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1장 근대 여행의 시작과 여행자
  • 3. 일제 강점기의 여행자
  • 여행 의식의 확산
황민호

일제하에서 국내외로의 여행이 좀 더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이후로 보이는데, 국내외로의 여행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서 여행의 중요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다양한 논설이 선보였다. 실제로 1919년 7월 발행된 잡지 『청춘(靑春)』에서는 여행을 인생 수양의 일대법문(一大法門)이라고 하면서 여행할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여행은 너에게 견식(見識)을 엄박(淹泊)케 할 것이며…… 관찰력을 주고 인내력을 주고 추진력을 줄 것이며, 입신행도(立身行道)의 기회를 제시(提示)하고…… 세계의 광대함과 인물은 번연(繁衍)함을 가르쳐 우주 인생(宇宙人生)에 대한 착신한 이해력과 정당한 판단력을 아울러 줄 것이니 여행하라 여행하라 인생 수양(人生修養)의 일대법문(一大法門)인 줄로……36)「아관(我觀)-수양(修養)과 여행(旅行)」, 『청춘(靑春)』 9, 신문관(新文館), 1919.7., 167쪽.

1921년 1월 문일평(文一平)이 『개벽(開闢)』에 기고한 ‘북한(北漢)의 일일(一日)’을 보면, 그는 “근일(近日) 우리 사회에 명산수(名山水)를 유상(遊 賞)하는 풍조가 유행(流行)하게 되어 금강산(金剛山)을 탐승(探勝)하는 인사(人士)도 많으며, 백두산(白頭山)을 탐험(探險)하는 인사도 있음은 어찌 가희(可喜)할 현상(現象)이 아니랴.”라고 하여 국내에서 여행 풍조가 일반화되고 있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37)문일평(文一平), 「북한(北漢)의 일일(一日)」, 『개벽(開闢)』 16, 1921년 10월 18일. 그리고 이 시기의 다른 글에서는 “쇄국양이(鎖國攘夷)하던 사상은 개문영양(開門迎洋)으로 변하였고 전구후배(前驅後陪)가 고호벽제(高呼辟除)하던 행차(行次)는 쌍두마차나 자동차로 하였으며 승교과마(乘轎跨馬)하고 일행(日行) 백 리에 인곤마피(人困馬疲)하던 여행은 기차 기선이나 비행기로 변하였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도 근대적인 여행의 모습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38)당시 중요 잡지에 실린 여행기의 목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으며, 여기에서는 중요 여행지를 알 수 있는 목차만 실었다. 몽아(夢我), 「개성 여행기(開城旅行記)」, 『서광』 3, 1920년 2월 18일 ; 문일평, 「북한의 일일」, 『개벽』 16, 1921년 10월 18일 ; 문학사(文學士) 노정일(盧正一), 「세계 일주(世界一周) 산(山) 넘고 물 건너」, 『개벽』 19, 1922년 1월 10일(『개벽』 22호까지 총 4회 연재) ; 재백림(在伯林) 박승철(朴勝喆), 「파리(巴里)와 백림(伯林)」, 『개벽』 24, 1922년 6월 1일 ; 박승철, 「독일 지방(獨逸地方)의 이주간(二週間)」, 『개벽』 26, 1922년 8월 1일 ; 창해거사(滄海居士), 「남해 유기(南海遊記)」, 『개벽』 26, 1922년 8월 1일 ; 재독일(在獨逸) 박승철, 「파란(波蘭)·화란(和蘭)·백이의(白耳義)를 여행(旅行)하고셔」, 『개벽』 36, 1923년 6월 1일 ; 일기자(一記者), 「경남 잡화(慶南雜話)」, 『개벽』 34, 1923년 4월 1일 ; 양명(梁明), 「만리장성(萬里長城) 어구에서(내몽고(內蒙古) 여행기(旅行記)의 일절(一節))」, 『개벽』 40, 1923년 10월 1일 ; 박영희(朴英熙), 「반월성(半月城)을 떠나면서」, 『개벽』 69, 1926년 5월 1일 ; 유순근(柳順根), 「북선 여행기(北鮮旅行記)」, 『신민(新民)』 42, 1928년 10월 1일 ; 유순근, 「영남 여행기(嶺南旅行記)」, 『신민』 51, 1929년 7월 1일 ; 유순근, 「북선 여행기」, 『신민』 54, 1929년 12월 1일 ; 임영빈(任英彬), 「미국(美國)의 기차 여행(汽車旅行)」, 『동광』 11, 1927년 3월 5일 ; 허헌(許憲), 「동서(東西) 십이제국(十二諸國)을 보고 와서」, 『별건곤』 7, 1927년 7월 1일 ; 허헌, 「세계 일주 기행(世界一週紀行(제이신(第二信)), 꼿의 ‘바리웃드’를 보고, 다시 대서양(大西洋) 건너 애란(愛蘭)으로!」, 『삼천리(三千里)』 2, 1929년 9월 1일 ; 허헌, 「세계 일주 기행(제삼신), 부활(復活)하는 애란(愛蘭)과 영기리(英吉利)의 자태(姿態)」, 『삼천리』 3, 1929년 11월 13일 ; 정월(晶月), 「태평양(太平洋) 건너서-구미유기속(歐米遊記續)-」, 『삼천리』 제6권 제9호, 1934년 9월 1일 ; 정석태(鄭錫泰), 「이태리(伊太利), 순교자(殉敎者) 백년 기념 대제례 성관(百年紀念大祭禮盛觀), 기독구교(基督舊敎)의 성대(盛大)한 기념제(紀念祭) 광경(光景)」, 『삼천리』 6, 1930년 5월 1일 ; 막사과(莫斯科)에서 김(金)니코라이, 「노서아(露西亞)의 볼가하행(河行)」, 『삼천리』 제5권 제9호, 1933년 9월 1일.

