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4장 근대 해외여행의 탄생과 여행지
  • 3. 누가 여행하고 무엇을 보고 느꼈나
조성운

식민지 조선에서 해외여행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적·경제적·정치적으로 중견 이상의 인물이었다. 1910년 조선 귀족 관광단을 포함하여 1909년과 1910년 경성일보사가 주최한 일본 시찰단은 당시 조선 사회의 최상위층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후 서서히 변하여 1920년대가 되면 일본 시찰의 대상은 유지, 교원, 군수, 면장, 실업가, 군 참사(郡參事), 군 서기(郡書記), 도 평의원(道評議員), 도 참여관(道參與官), 대지주, 경찰, 축산 조합원, 향교 평의원·직원(直員)·장의(掌議) 등 향교 관계자, 면 협의원(面協議員), 부 협의원(府協議員), 삼림 조합 기술원, 학교 평의원, 농회 관계자, 독농가, 유림, 금융 조합 관계자, 청년, 목사, 보통학교장, 민풍 진흥회 관계자, 잠종 제조자, 승려, 인쇄업 대표자, 소작인 등이었다.447)조성운, 「1920년대 일본 시찰단의 조직과 파견」, 『한국 독립 운동사 연구』 28, 한국 독립 운동사 연구소, 2007, 220쪽. 이 중 소작인을 제외하면 모두 조선 사회의 중간 지배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지방 사회에서 민중들과 직접 대면하는 인물로, 조선 총독부가 지칭한 중견 인물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접어들면 면장, 면 서기, 도·부·군·면 협의원, 교원, 상공업자, 청년, 사상 전향자, 육군 훈련 지원병, 경찰, 정총대, 체신국원, 소학생 등이 주 대상이 되었다.448)조성운, 「전시 체제기 일본 시찰단 연구」, 『사학 연구』 88, 한국 사학회, 2007, 1077쪽. 이 중 사상 전향자, 육군 훈련 지원병, 경찰, 정총대, 체신국원, 소학생 등은 1937년 이후에만 보인다. 이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전시 동원 체제 속에서 동원 대상자를 동원하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나 동원 대상자를 중심으로 시찰단이 조직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총동원 체제가 확립되면서 일본 시찰은 그동안 감추고 있던 침략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이 시기와 이전 시기의 시찰 장소를 비교하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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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미주나 유럽을 여행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종교 단체 등의 후원을 받았다. 이는 일본 여행은 정책적인 측면이 강하게 작용한 반면 서구 여행은 개인의 유학이나 종교적인 선택이 좀 더 강하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일본 여행자들이 남긴 시찰기와 서구 여행자들이 남긴 시찰기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일본 시찰 단원은 시찰 이후 의무적으로 시찰기를 제출하여야 했다. 그러므로 시찰단의 파견 목적과 다른 의미로 서술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 총독부 및 각 지방 행정 기관, 그리고 조선 총독부의 외곽 단체인 시찰단의 파견 주체가 의도한 바를 충실히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 하여 일본 시찰기는 엇비슷하다는 느낌이다.

이에 비해 서구 여행기는 상당히 자유롭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고 자신의 느낌을 자유롭게 썼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公刊)된 서구 여행기 중에는 검열에 걸려 삭제된 부분이 적지 않게 발견된다. 또 허헌이나 박승철의 글에는 아일랜드나 폴란드처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를 여행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비교하는 내용도 있다. 이는 이들의 여행지가 일본이 아닌 유럽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교의 대상을 직접 방문하여 경험한 것에서 도출한 결론이었던 것이다. 특히 허헌은 아일랜드 정부와 의회의 주요 인물과 회견하기도 하면서 약소민족으로서 겪었거나 겪고 있는 현실을 공유하였다. 그리하여 아일랜드 측의 요청에 따라 조선 관련 자료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이제 일본 여행기와 서구 여행기로 나누어 이들 여행기에 나타나는 여행지에 대한 인식, 여행을 통해서 깨달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인식 등 식민지인으로 살아가면서 느낀 점을 서술해 보자.

