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5장 도시 공간과 시각 문화
  • 1. 근대로의 이행
  • 사진과 인쇄 매체
김영나

근대 미술에 있어서 가장 새로운 문명의 표상으로 등장한 것은 인쇄물과 사진 매체였다. 신문, 교과서, 잡지 등의 발간으로 시작된 인쇄 매체는 근대 전환기의 지식을 전달하는 중추적인 계몽 도구였다.291)홍선표, 「근대적 일상과 풍속의 징조」, 『근대의 첫 경험』, 이화 여자 대학교 출판부, 2006, 17∼53쪽. 글, 그림이나 삽화, 사진 등을 복제해 대량 생산하고 유통하는 인쇄 매체가 대중에게 지닌 파급력이란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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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 양행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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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 양행의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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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인쇄국은 정부 직영의 출판 기관인 박문국(博文局)이다. 1883년(고종 20)에 설립된 박문국은 인쇄에 필요한 기계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일본인 기술자를 데려와 같은 해에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하였으나 곧 중단되고 말았다. 1886년(고종 23)에 다시 『한성주보(漢城周報)』를 창간하였는데, 바로 이 『한성주보』에다 함부르크에 본사를 둔 독일 무역 상사인 세창 양행이 ‘덕상 세창 양행 고백(德商世昌洋行告白)’이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근대적 상업 광고를 실었다. 광고(廣告)라는 단어 대신 ‘고백’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어 눈길을 끄는 이 광고는 물품을 싸고 정직한 가격에 팔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이 1896년(건양 1)에 창간한 한글 전용의 『독립신문 (獨立新聞)』에는 많은 광고가 실렸다. 『대한민보(大韓民報)』와 광무 정권(光武政權)의 대변지 『황성신문(皇城新聞)』이 1898년(광무 2)에, 최초의 민간 신문인 『매일신문(每日新聞)』이 1889년에 창간되었고, 1904년(광무 8)에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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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영의 신문 삽화
이도영의 신문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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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영의 신문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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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보』에는 이도영(李道瑩, 1884∼1933)의 삽화가 연속으로 실렸는데, 1909년 6월 10일자에는 서양식 양복을 입은 사람이 전통 한복을 입고 잠을 자는 사람에게 “고만 자고 어서 깨라”라는 말을 하고 있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6월 17일자에는 양복을 입고 원숭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남의 숭내’라는 캡션을 달고 있어, 서양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서양 문물을 흉내 내기에 급급한 세태를 비판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과서 발행 역시 인쇄 매체가 확장하는 초기 단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88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배재 학당(培材學堂, 1885년 설립)과 이 화 학당(梨花學堂, 1886년 설립) 등의 중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였으나 정부가 서당이나 성균관을 폐쇄하고 정식으로 ‘소학교령(小學校令)’을 공포하면서 초등 교육의 운영에 나선 것은 1895년(고종 32)이었다. 이와 같은 제도적인 교육은 교과서를 필요로 하였고, 교과서를 통해 근대적인 지식과 생활 방법, 가치관 등을 교육하고 보급하였다. 