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3장 관광 명소의 탄생과 숙박 시설
  • 4. 수학여행 명소와 식민 교육의 기획
윤소영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이 한 여행 가운데 가장 여행단의 규모가 컸던 사례는 단연 수학여행(修學旅行)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학생들의 단체 여행인 ‘수학여행’은 일본에서 1886년 도쿄 고등 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가 실시한 원거리 소풍에서 유래하였으며, ‘수학여행’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1887년 『대일본 교육회 잡지(大日本敎育會雜誌)』 54호라고 한다.346)『大衆文化事典』, 東京 : 弘文堂, 1991, 339쪽. 중국과 영국에 유학한 적이 있고 한국 감리 교회를 일으킨 양주삼(梁柱三)의 글 가운데 수학여행이 실시된 곳은 일본과 조선뿐이라고 하였던 것도347)소주(蘇州), 동호 대학(東湖大學) 유학시대(留學時代)(양주삼(梁柱三)), 「교수(敎授)로 대학생(大學生)으로 지나(支那) 제 대학(諸大學) 시대(時代)의 회상(回想)」, 『삼천리』 12권 6호, 1940년 6월 1일. 이러한 정황을 이해하는 데에 다소 참고가 된다.

일본에서 실시된 수학여행은 현지(實地)에서 사물을 조사하고 표본을 얻는 것과 채집, 지리 역사 탐구를 포함한 긴 행군을 의미하였다.348)『大衆文化事典』, 東京 : 弘文堂, 1991, 339쪽. 오사카 부립 심상중학교(大阪府立尋常中學校)의 1894년 당시의 수학여행 규칙 제1조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학여행의 주요 목적은 평상시 교내에서 배울 수 없었던 탐구를 하고 겸하여 괴로움과 결핍을 이길 수 있는 습관을 양성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이 여행에 참가하는 자는 이 뜻을 숙지하여 행로의 험악함과 숙박상의 불편함 혹은 사람들의 냉대 등이 많을수록 얻는 것도 많다는 것을 각오하고 힘쓰고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다.349)大阪府尋常中學校, 『府立大阪府尋常中學校一覽』, 1894, 55쪽, 第10章 修學旅行規則 第1條.

수학여행의 주요 목적을 학생들의 극기(克己)와 단체 훈련에 두어 군국주의(軍國主義) 색채가 농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1890년 초반부터 각급(各級)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실시하였고, 러일 전쟁(1904∼1905) 이후에는 중국과 한국으로의 해외 수학여행도 실시하였다.350)「滿韓修學旅行」, 『敎育界』 6卷 8號, 1907年 6月 ; 『近代日本のアジア敎育認識資料編』 第2卷, 龍溪書舍, 180쪽.

