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4장 근대 해외여행의 탄생과 여행지
  • 1. 근대 관광의 탄생
  • 선박을 중심으로 본 교통수단의 발달
조성운

근대에 들어 자국의 주요 명승지나 자연 생태가 뛰어난 곳을 중심으로 행해지던 유람 혹은 여행이 원격지나 해외로까지 확대되었음은 이미 말하였다. 교통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철도 교통의 발달에 기인하였다. 철도는 사람과 화물을 좀 더 짧은 시간에 좀 더 많은 사람을 운송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따라서 철도의 발명과 개통은 거리와 시간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철도는 레일 위에서만 이동이 가능하다는 한계가 있어 철도가 부설되지 않은 지역으로의 이동은 여전히 어려웠다. 바로 이렇게 철도가 부설되지 않은 지역과 철도를 연결하는 수단이 도로였다. 도로는 필연적으로 자동차의 이용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철도를 이용하여 원거리를 이동한 후 자동차를 이용하여 근거리에 위치한 여행지를 찾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보면 철도와 도 로의 발달은 우리 인간의 여행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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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화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이미 19세기 말엽부터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는 1897년(광무 1) 공사가 시작되어 1899년 완공된 제물포-노량진 구간의 경인선 철도이다. 그리고 이듬해에 노량진-남대문역 구간이 완공되어 경인선은 제물포-남대문 구간으로 연장되었다. 또 1905년 1월에는 경부선이 완공되었고, 1906년 4월에는 경의선이 완공되어 운행되었다. 1911년 11월 1일에는 신의주와 만주의 안둥(安東, 현재의 단둥(丹東))을 연결하는 압록강 교량이 완공되어 조선과 만주를 직통하는 철도의 개설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는 시모노세키-부산-만주를 잇는 철도망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며, 만주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진출 혹은 침략의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보면 우리나라의 철도는 이렇게 일제의 침략 정책의 틀 속에서 부설되었지만, 여행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이로써 우리나라 ‘근대’ 여행의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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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옛모습-수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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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옛모습-화성 자동차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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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옛모습-수원 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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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옛모습-수원 역전 앞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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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철도가 개통되고 운행되면서 조선의 전통적인 사회 구조와 세계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로 철도역이 들어선 지역에 새로운 행정적·산업적 중심 도시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는 도시의 기반 시설을 갖춘 이른바 ‘신도시(新都市)’로서 주로 일본인이 거주하였다. 대전, 부산, 인천, 원산, 청진, 군산 등이 대표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수원, 개성 등 조선의 전통적인 상업 도시나 공주 같은 행정 도시는 일제의 철도 건설 및 신도시 건설 과정에서 배제되어 점차 소외되었다. 이는 당연한 것이지만 조선 총독부의 신도시 개발이 자신의 식민지 지배에 이익이 되거나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상대적으로 조선인의 세력이 강하여 일본의 자본이나 세력의 침투가 용이하지 않은 지역은 개발에 소극적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도 일제의 정책적인 필요에 의해서 조선의 전통적인 세력을 억누르거나 무마하면서 혹은 끌어들이면서 개발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도시가 평양과 수 원이다. 평양은 한양과 함께 조선의 전통적인 대도시였으나 일제의 지배 정책과 대륙 침략 정책에서 중추적인 위치에 있는 도시였다. 그리고 수원도 정조 이래 유수부(留守府)가 설치되면서 경기 남부의 핵심 도시로서 기능하였으나 경부선 수원역을 일제가 건설하자 역 주변에 일본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일본인들의 생활 영역이 성문 안으로까지 퍼져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1924년 무렵이 되면 조선인과 일본인 상인들이 실업 협회를 함께 구성할 정도로 일본인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둘째로는 철도로 대표되는 근대 문물의 우월성을 확실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조선인들은 근대 문물의 침략성에 대해서는 직시(直視)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1917년 전남 구례에 살던 지방 지식인 유영업(柳瑩業)이 읊은 다음의 시에서도 나타난다.

