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4장 근대 해외여행의 탄생과 여행지
  • 2. 어디를 여행하였는가
  • 일본 여행
조성운

우리나라 역사상 해외여행이 비교적 대규모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이후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렇게 된 계기는 일본 시찰단의 조직과 파견이었다. 일본 시찰단이 처음으로 조직된 것은 1909년이었다.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 중의 한 명인 조선 귀족 조중응(趙重應)은 1909년 경성일보사가 200여 명을 내지 시찰단(內地視察團)으로 파견한 것이 효시라고 하였다.413)「내지 시찰단(內地視察團)에 대(對)하여 자작(子爵) 조중응 씨 담(趙重應氏談)」, 『매일신보』 1914년 3월 8일자. 그런데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에서는 111명으로 보도하고 있어 관광단의 인원수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讀賣新聞』 1909年 4月 22日字.). 이후 경성일보사가 1910년에 52명의 시찰단을 일본에 파견한 것을414)박기순(朴基順), 『관광약기(觀光略記)』, 1910, 6쪽. 비롯하여 시찰단은 동양 척식 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 會社)나 매일신보사, 경성일보사 등 조선 총독부의 주변 단체에 의하여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각지에서 개인 관광단의 형태로 속출하였다.415)「내지 시찰단에 대하여 자작 조중응 씨 담」, 『매일신보』 1914년 3월 8일자. 특히 일제는 ‘조선 귀족령(朝鮮貴族令)’을 반포하여 조선에 귀족을 탄생시킴과 동시에 구래의 지배층을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순응시키기 위해 병합을 전후하여 이들을 ‘내지 시찰’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을 시찰 혹은 관광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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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찰단의 파견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파견의 목적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시찰단이 조직되었다. 1910년대에는 귀족 관광단(貴族觀光團)(1910), 전북 관광단(1911), 동척 시찰단(東拓視察團)(1911∼1915), 기독교 시찰단(1911), 유림(儒林) 시찰단(1912, 1914), 조선 진신 내지 시찰단(朝鮮縉紳內地視察團)(1914), 교육 시찰단(1914), 불교 시찰단(1917), 규슈(九州) 시찰단(1918), 잠업(蠶業) 시찰단(1919), 농사(農事) 시찰 단(1919) 등이 수시로 파견되었다. 일제가 시찰단을 조직한 목적은 1910년의 귀족 관광단은 “천장가절(天長佳節)을 호기(好期)로 삼고 우악(優渥)하신 천은(天恩)을 봉사(奉謝)하기 위하여”,416)「귀족 제공(貴族諸公)의 동경 관광(東京觀光)을 가(賀)함」, 『매일신보』 1910년 10월 20일자. 또는 조선 귀족인 조중응이 지적한 대로 “공소상후(功少賞厚)한 수작(授爵)의 은전(恩典)에 대하여 천황 폐하(天皇陛下)께 미충(微衷)을 표(表)”하는 것에 있으며, “도쿄(東京)로부터 각지(各地)를 시찰(視察)함은 오히려 그 다음에 있”는417)「조 자작(趙子爵)의 대담(談話)」, 『매일신보』 1910년 12월 7일자. 것이었다. 곧 귀족 관광단의 목적이 일제의 은사에 대하여 충성을 맹세하는 데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11년의 동척 시찰단에 대해서 『매일신보』는 사설에서 그 목적을 “10인(十人)이 일지(一地)를 관(觀)할지라도 10인(十人)의 사(思)와 10인(十人)의 사(事)가 각수(各殊)한 즉 자연(自然) 100인(百人)의 취사(取捨)가 부동(不同)”할 것이므로 “아(我)의 졸(拙)함을 기(棄)하고 피(彼)의 교(巧)함을 학(學)하며 아(我)의 둔(鈍)함을 기(棄)하고 피(彼)의 이(利)함을 학(學)”하는418)「내지 관광단(內地觀光團)에 대한 감상(感想)」, 『매일신보』 1911년 3월 19일자. 