한편 구한말의 신문 기사 속에서 ‘수학여행’이라는 용어가 처음 보이는 것은 『황성신문(皇城新聞)』 1901년 7월 26일자의 ‘아국 동양어 학교생(俄國東洋語學校生) 수학여행’이라는 기사인 것 같다. 조선에서의 수학여행은 『황성신문』 1909년 5월 9일자에 보성학교 학생이 평양 수학여행을 한다는 기사가 보이고, 1911년에 경상북도 문경군 금룡사에서 주지 승려가 학생들을 대동하고 부근 사찰로 수학여행을 하였다는351)잡보(雜報), 『조선 불교 월보(朝鮮佛敎月報)』 4, 조선 불교 월보사, 1912.5.1. 기록이 있다. 1912년 10월 25일에는 중앙 학교 학생 100여 명이 평양과 개성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352)김윤식(金允植), 『속음청사(續陰晴史)』 15권, 임자년(1912) 10월 25일. 『황성신문』 1909년 10월 26일자에는 일본인 경성 소학교와 고등 여학교에서 수원과 인천으로 수학여행을 갔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리고 『매일신문』 1911년 4월 23일자에는 대구 거류민단(居留民團) 학교 생도 72명이 2명의 교원이 인솔한 가운데 대전을 시찰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각급 학교의 수학여행이 보편화되는 것은 신문과 잡지에 수학여행 관련 보도가 빈번하게 게재되고 있는 정황으로 보아 3·1 운동 이후로 생각된다. 1920년 5월 21일부터 25일까지 보성 고등 보통학교 학생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경주와 개성(108명)으로 수학여행을 하였으며,353)『동아일보』 1920년 6월 4일자 및 6월 19일자. 휘문 고등 보통학교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경주와 개성으로 6월 7일부터 사흘 동안 수학여행을 하였다.354)『동아일보』 1920년 6월 6일자. 보성 전문학교 학생은 1922년 상과 재학생이 개성, 금강산,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왔고, 1924년에는 처음으로 만주까지 수학여행을 하였다.355)신수식, 『고려 대학교 경영 대학 100년사 1905∼2005』, 고려 대학교 경영 대학, 2006, 99쪽. 백천 창동 학교에서는 3, 4학년생이 1박 2일로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하였으며,356)『동아일보』 1921년 5월 13일자. 개성 송도 고등 보통학교는 1학년 150여 명은 사흘 동안 평양으로, 2, 3학년 90여 명은 나흘 동안 원산으로, 4학년 20여 명은 나흘 동안 경주로 각각 수학여행을 실시하였다.357)『동아일보』 1921년 5월 16일자. 경상북도 상주 공립 농잠학교(상주 대학교의 전신) 학생은 1924년부터 수학여행을 실시하였는데, 1학년은 부근 지역을, 2학년은 전국의 명승지를, 3학년은 일본과 만주 지역을 여행하였다.358)상주 대학교 80년사 편찬 위원회 편, 『상주 대학교 80년사 1921∼2001』, 상주 대학교, 2001, 145쪽. 1923년에 개성 송도 보통학교는 1학년 170여 명이 평양으로, 2학년 198명은 함흥으로, 3학년 100여 명은 부여로, 4학년 50여 명은 경주로, 5학년 19명은 펑톈(奉川)으로 각각 수학여행을 다녀왔다.359)『동아일보』 1923년 5월 13일자. 개성 학당 상업학교 학생 21명은 1926년 5월 11일부터 17, 18일까지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기도 하였다.360)『동아일보』 1926년 10월 14일자. 수학여행 장소는 학년별로 달랐는데, 저학년은 학교 인근 지역으로, 고학년이 될수록 국내 원거리로 떠나 경성, 경주, 평양, 부여 등지를 여행하였다. 고등 보통학교와 사범학교 등은 졸업 학년이 되면 만주나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군산 메리 물턴 여학교에서는 경성 수학여행을 요구하여 동맹 휴학(同盟休學)을 하기도 하였다.361)일기자(一記者), 「육호통신(六號通信)」, 『개벽』 71, 1926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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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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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수학여행을 학창 시절의 통과 의례로 여겼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학생들의 마음이 들뜨고 흥분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1921년 10월 12일에 인천 수학여행을 떠난 보성 소학교 일행은 남대문역에서 기차를 타고 “들들들 굴러 가는 기차 바퀴는 종일토록 쉬지 안코 다라나도다. 십리만리 갈 길이 비록 멀으나 살과 가티 신속히 득달하누나”라는 기차가(汽車歌)와 “경개 조흔 산과 물은 재가 사랑함이로다 사면강산 단이다가, 조흔 곳 왓네”라는362)「청추(淸秋)의 여(旅)」, 『개벽』 17, 1921년 11월 1일, 101쪽. 탐승가(探勝歌)를 목청껏 부르며 ‘발을 구르며 손을 휘두르며’ 들뜬 마음으로 여행길에 나섰다. 경주 수학여행을 간 동덕 여학교 학생은 다음과 같이 여관에서 친구들과 즐겁게 밥을 먹고, 밤중에 몰래 친구들과 수다를 떨 계획을 세웠다가 피곤하여 자버린 탓에 다음날 전날 밤참으로 준비해 놓은 찬밥을 먹느라 고생한 이야기를 전해 준다.