차바퀴는 화살 구름과 같이 나는 것 같이

물이 북쪽에 있는지 산이 남쪽에 있는지 판별하지 못하고

어찌 장안길이 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침의 밝은 때에 출발하여 앉아서 천리를 오네396)『기어(紀語)』 1917년 10월 10일 : 이송순, 「한말·일제 초 ‘지방 지식인’의 근대적 제도 및 문물에 대한 경험과 인식-생활 일기류(生活日記類)의 분석을 중심으로-」, 『역사 문제 연구』 18, 역사 문제 연구소, 2007, 63쪽 주50 재인용.

앞의 시에서도 보듯이 경성을 여행한 지방 지식인인 유형업 역시 기차의 속도감에 대해서는 경외감을 토로하고 있지만 그것이 갖는 수탈성과 침략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와 같은 기존의 논의가 아니라 조선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철도 시설이 부설된 지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이 점차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관광 혹은 여행에서 교통상의 편의가 최우선적으로 고려된다는 점에서 타당성이 있다. 따라서 철도의 부설은 분명히 일제의 대륙 침략이라는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관광으로만 보면 조선에서 근대 관광 산업이 탄생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총독부 철도국을 중심으로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실행되어 철도 안내서, 여행 안내서, 리플릿(leaflet, 광고지), 팸플릿(pamphlet, 소책자), 그림엽서 등을 출판하여 배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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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총독부 철도국
조선 총독부 철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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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외국인의 조선 여행과 조선인의 해외여행에 대해 알아보자. 해외여행을 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교통수단은 선박이다. 아직 비행기가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기이므로 해외여행은 주로 선박을 이용해야 했다. 이것은 외국인의 조선 여행이나 조선인의 해외여행 모두 마찬가지였다. 물론 시베리아 철도(Siberia鐵道)를 이용할 수도 있었으나 비용 부담을 고려하면 많이 이용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외국인이 일본에서 조선으로 여행한다거나 조선에서 일본으로 여행할 때는 반드시 배를 이용하여야만 했다. 이들 두 나라 사이의 여행은 배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배가 항시적(恒時的)으로 조선과 일본 사이를 오고간 것은 부관 연락선(釜關連絡船)의 개통 이후였다. 부관 연락선은 1905년 1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직후인 1905년 9월에 영업을 시작하였다. 이렇 게 부관 연락선의 개설이 경부 철도 개통과 맞물린 것은 일본 산요(山陽) 철도 주식회사가 일본의 산요 철도와 조선의 경부 철도를 연결하여 인적·물적 자원을 수송하려는 계획을 세운 데 따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본의 조선 침략 과정에서 철도와 선박이 가지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간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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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부두 설비
부산항 부두 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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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을 잇는 항로가 개설되게 된 계기는 1877년 일본의 재계에서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정기 항로의 취항을 건의한 것에 대하여 일본 정부가 세이난(西南) 전쟁의 혼란이 진정되면 운항을 허락하겠다고 회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1893년 인천과 오사카, 모지를 잇는 기소카와마루(木曾川丸)가 취항하였고, 1902년에는 원산과 오사카, 원산과 모지를 잇는 스미타가와마루(隅田川丸)가 취항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1905년 9월에 부관 연락선이 개설된 것이다.