먼저 일본 시찰단으로 일본을 여행한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느낀 점은 천편일률적이다. 그들이 남긴 시찰기를 보면 일본의 첫인상으로 보통 울창한 숲을 든다. 그들이 경부선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창밖으로 본 조선의 풍경과 일본에 첫발을 내딛고 도쿄로 향하는 기차 속에서 바라본 풍경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녹색으로 울창한 일본의 산과 철도 연변의 공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커먼 연기였다. 이 장면에서 일본 시찰자들은 근대 일본의 ‘문명’에 대해 첫 번째 깊은 인상을 받는다. 다음으로 그들이 시찰 장소를 돌아다니면서 본 것은 일본의 고대 문물이 조선과 비교해서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10여 년 전 일본을 처음 여행하였을 때 받았던 느낌은 내가 그동안 일본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한때 국내에서 베스트셀러였던 『축소 지향(縮小指向)의 일본인』이라 는 책과 옛날의 일본 국명인 ‘왜(倭)’라는 명칭은 나에게 일본의 모든 문물은 작다는 선입견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이때 필자가 본 일본의 고대 문물은 우리나라의 그것보다 규모 면에서 컸으면 컸지 결코 작지 않았다. 교토(京都)의 난제지(南禪寺)의 일주문(一柱門)이나 그 유명한 나라(奈良) 도다이지(東大寺)의 금당(金堂)은 규모에서 필자의 선입견을 깨뜨리기에 충분하였다. 더욱이 교토의 소스이바시(疏水橋)를 본 이후 나는 일본의 근대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가 현(佐賀縣)의 비와 호(琵琶湖)의 물을 끌어들여 오사카까지 운하를 만들겠다는 의도로 계획된 소스이바시는 원래 계획대로 운하를 만드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근대 교토에 수력 발전소를 세워 전차가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20세기가 되기 전에 순수 일본 기술로 이 소스이바시가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후 『매일신보』를 읽으면서 일본 시찰단을 알게 되고 일본 시찰 단원이 소스이바시를 시찰하였다는 기사를 보았을 때 필자는 그때가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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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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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당시에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여행한 사람들은 공장과 도시의 거리나 백화점, 그리고 소스이바시 같은 근대 문물을 보고 일본의 강대함에 대해 한편으로는 놀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가 질렸을 것이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조선도 저렇게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이나 다짐을 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근대 문물에 대한 충격이었고 일본의 저력에 대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우리도 저렇게 되어야 한다는 다짐은 유감스럽게도 일본화되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1909년 경성일보사 주최 제1회 일본 관광단 환영회에서 행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연설을 먼저 보자.

관광단 제군이 일본의 문화 제도 및 인정, 풍습을 알고자 한다면 일본 국민 역시 열심히 그것을 환영하고 있다. 그러기에 일한 양국의 관계를 보면 양국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양 국민의 의사를 소통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양국은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고로 금후 일가족(一家族)과 같이 되어야 할 줄 안다. 또한 양국은 지금 문호 개방을 함과 동시에 상부상조하고 나도 금후 한국을 위해 힘을 다해 결코 한국민 속에서 불공평을 함과 같이 어리석음을 보이지 않겠다. 일가족으로서 더욱더 양국의 진보 발달을 희망한다.449)「觀光團招待會」, 『讀賣新聞』 1909年 4月 24日字.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과 일본이 일가족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경성일보사 주최 제1회 일본 관광단에 대한 다른 인사들의 환영사에서 자주 보이는데, 일가족이란 결국 조선을 일본이 병합하겠다는 의미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일본 측의 의도에 대해 당시 시찰 단원은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그들이 남긴 글읕 통해 살펴보자.