데 있는 것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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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찰단 기념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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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12년과 1914년의 진신 시찰단의 주요한 목적이 각각 척식(拓植) 박람회와 다이쇼(大正) 박람회의 관람이었다는 점에서 일본 시찰의 목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1920년대 초반의 후쿠오카 공업 전람회(福岡工業展覽會), 규슈·오키나와 8현 연합 공진회(九州沖繩八縣聯合共進會), 도쿄 축산 박람회(東京畜産博覽會), 도쿄 평화 기념 박람회(東京平和紀念博覽會) 등 연이은 박람회를 개최한 일제는 일본 시찰단, 곧 관광객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휴식과 오락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 관광단의 성격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총독부는 일본 시찰단을 통해 동화 정책을 구현하는 한편 관광객 유치를 통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경제 불황을 극복하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419)앞의 주)33에서 볼 수 있듯이 필자를 비롯한 지금까지의 일본 시찰단에 대한 연구는 주로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져 일본 시찰단의 관광단으로서의 성격에 대해서는 검토하지 못하였다. 향후 이에 대한 깊이 있는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근대 한국 관광사 연구의 시발점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일제의 관광 정책은 1930년 일본 정부 내에 국제 관광국을 설치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일제의 관광 정책은 이 시기 식민지 조선에 그대로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중일 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조선에서는 이세 신궁(伊勢神宮), 가시하라 신궁(橿原神宮) 등에 대한 ‘성지 참배단(聖地參拜團)’이 조직되는 것이다. 이 성지 참배에 동원하고 있는 계층은 면장, 면 서기, 도·부·군·면 협의원, 교원, 상공업자, 청년, 사상 전향자, 육군 훈련 지원병, 경찰, 정총대(町總代), 체신국원, 소학생 등이었다. 특히 사상 전향자, 육군 훈련 지원병, 경찰, 정총대, 체신국원, 소학생 등은 1937년 중일 전쟁 이후에만 보이는데, 이는 전시 동원 체제 속에서 동원 대상자를 동원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나 동원 대상자를 중심으로 시찰단이 조직되었음을 의미한다.420)조성운, 「전시 체제기 일본 시찰단 연구」, 『사학 연구』 88, 한국 사학회, 2007.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인 『경성일보』나 『매일신보』는 이를 ‘내지’ 시찰단이라 하였고 조선인이 경영하였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일본’ 시찰단이라 하여 용어상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신문사 경영의 주체가 어느 민족이냐에 따라 발생한 용어상의 차이라 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조선 내에서 발행되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최소한 일본을 ‘내지’라 칭하지 않음으로써 나름대로는 ‘민족지’라 표방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아직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던 1909년의 일본 시찰단을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요로즈조호(萬朝報)』, 『도쿄니로크신문(東京二六新聞)』 등 일본 신문에서는 ‘한국 관광단’이라 하여 조선의 신문들이 ‘시찰’이라 한 것과는 다른 인식을 보이고 있다. 이것 역시 후술하듯이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차가 아닐까 생각된다.

