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4장 근대 해외여행의 탄생과 여행지
  • 2. 어디를 여행하였는가
  • 서구 여행
조성운

주로 유럽과 미국으로 떠난 서구 여행은 일본 여행처럼 다양한 자료를 찾기 쉽지 않다. 그것은 서구를 여행한 사람의 수가 절대적으로 적었던 이유도 있지만 실제 여행기나 기행문이 많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서구 여행은 일본의 시각으로 걸러진 서구의 근대 문물을 접하거나 수용하던 우리나라 사람이 직접 서구의 문물을 접할 수 있었던 기회였기 때문에 소홀히 취급할 수는 없다.

조선 사람이 처음으로 서구를 여행한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887년(고종 24)에 박정양(朴定陽)이 미국에 전권 대사로, 이상재가 서기관으로 함께 파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19세기 말에는 조선 사람 가운데 서구 여행을 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1922년 박승철(朴勝喆)이 독일 유학을 하면서 쓴 글에는 자신보다 먼저 독일에 유학을 온 조선인이 베를린 14명, 포츠담 5명, 남독일 13명 등 모두 32명이라고 하였다.436)박승철(朴勝喆), 「독일(獨逸) 가는 길에」 (3), 『개벽』 23, 1922.5, 112쪽. 그리고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유럽에 정착해서 사는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유럽에 유학을 간 조선인이 적지 않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이 여행기나 수필 등을 통해 우리나라에 유럽과 유럽의 문화를 소개하였다.

조선 사회에서 서구에 대한 관심은 이미 17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 청나라를 왕래하던 사신들이 서구의 문물을 소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일부 실학자가 서구 문물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서구 문물 가운데 조선 사회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은 서학(西學)이라 불렸던 천주교(天主敎) 사상이었다. 더욱이 조선은 서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신앙으로 발전시킨 지구 상의 유일한 나라였다. 보통 천주교의 전파는 로마 교회가 선교사를 제3 세계에 파견하여 형성되는 것이었지만, 조선만은 선교사의 파견 없이 서학에 대한 연구가 천주교 신앙으로 발전한 유일한 사례라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학은 집권 세력에 의해 여러 차례 탄압을 받았다. 특히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집권기인 1866년(고종 3)에 일어난 병인박해(丙寅迫害)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심하였다. 그것은 서구의 사상이 조선의 전통적인 지배 질서에 근본적인 도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 조선 사회는 신분제와 조상 숭배라는 성리학적 지배 질서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는데, 천주교는 이러한 질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였다. 만민은 평등하다는 평등사상(平等思想)과 제 사 의식(祭祀儀式)의 부정을 통한 조상 숭배에 대한 거부는 성리학적 지배 질서에 대한 명백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882년(고종 19)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여러 나라와 수교한 후 조선은 기독교(基督敎)의 포교를 인정하였다. 따라서 이후 서구의 기독교 세력은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그 과정에서 조선 사회에는 천주교와 함께 개신교(改新敎)도 전파되었고, 이들 선교사에 의하여 학교와 병원이 건립되어 조선 사회에 이른바 근대적인 문물이 퍼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양성된 조선인 신자들은 서구 문물은 곧 근대적인 것이며 선진적이라는 관념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관념이 조선 사회에서 일반화되어 갔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 서구 문물의 전파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선교사 중심의 서양인이나 서구 세계에 의하여 이루어지기보다는 일본을 통한 간접적인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서구 문물을 소개하는 경로는 신문이나 잡지 등 언론을 통한 방법, 일본 시찰을 통한 방법, 유학을 통한 방법 등 다양하였으나 일본을 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1909년 『경성일보』 주최의 일본 시찰 단원의 선정 과정에서 보인 정치 지향성은 ‘근대’에 대한 흥미나 지적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일본 시찰이 곧 출세를 보장하는 것처럼 인식되었던 것이다.437)한규무, 「한말 한국인 일본 관광단 연구(1909∼1910)」, 『국사관 논총』 107, 국사 편찬 위원회, 2005 참조.

그러나 이러한 서구 세계와 서구 문물에 대한 소개와 인식은 일본을 거치면서 한 번 걸러져 이미 ‘일본화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서구 세계와 서구 문물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욕망이 서구 유학과 여행으로 이어져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잡지 『개벽(開闢)』, 『별건곤(別乾坤)』 등이 서구 세계를 유학하거나 여행한 조선인의 여행기나 기행문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1930년대 이후에는 『삼천리(三川里)』가 중심이 되어 서구 여행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일부 신문에 가끔씩 여행기가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여행기를 쓴 대표적인 인물이 박승철, 노정일, 나혜석, 정석태, 허 헌 등이다.