1909년 경성일보사 주최 일본 시찰단에 참가하였던 박기순(朴基順)은 후쿠오카(福岡) 공진회와 아이치 현(愛知縣) 나고야(名古屋) 공진회뿐만 아니라 해군 공창(海軍工廠), 조폐국(造幣局), 철×장(鐵×場) 등을 시찰한 소감이 익심(益深)하다고 하면서 한국 물품(韓國物品)이 외국 기소(外國譏笑)를 도초(徒招)함으로 개론(槪論)하여 전국 공업계(全國工業界)에 일성경고(一聲警鼓)한다고 하고450)박기순, 『관광약기』, 1910, 3쪽. 자신이 시찰기를 쓴 목적을 “국가(國家)의 부강(富强)을 실업(實業)이라 약론(略論)함은 동포 제공(同胞諸公)의 공익 사상(公益思想)을 고취(鼓吹)할 뿐 불시(不是)라 억위자가(抑爲自家)의 좌명(座銘)을 작(作)코져 함”이라451)박기순, 『관광약기』, 1910, 3쪽. 하였다. 그리고 해주 군수 김정현은 일본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갑판상(甲板上)에서 시모노세키(下關)를 전망(展望)할 수 있다. 선항 내(船 港內)에 가까이 감에 따라 대소(大小)의 선박(船舶)이 마치 숲과 같고 육상(陸上)의 고루거각(高樓巨閣)은 우리 일행을 반기는 것 같고 높은 구름 밖에 우뚝 솟아 실로 화려정구(華麗精構)하다. 곧 잔교(棧橋)에서 상륙(上陸)하면 제 공장(諸工場)의 굴뚝은 낮부터 밤까지 검은 연기를 토해 낸다. 장사(長蛇)와 같은 기차(汽車)는 서(西)에서 동(東)에서 옷감 짜는 것과 같이 거곡상격(車轂相擊)해서 인견상마(人肩相磨)하고 점두(店頭)의 매품(賣品)을 쌓아 산을 이루고 있다. 오호라 이것이 동양에서 패권(覇權)을 다투는 우리 모국(母國)의 풍광(風光)인가.452)東洋拓植株式會社, 『大正二年秋期朝鮮人內地視察記』, 1914, 5쪽.