최초의 부관 연락선은397)부관 연락선(釜關連絡船)의 원래 명칭은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이지만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부관 연락선이라 부르겠다. 부관 연락선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조된다. 향후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부관 연락선에 대한 서술은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였음을 말해 둔다. 金贊汀, 『關釜連絡船海峽を渡った朝鮮人』, 朝日選書, 1988 ; 기무라 겐지,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이 운송사(輸送史)에서 차지하는 위치」, 『한국 민족 문화』 28, 부산 대학교 한국 민족 문화 연구소, 2006 ; 홍연진, 「부관 연락선(釜關連絡船) 시말(始末)과 부산부(釜山府) 일본인 인구 이동」, 『한일 민족 문제 연구』 11, 한일 민족 문제 학회, 2006 ; 유교열, 「제국과 식민지의 경계(境界)와 월경(越境)-부관 연락선(釜關連絡船)과 ‘도항 증명서(渡航證明書)’를 중심으로-」, 『한일 민족 문제 연구』 11, 한일 민족 문제 학회, 2006. 이키마루(壹岐丸)와 쓰시마마루(對馬丸)였다. 이키마루는 1905년 9월 11일, 쓰시마마루는 11월 1일에 각각 부산에 취항하였는데, 항해 시간은 11시간 30분에 달하였다. 그리고 고라이마루(高麗 丸)와 시라기마루(新羅丸)가 1913년 1월 31일과 4월 5일에 취항하였으며, 게이후쿠마루(慶福丸)와 도주쿠마루(德壽丸)가 각각 1922년 5월 8일과 11월 12일에 취항하였고, 1923년 3월 12일에는 쇼케이마루(昌慶丸)가 취항하였다. 또 1936년 11월 16일에는 곤고마루(金剛丸), 1937년 1월 31일에는 고안마루(興安丸), 1942년 9월 27일에는 텐잔마루(天山丸), 1943년 4월 12일에는 곤론마루(崑崙丸)가 각각 취항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선박의 이름에서 우리는 해당 시기 일제의 침략 정책의 일단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조선과 중국의 지명을 딴 선박의 이름은 곧 일제가 이미 획득하였거나 획득하고자 하는 지역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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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마루
쓰시마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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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러한 선박의 이름에서 우리는 해당 시기 일제의 경계(境界)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1937년 고안마루가 중국의 지명을 선박의 이름으로 사용한 이래 부관 연락선의 이름은 모두 중국과 관련된 것이었다는 점은 이제 일본이 바라보는 침략의 시선이 조선을 넘어 중국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곧 부관 연락선의 운행이 단지 여객과 화물의 수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륙 침략이라는 일제의 정 책적 목적과도 매우 긴밀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부관 연락선이 취항한 이듬해인 1906년 일본 정부는 주요 운송 수단인 철도와 항로를 국가가 직접 통제하겠다는 ‘철도 국유법(鐵道國有法)’을 통과시킴으로써 부관 연락선도 국영화한 사실에서 이미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곤고마루는 1931년 만주 사변(滿洲事變) 이래 격증한 승객과 화물을 수용하기 위해 건조하였는데, 제67회 의회의 협찬을 거쳐 1935년 4월 설계하고 같은 해 12월 미쓰비시(三菱) 중공업 나가사키(長崎) 조선소에서 기공하여 1936년 10월 건조를 완료하였다.398)「關釜聯絡船金剛丸の就航に就て」, 『朝鮮鐵道協會會誌』 vol 15, No 12,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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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고마루
곤고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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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게이후쿠마루와 곤고마루의 비교’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게이후쿠마루와 곤고마루는 선박의 규모나 시설 면에서 차이가 많이 났다. 곤고마루는 기존의 게이후쿠마루가 2등 침대가 항상 만원이었으므로 이를 80개로 확대하였고, 2층 구조의 3등 침대 200개를 신설하였으며, 정원 26명의 일본식 2등 부인 보통석과 정원 109명의 3등 부인실을 분리하였다. 그리고 기존에 1등실에만 있던 욕실을 정원 3인용의 일본식 2등실에도 두 개를 설치하였으며, 13인 및 17인용의 일본식 3등실에도 욕실을 신설한 것 등을 들 수 있다.399)「關釜聯絡船金剛丸の就航に就て」, 『朝鮮鐵道協會會誌』 vol 15, No 12, 71∼72쪽. 이러한 시설의 확충은 승객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측면도 있겠지만 좀 더 많은 비용을 치를 수 있는 여행객의 수가 증가하였다는 측면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곧 일본의 중국 침략과 함께 일본 자본가의 중국 시찰 여행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과 맞물리고 있는 것이다.