일본 시찰단을 조직하여 파견한 배경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일관하여 관통하고 있는 사실은 조선인에 대한 동화 정책의 일환이라는 점이다. 곧 조선인에 대한 동화 정책의 내용이 어떻게 바뀌느냐에 따라 일본 시찰단의 구성원, 방문지, 방문 시설 등에 변화가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일제 강점기는 1910년대의 무단 통치기(武斷統治期), 1920년대의 문화 통치기(文化統治期), 1930년대의 민족 말살 통치기(民族抹殺統治期)로 구분한다. 따라서 일본 시찰단 역시 이러한 시대 구분에 따라 파견 배경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먼저 1910년대에 일본 시찰단을 파견한 배경을 살펴보자. 일제가 1910년 조선을 ‘병합(倂合)’한 이후 조선에 대한 식민지 통치 방식으로써 동화주의(同化主義)를 채택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위해 조선 총독부는 조선인을 식민지 지배 체제에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동화의 대상으로는 여론을 주도하는 조선의 상층 및 중간 지배층뿐만 아니라 향촌 사회(鄕村社會)의 지배층을 상정하였다. 또 조선 총독부는 한편으로는 조선의 식민지화에 협조한 조선인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과 함께 식민지 지배에 적합한 형태로 조선의 지방 행정 제도를 변화시켜야 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일제는 ‘병합’ 직후 ‘조선 귀족령’을 반포하여 조선의 식민지화에 공헌한 76명에게 작위(爵位)를 수여하였고,421)심재욱, 「1910년대 『매일신보』의 식민지 지배론」, 수요 역사 연구회 편, 『식민지 조선과 매일신보』, 신서원, 2003, 213쪽. 1914년 부제(府制)의 시행과 군면(郡面)의 통폐합, 1917년 면제(面制)의 시행 등 지방 행정 제 도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조선 총독부는 전통적인 향촌 사회의 질서를 해체하고 식민지 통치에 맞는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 하였다. 이러한 제도적인 정비와 함께 일제는 조선인의 정신 혹은 사상을 일본인화하기 위해 일선(日鮮) 동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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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하였듯이 필자는 우리나라의 대중화된 해외여행의 시발점으로 1920년대의 일본 시찰단을 들었다. 그러나 일본 시찰단의 목적은 해외여행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협력자 혹은 조력자를 양성하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띠고 이루어진 일본 시찰단의 여행 내용을 표 ‘1926년 군수 시찰단의 경로 및 시찰 시설’과 표 ‘1941년 유림 성지 순배단 일정’을 통해 살펴보자.

<표> 1926년 군수 시찰단의 경로 및 시찰 시설
날짜 시찰지 시찰 시설
10.16 서울 총독부 집합, 시찰 계획 안내
10.17 서울 조선 신궁(朝鮮神宮) 추기제(秋期祭) 참배(參拜)
10.18 부산 오전 10시 서울 출발, 오후 8시 부산 도착, 연락선 탑승
10.19 시모노세키(下關) 오전 8시 시모노세키 도착, 야와타 제철소(八幡製鐵所), 나카가와지 저수지(中河內貯水池), 마루야마 학원(丸山學院)
10.20 하카다(博多) 후쿠오카 현(福岡縣) 범인 감식과(犯人鑑識課), 후쿠오카 시(福岡市), 니시고엔(西公園), 후쿠오카일일신문사(福岡日日新聞社), 기노 주조소(野鑄造所), 후쿠오카 의과 대학(福岡醫科大學), 이모사키하치만구(莒崎八幡宮)
10.21 하카다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滿宮), 간제온지(觀世音寺), 농학 부속 농장(農學部屬農場), 상품 진열소(商品陳列所)
10.22 사세보(佐世保) 해군 항공기(海軍航空機), 군함 무츠(軍艦陸奧)
10.23 나가사키(長崎) 미쓰비시 조선소(三菱造船所), 나가사키 시(長崎市)