한편 시찰 단원은 일본이 근대 국가로 발전한 원인을 공공심(公共心) 혹은 공덕심(公德心)에서 찾았다. 강경 군수 채수강(蔡洙康)은 앞의 김정현과 익산 군수 박영철 등이 각각 촌민 일동(村民一同)의 공공심, 관민의 일치협력(一致協力) 등으로 표현한 것을 ‘국가적 공공(公共)’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주목하였다. 그에 따르면 “국가적 공공의 개념은 국가 존립의 기초로서 국민의 적성(赤誠)도 그것에서 배태(胚胎)”하며, 시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일본의 각 회사 및 조합 조직이 국가적으로 그것이 종업원도 역시 공공적(公共的) 지상(志想)이 풍부하여 근면정려(勤勉精勵)하여 그 직”을453)東洋拓植株式會社, 『大正二年秋期朝鮮人內地視察記』, 1914, 99쪽. 수행한다는 것이라 하였다. 또 1911년 목사 시찰단(牧師視察團)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한 상동 교회의 부목사 현순(玄楯)은 “하느님의 사랑이 일본 인민을 통해 조선에까지 미친 것에 대해 감사한다.”고까지 썼던 것이다. 이러한 현순의 말은 일본의 조합 교회에서 주장한 바를 그대로 옮겼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이처럼 1910년대 일본 시찰 단원이 파악한 일본의 발전 원인은 ‘국가적 공공’의 개념이었으며, 현순은 이를 종교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일본 인민을 통해 조선에까지 미친 것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1920년대에 접어들어서도 이러한 인식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1921년 일본을 시찰한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운두면장(雲頭面長) 정원영(鄭源榮)은 일본의 잘 보존된 자연에 대해 감탄하면서도 자연에 인공을 가하여 이용한 일본의 선진 기술에 주목하였다. 특히 그는 구레 해군 공창(吳海軍工廠)은 군함, 대·소포 등 각 병기를 제조하니 기계의 향(響)은 여뢰굉굉(如雷轟轟)하고 연돌(煙突)의 연(煙)은 여운몽몽(如雲濛濛)이라 하였으며, 오이타(大分) 공진회에 출품된 물품 가운데 조선 공산품의 열등(劣等)함을 보고 선객(鮮客)의 반성(反省)을 촉구하고 있다. 또 조선과 일본의 학교 수를 비교한 후 이것이 곧 조선과 일본의 우열(優劣)의 분기점(分岐點)이라 하면서 교육이 무(無)하면 상식(常識)이 핍(乏)하고 급격한 문명 풍조에 도태(淘汰)의 환(患)을 면치 못할 것이라 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454)정원영(鄭源榮), 「내지 시찰 감상(內地視察感想)」, 『유도(儒道)』 4, 유도 진흥회, 1921년 12월. 또 1922년에 동경 평화 기념 박람회를 시찰한 강원도 유생 김재익(金在翼)은 조선관을 관람한 후 “18만 원으로 건축한 조선관 2층 전각제(殿閣製)는 중관(衆舘)에 걸출(傑出)하나 내부 진열은 타관(他舘)보다 유치견(幼穉見)하니 기계 표본실에 고제 선포(古製船砲)가 원초발명(原初發明)은 세계의 선각이라 칭양(稱揚)할 만한 이여해(李汝諧, 여해는 이순신의 자(字))의 귀선(龜船)과 박진(朴晉)의 진천포(震天砲)를 상상(想像)하니 계속 부진한 함하 상태(陷下狀態)가 수(誰)의 과실(過失)인가. …… 후일 세계 평화 박람회에 조선관(朝鮮舘) 출품(出品)이 일등(一等) 점거(占據)되기를 기대한다.”고455)김재익(金在翼), 「내지 시찰 개요(內地視察槪要)」, 『유도』 8, 유도 진흥회, 1922년 7월. 하여 조선의 과학 기술이 쇠퇴한 것에 대한 한탄과 함께 미래를 기약하고 있다. 1928년 조선 여자 교원 일본 시찰 단원 중의 한 사람은 일본의 근대 문물을 접한 후 “혼을 빼앗겼다.”고 표현하였고, 다른 시찰 단원은 일본 시찰 이전에는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큰 격차가 있었다고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진실로 골육의 형제”라고 생각된다고 말하고, 더 나아가 “인간도(人間道) 향상을 위하여, 신일본 건설을 위하여, 대국민 육성을 위하여 감은봉사(感恩奉仕)하는 생활로 정진”할 것을 맹세까지 하고 있다.456)朝鮮總督府 編輯課, 『大禮奉拜朝鮮女子敎員內地視察記』, 1929, 39∼44쪽.

그런데 이러한 인식은 결국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라는 시선의 문 제였다. 일본 시찰단은 야만 혹은 열등한 존재로서 일본을 ‘보는 자’이며 동시에 일본인에게 ‘보여지는 자’가 되었다. 그럼으로써 이미 정해져 있는 코스에 따라 일본의 ‘선진 문물’에 대해 감탄하고 그것을 습득해서 ‘우리 조선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게 마련인 것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이러한 인식은 내선일체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그러한 의미에서 1922년 야나기하라 키치베에(柳原吉兵衛)가 1920년 조선 왕세자 이은(李垠)과 일본의 화족(和族)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의 결혼을 기념하여 조직한 이왕가 어경사 기념회(李王家御慶事記念會)가 조선인 여교원을 대상으로 조직한 시찰단은 독특하다 할 수 있다. 야나기하라는 “조선 동포의 완전한 통치를 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풍속·습관 등을 동일한 문화 아래 지도해 피아상애(彼我相愛)의 정신적 일치를 제일”로457)『앵근(櫻槿)의 화(華)』 제4호, 1935, 2쪽(박선미, 『근대 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 창작과 비평, 2007, 131쪽, 주) 31 재인용).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조선인 여성을 교육하는 의미로 그 여성들로 하여금 조선의 후속 세대를 교육하게 하면 내선일치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러한 취지에서 그는 조선인 여교원의 시찰단뿐만 아니라 조선인 여학생을 일본으로 초청하여 교육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458)이에 대해서는 박선미, 앞의 책 참조.

