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2장 상상의 틀, 여행의 수단
  • 3. 탐승 관광과 관광 열차의 등장
  • 탐승 관광하면 금강산 탐승
성주현

탐승 관광 중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것은 금강산 관광이었다. 금강산이 근대적 관광지로 개발된 것은 일본에 의해서였다. 하나는 금강산 철도의 부설이고, 다른 하나는 다양한 금강산 관광 안내서와 탐승기였다. 금강산 철도의 부설은 1914년 경원선이 완성됨에 따라 본격적인 금강산 관광을 위해 1919년 8월에 금강산 전기 철도 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162)『朝鮮總督府官報』 1919년 8월 15일자 ; 中村進吾, 『鮮內鐵道沿線要覽』, 共盛堂印刷所, 1932, 155쪽. 1923년 8월 1일 개통이 되면서163)『朝鮮總督府官報』 1924년 8월 2일자 ; 『朝鮮鐵道40年史』, 朝鮮總督府鐵道局, 1940, 538쪽. 금강산 관광이 더욱 대중화되었다. 금강산 관광 안내서는 1926년 『금강산 탐승 안내』를164)松本武正·加藤松林, 『金剛山探勝案內』, 龜屋商店, 1926. 이 책은 금강산 관광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실용적 안내서이다. 금강산의 각종 경승에 대한 짤막한 소개는 물론이고 서울과 일본, 만주 등지에서 금강산을 탐승할 수 있는 교통과 내·외금강 및 해금강 각지의 숙식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비롯하여 『금강산』,165)前田寬, 『金剛山』, 朝鮮鐵道協會, 1931. 『금강산 탐승 안내기』166)大熊瀧三郞, 『金剛山探勝案內記』, 谷岡商店印刷部, 1934. 등 다양한 안내서가 쏟아져 나왔다. 나아가 이광수의 『금강산 유기』,167)이광수는 1921년 여름과 1923년 여름, 두 차례 금강산을 여행한 바 있고, 1922년 ‘금강산유기’를 『신생활(新生活)』에 연재한 후 1924년 단행본으로 시문사에서 간행하였다. 이 책에 대해서 “세계에 이름 있는 명산을 정평 있는 춘원의 영롱한 필치로 그려낸 기행문이니 누구든지 일독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신간 소개」, 『동아일보』 1924년 10월 31일자). 『조선 금강산 탐승기』168)竹內直馬, 『朝鮮金剛山探勝記』, 富山房, 1914. 등 금강산 여행기도 다양하게 잡지169)해동초인(海東樵人), 「세계의 절승 : 금강산」, 『신문계(新文界)』 42, 1916. 9 ; 「금상산 탐승 기행」, 『반도 시론』 1∼8, 1917. 11 ; 박석윤, 「산수 자랑-우리의 산수미」, 『별건곤』 12·13, 1928. 5 등 이외에도 많이 있다. 또는 단행본으로 소개되었다.170)최남선도 1924년 가을 금강산을 여행하고 「풍악기유(楓嶽記遊)」를 『시대일보(時代日報)』에 연재한 바 있고, 1928년 단행본으로 『금강 예찬』을 간행하였다. 특히 이광수와 최남선의 금강산 여행기는 금강산 관광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금강산 철도가 개통되기 전에 금강산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곧 경원선 고산역에 하차하여 자동차로 장안사로 가는 방법과 원산역에서 내려 배로 갈아타고 장전으로 가서 온정리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171)「금강 탐승 자동차」, 『동아일보』 1921년 7월 5일자 ; 「만철 탐승 자동차」, 『동아일보』 1921년 7월 16일자. 그러나 금강산 철도가 온정리까지 개통되면서 철도를 이용하는 관광객이 늘어났다. 특히 1920년대 들어 금강산 탐승단이 적지 않게 조직되어 금강산 관광의 대중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172)「금강산 탐승객 다수(金剛山探勝客多數)」, 『동아일보』 1921년 9월 11일자. 1921년 9월 현재 장안사와 온정리에 있던 두 호텔은 전년도보다 투숙객이 세 배 이상 증가하였다.173)「등산열(登山熱)의 발흥(勃興), 금강산 탐승객(金剛山探勝客) 격증(激增)」, 『동아일보』 1921년 9월 14일자. 1927년에는 6월 1일부터 10월 3일까지 5개월 동안 7,625명이 금강산을 관광하여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가 늘어났다.174)「금강산 탐승객 7천 6백 20명」, 『동아일보』 1927년 11월 15일자. 그리고 1933년에 이르러서는 1년간 2만 2417명이 금강산을 관광하였다.175)「금강 탐승객 2만 2천여 명」, 『조선중앙일보』 1934년 2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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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920년대 금강산 탐승단 조직 현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920년대 『동아일보』 기사 또는 광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금강산 관광단은 37건에 이르고 있다. 『동아일보』 이외의 신문에서 확인할 경우 더 많은 금강산 관광단이 조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 관광은 주로 단풍이 드는 10월이 절정이지만 봄과 여름을 구별하지 않고 관광단을 조직하였다.