1895년에서 1899년(광무 3)까지 정부의 학부 편집국(學部編輯局)에서는 약 30여 권의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국민 소학 독본(國民小學讀本)』(1895)과 『소학 독본』이 최초의 교과서였고, 곧이어 소학교용 교과서로 편찬한 『신정 심상 소학(新訂尋常小學)』(1896)을 간행하였다. 당시 교과서의 출판과 편집은 우리나라에 전문가가 없어 대부분 일본인들에게 자문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 교과서나 삽화를 그대로 따른 경우가 많았다. 『최신 초등 소학』(1908)에서도 ‘그림 그리다’라는 제목과 함께 양복을 입은 남자가 이젤(easel)을 놓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보여 주어 그림이란 자연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서양의 회화 개념에 근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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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초등 소학』의 삽화
『최신 초등 소학』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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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통계에 의하면, 당시 전국에 있는 보통학교(普通學校)의 학생 수는 남학생 3만 8000명, 여학생 3,100명으로 4만 명이 조금 넘었다. 그런데 1921년에는 남학생이 14만, 여학생이 2만 정도로 증가해 모두 16만이 되었고, 20년 후인 1942년에는 남학생 120만, 여학생 53만으로 모두 170만이 넘었다.292)김윤수 외, 『한국 미술 100년』, 한길 아트, 2006, 162∼163쪽. 글을 읽을 수 있는 인구가 증가한 것은 신문, 잡지, 소설의 시장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1917년에는 이광수(李光洙)의 소설 『무정(無情)』이 『매일신보』에 연재되었고, 이것이 이듬해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1만 부가량이 판매되었다. 1908년에 최초의 소년 잡지 『소년』의 발간을 필두로 잡지가 본격적으로 발간되기 시작하였는데, 잡지 발행이 가장 활발하였던 1920년대에는 무려 168종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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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의 정청
김기창의 정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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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와 소설의 발간은 지식인 및 대중 담론의 공간을 형성해 주었다. 잡지에 글을 쓴다는 것은 지식인의 대단한 특권이었고 생활과 가치 판단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잡지 출판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20∼1930년대에는 『삼천리』, 『별건곤』, 『조광』뿐 아니라 『신여성』, 『신가정』, 『여성』, 『여성 공론』, 『부인 경향』 등의 여성 잡지도 많았다. 어느 정도 글을 읽을 수 있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이들 잡지는 근대적 가정과 사회를 위해 여성이 생활 개선에 앞장서야 한다는 계몽적 기사를 많이 실었다. 이들 잡지는 위생 과 건강, 미용, 요리, 육아, 재봉 관련 기사를 많이 실어 여성 문화를 선도하였으며, 집안과 아이들을 잘 관리하고 보살피는 것을 여성의 덕목(德目)으로 격려하였다. 건축가들이 근대적 건축을 설계하였다면 여성들은 가정에 우아함과 문화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문화생활을 하는 근대인들의 모습은 화가들의 화폭에도 반영되었다. 1930년대에 독서하는 여성이나 뜨개질, 음악 감상을 하는 여성 이미지가 많이 나타나는 것도 여성의 교양을 강조하던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김기창(金基昶, 1914∼2001)은 ‘정청(靜聽)’(1934)에서 벽에 그림이 걸려 있는 서양식 실내에 젊은 어머니와 딸이 축음기를 틀어 놓고 음악을 감상하는 모습을 그렸다. 단아하게 차려 입은 어머니는 쪽을 지고 전통 한복을 입었으나 구두를 신고 있다. 청결해 보이는 서양식 실내에서 의자 생활을 하고 그림을 감상하고 음악을 듣는 이들의 모습은 전통적인 가정과는 완연히 다른 근대적 가정의 초상이다. 일본을 통해 들어온 여성 교육은 서양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가정을 교육이 시작되는 곳으로 보았고, 근대적 여성 교육은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을 잘 교육시키는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293)김영나, 「논란 속의 근대성, 신여성과 모던 걸」, 『미술사와 시각 문화』 2, 미술사와 시각 문화 학회, 2003, 8∼37쪽 참조.