그리고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총동원 체제가 확립되면서 일본 시찰은 이른바 ‘성지 참배’라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음은 앞서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성지’란 이세 신궁(伊勢神宮), 가시하라 신궁(橿原神宮), 메이지 신궁(明治神宮), 모모야마 고료(桃山御陵),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노기 신사(乃木神社), 헤이안 신궁(平安神宮), 진무 천황 고료(神武天皇御陵), 미나토가와 신사(湊川神社), 히로시마 대본영(廣島大本營), 도요우케 대신궁(豊受大神宮), 이즈모 대사(出雲大社), 미야자키 신궁(宮崎神宮) 등 일본 정신을 강조하고 확인할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한다.

1941년 조선 유림 성지 순배단 단장이었던 나가타(永田種秀)는 시찰 이후 참가 단원들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이상(大理想)도 국민의 단결과 신의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라 하며 “스스로 경신 사상을 강하게 가져 신도(神道) 실천, 진충보국(盡忠報國)의 뜻을 올려 황국민신(皇國民臣)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봉공을 할 것”이라며 이 결심을 “조선에 돌아가면 강조하고 싶다.”고 하였다.459)「永田種秀團長の答辭」, 『朝鮮儒林聖地巡拜記』, 朝鮮儒道會聯合會, 1941, 55∼56쪽. 곧 ‘천황 폐하의 충실한 신민’으로서의 삶을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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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신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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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41년 6월 5일부터 24일까지 장로회 총회 종교 교육부 총무 정인과(鄭仁果), 조선 기독교 서회 편집 총무 백낙준(白樂濬), 영업 총무 오문환(吳文煥) 등과 함께 일본 기독교를 시찰하고 돌아온 조선 기독교 서회 총무 양주삼(梁柱三)은 “조선 기독교가 일본 기독교에 비해 양으로는 단연 우세를 점하고 있으나 문화적 수준에는 뒤떨어지는 점이 너무도 크다.”고460)양주삼(梁柱三), 「내지 기독교계(內地基督敎界)의 동향(動向)」, 『삼천리』 13권 9호, 1941.9, 106쪽. 하면서 소수의 교파를 제외한 일본의 기독교가 합동하여 ‘일본 기독교단’을 창립한 것을 세계 기독교 사상 미증유의 획기적 일대 변혁이라 평가하였다.461)양주삼, 「내지 기독교계의 동향」, 『삼천리』 13권 9호, 1941.9, 106∼107쪽. 그런데 ‘일본 기독교단’이라는 것은 ‘일본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이는 곧 일본의 국체, 곧 천황제(天皇制)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것이 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를 통한 내선결합(內鮮結合)은 쌍방이 요구하여 마지않는 바이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 기독교도 일본의 신교단(新敎團) 합동 실현과 같은 역사적 운동이 있어야” 한다고462)양주삼, 「내지 기독교계의 동향」, 『삼천리』 13권 9호, 1941.9, 110쪽. 주장하였다. 결국 그는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일본적 성격’의 기독교와 조선의 기독교가 합동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 운동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처럼 전시 체제기의 일본 시찰은 드러내 놓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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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일본에 앞서 근대화를 이룬 서구를 여행한 인물들은 서구 여행 이전에 이미 일본 유학이나 여행을 통해 일본의 근대 문물을 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본보다 앞선 서구를 여행함으로써 근대 문물의 정수를 체험하고 이해하려고 하였다. 그와 동시에 영국이나 프랑스 같이 식민지를 경영하던 나라와 폴란드나 아일랜드처럼 식민지를 경험하고 막 독립한 나라를 동시에 여행하면서 이를 우리 민족의 현실과 비교하기도 하였다.