<표> 게이후쿠마루와 곤고마루의 비교
항목 게이후쿠마루 곤고마루
톤수(ton數) 3,620 7,100
배의 길이(m) 114.10 134.10
배의 폭(m) 14.02 17.46
수면부터 뱃전(舷)까지의 높이 3.96 8.34
최대 속력(Kt) 19.8 23.2
여객 정원 1등실(침대) 45 46
2등 보통석 161 236
2등 침대 42 80
3등 보통석 730 1,184
3등 침대 200
합계 978 1,746
적화 선창 용적(積貨船倉容積 : ㎡) 795 2,700
적화 선창 톤 수 277 954
수소 화물실 용적(㎡) 189 674
우편실 용적 153 308
✽「關釜聯絡船金剛丸の就航に就て」, 『朝鮮鐵道協會會誌』 vol 15, No 12, 71쪽.

다음으로 부관 연락선의 항행 시간을 보면 이키마루, 쓰시마마루, 고라이마루, 시라기마루 등은 11시간 30분, 게이후쿠마루, 도주쿠마루, 쇼케이마루는 최고 시속이 20노트로 8시간, 곤고마루와 고안마루는 7시간이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항행 시간이 대폭 단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부관 연락선을 이용하는 사람이 증가하면서 선박의 편의 시설과 함 께 항행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요구와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또 기존에 운항하던 선박이 침몰하거나 퇴역하게 되었을 때 새로 취항하는 선박은 당연히 기존의 것보다 성능이 좋았을 것이다. 부관 연락선으로 취항한 모든 선박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으므로 두 선박의 시설을 예로 비교해 보면 표 ‘게이후쿠마루와 곤고마루의 비교’와 같다.

한편 1905년 부관 연락선이 개통된 이후 1945년 운행이 종료되기까지 부관 연락선을 통해 일본과 조선을 왕래한 연인원이 3053만 1298명이었다.400)이 통계는 홍연진, 앞의 글, 156∼157쪽의 ‘<표> 부관 연락선의 인원 수송 실적(1905∼1945)’을 이용하였다. 이 인원은 일본의 해외 정기 항로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표 ‘부관 연락선 인원 수송 실적(1905∼1945)’에서 보도록 하자. 이를 통해 보면 조선인에 대한 통계를 잡기 시작한 1917년 이후 1940년까지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의 수는 453만 627명으로 14.84%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1941년 이래의 통계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을 없앴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때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면서 조선인을 전쟁에 강제 동원하고 있던 시기였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내선일체가 되었는데 굳이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할 필요가 없다는 형식상의 논리로도 추론이 가능하다.

