도의 도입이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화랑 체제 속에서 미술 시장의 구조적 모순으로 지적되어 온 호당 가격제, 이중 가격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경매 제도의 도입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가 있어 왔고, 그동안 경매를 여러 차례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제도로 제자리를 잡지는 못하였다.283)1979년 신세계 미술관에서 개최된 경매 시발로 1984년 송원 화랑, 1984년 인사동에서 장안평으로 옮겨간 고미술상이 모여 고미술 교환 경매전을 개최한 바 있고, 1986년부터 하나로 미술관 경매가 195회 실시된 적이 있었다. 화랑 협회에서도 1987년 교환 경매전을 개최한 적이 있었으나 일시적 행사에 그쳤다(이규화, 「한국 미술품 경매의 어제와 오늘」, 『월간 미술』 4권 6호, 중앙일보사, 1992.6, 50∼54쪽). 그러 나 현재는 1998년 가나 아트의 서울 옥션을 필두로 2005년 현대 화랑의 K 옥션이 설립되어 대표적 2대 미술 경매 시장으로 정착하였으며, 2000년 이후에 미술 시장이 다시 과열되면서 인터넷 미술 경매 시장 등이 수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미술 경매 제도의 도입은 1차 시장으로서의 화랑, 2차 시장으로서의 경매 시장 구조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미술품 가격을 합리화시키고 유통 질서를 확립한다는 긍정적 효과를 지닌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국내 거대 화랑인 가나 화랑과 갤러리 현대가 각기 서울 옥션과 K 옥션을 운영하는 주체이기 때문에 화랑과 경매 회사의 구분 없이 미술 시장의 운영 주체가 혼재되어 시장의 신뢰성과 전문성을 의심을 받게 되는 등의 문제점도 역시 수반하였다. 이런 의심은 화랑의 소장 작품을 그 화랑이 자본주가 되어 설립한 경매 회사에서 경매에 붙이는 파행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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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서울 옥션 경매 장면
2007년 서울 옥션 경매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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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95년 이후 정부가 의무 조항으로 실시한 ‘건축물 미술 장식품 관련 법안’은 국가가 조각 시장을 지원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원래 이 법안은 1984년 제정된 것으로 서울특별시의 경우 연면적 1만∼2만㎡ 이하의 건 물을 신축할 경우 건축비의 0.7%를, 2만m2를 초과할 경우 초과분 0.5%(1%에서 1997년 하향 조정됨)를, 기타 지역의 경우 연면적 7,000m2, 6층 이상의 건축물에 회화, 조각 등의 미술 장식품을 설치하도록 규정한 것이었다. 이 법안은 86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1985년 권장 사항에서 의무 조항으로 변경되면서 1984년 이후 조각, 회화로 한정된 것을 공예, 사진, 서예 분야와 벽화, 분수대, 상징탑의 환경 조형물로 확대하여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동안 미술 시장이 주로 회화에만 집중되어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조각 분야 쪽에서 볼 때 이 제도는 실질적인 시장의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나 일부 작가에 지원이 편중되거나, 리베이트(rebate)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작가와 거간(居間) 사이의 사전 작업에 의한 작품 결정, 담합에 의한 작품 가격 조정으로 인해 작품의 질을 하락시키는 문제 등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284)최병식, 앞의 책, 63∼64쪽, 176∼180쪽.

