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3장 관광 명소의 탄생과 숙박 시설
  • 3. 금강산 여행의 권유
윤소영

금강산은 이미 조선시대 양반들에게 손꼽히는 여행지였다. 그러나 이의 대중화는 역시 일제 강점기 ‘관광의 기획’ 속에서 이루어졌다. 1910년대 전반에 금강산의 절경을 칭송한 글이 일본어 잡지에도 실렸다. 그뿐 아니라 1913년 『조선 급 만주(朝鮮及滿洲)』에는 이미 금강산이 외국인에게 세계 제일의 절승지(絶勝地)라는 평을 얻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었다.322)明石元二郞, 「朝鮮は世界に有數なる避暑地である」, 『朝鮮及滿洲』 73號, 朝鮮及滿洲社, 1913.8. “금강산에 오르는 이는 내지인은 드물고 외국인이 많다. …… 서양인으로 이곳을 구경한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극찬을 한다. …… 최근에 금강산은 세계 제일이라는 평판이 외국인 사이에 왕성한 모양이다.” 하지만 일본인의 여행 편의를 위해서는 금강산의 교통과 숙박 시설의 개선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지적할 정도로323)石塚英藏, 「綠蔭瑣談」, 『朝鮮及滿洲』 73號, 朝鮮及滿洲社, 1913.8. “외국인은 피서라고 하면 가족과 함께 자주 천막생활을 하고 있으나 일본인은 무조건 숙소를 찾으니까 피서지에는 상당한 설비가 필요하다. 조선은 내륙은 꽤 산수가 수려하나 주위의 설비가 아직 매우 불완전하니까 천막 피서는 훌륭하나 숙소를 찾는 입장에서는 적당하지 않다. 금강산 주변도 최근 내외인의 출입이 격증하여 매우 유명해졌으나 아직 장소가 불편한 것은 아쉽다. 그러나 장래 철도가 개통하고 그 부근에 숙소가 건설되어 일체의 설비가 완성할 때는 단순히 조선의 피서지일 뿐 아니라 세계의 피서지로서 선전되게 될 것이다.” 금강산 여행의 대중화는 아직 실현되지 못하였다.

금강산 여행이 본격화되는 것은 1914년 경원선 철도가 완공된 이후이다. 1915년 봄에 『매일신보』는 금강산 단체 여행단 모집 광고를 내었는데, 이것이 근대 금강산 단체 여행의 시초인 것 같다. 이 무렵 『매일신보』는 연일 금강산 관련 기사를 싣고 있는데 1915년 4월 15일자에는 “금강산의 봄 경치, 조선 제일의 명승”이라고 하였고, 1915년 4월 17일부터는 금강산에 대한 연재 기사를 실었다. 1915년 4월 28일자에는 ‘고려국에 생장된 몸 금강산을 일견하세’라는 기사에 “‘원컨대 고려국에 탄생되어 금강산을 한번 보았으면’이라 탄식하는 글을 읊었던 것은 누구인가. 당나라의 개국 공신 (開國功臣)으로 만고 명장 되는 이정(李靖)이라.”고 소개하였다. 이 글귀는 일제 강점기에 금강산의 대명사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유명한 구절이 되었다.324)1939년에 장혁주의 ‘금강산 잡감(金剛山雜感)’을 보면, “‘원생고려국 일견금강산(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 조선에 태어나서 한 번이라도 좋으니 금강산을 보고 싶다는 것이 중국인의 평생소원(平生所願)이라는 것이다. 이런 시를 중국의 어떤 시인이 만들었는지 중국인이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오히려 조선인끼리 서로 금강산을 예찬하는 표현으로 통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경우는 이 시를 인용한 문장을 몇 번이나 읽은 적이 있고 듣기도 하였었다.”고 적어서 이 글귀가 널리 인용되고 있던 모습을 엿보게 한다(윤소영 외 옮김, 『일본 잡지 모던 일본과 조선 1939』, 어문학사, 2007, 258쪽 참조). 이와 같은 기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끌었던지 1915년 5월 4일자에는 금강산 탐승단(探勝團) 모집에 대한 반향이 소개되었다.

