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1권 근대와 만난 미술과 도시
  • 제5장 도시 공간과 시각 문화
  • 2. 1950년대 이후 도시와 시각 문화
  • 전후 도시와 건축
김영나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면서 우리나라는 독립을 되찾았으나 해방 공간은 우리가 꿈꾸던 것처럼 자율적이고 독립적이고 평화롭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1945년에서 1948년까지 미군정하에 있으면서 남북의 이념 대립을 겪었고, 1950년 6·25 전쟁의 발발로 3년 동안 전쟁을 치러야 했다. 1953년 휴전이 성립된 후 모든 것이 파괴된 상황에서 안정을 다시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울시에는 판잣집들이 여기저기 들어찼고, 수도와 전기는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으며, 거리에는 거지가 돌아다니고 지게꾼과 우차(牛車)가 즐비하였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무렵에 거리에서 여성 노동 인력을 많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전후의 고단한 생활 속에서 이제까지 집이라는 사적 공간에 머물던 평범한 여성들이 돈벌이를 위해 생활 전선에 나서면서 남성들의 공간인 공적 공간으로 대거 진출하였다. 누구보다도 거리의 모습을 잘 관찰한 화가는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이었다. 그는 거리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 사람이나 노동하는 여성 등 서민의 고달픈 삶에 관심을 가졌다. 박 수근의 작품에서는 건장한 남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여성은 거리에서 행상을 하거나 물건을 머리에 인 채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으며, 노인은 거리에서 담배를 물고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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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의 귀로
박수근의 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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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의 노점
박래현의 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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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그린 또 다른 화가 박내현(朴崍賢, 1920∼1970)은 1956년 국전(國展,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서 ‘노점(路店)’으로 대통령상을 탔다. 그러나 박수근과는 달리 박래현은 삶의 고달픔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서구적 모더니즘(modernism) 양식의 적용에 더 주력하였다.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한 박래현의 여성들은 서구의 모더니즘적 형태로 분석되어 매우 현대적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화를 배웠던 박래현의 이러한 변화는 큐비즘(Cubism)의 분석적 양식을 적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는 문화의 모델이 일본에서 유럽과 미국으로 바뀌었음을 반영하는 하나의 예이기도 하다.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난 1950년대에는 모든 것이 뒤떨어져 있다는 의 식이 팽배하였고, 따라서 문화의 주요 담론은 국제화였다. 국제적인 흐름에 대한 관심은 건축에서도 나타났다. 건축 사무소가 개설되면서 전후의 판잣집과 기능 위주로 급하게 지은 철근 콘크리트 건물은 디자인적인 고려가 들어간 건축물로 바뀌었다. 당시의 가장 주요한 경향은 국제 양식(International Style)이었다. 서양에서 바우하우스(Bauhaus) 양식으로 대변되는 국제 양식은 수평적으로 반복되는 창문과 흰 벽의 내부로 이루어진 거대한 상자 형태의 건축물로 나타났다. 이 무렵 프랑스에서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의 사무소에서 일한 후 1957년에 귀국한 김중업(金重業, 1922∼1988)은 1959년에 프랑스 대사관 설계의 현상 공모에 당선되었다. 그의 프랑스 대사관 건축은 기본적으로 르코르뷔지에의 기능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조형과 한국적인 지붕의 곡선을 살리는 대담한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김중업의 국제 양식이 가장 잘 나타난 건물은 시카고의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을 모델로 한 ‘삼일로 빌딩’이었다. 1966년 완공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았던 31층짜리 삼일로 빌딩은 거대한 철골과 유리로 된, 장식이 없고 네모꼴의 순수하고 단순한 형태인 미스 반 데르 로에(Ludwig Mies van der Lohe, 1886∼1969)의 전형적인 국제 양식을 보인다. 이후 이러한 국제 양식은 도심 곳곳에서 솟아오르던 고층 건물의 대표적인 양식이 되었고,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스카이라인(skyline)을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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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로 빌딩
삼일로 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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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양식은 기본적으로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이상주의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건축 양식이지만 개별 도시의 역사와 전통을 배제시킨 양식이라는 점에서 특정한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기는 어렵다. 1961년 박정희 대통 령이 집권하면서 19년 동안 계속된 제3 공화국에서는 경제 성장과 수출 진흥에 박차를 가하면서 현대화를 이루고자 하였지만, 문화 면에서는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전통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화두(話頭)로 부상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민족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서구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문화적 정체성의 확립과 전통으로의 회귀를 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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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민속 박물관
