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1장 근대 여행의 시작과 여행자
  • 3. 일제 강점기의 여행자
  • 해외여행에서의 근대와 근대 문명
황민호

1920년대에 들어서 해외로 출국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당시 잡지에서는 이들의 여행기를 게재하였다. 주로 유럽, 미국을 비롯하여 일본, 인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등이 소개되고 있었으며, 만주, 몽골, 상하이, 남미 등 다양한 지역에 대한 여행기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내용을 보면 유럽과 미국에 대해서는 근대 문명과 풍광을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아시아권에 대해서는 조선의 처지와 관련하여 필자들의 감상이나 느낌이 여행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922년에 박승철(朴勝喆)은 김준연(金俊淵)과 함께한 독일 여행기에서 독일의 마을 풍경에 대해 “노변과 문전(門前)에 화초를 많이 심어 자기도 향락하고 행인의 눈도 즐겁게 만든다. 도시(都是) 독일(獨逸)의 5월은 어대를 가든지 즐겁고 좋은 것뿐”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조선서 부자가 몇 만 원(圓)을 들여서 주택과 정원을 잘 꾸미고 산다고들 해도 비록 흑병(黑餠)은 먹으나 이처럼 청초히 해놓고 사는 사람보담 몇 배 못하리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60)재백림 박승철, 「파리와 백림」, 『개벽』 24, 1922년 6월 1일. 1924년 낙위국(諾威國, 노르웨이) 여행에서도 그는 북구(北歐)의 풍광에 대해 “그림을 보는 듯싶다.”고 하였으며, 산악 철도 연변의 아름다움을 전하기도 하였다.61)박승철, 「그림을 보는 듯 십흔 북구(北歐)의 풍경(風景승전(承前))」, 『개벽』 44, 1924년 2월 1일. 이 글에서는 산악 철도 연변의 경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산악(山嶽) 사히로 달어나는 기차는 이 산모퉁이 져 산모퉁이를 돌고 놉흔 고개 야진 고개를 넘으며 산빗탈에 목제(木製)의 2, 3가옥식(家屋式) 듬은 듬은 백힌 것과 호수가 이곳저곳 백여 잇는 것만 보히고 산악에는 가을이 깁헛스며, 양편(兩便) 절벽(絶壁)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그 수효(數爻)가 엇지 만흔지 세일수 업스며 큰 것은 넓히가 4, 5칸(間) 길이가 수십 장(數十丈)이나 되며 적은 것은 실배암 갓흔 것도 잇다. 단풍으로 붉은 옷을 입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옥수(玉水) 소래는 천병만마(千兵萬馬)를 모는 것도 갓고, 옥쟁반(玉錚盤)을 부쉬는 것도 갓다. 얼마쯤 잇다 보면 좌우의 장산(壯山)으로 해서 창공이 안이 보히다가 기차는 별안간 골 속으로 들어가나니 이러키를 근 30번이나 지내는 중에 그 중 긴 것은 5,300미돌(米突)이나 되는 것도 잇섯다.”

허헌(許憲)은 1925년 5월에 국내를 출발하여 약 1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 등 12개국을 둘러보았으며, 여행기에서 서구 제국의 공업과 경제력의 발전 및 각 지역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소식을 전하였다. 그의 여정(旅程)은 우선 5월 30일에 국내를 떠나 일본으로 간 다음 6월 9일에 요코하마 항(橫濱港)에서 일본 기선을 타고 하와이로 갔으며, 하와이에서 2주를 묵고 다시 미국 배편으로 본토에 들어가 워싱턴, 뉴욕 등의 도시를 둘러보았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유럽 여행을 시작하였는데, 먼저 애란(愛蘭, 아일랜드)을 둘러보고 다시 영국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였으며, 화란(和蘭, 네덜란드)을 거쳐 백이의(白耳義, 벨기에)로 가서 약소 민족 회의(弱小民族會議)에 참석하였다. 이후 그는 불란서(佛蘭西, 프랑스),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폴란드를 거쳐 러시아와 중국을 경유하여 국내로 돌아왔다.