먼저 박승철은 다음과 같이 스리랑카에 대한 영국의 식민 통치의 현상을 들어 일제의 무단 통치를 비판하였다.

이것이 비록 세소(細少)한 일이라 할지 모르나 대영 제국이 이민족을 통치함에 어떻게 고심하는지를 찰지(察知)하겠나이다. 대영 제국이 금력(金力)으로나 무력(武力)으로나 석란도민(錫蘭島民)을 일시적 압박하기는 여반장(如反掌)이겠으나 이민족 통치에 경험과 재기가 있으므로 기독교국으로서 불교 사찰에서 재판을 행함은 실로 영국이 석란도민의 관습을 존중함에서 유출(由出)한 것이라 하나이다. 이와 같이 이민족 통치가 지난(至難)한 것이외다.463)박승철, 「독일 가는 길에」 (3), 『개벽』 23, 1922.5, 108쪽.

또 그는 자국 땅인 상하이에서 인도인 경찰에게 몽둥이로 매를 맞는 중국인을 “가장 불쌍”하다고 하면서 “이국인(異國人)인 나로서도 분(憤)하”다고 하였다. 또 허헌은 미국의 독립 전쟁 당시 샌프란시스코 선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상항(桑港, 샌프란시스코)이란 북아미리가(北亞美利加)의 관문(關門)에 서서 “청원(請願)의 때는 이미 지낫다.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그러치 안으면……” 하고 부르짖으면서 내닫던 1775년 3월의 이 나라 민중(民衆)의 장렬(壯烈)한 그 활동을 회억(回憶)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리라. 그 위에 또 식민지(殖民地)인 미국(美國)에서 본국(本國)인 영국(英國)에 배화 운동(排貨運動)을 일으키어 매년 237만 방(磅, 파운드)의 수입이 있던 것을 일격(一擊)에 163만 방에까지 하락시키었으며, 이어서 동인도 회사(東印度會社)의 차(茶)를 상륙 거절(上陸拒絶)한 일과 연(連)하여 인지 판매 사건(印紙販賣事件)과 대륙 회의(大陸會議) 등 온갖 역사적(歷史的) 비장(悲壯)한 기억도 첨가하여 좋은 것이나 최후에 의장(議長) 쫀, 한콕쿠를 선두로 한 13주(州) 대표 56명이 서명하던 그 옛날의 어느 광경은 누구나 없이 분명히 와서 보고 지나야 할 줄 안다.464)허헌, 「세계 일주 기행(世界一週紀行)(제2신(第二信)), 꼿의 ‘바리웃드’를 보고, 다시 대서양(太西洋) 건너 애란(愛蘭)으로!」, 『삼천리』 2, 1929.9, 22∼23쪽.

또 그는 뉴욕에서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인 네-단헬의 동상을 보고 그가 영국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남겼다는 “나는 내 나라에 바치는 목숨을 오직 하나밖에 가지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식민지 조선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아일랜드를 여행하면서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썼다.