국립 민속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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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계에서도 우리의 건축이 서구나 해외의 사조를 추종한다는 위기의식(危機意識)이 한편에서 공감을 얻기 시작하였다. 전통의 창조적 계승과 한국적인 건축에 대한 요구는 특히 국가에서 주도하던 건물에 강하게 반영되었다.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김수근(金壽根, 1931∼1986)이 설계한 부여 박물관이 일본 건축의 ‘도리’와 비슷하다는 비판이 나온 것도 이때였다. 민족적 색채에 대한 요구에 부응하는 건축 디자인으로는 1966년 현상 공모에서 당선된 강봉진(姜奉辰, 1917∼1998)의 국립 중앙 박물관(현재 국립 민속 박물관) 건축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건축은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 등을 종합해서 설계한 것으로,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수용하는 데에 그쳐 당시에도 많은 논 란을 불러일으켰다. 한편에서 한국적인 것 또는 고유한 민족적 정서가 드러나야 한다는 시각을 강조하였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적인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세계적인 흐름, 즉 국제성에 뒤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시각 역시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통과 현대, 또는 한국성의 표현이라는 문제는 1960년대 이후 문화 전반의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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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 서울 전경
1960년대 말 서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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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주택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옥이 많이 남아 있었으나 목재의 수급이 어려워지자 주택은 대부분 시멘트와 벽돌로 지은 양옥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성격상 실용적일 수밖에 없었던 민간의 양옥은 거실이 한옥의 대청마루처럼 마룻바닥으로, 거실 둘레에 들어선 방은 대부분 온돌로 된 경우가 많았다.311)전봉희, 「한옥의 역사와 미래 전망」, 제1회 한국 내셔날 트러스트 한옥전, 『우리 집은 한옥이다』 전시 도록,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 2007, 25쪽. 다시 말해서, 서양식 양옥 구조와 한국인들의 생활양식과 취향이 적절하게 뒤섞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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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 대교 전경
양화 대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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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부터는 도시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도심부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김포 공항에서 마포, 서대문을 거쳐 태평로에 이르는 대로는 해외 귀빈들이 서울로 진입해서 거치게 되는 주요 통로였다. 그 결과 이 일대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미지를 감안하여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섰고, 상대적으로 태평로의 남대문은 초라해지고 말았다. 변화는 도심부에 그치지 않았다. 한강의 고수부지(高水敷地)가 정리되었고, 양화 대교·한남 대교·마포 대교 등을 비롯하여 한강 북쪽과 남쪽을 연결하는 다리가 속속 건설되었다.

1963년에 325만 명이던 서울 인구는 1981년에 868만 명으로 늘어났고, 2000년에는 1,000만 명을 넘어섰다. 정부는 인구 증가와 함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여의도에서 시작하여 강남과 잠실에 택지를 조성하였으며, 여 기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아파트 건설은 1976년부터 시작된 중동(中東)의 건설 붐으로 기술과 시공 능력이 향상된 대형 건설 회사들이 더 나은 주거의 질을 요구하던 국내 아파트 건설에 거대한 자본을 가지고 뛰어들면서부터 우리나라 경제의 중핵(中核)으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에는 목동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으며, 곧이어 일산과 분당이 수도권 지역의 방계 도시(傍系都市)로 개발되었다. 이제 서울뿐 아니라 도시는 대부분 획일화된 아파트로 뒤덮였으며 아파트가 우리나라 주택량의 반을 넘어서게 되었다.312)전봉희, 앞의 글, 26쪽. 또 어느 지역에 있는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느냐가 사회 계층을 나누는 척도로 작용하였으며, 아파트는 주거 공간뿐 아니라 투기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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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의 아파트
초창기의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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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아파트 분양 광고나 모델 하우스 광고가 신문이나 잡지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넓은 공간과 고급 가구로 꾸민 아파트 내부 의 실내 사진은 아침에 배달되는 신문 사이에서, 또는 집집마다 보내는 건설 회사의 광고지에서 소비자의 욕망을 부추겼다. 또한 각종 여성 잡지에서도 중산층을 대상으로 현대적이면서 우아하게 사는 의식주(衣食住)의 방법을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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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서울 시내 전경
오늘날의 서울 시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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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아파트 문화는 이제까지 동양화 중심이었던 미술 시장을 서양화 중심으로 변화시켰다. 아파트의 넓은 벽은 수직이나 수평으로 길게 걸어야 하는 동양화보다는 서양화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미술 작품을 실내 인테리어와의 조화 여부에 따라, 또 자신의 부나 교양을 과시하기 위한 장식물의 차원에서 구매하는 관람자는 이제 단순히 미술을 관람하고 즐기는 차원을 넘어 미술을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사람이 되었다.