잡지에 실린 광고는 이런 독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광고를 통해 신문화를 배웠다. 잡지가 본격적으로 삽화, 사진, 광고 등을 싣기 시작한 것은 망판(網版) 인쇄 시설을 갖추고 윤전기(輪轉機)를 도입하면서부터였다. 잡지에 실리는 삽화, 도안, 표지화는 지식과 정보뿐 아니라 ‘이미지’가 중심인 시각 미술의 발달을 촉진하기 마련이다. 신문 광고는 처음에는 문장으로만 채워졌으나 곧 이미지를 싣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광고 대행업체도 생겨났다. 첫 번째 광고 업체는 1910년에 설립된 한성 광고사(漢城廣告舍)로 알려져 있는데, 1920년대부터는 여러 개의 광고 대행사가 생겨 본격적으로 활동하였지만, 비율은 총 발행 면수의 10%를 넘지 못하였고 광고주는 대부분 일본 회사였다.294)신인섭, 『한국 광고사』, 나남, 1986,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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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광고사의 광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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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나 잡지에서는 일본의 상품 광고를 그대로 받아서 문안을 한글로 바꾸거나 일본 옷을 한복으로 바꾸는 정도로만 변형해서 실었다. 이것은 광고가 전제하는 구매 대상에도 혼란을 가져올 뿐 아니라 은연중에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내포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모리나가(森永) 캐러멜의 광고에서는 일본에서 사용하던 “우리의 기운은 일본의 기운, 캐러멜을 먹었으니 기운이 더 난다.”라는 문안을 그대로 실어 조선인 독자들을 ‘우리’ 일본에 동화하게 만들었다.295)이기리, 「일제시대 광고와 제국주의, 1920∼1945년까지의 주요 일간지와 잡지 광고를 중심으로」, 『미술사 논단』 12, 한국 미술 연구소, 2001 상반기, 133∼134쪽.

가장 광고를 많이 한 것은 약과 화장품이었다. 화장품 광고 중에는 오늘날 두산 그룹의 창업자인 박승직(朴承稷)이 운영하던 포목점(布木店)에서 박승직의 부인 정정숙이 1915년부터 소규모로 제조하여 사은품으로 제공하다가 그 후 선풍적인 인기를 끈 박가분(朴家粉)처럼, 고전적인 여인의 이미지를 내세워 “죽은 깨와 여드름이 없어지며 얼굴에 잔 티가 없이 피부가 윤택하고 고아”진다고 선전하는 국산 화장품도 있었다. 그러나 화장품 광고도 대부분 일본 화장품 업체가 게재하였는데, 백색미안수(白色美顔水)는 “옛날 분은 연독의 무서운 것을 최근의 과학으로 잘 알게 되었고” “동경이나 대판(大阪)에서는 상류층 부인들에게 이 분이 많이 유행하는 중”이라는 문구로 과학과 유행을 앞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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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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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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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는 처음에는 삽화 같은 드로잉(drawing) 형식의 이미지를 사용하다가 점차 사진을 사용하게 되면서 사진은 큰 각광을 받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일찍이 1839년에 다게르(J.M.Daguerre, 1787∼1851) 타입의 은판 사진(銀板寫眞)이 처음 나온 이후로 19세기의 경이로운 발명품으로 주목을 받아 왔던 사진이 일본이나 중국에 전파된 것은 1840년대였다. 우리나라에서 사진을 처음 접한 이들은 1860년대에 중국에 간 사행원(使行員)이나 일본에 수신사(修信使)로 파견되었던 사신이었다. 이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였는데, 당시 찍은 사진으로 현재까지 전해오는 것으로는 1872년(고종 9)에 찍은 역관(譯官) 오경석(吳慶錫, 1831∼1879)의 사진이 있다.