<표> 1920년대 금강산 탐승단 조직 현황
명칭 주최/후원 일정 비고 전거
금강산 탐승단 영흥 분국 음력 추석 익일 비용 16원 1921.9.11
금강산 탐승단   1주간 김찬선 등 의주 인사 10명 1922.6.6
금강산 탐승단 나주역 10일간 비용 55원 1923.7.29
금강산 탐승대 공주 지국/공주 청년 수양회 8월 15일 출발 비용 40원, 28명 1923.8.2
금강산 탐승대 조선 청년회 연합회 9월 상순, 2주간   1923.5.24/7.11
금강산 유람
여행단
만철 경성 관리국 6월 15일 출발, 3일간 금강산 탐승객 장려를 위해 시설, 할인 등 점검, 비용 18원 1923.6.11
금강산 탐승단 부산 지국 8월 8일 출발, 14일간 비용 35원 1924.7.28
금강산 탐승대 통영·마산 지국 8월 상순, 2주간 비용 2등 80원, 3등 52원, 21명 이상 1925.6.1/6.22/7.14
금강산 보석 고등 보통학교 수학여행 7월 9일 출발 80명 1925.7.12
금강산 탐승단 진영 실업가 8월 16일 출발, 1주간 14인 1925.8.14
금강산 탐승단 축현역 8월 29일∼9월 2일 비용 23원, 10명 이상 1925.8.28
금강산 탐승단 김천역 9월 25일∼30일 비용 15원 64전 1925.9.24
금강산 탐승단 조선일보·동아일보 여주 지국 5월 25일 출발, 2주간 비용 35원 1926.4.26
금강산 탐승단 마산 지국 6월 8일 출발, 15일간 비용 60원, 2명 이내 1926.5.21
금강산 탐승대 거창 지국 6월 8일 출발, 14일간 비용 50원, 20명 이상 1926.5.28
금강산 탐승단 동아일보사 부산·울산 지국 8월 5일 출발, 11일간 비용 45원 1926.7.31
금강산 탐승대 인천 소년군 7월 30일 출발, 3주간 곽상훈 단장 11명 1926.7.31
담양군 시찰단 면장과 유림 9월 28일 출발 비용 1,500여 원, 20여 명, 수원 신의주 원산 등 1926.10.10
수학여행 개성 학당 상업학교 10월 11일∼18일 학생 21명 1926.10.14
금강산 탐승단 인천역 6월 10일∼15일 비용 44원 1927.5.27
수학여행 개성 호수돈 여자 고등보통학교 6월 6일 출발, 1주일 24명 1927.6.8
금강산 탐승단 수원 지국 10월 10일 출발 비용 25원 1927.10.2
금강산 탐승단 양책역 2주간 비용 40원, 10명 이상 1928.5.29
금강산 탐승단 매일신보 홍원 분국 6월 9일 출발, 8일간 비용 27원 1928.5.30
금강산 탐승단 부산 지국 8월 5일 출발 비용 40원 1928.6.21
금강산 탐승단 수원 지국/수원역 7월 12일 출발, 6일간 비용 25원 1928.7.1
금강산 탐승단 부산 지국 8월 25일 출발, 12일간 비용 40원, 30명 1928.6.25
금강 탐승단 거창 지국 7월 23일 출발, 12일간 비용 40원 1928.7.3
금강산 탐승단 대구 지국 7월 26일∼8월 9일 비용 50원 1928.7.5/7.15
금강산 탐승단 공주 지국 8월 1일 출발, 10일간   1928.7.18/7.21
금강산 탐승단 정주 지국 8월 15일 출발 비용 30원(?), 20명 1928.7.23/7.29
금강산 탐승단 남원 지국 8월 15일 출발, 15일간 비용 50원, 20명 이상 1928.8.13
금강산 탐승단 이리 유지 일동 8월 18일 출발   1928.8.13
금강산 탐승단 김제 지국 5월 19일 출발 10명 이상 1929.5.17
금강산 탐승단 문산 지국 6월 10일∼16일 비용 30원 1929.6.5/6.9
금강 탐승단 신풍 분국, 서흥 지국 8월 1일 출발, 5일간 비용 24원 1929.7.28
금강산 탐승단 청주 지국 9월 30일 출발, 6일간 비용 30원 1929.9.18
✽전거는 『동아일보』의 발행 연월일.