이들 여행기의 필자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노정일(盧鼎一)은 황해도 진남포 출신으로 일본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후 미국의 웨슬리언 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 밖에도 유니언 대학과 드루 신학교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았고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귀국하여 연희 전문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네브래스카 주립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31년에 이승협의 권유에 의하여 『중외일보(中外日報)』를 인수,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로 제호(題號)를 바꾸고 사장이 되었다. 1926년 미국 유학 시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고, 1923년에는 대만의 복주(福洲)에서 개최된 동아 선교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가지로 사회적으로 비난이 많은”438)여효생(黎曉生), 「중앙일보는 어데로 가나」, 『별건곤』 52, 1932, 14쪽.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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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철이 쓴 글의 제목
박승철이 쓴 글의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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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철은 서울에서 태어나 YMCA 청년 학교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일본 유학 시절에는 잡지 『학지광(學之光)』에 추봉(秋峰)이라는 필명으로 논문과 평론을 기고하였다. 유럽에서 귀국 후 배재 고등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리고 그는 각각 1924년과 1925년에 조직된 흥업 구락부(興業俱樂部)와 조선 사정 조사 연구회(朝鮮事情調査硏究會)에 참여하였다. 특히 흥업 구락부에 참여한 인물은 배재 고등 보통학교, 한영 서원, YMCA 청년 학교, 협성 신학교 등을 졸업한 사람이 많다. 이는 흥업 구락부 구성원의 상당수가 청소년기부터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등의 기독교인의 영향을 받았으며, 더 나아가 서구 지향적인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박승철을 비롯하여 김준연, 안재홍, 유억겸, 이춘호, 조정환 등은 흥업 구락부와 조선 사정 조사 연구회에 모두 참여하였다. 이로 보아 이들 단체에는 민족주의적인 인물들이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승철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독교 세력의 일원으로 참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남긴 글 가운데에는 김준연과 관계된 사실이 많이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김준연과 막역한 사이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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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에 선 나혜석
화실에 선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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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羅蕙錫)은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삼일 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여자 미술 학교에 유학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화가이자 여성 운동가로서 이름이 높고 3·1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또 그녀는 문필에도 능해 김억(金億), 염상섭(廉想燮) 등과 함께 잡지 『폐허(廢墟)』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일제 강점기 초에 용인과 시흥 군수를 지낸 나기정(羅基鼎)의 3남매 중 막내이다. 특히 오빠인 나홍석(羅弘錫), 나경석(羅慶錫)과 함께 3남매가 모두 일본 유학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그녀가 일본 여자 미술 학교에 유학할 수 있었던 것도 작은 오빠인 나경석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사촌 오빠 나중석(羅重錫)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까지 수원 지역의 유지로 명망이 높았다. 하지만 그녀는 만주국(滿洲國) 주재 일본 영사관 부영사인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하였으며, 천도교 신파의 거두인 최린(崔麟)과 염문(艶聞)을 뿌려 세상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등 다른 측면에서 보 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서구 여행기나 기행문을 남긴 사람은 대개 기독교 신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이들이 기독교를 통해 서구 지향적인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들의 활동은 기독교적 민족주의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 사회에서는 일본이나 서구에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이 실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던 듯하다. 자신이 배운 바를 일본의 지배 체제 속에서 출세의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민족적 관점에서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들에게는 마치 원죄(原罪)와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이 배운 바를 실제 적용할 만한 직업을 갖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들의 이러한 처지를 잡지 『별건곤』은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박승철 군(君)이 실은 독일(獨逸)에 만히 잇섯다지만 영국(英國)에서 도라왓다 하여도 조켓지. 그런데 중앙 학교(中央學校)에서 지리역사(地理歷史)하고 또 어느 전문학교(專門學校)에 가서 몃 시간 교수를 담임(擔任)하고 잇다데. 생각하면 가엽는 일이지. 외국 유학생(留學生)이라고 본국에 도라오면 중학교 교원(中學校敎員), 신문 기자(新聞記者), 전도사(傳道師), 통역인(通譯人)! 한심하지!439)「조선(朝鮮)에서 활동(活動)하는 해외(海外)에서 도라온 인물 평판기(人物評判記), 어느 나라가 제일 잘 가르처 보냇는가?」, 『별건곤』 3, 1927.1, 23쪽.