그런데 허헌은 여행기에서 “외국에서 경탄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화학 공업, 기계 공업 등의 발전상이었다.”고 하였으며, 미국에 처음 갔을 때는 “남들은 이렇게 하고 사는데 우리는”이라는 생각이 들어 몹시 비관하기도 하였다고 하여 여행하면서 비교되는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애를 서술하였다.62)허헌(許憲), 「동서 십이제국(東西十二諸國)을 보고 와서」, 『별건곤』 7, 1927년 7월 1일. 이러한 경향은 박승철의 여행기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폴란드와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 각지를 여행한 후 “독일은 물론 어떤 나라를 가 보아도 조선같이 국빈민약(國貧民弱)한 나라는 약에 쓰려고 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63)박승철, 「파란(波蘭)·화란(和蘭)·백이의(白耳義)를 여행(旅行)하고셔」, 『개벽』 36, 1923년 6월 1일.

또 안호상(安浩相)은 1934년에 쓴 ‘백림(伯林, 베를린)에서 윤돈(倫敦, 런던)’까지라는 여행기에서 독일인이나 영국인을 긍정적으로 묘사하였다.64)안호상(安浩相), 「백림(伯林)에서 윤돈(倫敦)까지」, 『신인 문학(新人文學)』 3, 청조사(靑鳥社), 1934년 12월. 그는 런던에서 탄 기차가 네덜란드 국경 지대에 이르렀을 때 어디에서 공부하였느냐는 세관원(稅關員)의 질문에 독일에서 한 8년 동안 공부하였다고 하자, 그러면 독일인들의 충직(忠直)과 점잖은 훈련을 받았을 터이므로 행구(行具)는 검사치 않고 통과시켜 주겠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독일인의 국민적 품격(品格)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영국인들에 대해서는 길을 가다 번지(番地)를 물으면 극히 친절하게 가르쳐 주며, 심지어는 그 집까지 데려다 주려고 하고 순사(巡査)들은 키는 장승 같지만 마음은 양(羊)같이 순하고 매우 친절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안호상은 현재 조 선인을 생각하고 조선 민족의 품격을 생각할 때 한숨을 금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대체로 서구를 여행한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의 식민지적 현실과 문화적 후진성으로 대별되는 조선의 현실을 염두에 두며 서구 사회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1922년에 미국 유학 중이던 노정일(盧正一)은 미국 자동차 도로의 청결함과 도시의 아름다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원래(元來) 미국(美國)의 도로(道路)라 하면 청결(淸潔)하고 기려(奇麗)할 것은 누구나 다 예상(預想)할 것이다. 상항(桑港, 샌프란시스코)이나 기타(其他) 대도회(大都會)는 물론(勿論) 그러할 것으로 짐작(斟酌)하겟지마는 한적(閒寂)한 소읍(小邑)에까지 그러틋이 안전(安全)하고 미려(美麗)하게 도로(道路)가 시설(施設)되엇슬 것은 몽상(夢想)치도 못하엿던 사실(事實)이엇다. 좌우 측로(左右側路)야 물론(勿論) 세멘트로 하여 놀 것이나 차도(車道)까지 아스프랄트로 부설(敷設)한 우에 농유(濃油)로 도고(塗固)하여서 자동차(自働車)와 마차(馬車)가 연주속지(連走續至)하더래도 행인(行人)에게 아모 불유쾌(不愉快)를 감(感)하게 아니 한다. 그뿐 아니라 매일 수차식(數次式) 뽐뿌로 수도(水道)물을 인용(引用)하야 도로(道路)를 소세(掃洗)해서 그 청결(淸潔)하고 상쾌(爽快)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낭연(朗然)한 심기(心氣)를 가지게 한다. 그러한 시가(市街)와 도로하우(道路下隅)마다 화원(花園)도 설(設)하엿스며 새파란 잔디 언덕 우에는 유공(有功)한 공민(公民)들의 동상(銅像)들도 나립(羅立)하엿다. 그 광활(廣濶)하고 화려(華麗)한 시가(市街)와 대도 상(大道上)에 쌍쌍(雙雙)이 짝을 지어 오고 가는 남녀 청년 학생(男女靑年學生)들의 보조(步調)와 기상(氣像)은 실(實)로 개세(盖世)의 영기(英氣)가 발발(潑潑)하다.65)노정일(盧正一), 「세계 일주(世界一周) 산(山) 넘고 물 건너(4)」, 『개벽』 22, 1922년 4월 1일.