단풍 시즌을 맞아 금강산을 탐승하는 관광객이 늘어나자 만철 경성 관리국은 관풍 열차(觀楓列車)를 증편하여 편의를 도모하였다. 1922년에는 10월 14, 15 양일간 경원선 남대문역과 석왕사역까지 임시 관풍 열차를 운행하였고,176)「경원선 관풍 임시 열차」, 『동아일보』 1922년 10월 3일자. 1928년에는 6월 1일부터 철원역과 김화역 간 금강산 전철 급행열차를 운행하였다.177)「금강산 전철 임시 열차 운전 6월 1일부터」, 『중외일보』 1928년 6월 5일자.

1932년에는 10월 1일과 2일 휴일이 겹치고 관광객이 740여 명에 이르자 9월 31일부터 10월 3일까지 임시 열차를 왕복으로 운행하였다. 구체적인 열차 운행 시간은 다음과 같다.

경성역 발 9월 31일 오후 10시 30분, 외금강 착 10월 1일 오전 7시

외금강 발 10월 2일 밤 8시 15분, 경성 착, 10월 3일 오전 6시 40분178)「내외 양 금강에 탐승 임시 열차」, 『동아일보』 1932년 9월 30일자.

그리고 임시 열차는 3등 침대차 2량과 3등차 2량으로 경성역을 출발한 후 복계역에서 3등차 1량을 증편하여, 외금강까지는 직통으로 운행하였다. 그리고 내금강까지 임시 열차를 운행하지는 않았지만 보통 열차 3등차 4량을 증편하여 운행하였다. 1933년에는 철도국에서 9월 22일 오후 10시 경성역을 출발하여 23일 오전 7시 30분 외금강에 도착하고, 24일 오후 7시 30분 외금강역을 출발하여 25일 오전 6시 경성역에 도착하는 특별 열차를 운행하기도 하였다.179)「23, 4일에 금강산 유람 특별 열차 운전」, 『동아일보』 1933년 9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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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금강산 관광객은 단체 관광객만 600명이 넘었으며, 숙박 시설이 모두 만원이 됨에 따라 철도국은 외금강역에 3등 침대차 2량을 긴급 유치하여 140명을 수용하는 임시 열차 호텔을 개설하기도 하였다.180)「가을의 금강산 탐승객 사태 열차 호텔 급설」, 『동아일보』 1932년 9월 20일자. 그뿐 아니라 철도국은 금강산 관광객과 지방 교통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7월 26일부터 10월 말일까지 원산역과 고성역 간을 매일 왕복하는 임시 열차를 운행하였다.181)「원산-고성 간의 임시 열차 계속 운행」, 『동아일보』 1932년 10월 29일자. 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금강산 전철이 운행되는 철원읍 월하리역은 1928년 상반기에 일일 평균 481.5명, 하반기에는 475.8명으로 철원역에 비해 두 배 정도 많을 정도였다.182)「월하리역의 승강 인원수」, 『중외일보』 1929년 2월 23일자. 또 1927년 통계에 따르면 금강산을 관광 한 사람이 1926년에는 8,000여 명에서 1927년에는 1만 5000명에 이르렀으며, 외국인이 550여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183)「금강산 탐승객의 격증」, 『중외일보』 1927년 11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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