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1장 근대 여행의 시작과 여행자
  • 1. 관광과 여행의 어원
황민호

서양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관광(觀光)의 기원(起源)은 그리스·로마시대에 있었던 올림픽 경기 참가, 온천 요양, 신전 참배 등으로 오늘날의 체육·요양·종교 등 특정 목적을 위한 관광과 비슷한 유형이었다. 그리고 여행(旅行)하는 사람을 ‘신성한 사람’으로 우대하는 관습이 있었다.

중세의 관광은 십자군(十字軍) 전쟁의 영향으로 동서의 문화가 교류하면서 이문화(異文化)에 대한 호기심이 늘어났고, 예루살렘 등 성지 순례에 대한 열망이 보편화되면서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여행은 주로 가족 단위로 수도원에서 숙박하고 기사단(騎士團)의 보호를 받으면서 이루어진 종교 관광이 성행하였다.

근대적 의미의 관광은 19세기에 들어와서 본격화되었다. ‘근대 관광 산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의 여행 사무 대행업자 토머스 쿡(Thomas Cook, 1808∼1892) 목사는 처음으로 철도 관광을 위한 여행 알선 업체를 창설하여 단체 관광객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또 기선(汽船) 발명 이후에는 세계적으로 관광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관광 산업을 무형의 수출(invisible trade)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발전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대량 수송 매체와 커뮤니케이션 의 발달, 개인의 소득 증대로 여가가 늘어나자 관광 수요는 폭발적으로 신장하였다.1)이웅규·김은희, 『관광과 문화』, 대왕사, 2002, 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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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의 여행 또는 관광에 관한 어원(語源)을 살펴보면 영국에서는 정주지(定住地)를 떠나 장소의 이동을 의미하는 용어로 Travling을 사용하였는데, Travel은 Travail(고행·노고)의 파생어로 ‘일을 하다’라는 일상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Trouble(걱정·고뇌), Toil(고통·힘든 일)과 같은 어원에서 파생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Tour라는 단어가 사전에 등장한 것은 1652년경이며, Tourism 혹은 Tourist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811년 영국에서 발행된 『스포팅 매거진(Sporting Magazine)』에서였다.2)닝왕, 이진형·최석호 옮김, 『관광과 근대성』, 일신사, 2007, 24∼25쪽.

독일에서는 Tourism과 유사한 단어로 Fremdenverkehr이라는 말을 사 용하는데, Fremden은 낯선 외국인(손님)이라는 뜻이고 Verkehr는 왕래, 교제, 거래라는 뜻이라고 한다. 또 Voyage는 원래 항해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현재는 일반 여행의 개념까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특히 군대에서 원정(遠征)의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 밖에 Tour라는 말을 어원으로 보면 여러 나라를 순회(巡廻) 여행하는 것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결국 여행 혹은 관광이란 자기의 일상 생활권을 떠나 다시 돌아올 예정으로 다른 나라나 다른 지방으로 떠나는 이동 행위와 견문(見聞)의 확대를 의미한다.3)김종은, 『관광학 원론』, 현학사, 2000, 19∼20쪽.

그러나 관광에 대한 이러한 어원의 정의에도 불구하고 관광의 양상은 일반적으로 사회적·역사적 현상을 반영하면서 변화되어 갔다. 중세에는 관광(여행)이 득도(得道)와 신앙심을 추구하기 위한 고행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기도 하였지만, 근대에 이르러서는 위락(慰樂)과 휴식, 기분 전환, 새로운 경험, 교양의 확대 등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관광과 비슷한 개념인 여행과 여가(餘暇, Leisure)에 대해서 정리해 보면, 여행은 관광과 달리 뚜렷한 목적이나 동기가 없어도 가능한 행위 유형으로, 관광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여행은 이동(移動)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지만 목적이나 동기를 전제하지 않는 데에 반해, 관광은 유흥, 오락, 재미, 문화적 욕구, 역사 탐방, 각종 행사 참여 등 목적이나 동기가 여행에 비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관광과 여행을 개념상 혼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4)인태정, 『관광의 사회학 : 한국 관광의 형성 과정』, 한울, 2007, 43쪽.