작년 가을에 우리 반 20여 명이 신라 고뎍을 차저 경상도 경주에 갓슬 때, 네 패에 난호여 네 방에서 자는데 방방이 들너 안저 밥을 먹을 때는 까닭업시 자미 잇서서 이 방 저 방이 밥 싸홈을 하노라고 에그머니 아그머니 하는 소리가 깔깔거리고 웃는 소리와 함께 엇더케 요란하던지…… 남은 밥을 욕심 사납게…… 브인 벤또에다 모다 갓듬 담어서 감추어 두엇지요. 하기는 “잇다가 밤중에 출출할 때에 다른 방 사람들을 놀려 가면서 우리만 맛잇게 밤참을 먹으면서 우슴판을 벌니자”는 계획이엿는데, 그만 낫에 고단한 몸이라 다섯 식구가 그냥그냥 잠이 들어버렷슴니다그려. 잇흔날 아침 에 려관에서 벤또를 싸 주마고 벤또 그릇을 내노으라는데……선생님에게 야단 맛날가봐 겁이 나서 얼는 쏫아서 보자귀에 싸 놋코……그 고생 덩어리인 찬밥 보퉁이를 내여 버리지는 못하고 땀을 뻘뻘 흘니면서 그 산(토함산)을 다 올나 가서 점심때에 억지로 먹어 치웟스니 그 고생이 엇더 하엿겟슴니가…… 늙어 죽을 때까지 밥그릇만 보면 닛지 안코 생각날 수학려행의 영구한 긔렴임니다.363)망향초(望香草), 「여학생 특집란(제1회 동덕부), 밥 고생, 수학여행기 중에서」, 『별건곤』 7, 1927년 7월 1일, 124∼125쪽.

수학여행길에 남은 에피소드가 어디 이뿐이랴? 일제 강점기에도 수학여행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남기는 행사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한편 그들이 머문 여관은 어떠하였을까? 1920년 5월 4박 5일의 일정으로 인솔 교사 2명과 18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보성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이 대구에서 머문 여관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대구 여관은 어찌 온돌만 놓고 불 넣을 줄 모르는지, 사명당(四溟堂) 사처는 명함도 못 드리게 차고, 음식품은 가액(價額)만 받으면 그만이고 여객의 편의는 도시 부지부관(不知不關)이고…… 다 얼어 죽어라 하는 듯한 삼층 냉돌에서 잠을 잤다.”고 하며 개선을 촉구하기도 하였다.364)신경수(辛景壽), 「보성 고등 보통학교 경주 수학여행기(1)」, 『동아일보』 1920년 6월 19일자.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는 여관의 숙박료가 4, 5원 정도인 데 비하여 조선인이 경영하는 여관은 1원 내외였다는 점, 더욱이 수학여행의 개인당 총비용은 10원 정도였다는 점을365)주요섭(朱耀燮), 「수학여행 시비, 과연 소득이 잇느냐 업느냐」, 『별건곤』 45, 1931년 11월 1일, 16쪽. 감안할 때 학생들의 수학여행에서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저렴한 여관을 이용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가 되면 이러한 수학여행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나와 논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여행 경비가 가계(家計)에 부담이 되고 여행이 주마간산식(走馬看山式)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그 폐단이 없지 않았지만, 『동아일보』 1936년 5월 5일자를 보면 매일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오는 초·중등 학교의 수가 10여 개로 3,000여 명 이상이 개성을 찾고 있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중일 전쟁(1937) 무렵까지는 수학여행이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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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수학여행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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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앞서 살펴본 몇몇 학교의 수학여행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당시 수학여행의 명소는 경주, 부여, 개성, 평양, 인천(강화도), 경성 등지였다. 이러한 지역은 대개 유서(由緖) 깊은 사적지(史蹟地)라는 공통점이 있다. 왜 이러한 여행지를 선호하였던 것일까? 이는 아무래도 조선 총독부의 교육 방침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한일 병합 초기의 교육 방침을 보면, 특히 수신(修身) 교육에서는 고대 일본과 조선의 깊은 관계를 일본 역사에 비추어 잘 설명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조선 총독부는 얼마 전에 교육에 관한 칙어(勅語) 등본(謄本)을 하사받고 이어서 학교 시설에 관한 각 법령을 발포하였고, 동시에 데라우치 총독에 의해 학제 요지(學制要旨)를 훈령하여 조선 교육의 방침을 유고(諭告)하였다. …… 그 유고의 일절(一節)은 “제국 교육의 근본은 일찍이 교육에 관한 칙어에 명시된바, 이를 국체에 비추이고, 역사로 증명하여 확고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 교육의 본의도 여기에 있다. 생각하건대, 조선은 아직 내지(內地, 일본)와 사정이 같지 않아서 그 교육은 특히 덕성 함양과 국어 보급에 두고 이로써 제국 신민으로의 자질과 품성을 구비시키는 것이다. …… 수신과(修身科)의 역사적 재료로서는 고대 내지와 조선과의 깊은 관계가 있던 사실을 우리 국사(일본사)에 비추어 설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366)社說, 「朝鮮敎育に就て」, 『敎育時論』 958號, 開發社, 1911年 11月 25日 ; 『近代日本のアジア敎育認識 資料篇』 第1卷, 龍溪書舍, 254∼155쪽.

