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4장 근대 해외여행의 탄생과 여행지
  • 1. 근대 관광의 탄생
  • 근대 관광의 탄생과 조선인의 해외여행
조성운

‘근대’는 서구에서 탄생하였으므로 ‘근대’의 의미를 탐구할 때는 서구 사회를 원용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서구 사회에서 ‘근대’는 르네상스 이후 나타난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사회를 말하며, ‘근대성’이란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적 사회 질서를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18세기 이후의 사회를 ‘근대’ 혹은 ‘근대성’을 가진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이성과 합리성에 근거한 자본주의 사회만 성립한 것이 아니라 산업 혁명(産業革命)을 통해 산업 사회가 성립하였고 시민 혁명(市民革命)을 통해 절대 군주제(絶對君主制)가 타도되어 시민 사회가 성립하였으며, 민족 단위의 국가가 탄생하였다. 바로 이러한 시대적 변화가 근대적 의미의 여행 혹은 관광의 탄생 배경이라 할 수 있다.378)본 장에서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관광과 여행을 혼용하였음을 밝힌다.

근대적 의미의 ‘여행’ 혹은 ‘관광’이 탄생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1841년 7월 5일 영국의 토머스 쿡(Thoma Cook)은 570명의 관광객을 모집하여 영국의 레스터(Leicester)에서 러프버러(Loughborough)까지의 기차 여행을 실시하였다. 가격은 1실링이었으며 브라스 밴드(brass band)와 점심 식사 를 제공하였다.379)정성채, 『여행 사업 경영론』, 기문사, 2005, 38쪽. 그러나 쿡이 이 여행을 조직한 직접적인 목적은 관광이 아니었다. 당시 쿡은 매우 활동적인 금주(禁酒) 운동가였고 금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단체 전세 열차의 운행을 실현시켰다. 즉 쿡은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철도가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과 정규 운임을 지불하고 열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전체 승객의 25%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380)김광군 외, 『관광학 원론』, 백산 출판사, 2001, 68쪽. 이 여행을 성사시켰던 것이다. 이 여행이 역사상 최초의 패키지 여행(package旅行) 상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여행의 성공 이후 그는 금주 협회원(禁酒協會員)과 일요 학교(日曜學校) 어린이들의 단체 여행을 몇 차례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마침내 1845년에는 토머스 쿡 앤 선(Thomas Cook and Son)이라는 세계 최초의 여행사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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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익스커전이스트(EX-CURSIONIST)』의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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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쿡이 처음부터 단체 여행을 의도하였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성공이 그가 단체 여행의 기획과 주선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또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유행처럼 개최된 박람회(博覽會)는 단체 여행의 수요를 더욱 확장하는 데 훌륭한 요소가 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소수의 귀족 계급만이 누려 오던 여행이 더 이상 그들만의 전유물(專有物)이 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후 그는 1868년까지 약 200만 명의 여행을 조직하여381)김사헌·지선진, 「근대-탈근대 사회 맥락에서 본 관광 패턴의 변화 : 이론적 논의를 중심으로」, 『경기 관광 연구』 9, 관광 종합 연구소, 2006, 1쪽. 관광을 근대화하였다. 더욱이 그는 1872년에는 기선(汽船)을 이용한 22일간의 세계 일주 관광을 실시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이처럼 19세기 중반에는 여행 혹은 관광이 점차 확대되고 있지만 물론 아직까지 대중화된 것은 아니었다. 여행의 대중화, 관광의 대중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가능하였다.