고객의 측면에서 보면 이 시기에는 고객층의 연령이 좀 더 낮아지고 좀 더 중산층으로까지 확대되는 변화를 보였다. 이것은 일부 부유층 부인, 기업인, 의사 등과 같은 상층부 계층의 전유물이던 미술품이 각종 아트 페어와 미술 경매 시장, 인터넷 미술 경매 시장, 아트 펀드 등 다양한 미술 시장으로 인해 접근이 쉬워지면서 일어난 변화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양상은 미술품의 가격은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다는 인식이 확대되면서 미술품을 사고파는, 부동산과 같이 시세 차익을 남기고 되파는 투자 상품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객의 취향 면에서 볼 때도 1970년대에는 동양화를 주로 구매하였고 사실적이거나 반추상적이면서 다소 장식적인 경향을 띤 서양화를 선호하였다면, 1980년대 이후에는 아파트 평수가 부의 척도이자 욕망의 대상이 되면서 동양화가 현격히 퇴조하는 대신 모던한 아파트 실내 공간에 어울리는 서양화가 시장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가령 2001년에서 2005년까지 경매 시장 지배율 21.6%를 차지한 작가 다섯 명을 보면 박수근, 김환기, 장 욱진, 천경자, 유영국으로 동양화가는 채색화가인 천경자만 포함되고 박수근, 김환기 불패신화(不敗神話)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다음으로 경매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된 작가를 보면 동양화가로는 김기창, 이상범, 변관식, 허백련, 김은호, 이왈종, 박생광, 민경갑 등의 순으로, 서양화가로는 이대원, 이중섭, 권옥연, 최영림, 남관, 김창렬, 박고석, 김종학, 오윤, 고영훈, 김흥수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285)서진수, 「한국 미술 시장과 블루칩 작가」, 2006년 발표문 : 김순응, 『돈이 되는 미술』, 학고재, 2006, 260∼264쪽 재수록. 여기서도 동양화가에 비해 서양화가가 많고, 세대 면에서는 1950년대 말 이후 앵포르멜(Informel) 세대와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민중 미술까지 시장 내에 흡수되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서양화 우위 현상으로 인해 그동안 꾸준히 동양화를 수집해 온 컬렉터들은 뜻밖의 손실을 보는 현상까지 속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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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택의 책꽂이
홍경택의 책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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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시기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해외에서 활동하거나 해외로 진출하여 각광받는 작가가 늘어난 점이라 할 수 있다. 백남준, 이불, 고영훈, 김홍주, 서도호, 조덕현, 김수자, 이상남, 이기봉 등은 해외에서 인정받는 작가이고, 함섭, 전광영, 정광호, 함진, 김동유, 홍경택 등은 국제 아트 페어나 경매를 통해 작품을 판매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처럼 작가나 작품 경향 면에서 과거에 비해 다양화되는 양상은 국제 시장 개척, 국내 미술 시장의 다양화, 고객층의 다양화 등과 맞물려 나온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크게 보면 우리나라 미술 시장의 역사는 우리나라 자본주의 상품 경제의 발달과 맥을 같이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상품 유통이 활발해지고 경제적 잉여로 부를 축적한 계층이 미술품의 소비자로 등장하면서 미술 시장이 상품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의 시장 왜곡은 미술 시장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아울러 일본인 자본과 조선인 자본의 이중 구조는 고미술품 시장에서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그뿐 아니라 광복 이후 원조 경제 시기의 반도 화랑, 1970년대 개발 경제 시기의 동양화 붐과 화랑의 발달, 1990년대 국제 통화 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받은 외환 위기(外換危機)와 미술 시장의 침체, 글로벌 개방 경제 시대의 미술 시장 개방 등 지난 100여 년 간의 정치적·경제적 구조의 변동 내에서 미술 시장의 구조 역시 만들어져 왔다.

이 과정에서 미술품은 때로는 문인 문화를 향수(享受)하는 대상으로, 조선을 대표하는 민속자료로, 수탈한 전리품으로, 상품으로, 지켜야 할 민족 문화재로, 그리고 투자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까지 지위가 바뀌어 왔다. 고객 역시 소수의 사회 상층부 그룹에서 중산층 대중으로까지 범위가 확대되어 왔으며, 취향 역시 고미술품과 동양화 일변도에서 서양화, 사진, 판화 등으로 확장되어 왔다. 그리고 그들을 매개하는 유통 구조 역시 확대되어 1차 시장으로서의 화상과 2차 시장으로서의 경매 시장이 서로 경합하는 시장 구조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00여 년의 역사 속에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년이 채 안 될 뿐더러 현재의 상황이 안정된 시장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즉 시장을 주도하는 거대 경매 회사와 화랑 간의 불투명한 역할 분담, 이로 인해 벌어지는 가격 담합과 여전히 불투명한 가격 구조, 위작(僞作)의 양산과 그에 대한 검증 시스템의 부재, 여전히 블루칩(blue chip) 작가에게만 고객이 쏠리는 시장의 양극화 현상, 젊은 작가의 빠른 세속화 현상, 화랑의 작가 육성 역할 부재 등은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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