이러한 의도를 기다 사다키치(喜田貞吉)는 고대에 일본의 속국(屬國)이었던 조선이 다시 일본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설명하였고,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는 고대 일본의 한국 지배설을 ‘역사상 증명되는 사실’이라고 강조하여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하는 현실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폈다.

조선은 일본의 오랜 우방으로서 진구 황후(神功皇后) 때 조선 남부를 무력으로 지배하여, 하나 내지 둘의 속국이 있었다는 것이 일본 국사에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중국 역사가 이미 이를 전해 주고 있다. …… 1,300년 후인 지금 다시 일본으로 조선은 돌아온 것이다.367)喜田貞吉, 「倂後の朝鮮敎育」, 『敎育時論』 914號, 開發社, 1910年 9月 3日.

우리 일본 제국이 조선 반도에 세력을 얻은 것은 진구 황후 때이며 당시 조선 반도 남부에 있던 미마나국(任那國)을 속국으로 삼고 그 옆의 신라와 백제를 조선국으로 하였던 것이다. 즉 반도 남반부가 일본 세력 범위에 속한 것이다. 이후 일본의 반도에 대한 세력은 소장(消長)이 있어서 그들이 혹은 이반하고 혹은 복종해 왔으나 그 관계가 밀접한 것은 메이지(明治)시대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았다. 즉 일본과 조선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가는 역사상의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368)白鳥庫吉, 「日本は果して朝鮮を感化し得べきか」, 『敎育時論』 915號, 開發社, 1910年 9月 15日.

한편 1915년에 조선 총독부 학무국(學務局)에서 주관한 공립 보통학교 교원 대상 강습회 강연에서도 조선사 강의를 담당한 오다 쇼고(小田省吾) 총독부 편집 과장이 고대사의 시기 구분을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있을 정도로,369)小田省吾, 「朝鮮歷史講演」, 『公立普通學校敎員講習會講演集』, 朝鮮總督府 內務部 學務科, 1915 참조. 이러한 고대사 인식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에 대한 역사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1921년 신학기부터 보통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국사 교과서 『심상소학 국사 보충 교재(尋常小學國史補充敎材)』 1권의 내용으로도 연결된다.

옛적에 반도의 북부를 조선이라고 하여 지나(支那, 중국)에서 기자(箕子)가 와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위만(衛滿)이라는 자가 이 지방에 들어와 기자의 후손인 준(準)을 쫓아내고 나라를 빼앗았다.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 때,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에 4군을 두었다. 이로부터 수백 년 간 반도의 대부분은 지나의 영지가 되었다. …… 반도의 남부에는 한(韓) 종족이 살아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세 종류로 나뉜다. 모두 많은 소국으로 구성되었는데 나중에 마한은 백제국이 되고 진한은 신라국이 되고 변한은 가라(加羅) 등의 나라로 되었다. 가라 등의 나라를 가리켜 미마나 제국(任那諸國)이라고 부른다. 이상의 나라들은 모두 일본과 매우 가까워서 바다를 건너 일찍부터 교통하였다. 아마데라스 오미카미(天照大臣)의 동생 스사노오노 미코토(素戔鳴尊)는 그 아들과 함께 조선에 온 적이 있다. 수진(崇神) 천황 때 가라국이 처음으로 일본 조정에 사절을 보냈고 수닌(垂仁) 천황 때 신라 왕자 아마노히 호코(天日槍)가 일본에 옮겨 살아 그 자손이 대대로 이어졌다. …… 백제에서는 일본에 복속하였을 무렵 고흥(高興)이라는 박사가 와서 처음 기록이 이루어졌다. …… 진구 황후가 신라를 정벌한 다음, 일본부를 미마나(任那)에 두고 한토(韓土)를 다스렸다. 이때부터 신라, 고구려, 백제는 모두 일본에 조공을 바치고 또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인질을 보내 와 그 성의를 드러내었다.370)朝鮮總督府 編纂, 『尋常小學國史補充敎材』 卷1, 兒童用, 1920年 12月 13日, 1∼8쪽.