본사 주최로 금강산 탐승회를 조직하는 일이 한 번 발표된 지 불과 일주일에 각처의 찬성이 물 끓듯 하야 경성과 각 지방으로부터 참가하기를 희망하는 이가 극히 많은데 성황이라. …… 그러나 본사에서는 미리 작정한 회원 수효가 있는바 그 정한 수효에 남으면 도저히 이상의 신청을 응수(應酬)키 불능한즉 가실 마음이 있는 이는 생각나는 즉시에 신청해야 하겠더라. 금강산 생긴 후에 이번 탐승회와 같이 단체의 조직으로 구경 들어가기는 이번이 처음이라.325)「금강산 탐승회는 여사(如斯)한 대대적 대성황」, 『매일신보』 1915년 5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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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신청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며 금강산 탐승을 권유하고 있다. 여행 과정에 대해서는 ‘천하의 명승지 금강산’ 여행은 ‘도회(都會)의 환락(歡樂)과 산수의 맑은 흥’을 누릴 수 있고 ‘탐승 단원의 대우는 정녕 친절을 위주’로 하며 단원에게 ‘편리’하도록 순수한 조선식으로 유감이 없도록 대우하며 ‘조선 사람으로만 조직한 유람단’이고 ‘저렴한 회비’와 ‘다시없을 기회’라는 점을 강조하였다.326)「금강산 탐승회는 여사한 대대적 대성황」, 『매일신보』 1915년 5월 4일자. ‘관광’의 특징인 대중성, 안락성, 편의성 등을 선전한 문구가 주목된다.

금강산에 대한 여행 홍보는 1915년 9월 11일부터 10월 3일까지 개최한 조선 물산 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에서도 이어졌다. 강원도에서 금강산 모 형을 출품하여 전시실의 중앙에 배치하였는데, 내금강과 외금강은 물론 부근의 명승지와 통로(通路) 등을 표시하여 관람자의 눈길을 끌었다.327)江原道 第一部長 武藤文吾, 「九十萬を要したる金剛山道路」, 『朝鮮公論』 1915年 10月號, 朝鮮公論社, 129∼130쪽. 그리고 강원도 제일 부장(第一部長) 무토(武藤文吾)는 『조선 공론(朝鮮公論)』에 게재한 글에서 경원선 개통과 함께 평강에서 말휘로 통하는 31리 도로와 원산에서 온정리로 통하는 28리 도로를 총 90만 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새롭게 신설하였다고 알리면서 조선 물산 공진회 기간 중 금강산을 찾는 이들을 위해 인력거(人力車), 말, 가마 등을 준비하고 있으며 전신 전화(電信電話)를 개설하여 탐승의 편리를 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등에 대대적인 숙박 시설을 만들어 편의를 꾀하고 있다고 선전하였다.328)江原道 第一部長 武藤文吾, 「九十萬を要したる金剛山道路」, 『朝鮮公論』 1915年 10月號, 朝鮮公論社, 129∼130쪽. 조선 물산 공진회를 계기로 한 이런 홍보가 꽤 효과를 발휘하여 금강산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높아졌다.329)釋尾旭邦, 「金剛山行」, 『朝鮮及滿洲』 110號, 朝鮮及滿洲社, 19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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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진회장경복궁지도(共進會場景福宮之圖)
공진회장경복궁지도(共進會場景福宮之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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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1919년에는 경원선 철원역에서 시작하여 금화를 거쳐 내금강역까지 이르는 총연장 116.6㎞의 금강산 철도가 착공되어 1924년에 철원-금화 간이 먼저 개통되고 1931년에 전 구간이 완공되었다.330)서영채, 「최남선과 이광수의 금강산 기행문에 대하여」, 『민족 문학사 연구』 24, 민족 문학사 학회, 2004, 246쪽. 1926년 현재 금강산 탐승객의 수는 매년 2,000명 정도이며, 금강산 철도 회사의 기록에 따르면 금강산 철도 이용 승객은 1926년에 881명, 1931년에 1만 5219명, 1939년에 2만 4892명으로 증가하였다.331)서영채, 앞의 글, 248쪽. 또 매년 6월 1일부터 10월 말일까지 개산(開山) 시기에는 기차, 기선, 자동차의 연락을 통해 편의를 도모하고 철도 직영 호텔을 개장하며, 산행길의 다정(茶亭)이 영업하는 등의 준비를 갖추었다.332)松本武正·加藤松林, 『金剛山探勝案內』, 龜屋商店, 1926, 214쪽. 경성에서 경원선 열차로 약 3시간 만에 철원역에 도착한 다음 내금강 방면은 금강산 전차로 바꾸어 타고 금성에서 내렸다. 금성에서 내금강 장안사까지는 자동차가 왕복하였다. 외금강 방면으로 여행할 경우에는 경원선으로 철원을 지나 원산역에서 하차하였는데, 원산은 경성에서 약 8시간이 걸렸다. 원산에서 외금강 온정리까지 가는 길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선(汽船)을 타는 것이었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온정리까지 30리를 5∼6시간에 갔다. 기선은 온정리 앞 2리 가까이에 있는 장전항(長箭港)까지 운항하는 데, 개산 기간 동안 정기 항로가 열려 매일 왕복하였다.333)松本武正·加藤松林, 『金剛山探勝案內』, 龜屋商店, 1926, 23∼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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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탐승 기념사진
금강산 탐승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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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금강산은 이광수가 “절승은 금강산, 절경은 다도해”라고 지적하였듯이 조선을 대표하는 명산으로 많은 이들이 앞을 다투어 이곳을 찾았다. 1921년 8월 3일 오전 8시 15분에 이광수도 남대문역에서 출발하는 원산행 기차를 탄다. 정오에 고산역에서 내려 장안사로 가는 자동차를 타고 “어디를 가든지 말씀 아니게 초라한 조선 시가(市街)를 지나, …… 아직 다져지지 않은 신작로의 주먹만 한 자갯돌 위로 춤을 추면서 내달려”334)이광수, 「금강산 유기」, 『금강산 기행문선(金剛山紀行文選)』, 작가 정신, 1999, 104쪽 및 136∼137쪽. 금강산을 탐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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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사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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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에 금강산을 여행한 최남선(崔南善)은 “교통이 편치 못하던 전일(前日)에는 금강산 구경이 실로 용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 그러나 시방은 조선 내에서는 대개 1, 2일 정도로 이 선경을 밟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차, 전차, 자동차의 이용…… 금강산의 일반화가 촉진”되었노라고335)최남선, 『금강산 예찬』, 『한국 현대 수필집 자료 총서』 2, 태학사, 1987, 11쪽. 술회한다. 최남선은 “서울서 금강산 가는 길은 경원선으로 철원까지, 전차로 창도(昌道)까지, 그 앞은 자동차로 하여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을 차례로 보고 장전(長箭)에서 기선으로 원산을 경유하여 돌아오는 육왕해귀선(陸往海歸線)과 이것을 역행하는 해왕육귀선(海往陸歸線)과 원산 장전으로 하여 온정리에서 금강산의 온정령을 끼고 돌아 내·외금강을 구경하고 오던 길로 다시 가는 해왕육귀선의 세 종류가 있”는데 이 중 육왕해귀 경로가 권할 만하다고 하였다.336)최남선, 『금강산 예찬』, 『한국 현대 수필집 자료 총서』 2, 태학사, 1987, 12∼13쪽.