여가는 크게 두 가지로 개념을 분류할 수 있다. 곧 인간의 잔여 시간 또는 자유 시간을 여가로 보는 양적인 개념과 인간의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한가한 내면의 느낌 자체를 여가로 보는 질적인 개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개념은 각각 장단점을 내포하고 있다. 전자는 객관적으로 통계적 측정이 가능한 반면, 잔여 시간만을 강조한 나머지 실업자의 여가나 정신적 압박감 속에서 자유 시간을 보내는 인간의 행태가 과연 진정한 여가가 될 수 있는가라는 점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줄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 다. 반면에 후자는 정신적인 해방감을 강조하기 때문에 여가를 질적으로 충실하게 설명해 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통계의 작성 등 현실 사회에서 필요한 객관성의 확보에 어려움이 따른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학술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질적인 개념을, 현실적인 실무 목적을 위해서는 양적인 개념을 여가의 정의로 널리 사용하고 있다.5)원용희, 『관광과 문화』, 학문사, 1999, 36∼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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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초상
최치원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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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동양에서는 용어로 보면 여행보다는 관광이 훨씬 널리 쓰였다. 이는 『주역(周易)』의 “관국지광이용빈우왕(觀國之光利用賓于王)”이라는 구절과 『상전(尙傳)』의 “관국지광상빈야(觀國之光尙賓也)”라는 문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크게 보아 이 용례는 한 나라의 사절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여 왕을 알현하고 자기 나라의 훌륭한 문물을 소개하는 동시에, 그 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관찰하는 것이 왕의 빈객으로 대접받기에 적합하다는 일종의 의전적(儀典的) 개념이다.

우리나라 문헌으로는 최치원(崔致遠, 857∼?)의 『계원필경(桂苑筆耕)』 서문(序文) 중 “남이 백 번 하면 나는 천 번 해서 관광 6년 만에 과거 급제자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人百己千之 觀光六年 銘勝尾).”라는 글에서도 관광이라는 용어를 볼 수 있다. 이 글에서의 관광은 ‘당나라의 빛나는 선진 문화를 보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어 앞서 『주역』의 용례와 비슷한 뜻으로 볼 수 있다.6)김종은, 앞의 책, 18쪽.

여행이나 관광이라고 쓴 용례(用例)는 우리나라의 고문헌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기행 문학(紀行文學)이라 할 수 있는 유람기(遊覽記)·유산록(遊山錄)·별곡(別曲) 등의 자료나 연행록(燕行錄)·『열하일기(熱河日 記)』·『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해유록(海遊錄) 등 중국이나 일본을 다녀온 관리들이 남긴 기록, 그리고 개인이 남긴 문집류(文集類)에서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7)한경수, 「한국에 있어서 관광(觀光)의 역사적 의미와 용례(用例)」, 『관광학 연구』 36, 한국 관광학회,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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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도(燕行圖)
연행도(燕行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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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여행자들이 관광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앞서 최치원의 경우에서와 같이 통일 신라 이래로 꾸준히 이어져 왔다. 고려시대에는 1123년(인종 1)에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 조선의 창업 공신 정도전(鄭道傳, 1337∼1398) 등의 개인 기록에서는 물론 『고려사(高麗史)』에서도 관광이라는 용례가 나타나고 있다. 곧 서긍은 “왕역(王域)에는 누각이 없었는데 사신이 왕래한 이래 상국을 관광하고 그 규모를 배워 만들게 되었다(王域 昔無樓觀 自通使以來 觀光上國 得其規模).”라고 하였다.8)서긍(徐兢), 『국역 고려도경(國譯高麗圖經)』, 민족 문화 추진회, 1987, 48쪽. 또 정도전은 “자안 씨(子安氏, 이숭인(李崇仁))가 중국에서 돌아와 그것을 내게 보여 준다면 마땅히 제목을 ‘관광집(觀光集)’이라고 하겠다(子安氏歸也 特以示予 則當題曰觀光集云).”라고 하였다.9)정도전(鄭道傳), 『국역 삼봉집(國譯三峰集)』 권3, 국역1, 민족 문화 추진회, 1978, 245쪽.