10.24 육군 비행장(陸軍飛行場), 즈지야 버선 회사(土屋足袋會社)
10.25 오무다미쓰이 탄광(大牟田三井炭鑛), 미쓰비시 염료장(三菱染料場)
10.26 가고시마(鹿兒島) 사마츠 공 별저(島津公別邸), 상고집성관(尙古集成舘), 시로야마 공원(城山公園), 난스로 동굴(南洲翁洞窟), 난스로 종언지(南洲翁終焉地), 가고시마 시 역소(鹿兒島市役所), 가고시마 시(鹿兒島市), 가고시마 현(鹿兒島縣)
10.27 나데오카와(苗大川) 가고시마 현(鹿兒島縣) 히오키 군(日置郡) 나데오카와(苗大川) 조선인 이주 마을(민가 방문, 소학교 참관, 촌 역장(村役場), 신사 참배, 심수관저(沈壽官邸))
10.28 벳푸(別府) 벳푸
10.29 오사카(大阪) 벳푸에서 오사카로 이동
10.30 도요사키(豊崎)의 주택(조선인이 거주하는 주택), 내선협화회(內鮮協和會), 오사카 부(大阪府), 오사카매일신문사(大阪每日新聞社)
10.31 가스가 신사(春日神社), 나라 대불(奈良大佛), 오사카 무답장(大阪舞踏場)
11.1 조폐국(造幣局), 오사카 성(大阪城), 도아이 양복점(十合吳服店), 나카야
마 타이요도(中山太陽堂)
11.2 이세(伊勢) 이세 신궁(伊勢神宮), 후타미(노)우라(二見浦)
11.3 도쿄(東京)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적십자사 제34회 총회 및 창립 50년 축하회), 제국 미술 전람회(帝國美術展覽會)
11.4 교죠니쥬바시(宮城二重橋),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 아타고 공원(愛宕公園), 아타고 방송국(愛宕放送局), 시바미스조지(芝增上寺), 센카쿠지(泉岳寺), 노기 대장저(乃木大將邸), 메이지 신궁(明治神宮)
11.5 기보잡지사(希望雜誌社), 신주쿠 교엔(新宿御苑), 마루노우치(丸之內) 빌딩, 호신지(法心寺)(오츠카(大塚) 내무국장 법요 참석), 이왕저(李王邸), 일선상애회(日鮮相愛會)
11.6 교토(京都) 교토로 이동
11.7 모모야마 고료(桃山御陵), 히에이 산(比叡山)
11.8 교토 고소(京都御所), 아라시야마(嵐山), 긴카쿠지(金閣寺)
11.9 운령(雲令) 운령(雲令)으로 이동
11.10 이즈모 대사(出雲大社) 참배, 치이구(知井宮) 참배 예정이었으나 부친의 기일 때문에 1일 먼저 귀국
✽孔濯, 「內地視察感想談」, 『朝鮮』, 朝鮮總督府, 1927년 3월, 1927년 4월.

일본 시찰단이 여행한 코스는 오늘날의 일본 여행 코스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부산에서 부관 연락선으로 시모노세키까지 간 다음 산요선과 도카이도선(東海道線)을 타고 히로시마, 오사카, 교토, 나고야, 도쿄의 순으로 시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두 시찰단의 시찰 장소와 시설이 다름을 볼 수 있다. 곧 군수(郡守) 시찰단은 주로 행정 관서를 중심으로 관광지를 병행하였으나 유림(儒林) 시찰단은 유학(儒學)과 직접 관련이 없는 신궁(神宮)이나 신사(神社)를 중심으로 시찰하고 있다. 물론 전시 체제기 일제가 이른바 황도 유학(皇道儒學)을 내세우면서 유학을 일본화할 것을 주창하기는 하였지만 조선의 전통 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장소를 참배한 것은 사문난적(斯文亂賊)과 같은 행위였다. 이는 시찰이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하면 시찰자들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 이들은 ‘보는 자’이면서 동시에 ‘보여지는 자’이다. ‘보는 자’가 시찰자라면 ‘보여지는 자’ 역시 시찰자이다. ‘보는 자’는 시찰지의 유적이나 풍광을 보지만 그들은 현지인에게는 ‘보여지는 자’일 뿐이다. 따라서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는 결국 같은 존재이다. ‘보는 자’인 조선인들은 스스로 조선은 일본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며, ‘보여지는 자’를 보는 일본인들은 ‘야만인’이 일본의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만한 순유단의 일원으로 조선과 만주를 관광한 일본인의 시선과는 반대의 입장에 있다. 곧 ‘보는 자’나 ‘보여지는 자’라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고, 그들이 어떠한 시선을 갖는가 하는 점 역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곧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의 승자로서의 일본인의 시선과 그들의 식민지인 조선인의 시선은 같은 사물을 보아도 그 시선과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표> 1941년 유림 성지 순배단 일정