당시 금강산 지역의 숙박 시설은 여관이 외금강의 온정리, 해금강 및 고성, 내금강의 장안사에 있었다. 온정리에는 여관 외에 경찰관 주재소, 우 편소, 상점 네다섯 개 등을 비롯하여 온천도 있었다. 고성은 온정리에서 4리 정도 떨어져 있는데 해금강 탐승에 적합하고 경찰서, 우편소, 학교, 그 밖의 공공 기관도 있었다. 장안사는 이 지역과 정반대에 위치하여 내금강 입구라고는 하나 산속 가운데 있고 철도 직영의 방갈로 건축의 호텔이 있으며 그 호텔 옆에는 내금강 여관이라는 일본식 여관도 생겨서 방이 네다섯 개 정도 있었다. 당시의 숙박 시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표 ‘1926년의 금강산 지역 숙박 시설’과 같다.

표) 1926년의 금강산 지역 숙박 시설
위치 명칭 특징
온정리 온정리 호텔 철도 직영. 미국식 1일 3식에 8원 정도, 온천 내탕 설비, 오락실
있음
영양관(嶺陽館) 일본풍 여관, 숙박료 3∼5원, 온천 내탕 설비
만룡각(萬龍閣) 일본풍 여관, 숙박료 3∼5원, 온천 내탕 설비
송월(松月) 여관 일본풍 여관, 숙박료 3∼5원
고성 고성관 일본풍 여관, 숙박료 3∼5원
화옥(花屋) 일본풍 여관, 숙박료 3∼5원
고성관 지점 일본풍 여관, 숙박료 3∼5원, 해금강에 위치
장안사 장안사 호텔 철도 직영, 미국식 1박 3식에 8원 정도, 장기 체류객에게 자취할수 있는 임대실 있음, 오락실 있음, 설비 완비
내금강 여관 일본풍 여관, 숙박료 3∼4원 정도
✽松本武正·加藤松林, 『金剛山探勝案內』, 京城 : 龜屋商店, 1926, 32∼34쪽에서 작성.

이 밖에 금강산 속에는 조선인이 경영하여 온돌방을 갖춘 숙소도 있었고,337)松本武正·加藤松林, 『金剛山探勝案內』, 龜屋商店, 1926, 36쪽. 1934년경에는 온정리에 독일풍 지붕으로 지은 철도국 직영의 외금강 산장도 들어섰다.338)渡邊忍, 『金剛山探勝案內記』, 谷岡商店印刷部, 1934, 48쪽 : 『한국 지리 풍속지 총서』 78권, 경인 문화사, 2000.