미국에서 처음으로 자동차를 탄 노정일은 델라웨어(Delaware)의 한적 한 소읍에까지 안전하고 미려한 아스팔트 도로가 설치되어 있고, 매일 수차례 펌프로 청소하여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며, 화단과 파란 잔디를 갖춘 도시의 미관(美觀)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1928년 12월 『별건곤(別乾坤)』에서는 ‘외국에서 좋게 본 것, 즉시 본 뜰 수 있는 것’에 대한 설문 조사를 통해 주로 서구의 좋은 제도나 사회 현상을 소개하였다.66)「외국(外國)에 가서 제일(第一) 조케 본 것, 우리도 즉시 본뜰 수 잇는 것」, 『별건곤』 16·17, 1928년 12월 1일. 우선 김법린(金法麟)은 불란서에 대해 대도시는 물론 두메산골에도 도서관이 있어서 조선의 막걸리 집보다도 도서관이 많은 것이 제일 부럽다고 하면서 우리 조선은 독서력이 박약(薄弱)한데 종교 단체나 청년 단체 등이 간이(簡易)한 시설이라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 주었으면 한다고 하였다. 또 독일에 체류한 적이 있는 이성용(李星鎔)은 독일인들의 청결함과 규칙적인 행동과 어린 아이에 대해 타이르거나 꾸지람을 할지언정 조선 사람같이 주먹이나 막대기로 매질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을 부러워하였다. 이 밖에 김우평(金佑枰)은 미국의 융성한 도시, 시가의 정연하고 화려한 품(品), 방초(芳草) 동산 위에 우뚝 솟은 대학(大學)이라든지, 어마어마한 대공장 제도 등도 부럽지만, 특히 부부간의 검소한 생활과 저축하는 습관 및 자녀에 대한 절제 있는 교육 등이 부럽다고 하였다. 대체로 국내의 여행기에 나타나는 서구는 조선인 여행자들에게 조선 사회가 수용해야 하는 근대 문명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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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후 새로운 신흥 국가로 성장하던 소련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당시 국내에서는 막사과(莫斯科, 모스크바)에만 가면 돈 없이도 공부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러시아 유학이 권장되고 있었으며,67)합이빈(哈爾賓)에셔 이(李)비-ㄴ손, 「구아 유학(歐俄留學)에 대(對)하야」, 『개벽』 43, 1924년 1월 1일. 러시아를 긍정적으로 소개하는 여행기나 회고담 등도 다수 있었다.68)황민호, 「1920년대 국내 언론에 나타난 소비에트 러시아와 재로 한인(在露韓人)」, 『한국 민족 운동사 연구』 42, 한국 민족 운동사 학회, 2005. 일제 강점기에 러시아에 대한 언론의 보도는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조선 총독부의 관제 언론과 긍정적인 면을 부각하는 민간 언론 간의 대립이 존재하고 있었다. 1930년대의 소련에 대한 좌담회나 기행문에서는 대체로 모스크바는 공업화가 활발하게 추진된 결과 마차를 버리고 자동차를 사용하게 되었으며, 전 시가(市街)가 아스팔트화 되었다고 하거나 지하철 입구의 대로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 등 미국보다 훌륭하다고 하였다.69)「막사과(莫斯科)의 신여성(新女性)과 신문화(新文化), 금석(今昔)의 모스크바를 이약이 하는 회(會)」, 『삼천리』 7∼9, 1935년 10월. 당시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은 다음과 같다. 리동민(李東民), 신경제 정책시대(新經濟政策時代)로부터 제1차 제2차 5개년 계획시대(五個年計劃時代)에 긍(亘)하여 소련(蘇聯)에서 생활한 분, 김해룡(金海龍), 현금(現今) 막사과(莫斯科)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예술 방면에 대한 연구의 제일인자(第一人者), 최일선(崔一鮮), 일로 전쟁 당시(日露戰爭當時)부터 제정시대 말기(帝政時代末期)까지 막사과에서 생활하엿스며, 한명(韓鳴), 제정 말기(帝政末期)로부터 최근까지 자주 입로(入露)하여 단이든 분.