날짜 시찰지 시찰 시설 비고
10.17 경성   부산 도착
10.18 미야지마(宮島) 이츠쿠시마 신사(嚴島神社)  
10.19 교토(京都)   교토 도착
10.20 교토 모모야마 고료(桃山御陵), 신사 참배(神社參拜), 시내 견학  
10.21 교토 가시하라(原神宮) 나라(奈良)
10.22 야마다(山田) 이세코다이 신궁(伊勢皇大神宮), 후타미노우라(二見浦)  
10.23 나고야(名古屋) 나고야성(名古屋城) 차중 취침
10.24 도쿄(東京) 메이지 신궁(明治神宮), 유시마 세이보(湯島聖廟), 다이도가쿠인(大東學院), 고쿠가쿠인(國學院)  
10.25 도쿄 고마 신사(高麗神社), 유학(儒學) 관계 지명 인사(知名人士) 방문, 우노(宇野) 박사 강연  
10.26 도쿄 시내 견학  
10.27 미토(水戶) 사적지(史蹟地) 견학, 미도가쿠(水戶學) 청강  
10.28 닛코(日光) 도쇼구(東照宮) 및 기타 견학 주센지(中禪寺) 숙박
10.29 도쿄   차중 취침
10.30 오사카(大阪) 오사카성(大阪城), 시내 견학, 협화회 사업 및 조선인 마을  
10.31 마쓰에(松江)    
11.1 마쓰에 이즈모 신사(出雲神社) 사적지 및 시내 견학 차중 취침
11.2 벳푸(別府) 시내 견학, 지옥 순례  
11.3 모지(門司)   선중 취침
11.4 부산   해산
✽『朝鮮儒林聖地巡拜記』, 朝鮮儒道會聯合會, 1942,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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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평화 박람회 조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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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된 일본 시찰단은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점차 ‘관광’의 목적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일제가 1920년대에 앞 다투어 개최하였던 박람회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것이었다. 특히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파견된 일본 시찰단의 수는 약 400개 정도이다.422)이 숫자는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보도된 기사의 통계이다. 이 중 중복된 것도 있겠지만 보도되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이보다는 더 많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 중 일본 시찰단이 가장 많이 파견되었던 시기인 1920년부터 1923년까지는 시찰의 목적이 후쿠오카 공업 전람회, 규슈·오키나와 8현 연합 공진회, 도쿄 축산 박람회, 도쿄 평화 기념 박람회 등 박람회의 관람에 있었다. 이 시기에 파견된 일본 시찰단의 수는 154개이다. 이는 전체의 38.5%에 해당 한다. 방정환(方定煥)은 도쿄에서 일시 귀국할 때 “박람회에 다녀가는 관광단 때문에 (부관 연락선이) 매일 만원이니 시모노세키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일찍 배를 타라.”는423)방소파(方小波), 「미행당하던 이야기, 도리어 신세도 입어」, 『별건곤(別乾坤)』 27, 1930.3, 54쪽. 말을 들을 정도였다. 춘파(春破)는 이러한 일본 시찰 열풍을 “각지를 통하여 이야기 마디나 할 사람은 말금 외지로 갔구려. 기자대회민(記者大會民), 중대회(衆大會) 또 일본 관광단까지 하여 똑똑한 사람은 말금 도망하였구려! 가가 보는 사람, 관공리, 소년 부랑자 외에는 없는 모양이요.”라고424)「동서편신(東西片信)」, 『개벽(開闢)』 59, 1925.5, 69쪽. 할 정도였다.