결국 기다 사다키치나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고대사 인식이 그대로 교과서에 투영되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를 학생들에게 주입하였다.

수학여행은 이러한 교육 목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일제 강점기의 수학여행지 선정에는 식민 통치 당국이 기획한 정치적인 의도가 농후하게 작용하였다.

수학여행의 목적이 주로 역사 이해에 있었음은 당시 사람들의 인식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면 1920년 봄, 경주로 여행을 떠난 보성 고등 보통학교 학생 신경수는 수학여행의 의미에 대해 “지리로 배운 것을 실지로 보아 넓히기 위함”이고 “지리에 승지(勝地) 강산이며, 사학(史學)에 미술 고적과 인정 풍속을 실탐(實探)하야 알고 증명코저 할진대 여행을 놓고는 구하야 얻을 곳이 없다.”고371)신경수, 「보성 고등 보통학교 경주 수학여행기(1)」, 『동아일보』 1920년 6월 19일자. 하고 있다. 1931년 수학여행의 존폐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의견을 제시한 주요섭(朱耀燮)도 수학여행의 목적은 “‘1. 수학여행’이라는 글자 뜻대로 수학하기 위한 여행, 2. 휴양, 3. 쾌락”이라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 점도 역시 조선에서의 수학여행이 주로 명승고적을 통한 역사 이해에 중점을 두고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여행으로서 수학함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역사 지리의 보습(補習)으로 가장 만히 씨울 것이다. 고적을 구경하여 역사 지식을 널피고 명승 급(及) 외국 제(諸) 도시를 구경하여 지리에 관한 실감을 더 들 수 잇슬 것이다.372)주요섭, 「수학여행 시비, 과연 소득이 잇느냐 업느냐」, 『별건곤』 45, 1931년 11월 1일, 16쪽.

그렇다면 실제로 수학여행의 주체인 학생들은 여행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그들의 여행기를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1920년 5월 4박 5일의 일정으로 인솔 교사 2명과 학생 18명으로 구성된 보성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은 5월 21일 오전 7시 50분에 출발하여 대구 달성 공원을 돌아보고 대구에서 하루를 묵은 다음 22일 아침에 경주로 가는 경편 열차를 탄다. 경주에 도착한 후 고물 진열관(古物陳列館)을 견학한다. 학생 신경수는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유물은 봉덕사종(奉德寺鍾, 성덕 대왕 신종)이었다고 술회한다. 그런데 귀성길에는 토함산에서 울어 오는 산새소리가 고국의 원한을 하소연하는 듯하였고 “우리 졌던 천년 고화(古花) 다시 피는 그 날까지” 잘 있으라는 인사를 남기고 경주역을 떠난다.373)신경수, 「보성 고등 보통학교 경주 수학여행기(5)」, 『동아일보』 1920년 6월 24일자. 그들은 번영하던 신라시대와 다른, 현재 조선의 식민지적 상황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점은 그들에게 결과적으로 망국 조선의 국민으로서 착잡한 심경을 안겨 주는 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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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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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박물관 진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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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배재 고등 보통학교 수학여행단은 경주 고물 진열관 관람으로 경주 수학여행을 시작한다. 제1 고물 진열실에는 수천 년 전의 석기(石器) 등을, 제2호실에는 신라시대 기와를, 제3호실에는 석비·석등 등을 진열하였는데, 수년 전에 분황사 9층탑을 수선하는 중에 발견된 돌조각, 아미타불 상, 돌사자, 여의륜관음상(如意輪觀音像), 이차돈 공양 석동(異次頓供養石棟) 등이 유명하다고 하였다.374)「경주의 고적 탐상-배재 수학여행단에서-」, 『동아일보』 1920년 5월 30일자. 그리고 분황사 9층탑은 임진왜란 때 손상을 입고 그 후에도 쇠락하여 3층만 남은 것을 1915년 조선 총독부에서 개축하여 원래 모습은 아니라고 적고 있다.375)경주 고적 보존회는 1913년 9월에 창설된다(『매일신보』 1913년 9월 12일자).) 쇠락한 조선의 문화재를 복원시키고 보호해 주는 주체는 바로 조선 총독부였다. 그러한 현실 또한 식민지적 현실을 되새기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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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수학여행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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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0월 12일에 인천 수학여행을 떠난 보성 소학교 일행은 인천에서 ‘편리한 증기선’을 타고 강화도 전등사(傳燈寺)로 가기를 기대하였으나 부득이 ‘목선(木船)’을 타고 갔다고 한다. 강화도 근처의 여러 섬을 지날 때는 조선이 당한 외침(外侵)의 역사의 한복판에 강화도가 있었고 오늘날 식민지적 상황의 직접적 단서가 강화도에 있었음을 상기하면서 비통한 심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 강화도 난을 몃 번이나 치럿는가. 4000년의 전사(戰史)를 고찰하야 볼 때 누가 강화에 대하야 눈물을 아니 뿌리겟는가. …… 임진·병자의 참극, 병인·신미의 병화 -다- 우리로서는 영원히 잇지 못할 것이 아닌가. 더욱이 우리의 금일의 경우를 직접 초래한 것이 강화(江華)에 잇슴을 절실히 기(記)할 때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압흐겟는가.376)「청추의 여」, 『개벽』 17, 1921년 11월 1일, 103쪽.