한편 1930년대에 들어서도 여행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는 더욱 확산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1933년 『시조(時兆)』에 실린 선교사 우국화(禹國華)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과연 여행의 시대이니 어디든지 유력한 사람이 모이면 그중에 외국에 갔다 온 사람은 찾지 못하는 일은 거의 없다. 여행이 심히 증가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오늘날에는 바로 얼마 전까지는 없던 편리한 교통 기관이 있게 되었다. 도보 혹은 말을 타는 것이 유일한 육상 여행 방법이든 시대, 바람과 노가 바다로 여행하는 유일한 방법이든 시대에는 집에 머물러 있기에 충분한 구실이 있었다. 또 나라들은 서로 교제하지 않고 서로 외국인을 배척하였음으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본국에 있음이 좋다는 생각이 박히어 있었다. 지금은 신속하고 편리한 교통 기관이 발명되어 돈이 있는 사람은 거절하지 못하게 사람을 끌어낸다.39)우국화(禹國華), 「여행(旅行)의 유행(流行)」, 『시조(時兆)』 23-9, 1933년 9월. 『시조』는 제7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第七日安息日Jesus再臨敎會)에서 발행하는 잡지이며, 필자 우국화(Urquhart, E. J.)는 잡지 발행의 실무를 맡아보던 선교사였다. 당시 읽을거리가 없던 일반인들에게까지 파고 들어가 보급되었다. 이렇게 교회의 기관지이면서도 교양지적 성격을 지닌 이 잡지가 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널리 읽혔기 때문에 1944년 9월 일제에 의하여 강제 폐간되고 말았으나 이후 복간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윤춘병, 『한국 기독교 신문·잡지 백년사 : 1885∼1945』,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4).