이처럼 많은 시찰단이 192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일본을 찾는 것은 물론 3·1 운동 이후 식민지 지배에 위협을 느낀 일제가 조선에 대한 새로운 지배 정책을 수립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조선을 강점하는 데 협력하였던 세력이 더 이상 조선 인민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일제는 새로운 협력자를 양성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식민지 지배의 새로운 파트너로서 이른바 ‘중견 인물’을 상정하였고 일본 시찰 단원은 ‘중견 인물’에 해당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선발하였던 것이다. 일제 식민 당국의 이러한 의도에 대해 시찰 단원으로 선발된 인물들은 어떠한 생각을 하였는가는 일본 시찰단에 대한 시찰 단원의 인식, 더 나아가 문화 통치라는 새로운 식민지 지배 정책에 대한 이들의 인식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시찰을 다녀온 후 이들은 의무적으로 시찰기(視察記)의 작성 및 제출, 간담회나 강연회를 통한 대중에 대한 선전 및 계몽 활동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리에서 이들이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남긴 시찰기를 보고 이들의 경향성을 파악하는 데는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한편 이렇게 일본을 찾은 많은 시찰단은 일본에 유학하던 학생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유학생으로 판단되는 어느 학생의 다음의 글을 통해 살펴보자.

국외의 손이 되면서 의표(衣表)가 어쩌면 그리 ×솔(×率)할까요. 우리의 무기력을 왜 그다지 외국인에게까지 표시할까요. 제발 상투 좀 잘라 버리시고 갓 좀 벗어 버리시고, 세계식 현대식 보통식으로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유일의 긴자통(銀座通)이나 스다쵸(須田町)에서 소위 조선의 귀객(貴客)으로서 상투 짜고 망건 쓰고 흑립 쓰고 철 아닌 백저(白紵) 두루마기 입고 편리화(便利靴) 신고 아모 기력 없이 뒷짐 지고 어릿어릿 하시는 경황-실로 보기에 미안스럽더이다. 조선의 자제로서 조선의 부로(父老)를 대할 때 이와 같이 불쾌하였는데 황차(況且) 이국의 민족이야 여간 비웃었겠나이까. 조선인으로 조선 고유의 의표로써 만국(萬國)에 횡행함-물론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빈약(貧弱)의 태(態)가 들어납디다. 국외의 손이 되면서 몸에 10원의 치(値)가 없어 보이니…… 제발 상투 좀 베고 흑립 좀 벗어 주셔요.425)「여쯀말슴 잇습니다」, 『개벽』 12, 1921.6, 81쪽.

이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학생은 ‘상투 짜고 망건 쓰고 흑립 쓰고 철 아닌 백저 두루마기 입고 편리화 신고 아모 기력 없이 뒷짐 지고’ 있는 모습은 ‘세계식’, ‘현대식’, ‘보통식’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 학생이 공부하고 있던 일본에서도 사람들이 모두 ‘세계식’, ‘현대식’, ‘보통식’으로 살았던 것은 아니다. 당시 일본 사람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전통 복장과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일반 대중에게도 널리 확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재(李商在)가 미국에 사절(使節)로 갔을 때를 회상하면서 “지금은 우리도 머리를 다 깎고 아무리 완고(頑固) 생원님이라 하더라도 외국 관광단에 한번 뽑히면 으레 머리를 깎고 서투른 양복이나 입어야 될 줄 안다.”고426)이상재(李商在), 「상투에 갓 쓰고 미국에 공사 갔던 이야기, 벙어리 외교, 그래도 평판은 좋았다」, 『별건곤』 2, 1926.12, 8쪽. 한 말에서도 이러한 정황은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1906년 아사히신문사에서 주최한 만한 순유단에서도 보인다. 아사히신문사는 만한 순유단원에게 문명국의 복장으로서 양복을 입을 것을 장려하였으며,427)有山輝雄, 『海外觀光旅行の誕生』, 吉川弘文舘, 2002, 57쪽. 1908년 세계 일주 여행에서는 양복을 의무화하 였다.428)有山輝雄, 『海外觀光旅行の誕生』, 吉川弘文舘, 2002, 98∼99쪽. 20년 정도의 시간차가 나기는 하지만 양복을 착용하라는 이유는 똑같은 것이다. 