특히 1939년 11월 10일 제령(帝令) 제19호 ‘조선 민사령 중 개정의 건(朝鮮民事令中改正の件)’과 제령 제20호 ‘조선인의 씨명에 관한 건(朝鮮人の氏名に關する件)’이 공포되었고, 1939년 12월 26일 조선 총독부령 제218호에 의해 앞의 제령의 시행일이 1940년 2월 11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령 제220호는 씨제도(氏制度)의 설립에 따른 호적식(戶籍式)의 변경을 규정하였다. 이러한 호적식의 변경은 결국 조선에서 일본식 씨제도를 실시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는 곧 조선의 전통적인 가족 관계를 일본식으로 변경하겠다는 의도를 표현한 것이다. 더 나아가 조선의 젊은이를 일본 군대에 징집하겠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즉 이러한 호적 제도의 변경은 1940년대 전쟁이 점차 확대되면서 병역 자원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표> 부관 연락선 인원 수송 실적(1905∼1945)
연도 운항 횟수 시모노세키 → 부산 부산 → 시모노세키 합계
승객 총수 조선인 승객 승객 총수 조선인 승객 승객 총수 조선인 승객
1905           39,956  
1906           98,446  
1907   55,019   56,077   111,096  
1908   62,616   56,298   118,914  
1909   63,618   56,718   120,336  
1910 1,080 80,546   67,451   147,997  
1911 1,250 93,785   81,185   174,970  
1912 1,453 104,597   95,422   200,019  
1913 1,476 109,611   103,029   212,640  
1914 1,492 102,411   96,593   199,004  
1915 1,446 102,320   97,011   199,331  
1916 1,550 102,199   106,379   208,578  
1917 1,649 134,250 3,927 149,510 14,012 283,760 17,939
1918 1,613 177,053 9,305 189,672 17,910 366,725 27,215
1919 1,580 216,164 12,739 214,413 20,968 430,577 33,707
1920 1,405 221,220 20,947 218,268 27,497 439,488 48,444
1921   227,030 25,536 238,148 38,118 465,178 63,654
1922   261,726 46,326 303,510 70,462 565,236 116,788
1923   293,548 89,745 283,725 97,395 577,273 187,140
1924   280,451 75,427 358,112 122,215 638,563 197,642
1925   300,437 112,471 299,036 131,273 599,473 243,744
1926   284,148 77,689 296,831 88,360 580,979 166,046
1927   315,730 81,025 372,609 156,554 688,339 237,579
1928   349,590 113,904 360,229 132,024 709,819 184,187
1929   347,438 94,907 382,522 142,785 729,960 172,245
1930   330,304 102,436 295,156 81,751 625,460 177,188
1931   290,202 73,317 300,017 98,928 590,219 227,553
1932   322,955 67,718 319,787 109,470 642,742 190,814
1933   360,427 81,407 382,953 146,146 743,382 163,667
1934   391,439 83,393 371,337 107,421 762,776 168,279
1935   427,569 79,756 392,692 83,911 820,261 184,163
1936     81,725   86,554 899,688 259,095
1937 1,858   89,874   94,289 1,029,201 427,996
1938 2,134   118,447   140,648 1,353,993 551,922
1939 2,626   156,792   271,204 1,793,059  
1940 2,991   158,164   393,758 2,198,113  
1941 2,738         2,200,845  
1942 2,719         3,057,092  
1943 1,998         2,748,798  
1944           1,659,500  
1945           499,512  
합계 33,058 6,408,403 1,856,977 6,544,690 2,673,653 30,531,298 4,047,007
✽홍연진, 「부관 연락선(釜關連絡船) 시말(始末)과 부산부(釜山府) 일본인 인구 이동」, 『한일 민족 문제 연구』 11, 한일 민족 문제 학회, 2006, 156~157쪽의 <표> 부관 연락선의 인원 수송 실적(1905~1945).

1927년 공포된 법률 제47호에 따른 병역법(兵役法)의 적용을 받는 자는 ‘호적법(戶籍法)의 적용을 받는 자’였으므로 조선인이나 대만인은 병역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이 확대되면서 병역법의 적용 대상자를 확대할 필요가 발생하였고, 이에 따라 호적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호적법을 개정하여 조선이나 대만에서 전면적으로 실시하면 법률과 상충되는 관습으로 말미암아 큰 저항에 부딪칠 것이 예상되었으므로 기존 병역법에서 병역의 의무를 지닌 자를 ‘호적법의 적용을 받는 자’에서 ‘내지(內地), 조선 또는 화태(樺太, 사할린)에 본적을 갖는 자’로 바꾸어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당시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조선에서 일본식 성명으로 바꿀 것을 강요하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조선의 내지화(內地化)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401)이승일, 「일제 시기 조선인의 일본 국민화 연구-호적 제도를 중심으로-」, 『한국학 논집』 34, 한양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2000, 108쪽.