한편 토머스 쿡이 대단위의 관광객을 모객(募客)하고 이들을 여행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교통 편의 예매, 관광 안내서의 제공, 관광 가이드의 동행, 일괄 예약, 단일 청구서로의 지불 등 여러 가지 요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한 것은 바로 기차(汽車)라는 대량 운송 수단의 발달이라 할 수 있다. 또 바다를 건너는 여행의 경우에는 선박의 발달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비행기 여행이 대중화되어 시간적·공간적으로 관광은 대중화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근대적인 의미의 여행 혹은 관광이 대중화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 기차, 선박, 비행기 같이 좀 더 빠르게 좀 더 많은 사람을 운송할 수 있는 교통수단의 마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철도나 선박, 그리고 비행기의 발달은 근대 여행 혹은 관광의 발달과 분리할 수 없는 관계를 갖는다. 그런데 토머스 쿡이 많은 관광객을 모객하여 여행을 시작하던 1841년에는 영국 최초의 국철(國鐵) 시간표가 발표되었으며, 철도 요크역(York驛) 근처에는 유럽 최초의 호텔이 개업하였고, 최초의 대서양 횡단 증기선(蒸氣船)이 운행되었다. 이는 이 시기에 이미 근대적 의미의 여행을 실시할 여러 조건이 성숙해 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19세기 중반 서구에서는 점차 관광이 대중화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일본은 신사(神社)와 사찰에 대한 참배를 목적으로 한 관광이 17세기 에도(江戶)시대 이래 대중화되어 있었다. 물론 이 시기 일본의 여행은 종교적인 성격을 띠었으나 참배 루트에는 하코네(箱根), 아리마(有馬), 아타미(熱海) 등 유명한 온천과 에도(江戶), 도쿄(東京), 오사카(大阪) 등 대도시의 관광도 포함되어 다분히 관광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더욱이 이 여행에서는 권력에 의한 이동의 제약이나 봉건 체제의 일상적인 속박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민중들에게는 더욱 매력적이었다. 이는 관광이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혹은 상상 속의 해방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사 례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일본에서 이렇게 여행이 대중화될 수 있었던 조건은 무엇일까? 그것은 에도 막부가 실시한 산킨코다이(參勤交代) 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산킨코다이 제도란 막부(幕府)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다이묘(大名)들을 통제하고 감시하기 위하여 제도화한 것으로, 원칙적으로 각 다이묘는 격년에 한 번씩 에도에 거주할 것을 의무화한 것이다. 따라서 막부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도로망을 확충하였으며, 거의 매년 에도로 가는 길은 이들 다이묘의 행차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다이묘의 행렬이 지나다니는 길목에는 이들 일행이 묶을 여관이나 식당 등이 생겼고, 이러한 시설들이 일반 민중의 참배 여행에도 이용되어 여행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1702년에는 도카이도(東海道)를 여행한 사람의 수가 100만 명을 넘었다는 기록은382)石森秀三, 「旅から旅行へ」, 守屋毅 編, 『日本人と旅び』(現代日本文化における傳統と變容 6), ドメス出版, 1998, 96쪽, 권숙인, 「근세 일본에서 대중 관광의 발달과 종교-이세마이리(伊勢まいり, 이세 신궁 참배)를 중심으로-」, 『지역 연구』 6권 1호, 서울 대학교 지역 종합 연구소, 1997, 127쪽 재인용. 일본의 국내 여행이 이미 대중화되었음을 보여 준다. 더욱이 18세기 초에 “유람을 위해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사람은 1년에 12명을 넘지 않았다.”고383)주 5)와 같음. 유럽의 한 사가(史家)가 지적한 바에 비추어 보면 아직 유럽에서도 여행은 소수의 특권이었다. 이에 비하면 100만 명이라는 기록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은 18세기 무렵에 이미 국내 여행이 대중화되어 있었다.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일본은 20세기 초에 비록 국가주의적인 목적하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해외여행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해외여행이 시작된 해는 1906년이다. 같은 해 6월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일본 최초로 만주와 조선을 유람하는 관광 여행을 기획하였다. 이 여행은 요코하마(橫浜)-고베(神戶)-모지(門司)-부산(釜山)-인천(仁川)-경성(京城)-진남포(鎭南浦)-다롄(大連)-랴오양(遼陽)-뤼순(旅順)-나가사키(長崎)로 이어지는 30일간의 일정에 약 350명의 인원을 모집할 계획이었다.384)朝日新聞百年史編修委員會 編, 『朝日新聞社史(明治編)』, 朝日新聞社, 1995, 500쪽 : 임성모, 「팽창하는 경계와 제국의 시선」, 『일본 역사 연구』 23, 일본 역사 연구회, 2006, 93∼94쪽 재인용. 이 여행에 대한 『아사히신문』의 기획 의도는 다음과 같다.