따라서 근대의 초입에 들어서면서 일본이건 조선이건 서구의 것은 근대이며 문명이라는 인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면 일제가 시찰단을 통해 이루고자 하였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이는 시찰단 파견에 가장 적극적이었으며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조중응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중응은 ‘한일 합방’ 이후 조선인의 사상이 진보하였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일본 시찰에서 찾고 있다. 일본 시찰을 다녀온 독농가(篤農家)들이 일본인의 근면과 일본의 문명개화(文明開化), 식산흥업(殖産興業)의 발달 등을 조선에 돌아와 일반 민중에게 전파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찰의 효과는 특히 완고한 유생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여 일본 시찰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을 개진하였다. 더 나아가서 그는 조선의 각 지방에서 경성을 시찰하는 것도 이러한 목적으로 설명하였다.429)「선인 사상(鮮人思想)의 진화(進化)」, 『매일신보』 1913년 9월 10일자. 이에 따라 평안남도 도장관인 마츠나카(松永)는 1914년 진신 시찰단에 참가할 것을 독려하였다.430)「내지 시찰단(內地視察團)에 대(對)하여」, 『매일신보』 1914년 3월 11일자. 이로 보아 일본 시찰이나 조선 국내의 시찰 모두 일제의 의도는 일본의 근대 문물의 우수성을 선전하여 조선인을 감복시키고 식민지 지배를 영구화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이에 따라 1924년 개최된 내선 연합 교육자 대회(內鮮聯合敎育者大會)에서는 일선 동화(日鮮同化)의 한 방법으로서 일본과 조선 양국민의 상호 시찰을 권유하였고 박물관, 물산 장려회 등을 이용하여 상호 이해를 도모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431)岡田貢, 『內鮮生活上より見たる內鮮融和の要諦』, 京城出版社, 1928, 157∼158쪽 : 박성진, 『한말∼일제하 사회 진화론과 식민지 사회사상』, 선인, 2003, 233∼235쪽 재인용.

그리하여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매일신보』는 일본 시찰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 때문에 시찰 장소로서 박람회가 갖는 의미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일본이 자국 내에서 개최되는 박람회에 조선의 유력자들을 관람시키고자 하였던 것은 박람회를 식민지 지배 전략에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432)박성진, 「일제 초기 ‘조선 물산 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연구」, 수요 역사 연구회 편, 『식민지 조선과 매일신보』, 신서원, 2003, 74쪽. 박람회에 대한 조선인의 관심은 이미 1882년 조사 시찰단에 참가하였던 인물들의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면 조사 시찰 단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던 강문형(姜文馨)도 일본이 산업 박람회의 개최를 통하여 기술 발전과 공업 진흥을 도모하고 있음을 주목하였다.433)강문형(姜文馨), 『문견사건(聞見事件)』, 허동현 편, 『조사 시찰단 관계 자료집(朝士視察團關係資料集)』 12, 35∼36쪽. 이와 같이 박람회를 견학하기 위한 목적은 이미 경성일보사가 1909년과 1910년에 파견하였던 시찰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434)1910년 시찰단의 목적은 “금행 목적(今行目的)이 양지 공진회(兩地共進會, 후쿠오카(福岡) 공진회와 제10회 간사이 부현 연합 공진회(關西府縣聯合共進會))에 전주(專注)하고 실업 발전(實業發展)에 단재(亶在)한 고(故)로 양지 안내(兩地案內)에 취(就)하여 기술(記述)이 편상(偏祥)함.”이라 하였다(박기순(朴基順), 『관광약기(觀光略記)』, 1910, 2쪽). 이로 보아 일제는 박람회의 견학을 통해 일본 문화 및 일본인의 우수성과 조선 문화 및 조선인의 열등감을 각인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곧 일본 시찰을 통하여 일본의 선진 문물을 선전하고 이를 조선에 이식하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는 1914년 진신 시찰단에 대해 “일국 일가족(一國一家族)을 성(成)함과 여(如)하도다.”435)「시찰단(視察團)의 성공(成功)」, 『매일신보』 1914년 4월 26일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통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순응하는 인간상의 창출, 곧 동화주의 정책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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