1933년에 볼가 강(Volga江)을 여행한 김니코라이는 러시아 인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볼가 강을 바라보며 작년에 단성사(團成社)에서 보았던 ‘볼가의 뱃노래’라는 영화를 보았을 때의 감동이 연상된다고 하였으며, 볼가 강의 발전소 건설 계획과 대농장의 개척, 볼가 강의 어업(漁業) 등이 러시아를 살찌우게 하여 그 장래가 주목된다고 하였다.70)막사과(莫斯科)에서 김(金)니코라이, 「노서아(露西亞)의 볼가하행(河行)」, 『삼천리』 제5권 제9호, 1933년 9월 1일. 1931년에 시베리아를 여행한 ‘KELENS’라는 필명(筆名)의 여행객은 여행에서 느낀 소련 농촌의 한적하고 여유 있는 풍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기도 하였다.

백림(伯林)에서 떠나 로시아 국경에서 로시아 기차와 승환(乘換)한 후 모스코를 지나 구라파(歐羅巴)로시아를 횡단하야 우랄 산맥을 넘은즉 벌서 그 곳서부터는 광막(廣漠)한 시베리아 평원이다. 차창에서 보이는 풍경은 얼마를 가도 초목(草木)과 백화(白樺)의 숩풀과 지평선뿐이었다. 석양이 되여서 태양이 하늘을 빨앗케 물드리면서 지평선 저쪽으로 없어지기 시작할 제 제 집울 찻는 농부의 그림자가 석양 노울 속에 문채 모양으로 낫하난다.

오후 11시라고 해도 여름의 서비리아는 아직 겨우 석양이 다다들 때다. 기차가 역에 머므는 시간이 15분쯤 되는 고로 그동안에 승객들은 프랫트홈에 내려서 산보한다. 더욱히 서비리아 철도 각 역에는 푸랫트홈에 연(連)해서 수목(樹木)과 초목(草木)를 심고 그 속에 뻔취를 노흔 적은 공원이 잇서서 지리(支離)한 여행에 피곤을 늣기는 승객들은 그 가운데를 자유로 산보하기도 하고 뻔취에 걸처안저서 쉬기도 한다.71)KELENS, 「서백리아(西伯利亞)의 침대차(寢臺車), 로-맨틱한 그 일야(一夜)」, 『삼천리』 제4권 제7호, 1932년 5월 15일.

한편 아시아 지역에 대한 여행기에서도 필자들은 유럽의 경우와 마찬 가지로 여행 과정이나 지역별로 다양한 감상을 남겼다. 1934년 10월 ‘인도양을 넘어 예루살렘에’라는 기행문을 쓴 김활란(金活蘭)은 배를 타고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의 감상을 비교적 담백하게 서술하였다.72)김활란(金活蘭), 「인도양을 넘어 예루살렘에」, 『신인문학(新人文學)』 2, 청조사(靑鳥社), 1934년 10월. 당시 경성을 출발한 김활란은 일본의 모지(門司)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上海)에 도착 후 불란서 배로 갈아탔고, 향항(香港, 홍콩), 싱가포르 항을 거쳐 인도양을 건너 콜롬보에 도착하였으며, 아덴을 지나 홍해(紅海)로 들어가 폿사이트에 이르러 배에서 내렸다. 이후에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피라미드를 구경하였으며, 기차 편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여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활란은 여행기에서 불란서 배에 대해 크고 화려하며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어서 배를 탄 것 같지 않고 호텔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으며, 점심 전에는 오케스트라가, 저녁 후에는 댄스회(dance會)가 있어서 심심치 않았다고 하였다. 그녀는 싱가포르와 콜롬보에서 먹어 본 ‘망고’와 ‘라이스 카레’도 언급하였는데, 망고는 “복숭아와 파인애플을 합친 듯한 맛있는 과일이며 살이 많고 서양 참외 같은 모양”이라고 하였다. 라이스 카레에 대해서는 콜롬보에서 시작된 음식이라 하여 먹어 보았으나 눈물이 날 정도로 매워 한 숟갈 겨우 먹고 다른 양식을 먹었다고 하였다.