정연두(鄭然斗, 1969∼ )의 ‘상록 타워’(2003)는 이러한 우리나라 아파트 문화의 단면을 집어낸 흥미로운 사진 작품이다. 그는 25평의 동일한 구조에 사는 임대 아파트의 주민 32세대의 거실을 찍었다.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실제 그 아파트에 사는 젊은 가족들로, 주로 부모와 두세 명의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이다. 정연두는 이 32세대의 거실 사진을 가로로 8점, 세로로 4점을 연결해 전시한다. 그러므로 사진을 보는 관람자는 마치 거실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위치에 있게 된다. 획일적이며 개성 없는 아파트의 실내 구조 속에서도 각 가족은 카메라 앞에서 취한 포즈, 옷차림, 가구, 텔레비전, 에어컨, 벽에 걸린 그림 등에서 완연히 차이가 나고, 그들의 취향과 가치관 그리고 일상의 욕망이 섬세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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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두의 상록타워
정연두의 상록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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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에는 오랜 세월 동안 권력을 잡았던 군부 정권 대신 김영삼 대통령의 민간 정부가 들어서고 중국이나 동구권과 수교를 맺으면서,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개방 쪽으로 흘렀다. 이제 서울은 글로벌시대에 걸맞은 국제도시(國際都市)로 탈바꿈하였다. 1980년대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러시아 발레단의 공연에서부터 해외의 유명한 미술가의 전시를 다양하고 쉽게 접하게 되었다. 세계의 미술가들을 초대한 대규모 미술 전람회인 광주 비엔날레(Gwangju Biennale)가 1995년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수많은 비엔날레의 붐이 일면서 미술은 일반인과 더 친숙해졌다. 또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면서 대학생뿐 아니라 기업의 해외 연수, 주부들의 단체 해외여 행 등이 활발해졌고, 반대로 외국 노동자들의 국내 취업도 증가하였다. 한편에는 아직도 단일 민족의 자부심과 국수주의(國粹主義)가 강하게 남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타 문화를 인식하고 타자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이제 거대 도시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보편적인 소속감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대신 계층, 수입, 연령 등에 따라 지역적 특성이 좀 더 두드러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서울 강북의 경우 세종로가 정치적 공간이라면 신촌과 명동은 소비적 공간의 특성을 띠고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줄곧 소비와 유행을 이끌었던 명동은 이제 주로 젊은 사람들의 소비 공간으로 축소된 반면, 신촌의 홍익 대학교 앞은 대학생들의 공간으로, 한남동·이태원·반포의 서래 마을 등은 외국인 거주자의 공간으로 각각 독특한 지역적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애당초 이태원은 주로 미군 기지 근처에서 미군을 상대로 하던 상권이었지만 용산 기지 이전 방침이 확정된 이후에 러시아,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에서 온 외국인 인구가 훨씬 늘었다. 널찍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세련된 건물이 줄지어 있는 강남은 패션과 카페, 성형외과, 미용실이 즐비하게 들어선 첨단의 유행과 소비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압구정동이 생활수준(生活水準)이 비슷한 부유층의 거주지와 소비 지역을 겸하는 지역적 정체성을 갖게 되면서 시인 유하(1963∼ )의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와 같은 책도 나왔다.313)유하,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문학과 지성사, 1991.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강남에서 비싼 수입차를 몰고 다니면서 젊은 여성을 유혹하는 남성들을 수입 과일인 오렌지에 빗댄 ‘오렌지족’이라는 단어도 등장하였다. 이 단어는 지성과 삶의 깊이보다는 자유로운 생활 방식과 감각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새로운 세대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압구정동의 명성도 2000년에 들어와서 바로 옆 청담동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될 만큼 유행과 패션, 그리고 소비의 중심은 급속히 이동하였다.

이렇듯 우리의 도시가 빠르게 변화함에도 불구하고 치밀하지 못한 도 시 계획과 행정, 인구 집중 때문에 도시인의 삶은 갈수록 복잡하고 혼잡스럽다. 10차선이 넘는 대로는 늘 차량으로 빽빽하고, 도시는 거의 남향의 아파트 단지로 뒤덮여 있으며, 주소만 가지고는 길을 찾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혼잡하고 변화가 빠르다.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건물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새로 세운 건축도 옥외의 대형 이미지 광고나 전광판으로 가려지기 일쑤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러한 도시 공간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하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시도의 중요한 키워드는 디자인이다. 오세훈 서울 시장이 서울시를 디자인화하겠다고 선언하더니, 2008년에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은 도시와 건물에 공공 디자인 개념을 도입해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디자인 코리아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였다.314)『조선일보(朝鮮日報)』 2008년 1월 22일자, 일면. 21세기는 ‘디자인의 세기’라는 말이 자주 들리고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도처에서 등장한다. 모두 디자인적 요소를 강조하다 보니 미술 작품이 실내 장식의 한 부분으로 빈번히 기능하고, 건축도 디자인에 가려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웰빙(well-being)과 쾌적한 라이프스타일(life style),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미적 감각을 요구하는 것이 21세기의 대세인 것 같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앞으로도 시각 문화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될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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