바로 이러한 시기였으므로 1930년대 후반에는 이전 시기보다 부관 연락선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도항하는 사람의 수가 증가하였다. 1941년 이후 부관 연락선을 이용한 총수는 1016만 5747명으로 연인원의 33.3%이다. 이 시기에 징병제(徵兵制)와 징용제(徵用制) 등 강제 동원이 실시되었으므로 이들은 대부분 조선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보면 부관 연락선은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조선과 일본을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부관 연락선은 한편으로는 침략을 수반한 일본의 근대 문물이 들어오는 창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떠나는 노동자, 유학을 떠나는 학생, 일제 강점기 말에 강제 동원되거나 징병되어 떠나는 조선인의 애환을 모두 볼 수 있는 하나의 장(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개인 여행은 철도를 이용하여 부산으로 간 후 부관 연락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겠지만 단체 여행은 이와 달리 일본 여행 협회(Japan Tourist Bureau)의 조선 지부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여행 협회는 1912년 3월 12일 철도원(鐵道院)에서 창립되었다. 조선에서는 조선 총독부 철도부의 오야 겐페이(大屋權平)를 비롯하여 남만주 철도와 대만 총독부 철도부의 관계자도 참석하였다.402)日本交通公社, 『50年史』, 1962, 8∼9쪽. 또 초대 임원에도 철도원 부총재인 히라이(平井晴二郞)가 회장에 선임되고 그 밖에 철도원 관계자 및 조선 총독부 철도국 영업 과장인 미즈모토(三本武重)와 대만 총독부 철도부와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동양 기선, 미쓰코시(三越) 백화점 등의 관계자가 이사로 참여하였다. 결국 일본 여행 협회는 자본 구조상 민관 합자 회사(民官合資會社)이며, 지역적으로는 제국 일본의 영향 아래 있던 지역을 아우르는 대규모 회사로 설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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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 여행 협회는 설립 직후부터 영업망을 확충하여 1912년 12월 1일 경성에 조선 지부를 설치하고 남대문 정거장 여객 대합소(旅客待合所) 내에 경성 안내소, 부산 정거장 여객 대합소 내에 부산 안내소를 개설하였으며, 지부장으로 오야(大屋權平)를 임명하였다.403)日本交通公社, 『50年史』, 1962, 21쪽 및 연표(年表) 1쪽. 오야 겐페이(大屋權平)는 철도 전문가로서 1886년 철도 기사가 되었고, 1901년 철도 시찰을 목적으로 구미를 시찰하였다. 일본에 돌아온 후에는 경부 철도 주식회사 공장장, 통감부 철도 관리국 기사, 철도 관리국 장관, 철도청 장관, 1909년 철도원 기감이 되었다.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점 이후에는 조선 총독부 철도국 장관을 역임하였다(『신사명감(紳士名鑑)』 124쪽, 국사 편찬 위원회 홈페이지에서 인용). 이후 조선 지부장이 되는 구보(久保要藏), 안도(安藤又三郞), 오무라(大村卓一) 등은 모두 조선 총독부 철도국 혹은 만철(滿鐵) 경성 관리국의 책임자 혹은 그에 준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일본 여행 협회는 경성, 부산, 평양, 함흥, 대구, 원산, 신의주, 대전, 나진, 청진, 목포, 광주, 인천, 흥남, 군산, 전주, 부평, 여수 등에 안내소나 출장소 등을 설치하였다.404)日本交通公社, 『50年史』, 1962, 연표에서 재작성. 그러나 1920년대까지는 경성과 부산에 촉탁 안내소만 두었고405)日本交通公社, 『日本交通公社70年史』, 1982, 年表 3쪽. 나머지는 모두 1931년 이후에 설치하였다. 이것은 1930년 4월 일본 정부의 국제 관광국(國際觀光局) 설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추측된다. 국제 관광국을 설치하면서 일본 정부는 관광을 국책 사업으로 육성하고자 하였음은 이미 말한 바 있다. 곧 관광을 통해 경제 공황을 극복함과 동시에 여행을 통해 만주 사변 이래 확대된 제국 일본의 신영토를 일본 국민에게 확인시킴으로써 국가적 정체성과 동질성을 강화하여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여행 안내소의 확충은 필요하였다. 또 여행 안내소가 설치된 함흥, 원산, 나진, 청진, 흥남 등 함경도 지방의 도시는 병참 기지화 정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도시는 모두 함경도의 지하자원을 이용해 가공한 물건을 운송하기에 적합한 지역이며, 블라디보스토크로 연결되는 항구 도시라는 공통점이 있다. 결국 일제의 대륙 침략에 맞추어 조선 내에서 일본 여행 협회의 영업망도 확대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의 패망이 점차 가시화되던 시기에도 일부 지역에 사무소가 개설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1945년 7월 조선 군관구 사령부 내 출장소와 조선 총독부 내 사무소를 개설한 것은 패망을 예견하고 조선에서의 철수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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