바닷가에서 납량을 하고 산골짜기에서 피서를 하는 것은 이미 낡았다. 그렇다고 발(簾) 그늘 아래에서 술을 마시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오수(午睡)를 즐기는 것도 피서라기에는 너무 소극적이다. 전승국 인민은 전승국의 인민에 부합되는 호쾌한 거동을, 신흥국 인민은 신흥국 인민에 상응하는 장용(壯勇)한 소하법(消夏法)을 취함이 마땅하다.385)「滿韓地方巡航」, 『東京朝日新聞』 1906年 6月 22日字.

곧 『아사히신문』은 전쟁을 통해 획득한 새로운 ‘영토’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고, 일본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帝國)’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선전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여행지는 당연히 요코하마·고베·오사카·구레(吳)·모지 등 러일 전쟁과 관련 있는 곳, 다롄·랴오양·펑톈(奉天) 등 러일 전쟁 전승지, 인천·경성·평양 등 청일 전쟁 관련지와 유적 및 일본군의 전승지가 중심이었다.386)李良姬, 「日本植民地下の觀光開發に關する硏究」, 『日本語文學』 24, 日本語文學會, 2004, 476쪽. 따라서 일본 최초의 관광 사업은 제국 일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행사가 아닌 신문사에서 이러한 기획을 한 것은 당시 일본 내에서 격화되던 신문 시장에서 생존하고 더 나아가 발행 부수를 확대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387)有山輝雄, 『海外觀光旅行の誕生』, 吉川弘文舘, 2002, 28∼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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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한 순유단의 항로
만한 순유단의 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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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만한 순유단(滿韓巡遊團)의 항로’를 통해 볼 때 만한 순유선(滿韓巡遊船)은 모지-부산-진해-인천-진남포-다롄의 경로를 거쳤으나 귀국하는 길에는 조선을 들르지 않고 바로 다롄-나가사키-사세보(佐世保)-모지로 항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과 만주 여행은 일반적으로 부산에서 경부선 철도를 타고 북 상하였다. 1939년에 발행된 『조선지관광(朝鮮之觀光)』에서 제시한 동경 출발의 조선 여행 일정은 다음과 같다.

제1일 도쿄역 출발 시모노세키행(22시간), 차중에서 1박

제2일 시모노세키 출발 부산행, 부관 연락선(釜關連絡船) 이용(7시간 30분)

제3일 부산역 출발 경성행(6시간 45분)

제4일 경성 관광

제5일 경성 관광

제6일 경성 출발 평양행(6시간 44분), 오후 평양 출발 안둥행(安東行, 현재의 단둥(丹東))(5시간 45분)

제7일 안둥역 출발 부산행(신의주 → 안둥 → 대구)

제8일 대구 출발 경주행, 경주 관광 후 경주 출발 부산행, 부산 출발 시모노세키행

제9일 시모노세키 출발 도쿄행

제10일 도쿄역 도착(오전)388)今井晴夫 編, 『朝鮮之觀光』, 朝鮮之觀光社, 1939, 17∼18쪽.

이렇게 해서 10일 동안의 조선 여행에 소요되는 비용은 2등 기준 169.99엔, 3등 기준 90.57엔 정도였다.389)今井晴夫 編, 『朝鮮之觀光』, 朝鮮之觀光社, 1939, 18쪽. 이처럼 일본에서는 1906년을 기점으로 해외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12년 일본 여행 협회가 설립되고 조선 지부도 같은 해에 경성에 설치되었다. 한편 일본은 1930년 4월 23일 국제 관광국(國際觀光局)을 설치하여 관광을 국책 사업으로 육성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세계적으로 관광 산업이 부흥하고 있었다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세계 경제 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일본 경제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390)新井堯爾, 『觀光の日本と將來』, 觀光事業硏究會, 1931, 序文.