이 글을 보면 필자는 오늘날 다양하고 편리한 교통수단의 발달이 사회적으로 여행을 확산시켜 돈 있는 사람들은 거절하지 못하는 여행의 시대가 되었다고 하여 여행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과 태도가 일반적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선교사 우국화의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이 해외여행을 한다는 것은 여전히 유력한 사람들만이 가능한 특수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국내 여행기나 외국에서의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출간하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하였다. 안재홍(安在鴻)은 1931년 『백두산 등척기(白頭山登陟記)』를 출간하였다. 당시 이 책을 소개한 잡지의 기사에 따르면, “금강산이 속화(俗化)된 이래 우리나라에서 산을 찾는 사람들은 지리(智里)·묘향(妙香)을 동경”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의 거봉(巨峰)인 백두(白頭)에 이르러서는 개인적으로는 좀처럼 엄두를 내기 어려웠으나 근래에 국경 수비대(國境守備隊)가 연중행사로 백두산에 등척(登陟)하게 되고 이때에 민간 인사들의 참가가 허용되어 백두산 기행이 잦게 되었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보면 1930년대까지도 백두산은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명산이었다고 하겠다.40)독서실(讀書室), 「백두산 등척기(白頭山登陟記) 안재홍(安在鴻) 저(著)」, 『동광(東光)』 26, 1931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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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여행 기사의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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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 아니라 『백두산 등척기』의 내용에 대해 “일도일기(一倒一起)의 민족의식에 관한 토구(討究)가 있으며, 혹은 토속학적(土俗學的)으로 본 조선사의 계발이 있다.”고 하거나 “정계비(定界碑)를 중심으로 하야 간도(間島) 경계 분쟁에 대해 비분(悲憤)과 탄식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천지(天池)의 대기 속에서 조선 민족 발상(發詳)의 연유를 찾아보고 있다.”고 하여 상당히 민족적인 견지에서 저술한 책임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틈틈이 사진을 첨부하야 그 경치를 여실(如實)하게 하였으며, 일폭(一幅)의 지도를 권두에 두었으니 뒤에 가는 이의 좋은 참고가 될 듯하다.”고 하여 안재홍의 여행기가 당시로서는 상당한 볼거리를 갖추고 있음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여행기는 아니지만 외국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펴내기도 하였다. 1932년 조선 기독교 청년 연합회(朝鮮基督敎靑年聯合會)에 서 펴낸 박인덕(朴仁德)의 『정말 국민 고등학교(丁抹國民高等學校)』가 이러한 예에 속한다.41)독서실(讀書室), 「정말 국민 고등학교(丁抹國民高等學校)」, 『동광』 36, 1932년 8월 1일. 그의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제1부는 실지로 덴마크 엘서노에 있는 국민 고등학교를 관광한 여행기이며, 제2부는 이 학교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고, 제3부가 그것을 모방하여 조선에 실험해 보자 하는 ‘국민 양성소안(國民養成所案)’을 제시하는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박인덕이 덴마크의 국민 고등학교를 ‘관광 여행’한 뒤 이를 조선에 도입해 보려는 의도에서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책을 국내에서 덴마크에 관해 출간한 네 번째 책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국내에서는 덴마크 농촌의 발전상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인덕의 이 책을 두고 당시 『동광(東光)』에서는 “덴마크는 자주국이고 조선은 식민지인 상황에서, 그리고 자본가와 봉건 세력이 거의 무제한적으로 조선의 농촌을 흡취(吸取)하려는 상황에서 그 구상은 현실을 무시한 허수아비가 될 염려가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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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하는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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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에 이르면 철도나 항공 교통도 팽창하고 있었다. 이 시기 일제 측의 기록에서는 조선에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한 이래 총연장 5,000㎞가 넘게 되었으며, 1936년에는 총 1,200만 톤의 화물과 4,200만 명의 여객을 운송하였다는 통계를 보여 주고 있다. 또 영업 자동차의 운전망(運轉網)도 총 2만 797㎞에 이르러 조선 내의 교통은 면목을 일신(一新)하는 한편 교통의 발달은 산업 개발과 인문(人文)의 부흥(復興)에 기여하는 바가 다대(多大)하다고 하였다.42)「약진 조선(躍進朝鮮)의 전모(全貌) : 약진 조선(躍進朝鮮)의 교통망(交通網)」, 『재만 조선인 통신(在滿朝鮮人通信)』 69, 흥아협회(興亞協會), 1939. 1., 72쪽. 항공 교통은 여의도 비행장에서 후쿠오카(福岡)의 간노스(雁巢) 비행장을 연결하는 노선이 운항되었으며, 이 노선은 다시 3시간 만에 도쿄(東京)의 하네다(羽田) 공항에 도착하는 노선으로 이어져 조선과 일본을 하루 코 스로 연결하였다. 이 노선의 비행기는 18인승의 헬리콥터형 기종이었으며, 간단한 샌드위치가 제공되는 소형 비행기였다.43)우영희(禹永熙), 「동경 기행(東京記行)-내지 광업계(內地鑛業界)의 동향(動向)-」, 『광업시대(鑛業時代)』 2-5, 광업시대사(鑛業時代社), 1938년 5월, 38∼38쪽.

이렇게 보면 1920년대 이후 들어서면서 일반 교통의 발달 등을 통해 한국인들의 국내 여행이나 해외여행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개인 여행기의 출간이나 다양한 여행기의 기고(寄稿) 등을 통해 볼 때 여행 의식이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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