1880년대 이후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진관이 들어와 영업을 시작하였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사진관이 문을 연 것은 1883년(고종 20)이었다. 수신사와 함께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 자격으로 일본에 건 너가 사진술을 목격하였고 그 후 수군우후(水軍虞候)를 지낸 김용원(金鏞元, 1842∼1892)이나 개화 관료였던 황철(黃鐵, 1864∼1930)이 한성에서 촬영국(사진관)을 설치하였다. 황철은 도화서를 폐지하고 초상이나 기록화를 사진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296)최인진, 『한국 사진사 1631∼1945』, 눈빛, 1999, 99쪽. 이듬해인 1884년(고종 21)에는 일본을 수신사로 오가며 사진을 배운 지운영(池運永, 1851∼1935)이 독일제 사진 기재를 사서 현재의 송현동 부근에 사진국을 개설하였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사진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터라 사진은 국가 기밀을 누설할 위험이 있고, 사진을 찍으면 단명한다는 이야기가 나돌았고,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에는 황철의 촬영국에 사람들이 몰려와 기자재를 모두 부수어 버리는 사건도 있었다.297)최인진, 앞의 책,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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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지 10층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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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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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매력은 기계로 사람이나 사물, 풍물을 그대로 재현하기 때문에 과학적일뿐 아니라 놀랄 만큼 정확하다는 점에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초상 사진은 도입 초기부터 수요가 있었다. 1907년(융희 1)에는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을 열어 영업을 시작하고 신문에 광 고도 냈다. 하지만 작은 사진이 50전, 큰 사진은 4원 반으로 매우 비쌌기 때문에 일반인이 사진을 이용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298)참고로 1916년에 쌀 한 석(144㎏)이 4원 정도였다. 최인진, 앞의 책, 220쪽, 주 29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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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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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사진의 주요 고객은 주로 황실이나 귀족이었다. 1881년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에 조선 정부가 일본인 사진가를 통해 일본 황족들의 사진을 구하려고 한다는 기사가 난 것으로 보아 조선 왕실은 유럽식 군복이나 양복을 입은 일본 황실의 사진을 보았을 것이다.299)이은주, 「개화기 사진술의 도입과 그 영향-김용원의 활동을 중심으로-」, 『진단학회』 93, 진단학회, 2002, 152쪽.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고종은 사진 찍기에 별 거부감이 없었던 듯하다. 현재 알려진 고종의 첫 번째 사진은 1884년(고종 21) 미국인 퍼시발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6)이 찍은 사진으로 당시 지운영도 같이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찍은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정부가 1883년(고종 20)에 미국으로 보낸 보빙사(報聘使)를 미국에서 안내하고 수행하였던 로웰은 1884년에 왕의 공식적인 초청을 받고 서울에 왔다. 그는 4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이 사진을 찍었고, 당시 그가 촬영한 사진 일부를 보스턴에서 1886년에 출간한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 싣기도 하였다.

창덕궁에서 촬영된 고종의 모습은 이제까지 왕의 초상이 어진(御眞)으로 진전(眞殿)에 봉안되는 제의적(祭儀的) 기능을 가졌던 전통에서 벗어나 근대 국가 군주의 초상으로 나타난다. 고종은 로웰 이외에도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을 비롯한 외국인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찍거나 그리는 것을 허락하였다. 고종이 이렇게 한 까닭은 정치적 차원에서 근대 국가의 군주로서 가시화되고 범국민적 여론을 형성해야 할 필요 때문이었다는 견해도 있으나, 군주의 초상 사진을 교환하는 당시의 외교 관습에 따른 실무적인 필요 때문이었다는 의견도 있다.300)권행가, 「사진 속에 재현된 대한제국 황제의 표상-고종의 초상 사진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 미술 사학』 16, 한국 근대 미술 사학회, 2006 상반기, 24∼25쪽. 1907년(융희 1)에 즉위한 순종의 사진은 대부분의 관공립 학교에 배포되었고 각종 행사에 걸리게 된다. 왕의 얼굴을 함부로 볼 수 없고 왕의 행차 때에는 엎드리게 하던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 왕은 이제 국가의 상징적 이미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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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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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남아 있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의 사진은 초상 사진을 제외하면 풍경이나 풍습을 촬영한 것이 대다수이다. 이 중에는 우리나라를 방문한 호기심 어린 외국인들의 여행 사진도 있으나 전문 사진가나 외교관 등이 찍은 정보용 수집 사진도 많다. 주로 시골의 주민이나 초가집을 찍은 외교관들의 사진은 조선을 미개하고 전근대적이며 이국적인 이미지로 고정시킴으로써 제국주의의 도구가 되었다.