한편 조선에서도 이미 구한말 문명개화론(文明開化論)의 영향을 받아 여행을 통해 신지식을 수용하자는 움직임이 없지 않았다. 특히 유럽과 미 국을 여행한 후 느끼고 배운 바를 토대로 일본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사례를 들어 여행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391)편집인(編輯人), 「일본(日本) 교육계(敎育界) 사상(思想)의 특점(特點)」, 『대한 흥학보(大韓興學報)』 13, 대한 흥학회, 1910년 5월 20일. “남자 13세 이상에 이르면 학교 휴학 중에 행장(行狀)을 바르게 하여 사우(師友)와 함께 각지를 여행케 할 것”이라는392)「일본(日本) 삽택가(澁澤家)의 가훈(家訓)」, 『서우(西友)』 11, 서우 학회, 1907. 시부사와가(澁澤家)의 가훈(家訓)을 잡지 『서우(西友)』에서 소개할 정도였다. 이는 여행에 대한 관심이 당시에 얼마나 고조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여학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여학생이 관인(官人)을 따라 탑동 승방(僧房)에 출유(出遊)한 사실에 대해 『서북 학회 월보(西北學會月報)』는 “여학생의 신분이 되어 여행 운동을 작(作)할지라도 동학 생도(同學生徒)와 해야지 관인을 따라간 것은 순결을 견지하고 정조가 고상하다 하더라도 흘끗 보면 체모를 손상”할393)신민자(新民子), 「여학생 제씨(女學生諸氏)여」, 『서북 학회 월보(西北學會月報)』 16, 서북 학회, 1909.10. 것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이렇듯 구한말에도 여행을 강조하는 글이 여기저기에서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행을 강조하고 관심이 많다고 해서 누구나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 시기는 여행에 대한 계몽기(啓蒙期)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행을 비교적 활발하게 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그것은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신문이나 잡지에 여행기(旅行記)나 기행문(紀行文) 등이 많이 실렸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서양 여행기가 자주 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을 통해 수입된 근대 문물을 그 본고장인 서양을 통해서 직접 확인하고 수용하고자 하였던 문명개화론의 흐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와 같이 여행을 권장하는 분위기 속에서 유명한 민족주의 역사학자인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 역시 여행을 다음과 같이 권장하고 있다.

근일(近日) 우리 사회(社會)에 명산수(名山水)를 유상(遊賞)하는 풍조(風潮)가 유행(流行)하게 되어 금강산(金剛山)을 탐승(探勝)하는 인사(人士)도 많으며 백두산(自頭山)을 탐험(探險)하는 인사(人士)도 있음은 천연미(天然美)에 대하야 일반 사회(一般社會)의 취미(趣味)가 향상(向上)된 표증(表證)이니, 어찌 가희(可喜)할 현상(現象)이 아니랴.394)문일평(文一平), 「북한(北漢)의 일일(一日)」, 『개벽』 16, 1921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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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 박람회 조선관
나고야 박람회 조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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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1920년대 초반이 되면 일부 유산 계급 지식인들은 비교적 활발하게 여행한 것으로 보인다.395)이 시기 조선 인구의 80% 가량이 농민이고 농민의 대다수가 소작인이었음을 감안하면 여행을 한 사람이 일반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 시기에는 조선인들의 일본 관광을 장려하는 정책이 채택되었다. 물론 3·1 운동 이전에도 조선인으로 구성된 일본 시찰단이 조직되어 사실상 일본을 ‘관광’하고 있기도 하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920년대 초 일본에서 개최된 박람회를 시찰한 일본 시찰단의 수와 인원은 1921년 100여 개 2,000여 명, 1922년 192개 4,700여 명이다. 이 숫자는 뒤에서 볼 표 ‘부관 연락선 인원 수송 실적(1905∼1945)’에 나타난 부관 연락선 조선인 승객 수의 각각 7.8%와 10.1%에 해당한다. 그리고 일본 시찰단의 파견이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라 추정되기 때문에 실제 비율은 이보다 높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인의 일본 여행은 이미 1920년대 초에 일본으로 도항(渡航)하는 전체 인원의 10%를 넘어섰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일본 이외의 다른 나라를 여행한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되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중국을 여행한 사람의 수는 일본과 비교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통계를 발견할 수 없어 아쉽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당시 해외여행자의 수는 전체 조선의 인구에 비하면 미미하였다. 그리고 중국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여행자라기보다는 생계를 위해서나 독립 운동을 위해 이주한 사람들이 다수라 생각되므로 역시 이를 관광 목적으로 여행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조선인의 해외여행이 이 시기에 대중화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시기의 해외여행자는 남들은 하지 못하고, 또 할 수도 없는 해외여행을 하였다는 특권 의식을 갖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는 이들에게 일본 시찰 중에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정리하여 보고서를 낼 것을 의무화하였으며,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인민들에게 강연이나 강습을 통해 보고하고 계몽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 이들 가운데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도 있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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