이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지식인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을 고민하였다. 특히 최소한의 민족적인 양심을 가진 인물이었다면 선택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당시 확산되던 사회주의의 조류 속에서 자신들의 기독교적 가치와 민족주의적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관념 혹은 압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앞서 『별건곤』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교수, 교사, 신문 기자, 전도사 등을 제외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듯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의 하나로 신문이나 잡지에 서구 생활에 대한 자신의 경험이나 서구 문물을 소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자신들이 조선의 다른 사람보다 ‘근대’ 문물의 세례(洗禮)를 더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아가 자신들의 주장이 더 ‘근대’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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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이 쓴 글의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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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보았듯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이 서구를 여행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었다. 당시에 유럽까지 가는 방법은 배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박승철의 글에는 유럽까지의 이동 경로가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고베(神戶)-모지(門司)-상하이(上海)-홍콩(香港)-싱가포르(新嘉波)-페낭(彼南)-스리랑카(錫蘭島) 콜롬보(古倫母)-수에즈 운하(蘇士運河)-이집트(埃及) 포트사이드(Port Said)-마르세유(馬耳塞)의 경로로 프랑스에 갔다. 아마도 이 길이 당시 일본에서 유럽으로 가는 일반적인 코스였을 것이다. 그것은 박승철보다 약 1년 뒤에 유럽을 여행한 정석태(鄭錫泰) 역시 마르세유에 도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승철은 고베 출발 이후 40일 만에 도착하였지만440)박승철, 「독일 가는 길에」 (3), 『개벽』 23, 1922.5, 112쪽. 정석태는 배로만 48일, 조선을 떠난 후로는 57일 만에 도착하였다고 한다.441)정석태(鄭錫泰), 「양행중(洋行中) 잡관잡감(雜觀雜感)」, 『별건곤』 1, 1926, 11, 66쪽. 항해 시간의 차이는 아마도 기상 조건이나 기항지(寄港地) 사정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자신의 딸인 허정숙(許貞琡)과 함께 미국을 거쳐 유럽을 여행한 허헌(許憲)의 여행 코스는 다음과 같다. 1926년 5월 30일442)허헌(許憲), 「세계 일주 기행(世界一周紀行)(제1신(第一信)) 태평양(太平洋)의 노도(怒濤) 차고 황금(黃金)의 나라 미국(美國)으로! 포왜(布哇)에 잠감 들러 형제(兄弟)부터 보고」, 『삼천리(三千里)』 1, 1926.1, 6쪽에는 5월 31일 서울을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을 떠나 일본으로 가서 6월 9일 요코하마(橫濱)에서 배를 타고 14일 만에 하와이에 도착하여 10여 일을 체류하였다. 7월 8일 샌프란시스코행 배를 타서 1주일 만에 도착한 후 서부의 여러 주를 거쳐 워싱턴과 뉴욕을 여행하였다. 그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아일랜드(愛蘭)-영국-네덜란드(和蘭)-벨기에(白耳義)-프랑스-스위스(瑞西)-오스트리아(墺地利)-독일-폴란드(波蘭)-러시아-중국을 여행한 후 1927년 5월 10일 거의 1년 만에 귀국하였다.443)허헌, 「동서(東西) 십이 제국(十二諸國)을 보고 와서」, 『별건곤』 7, 1927.7, 45쪽. 허헌의 여행 코스는 1908년에 아사히신문사가 주최한 세계 일주 여행 코스의 미국행 코스와 매우 흡사하다. 이 길이 아마도 당시 미국으로 가는 일반적인 코스였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이 여행기는 1929년에야 잡지 『삼천리』에 연재되었고 그마저도 끝을 맺지 못하였다. 연재가 끝나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가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光州學生抗日運動)과 관련한 신간회의 민중 운동자 대회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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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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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시기 유럽이나 미주 여행의 목적은 ‘관광’이 아니라 유학이나 이민이었다. 다만 허헌의 경우는 일제의 정치적 탄압이나 압력에 따른 외유(外遊)였을 가능성이 높다. 허헌이 스스로 “나의 외유의 동기라든지 주요 목적은 여기서 말씀할 필요가 없겠지요.”라고444)허헌, 「동서 십이 제국을 보고 와서」, 『별건곤』 7, 1927.7, 45쪽. 한 것으로 보아 공간되는 잡지에서 직접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이 시기 이들의 유학이나 여행에 쓴 비용은 당시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허헌이 약 1년 동안 다녀온 해외여행의 비용은 땅을 판 1만 2000원 정도였다. 정석태와 함께 유럽으로 유학을 가던 G 군과 N 군이 홍콩에 잠깐 상륙하였을 때 일본 기생집에서 반년간의 학비인 1,500원이나 되는 돈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유럽이나 미주로의 여행은 거금이 드는 길이었으므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린은 천도교의 지원으로 1925년부터 3년간 세계 일주를 하였다.445)『사업과 향인』 제1집 : 국사 편찬 위원회 홈페이지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재인용. 그리고 “자네도 야소교(耶蘇敎) 독신자(篤信者)나 되어 가지고 교회의 주선으로 미국 유학(米國留學)이나 가보게 그려! 그리고 자네 집부터도 재산 푼이나 있으니까 미국 유학 가기는 제일 좋지.”라고446)「조선에서 활동하는 해외에서 도라온 인물 평판기, 어느 나라가 제일 잘 가르처 보냇는가?」, 『별건곤』 3, 1927.1, 20쪽.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독교회에서 유학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나 천도교 등 종교 단체가 지원하여 여행 혹은 유학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시기 유럽이나 미주 여행은 ‘관광’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유학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여가를 즐기기 위한 여행이라는 성격도 갖는 일본 여행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따라서 서구 여행에 대해 서술한 글은 유학하기 위해 서구로 이동하는 과정을 묘사한 글과 유학 도중 짬을 내어 주변의 다른 지역을 여행한 후 남긴 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앞서 본 박승철의 글은 전자의 대표적인 예이며 나혜석, 정석태, 허헌의 글은 후자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들이 여행하면서 무엇을 보고 느꼈는가를 살펴보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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