1930년대가 되면 금강산 여행은 더욱 대중화된다. 하다못해 “전차를 타기 5분전까지 금강산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로 망설”인다고 할 만큼 쉽게 떠날 수 있는 여행이 되었다. 정래동(丁來東)과 그의 친구는 “금강산행 기차를 아슬아슬하게 타고 왕십리를 지나…… 장안사역에 내려…… 역 앞에 기다리고 있던 버스를 타고 여관으로 갔다. …… 여관의 문에서 앞뒤로 둘러보니 높고 큰 전나무가 길가에 늘어서 있다. 여관의 뒤뜰은 시냇물 소리가 요란하고 흰 돌이 달빛에 비쳐 반사된다. …… 단 하루라도 서울을 떠나, 이러한 청정한 곳에 와서 저녁을 지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339)정래동, 「금강산 유람기」, 『금강산 기행문선』, 작가 정신, 1999, 80쪽.고 술회할 정도로 손쉽게 금강산을 찾았다.

이렇게 갑작스런 여행이 가능했던 이유는 1931년 6월 15일부터 10월 31일까지 금강산 탐승객을 위해 일반 휴일 전날에 경성발 제503 열차에 2·3등 침대차를 연결하여 내금강까지 직통 운전하게 하는 한편,340)朝鮮總督府 鐵道局, 『昭和六年度年譜』, 1931, 26쪽. 1932년 9월 16일에 외금강역이 개설된 데다가 탐승 시즌에는 기존의 일반 휴일 전날에 경성발 제503 열차와 연결한 내금강행 직통 2·3등 침대차를 9월 26일부터 매일 운행하였기 때문이다.341)朝鮮總督府 鐵道局, 『昭和七年度年譜』, 1932, 24쪽. 같은 해 10월에는 금강산 탐승객이 격증하였고 이러한 여행객에 대한 철도 편의 제공은 매년 정례화되었다.342)朝鮮總督府 鐵道局, 『昭和十一年度年譜』, 1936,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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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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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여름에 금강산을 여행한 한설야(韓雪野)는 만주국(滿洲國)의 관 리가 된 친구가 7, 8년 만에 찾아와 “밤이 깊어 거듭 술잔을 기울이다가 금강산에 가고 싶다.”고 하여 갑자기 금강산으로 떠났다고 한다. 안변역에서 외금강행 열차를 타고 ‘온정리 최고의 여관인 영양관(嶺陽館)’에 투숙한 다음 저녁 식사 후에는 거리로 나가 어느 요정에 들어갔고, 다음날에는 온천수로 목욕을 하고 해금강을 보기 위해 고성으로 갔다.343)한설야, 「금강산 유기(金剛山遊記)」, 『금강산 기행문선』, 작가 정신, 1999, 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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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탬프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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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가을에 사나흘 일정으로 금강산을 찾은 정비석(鄭飛石)은 철원에서 금강 전철로 갈아타고 “내금강 역사에 닿으니 순 한국식 건물이 달빛 속에 우리를 반기는 듯하다. 어느 외국인 산장을 그대로 떠다 놓은 듯이 멋진 외금강역과 아울러 이 한국식 내금강역은 좋은 대조를 이룬다.”344)정비석, 「산정무한(山情無限)」, 『금강산 기행문선』, 작가 정신, 1999, 121쪽.고 평가하였다. 그는 장안사를 지나 명경대에 도착하여 스탬프 북을 한 권 사서 옆에 기념인장(記念印章)을 찍는다.345)정비석, 「산정무한」, 『금강산 기행문선』, 작가 정신, 1999, 123쪽. 스탬프 북에 기념 스탬프를 찍어 가지는 것은 여행을 기억하기 위한 통과 의례(通過儀禮)로 일본인들이 현재에도 즐겨하는 여행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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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금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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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서의 금강산 여행은 ‘관광’을 통해 ‘국리민복(國利民福)’을 꾀하고자 하는 정책적 견인(牽引)과 일제 당국과 철도국, 그리고 언론사가 견인하는 ‘관광 명소’ 기획 그리고 기획된 여행지에 대한 이미지의 선전, 예를 들면 금강산에 대한 “원생고려국 일견금강산(願生高麗國一見金剛山)”과도 같은 것이 매체를 통해 반복됨으로써 조선인으로 태어났으면 금강산은 한 번쯤 가봐야 한다는 인식을 조장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금강산에서의 조선인은 기획된 관광지 ‘금강산’을 코스에 따라 돌아보며 일본식 일류 호텔에 숙박하는 것을 즐겨하고 온천욕을 하고 스탬프를 찍으며 다시 경성으로 돌아오는 여행 방식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러한 모습 속에서 식민지 조선에서도 어김없이 ‘기획된’ 근대 여행, 투어리즘이 존재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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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여행 관련 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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