특히 일본은 정책적 차원에서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사진을 이용하여 우리나라에 대해 많은 지형적 정보나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301)사진이 인간의 눈보다 더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하여 유럽에서는 1840년대에 범죄자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분류하고 분석하는 작업에 사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 말에는 신체의 타입, 인종, 골상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많은 사진 자료를 모으고 분류하였다. 한일 병합 이후 일본은 유럽 인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의 식민지에서 행한 선례를 따라서 조선에서 민속자료(民俗資料)와 고적(古跡)의 체계적인 아카이브(archive)를 구성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진 아카이브 중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이 조선 총독부 촉탁(囑託)으로 임명된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주도한 조선 주민의 신체 측정이다. 1910년부터 전국의 주민들을 성, 연령, 지역, 직업 별로 나누어 정면과 측면의 얼굴을 촬영한 사진 아카이브는 결국 서구식 분류법에 의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 출신에 어떤 신체적·물리적 특징을 가진 인물이 많은가를 알 수 있는 데이터 구축 작업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이름을 앞세워 자행된 이 조사는 중요한 사회적·문화적 의미를 함축한다. 약 140여 지역의 주민을 촬영한 사진에서 피사체가 된 인물은 주체성을 상실한 채 단순한 관찰의 대상으로 물화(物化)되고 타자화(他者化)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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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형 측정 사진
체형 측정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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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잡지를 위시한 대중 매체의 발행이 활발해진 1920년대부터 사진도 함께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초창기에는 주로 개인의 초상화 대용이던 사진은 이제 집단이나 군중의 모습을 보여 준다. 개인은 익명화(匿名化)되었고, 군중은 이제 하나의 익숙한 도상(圖像)으로 다가왔다. 사진은 일상 생활, 정치적 사건, 여행, 패션과 소비의 이미지와 정보를 공급하는 새로운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이 시기의 문화 형성에서 중요한 매체로 자리를 잡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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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부근
동대문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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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시야의 강력한 확장이라는 면에서 매력적인 사진 분야는 포토저널리즘(photojournalism)이었다. 더 멀리, 더 많이 기록할 수 있는 사진의 능력은 특히 신문 사진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높은 창공에서 찍은 장면과 같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이나, 아래에서 위를 올려보는 시점, 또는 기울어진 각도에서 찍은 사진의 새로운 시각은 근대적 시각 매체로서 사진의 기능을 충분히 보여 주는 것이었다. 사진은 이와 같이 클로즈업이나 카메라 앵글의 조작, 또는 잘라내기 같은 방법으로 보는 방식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었다.

휴대용 카메라가 다량 보급되면서 사진을 직업으로 삼지 않았던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대거 활동하게 된 것은 1930년대 이후부터이다. 이들이 직업적으로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던 사진사들과 차별화된 아마추어 사진 단체를 형성하고 신문사 주최의 공모전 등에서 전시를 하면서부터 예술로서의 사진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었다. 당시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주도하던 사진의 경향은 서구에서 1880년대에서 1910년대까지 회화적 효과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불리던 ‘픽토리알리즘(Pictorialism)’이었는데, 이 용어를 일본에서 ‘예술 사진’으로 번역하였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였다. 예술 사진을 하던 이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인화(印畵) 과정이었다. 이들은 인화 과정에서 세부 묘사를 흐리게 하는 연초점(軟焦點)을 이용하거나 명암, 톤 등을 조작하여 예술적 효과를 강조하였는데, 특히 풍경 사진에서 이러한 기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1929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 사진 전람회를 연 정해창(鄭海昌, 1907∼1967)의 사진은 인상주의 회화와 같은 우연하게 포착된 풍경과 인물을 보여 준다. 순수한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그의 사진은 이 무렵 회화의 향토적 경향과도 비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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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창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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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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