조선처럼 식민지 상태였던 인도와 필리핀에 대한 여행기가 소개되기도 하였다. 인도와 관련해서는 김추관(金秋觀)이 ‘인도 유기(印度遊記)’에서 당시 인도 사회의 단면을 전하고 있다. 당시 인도에서는 간디모(Gandhi帽)가 유행하였는데 국민운동(國民運動)에 다소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이 모자를 쓰고 다녔고 이는 국기(國旗)를 가지지 못하는 대신에 인민 공통의 모자를 통해 자기 집단의 특징을 표현하고자 애쓰는 것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인도 국민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소개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73)김추관(金秋觀), 「인도 유기(印度遊記)』, 『삼천리』 17, 1931년 7월 1일. 실제로 김추관은 약 200명의 인원이 수용되어 있다고 하는 캘커타 시의 ‘과부 수용소’를 직접 찾아갔으나 이들이 근교(近郊)로 원족(遠足)을 나가 만나지는 못하였다고 하고 있다. 또 필리핀을 둘러본 안창호(安昌浩)는 ‘비율빈 시찰기(比律賓視察記)’74)안창호(安昌浩), 「비율빈 시찰기(比律賓視察記)」, 『삼천리』 제5권 제3호, 1933년 3월 1일. 이 여행기는 1929년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안창호가 한인 의학 박사 김세창(金世昌)의 권유로 1929년 4월 8일부터 약 3개월 동안 필리핀을 방문하고 돌아온 감상(感想)을 수록한 것이다.에서 일제 식민 통치의 문제점을 필리핀의 경우와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필리핀은 교육의 보급이 활발하여 문맹률이 해마다 급격히 감소하고 있으며, 관청의 대부분이 필리핀 사람을 채용하고 있고 공원 등지에서 필리핀 사람들이 미국에 대해 자유롭게 규탄하는 연설을 하는 등 언론이 극히 자유로웠다는 점에서 놀랄 만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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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시 통제기인 1930년대 말의 일본에 대한 기행문은 일본에 대해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1938년에 동경을 방문한 주운성(朱雲成)은 여행기에서 “동경(東京)은 동방의 ‘런던’이오 신아세아(新亞細亞) 문화의 총본산이라는 의미에서 애착을 가진다. 나는 동경역(東京驛)에만 도착하면 가슴이 넓어짐을 느끼며 어쩐지 기운이 용솟음침을 느끼곤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조금도 전시 분위기 없이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동경이 이상할 정도라고 한 것은 오히려 당시의 시대적 분위를 반영하는 필자 나름의 표현으로 생각된다.75)주운성(朱雲成), 「동경 유기(東京遊記)」, 『삼천리』 제10권 제12호, 1938년 12월 1일. “누구나 비상시하의 동경(東京)이 너무나 숙연무풍(肅然無風)함과 물물인인(物物人人)의 평온 상태를 보고는 이상히 역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 ‘히틀러 유겐트’나 이태리(伊太利) 사절단이나 카이젤 영손(令孫)이나 다 일구여출(一口如出)로 한 말이지만 조곰도 전시(戰時) 기분이 없는 동경이다. 다만 가두(街頭)에 종종 입간판 광고를 볼 뿐인데 이는 우익 단체 등의 연설회와 또는 정부 주최의 연설 등이다. …… 그 밖에 건국회(建國會) 주최의 대소 응응 연설회(對蘇膺應演說會) 같은 것은 퍽으나 긴장소연(緊張騷然)한 광경을 정(呈)하였고 진재(震災) 15주년 기념 연설회에는 정부 측 연사들의 점잔은 강연에 감명이 컸다.”

따라서 이상의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아시아 지역 여행기는 유럽이나 미주 여행기와 달리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좀 더 직접적으로 반영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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