마니산의 제천단(祭天壇)을 보면서도 “이 보단(寶壇)이 영미(英米)나 일본에 잇서 보라, 그들이 얼마나 힘 잇게 보존하얏겟는가”라고 생각하고 “단 군 한아버지의 엄책(嚴責)이 나리는 듯하여” “우리 일행은 다 각기 아모 말업시 침묵리에 후생(後生)의 무능을 자책하면서 장래를 위하야 의분(義奮)을 내엇섯다.”고 한다.377)「청추의 여」, 『개벽』 17, 1921년 11월 1일, 105∼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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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산 참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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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청소년이 수학여행을 통해 조선의 명승지를 찾았지만 그 여행은 그들에게 즐거울 수만은 없는 여행이었다. 대개 고대 일본과 교류가 있었다고 하는 신라의 옛터와 외침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강화도를 보면서 그들은 망국의 현실을 더 깊이 느껴야 했고, 부여를 찾아 고대에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깊었음을 예시하는 유물들을 접하고는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해 생각하며 귀향하였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근대 여행의 형태가 구성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박람회, 공진회 등 사람들의 방문을 유혹하는 근대 문물의 장치, 철도와 연계한 명승고적의 재배치, 사계(四季) 여행 코스의 기획 등이 이루어지면서 우리나라 사람도 여행의 중요한 소비 주체로 자기매김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숙박 시설은 일본인이 주도하였고 주요 관광 명소에는 호텔이나 일본식 여관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숙박 시설 은 청결이나 친절 등의 면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숙박 시설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여행자가 증가하면서 조선인이 경영하는 여관은 급속도로 증가해 나갔던 것도 사실이다. 경성에 위치한 조선 호텔은 대개 외국인과 일본인 투숙객이 많았지만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조선 호텔은 문명을 맛볼 수 있는 장소로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여행자들은 벚꽃 명소를 소개하는 신문 기사를 통해, 혹은 관앵단 모집에 응하여, 혹은 열차 할인에 현혹되어 봄에는 이들 명소를 찾았다. 그리고 일본식의 유카타(浴衣)가 제공되는 온천을 찾아 휴식을 즐겼으며, 관계 당국과 언론사가 기획해 놓은 관광 명소 선전에 고무되어 온천과 명승지를 찾았다.

수학여행은 ‘기획된 여행 코스’에 입각하여 집단적으로 수행된 대표적 단체 여행이었다. 청소년들은 긴 여행에 들떠 설렌 마음으로 명승지를 찾아갔지만 돌아오는 그들의 마음은 그저 보람 있고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명승지에서 그들은 일제의 조선 지배의 정당성을 암암리에 유도하는 장치에 구속되어 결과적으로 식민 조선의 현실을 긍정하고 체념하는 심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또 벚꽃, 온천욕, 여행지의 스탬프 같은 일본 국내에서의 여행 방식이 식민지 조선에서도 그대로 전개되고 있었고, 이에 대해 조선의 여행자들도 익숙해진 모습이 엿보인다. 그리하여 조선의 명승지를 여행하면서도 이전의 조선이 아닌 일본인 통치자의 기획에 의해 새롭게 재편성된 ‘관광 명소’로서의 ‘식민 조선’이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여행의 공통점은 여행의 방식에서 여행자들은 ‘문명’적인 청결함과 편의와 안락함을 점점 선호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도 ‘기획된 근대 여행’의 틀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안착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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