『조선 왕조 실록』에는 관광에 관한 용례가 더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선 ‘관광상국(觀光上國)’이라 하여 중국의 제도나 문물을 보고 배우는 것 이외에, 과거(科擧) 또는 과거를 구경한다는 뜻(觀國之光)과 임금이나 중국 사신의 행차를 구경한다는 뜻이 있었다. 그리고 사찰(寺刹) 등 국내 유람을 뜻하기도 하였으며, 왜(倭)의 사신들이 임금이 베푸는 연회에 참여하거나 사예(射藝)·방화(放火)를 참관하는 것에 관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한양의 북부 지명 중에 관광방(觀光坊)이 있었으며, 사대부의 부인들이 대궐 안을 구경하는 것을 관광이라고 하였다.10)한경수, 앞의 글, 274쪽. 고문헌에 나오는 관광에 대한 용례는 주로 이 논문의 내용을 참조하였다.

한말에도 관광이라는 용어는 의미에 별다른 변화 없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경성일보사는 공명한 연필(椽筆)을 병(秉)하야 세계의 은촉(珢燭)을 게(揭)하고 인민의 주탁(遒鐸)을 명(鳴)함으로 자임(自任)함은 인소공지(人所共知)이어니와 동사(同社)에서 아(我) 대한 인민(大韓人民)의 지식을 일층 고발(鼓發)하고 실업(實業)을 특별히 장려키 위하여 전년(1909) 제1회 관광단을 조직하여 일백여수(一百餘數) 신사(紳士)를 일본 국내 각처에 인도하여 문명의 공기와 부강을 실지흡수(實地吸收)하여 국가에 무궁한 이익을 전진(前進)케 함은 금(今)에 별론(瞥論)할 바 무(無)하거니와 본년 4월에 제2의 관광단을 조직하야 경향 신사 50인을 소집하여 여전(如前)히 인도하여 일본(日本) 복강현(福岡縣)과 애지현(愛知縣) 명고옥(名古屋)의 공진회(共進會)와 기타 각 군(各郡)의 거항(巨港) 차제(次第) 관람케 하야……11)박기순(朴基順), 『관광약기(觀光略記)』, 융희 4년(1910) 8월, 6∼7쪽.

곧 앞의 내용은 1910년 4월에 『경성일보(京城日報)』가 후쿠오카 현(福岡縣)과 아이치 현(愛知縣)에서 개최되는 공진회을 관람토록 한다는 명분으로 유길준(兪吉濬), 민영찬(閔泳瓚) 등 전·현직 관리들을 대상으로 일본 방문단을 기획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경성일보』의 여행 기획에 참여 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관광단(觀光團)’으로 부르고 있었다. 이 관광단은 공진회 이외에 일본의 해군 공창, 조폐국, 시멘트 회사, 방적 회사, 역사 문화 유적 등을 돌아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차 관광단은 100여 명이 넘는 인원이 일본을 방문하였다. 이후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오는 이른바 ‘내지 시찰단(內地視察團)’은 일제하에서 1930년대까지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는 일본 관광이라는 정책적 지원을 통해 일제가 꾸준히 친일 세력을 육성하고자 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12)조성운, 「1920년대 일본 시찰단의 조직과 파견」, 『한국 독립 운동사 연구』 28, 한국 독립 운동사 연구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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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통한 일제의 체제 선전은 경성 관광(京城觀光)에도 적용되고 있었다. 1912년 10월 27일자 『권업신문(勸業新聞)』에서는 “일인들이 한인들을 동화시키려는 수단으로 관광단을 장려하여 한인의 일본 구경을 자주 시켜 주는 것은 본보에서 이미 게재하였거니와 근일에 또 경성 관광단이라는 것을 장려하여 각도에서 수십 명씩 단체하여 서울 구경을 오게 하였는데 그 실상은 서울 구경하는 것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곧 서울에 와서 일인의 각종 시설을 구경시켜 일본 문화에 굴복하는 마음이 나도록 하게 함이더라.”라고 비판하였다.13)『권업신문(勸業新聞)』 1912년 10월 27일자.

따라서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보면 우리나라에서 관광이라는 용어는 관광의 본래 의미인 방문한 국가나 지역의 ‘광화(光華)’를 배우고 구경한다는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관광이나 여행이 정책적 차원에서 식민지 동화 정책의 보급에 이용되는 측면이 강하게 나타났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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