자유국이 된 뒤에 신정부의 손으로 부흥 사업이 성히 일어나는 모양으로 길가마다 새로운 가로수가 서기 시작하고 또 시구(市區)도 개정이 되며 좌왕우래(左往右來)하는 애란인(愛蘭人, 아일랜드 인)의 얼굴 위에도 희망과 정열의 빛이 떠오르더이다. 나는 이 모양을 보고 잿속에서 날개를 털고 일어나는 불사조라는 새를 생각하였소이다.465)허헌, 「세계 일주 기행(제2신), 꼿의 ‘바리웃드’를 보고, 다시 대서양 건너 애란으로!」, 『삼천리』 3, 1929.11,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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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허헌의 인식은 박승철에게서도 나타난다. 박승철은 폴란드 여행을 시작하면서 “부흥국(復興國) 파란(波蘭, 폴란드)을 보는 것이 조선(朝鮮) 사람 된 나로서는 최고(最高)의 흥미(興味)”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면서 “파란(波蘭)의 왕사(往事)를 생각하면 파란 사람 된 사람이야말로 혈루(血淚)가 날 것”이라며466)박승철, 「파란(波蘭)·화란(和蘭)·백이의(白耳義)를 여행(旅行)하고셔」, 『개벽』 36, 1923.6, 38쪽. 식민지 조선인의 입장에서 새로이 독립한 폴란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또 그는 폴란드 패망의 원인으로 내정의 부패와 귀족의 알력이 주요하다 할 수 있으나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신조(信條)로 삼든 18세기(世紀) 외교(外交)에 희생(犧牲)”된467)박승철, 「파란·화란·백이의를 여행하고셔」, 『개벽』 36, 1923.6, 38쪽. 것으로 파악하여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한 것이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더 나아가 박승철은 나폴레옹 전 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파리의 개선문(凱旋門)을 보고 난 후 “나는 근세 문화인(近世文化人)의 생각으로는 얼마만한 가치가 잇슬는지 의심하나이다.”고468)박승철, 「파리(巴里)와 백림(伯林)」, 『개벽』 24, 1922.6, 58쪽. 하여 프랑스 세력의 해외 팽창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이곳(싱가포르)도 서양인(西洋人)의 주택(住宅)이며 도로(道路)는 향항(香港, 홍콩)이나 다름없고 중국인(中國人) 시가(市街)도 역(亦) 상해(上海, 상하이)나 향항이나 같더이다. 참으로 동병상린(同病相憐)인지는 몰라도 중국인(中國人)과 마래인(馬來人, 말레이시아 인)이 불쌍”하다고469)박승철, 「독일 가는 길에」 (1), 『개벽』 21, 1922.3, 76쪽. 할 정도였다. 이는 당시 지식인들이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들의 행동이 인식과 동일한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 지식인의 사명감이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나혜석은 1927년 스위스를 여행하던 중 제네바에서 군축 회의(軍縮會議)에 참석하였던 “일본 전권(日本全權)과 마루야마 씨 부처(丸山氏夫妻), 후지와라 씨 부처(藤原氏夫妻)를 만나 기쁘게 놀고 점심”까지470)나혜석, 「백림(伯林)과 파리(巴里)」, 『삼천리』 5, 1933.3, 39쪽. 같이 먹을 정도로 민족의식에 차이를 보인다. 그러한 그녀도 자신을 찾아온 박석윤(朴錫胤)을 만나고 “이국(異國)에서 동포를 만나 보면 조상으로부터 받은 피가 한데 엉키어지는 것 같은 감회가 생겨나서 감사함을 더욱 느끼게 된다.”고 하면서도 “호수 위에 둥실둥실 떠 음악 소리에 몸이 쌓였을 때 아- 행복스러운 운명에 감사 아니 드릴 수 없었고 삶에 허덕이는 고국 동포가 불쌍하였다.”고471)나혜석, 「백림과 파리」, 『삼천리』 5, 1933.3, 39쪽. 하였다. 자신의 생활에 감사하지만 동포들의 삶은 불쌍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자기 자신만 행복하면 그만이라는 의식의 반영이었다. 이처럼 해외여행은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삶의 방향을 정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에 대해 서구 여행자들이 느낀 바를 서술해 보자. 먼저 박승철은 남녀의 성별에 따른 인식의 차이를 보이는 광경을 몇 차례 목격하였다. 유럽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벌어진 여자들의 수영 경기를 보고 “우리 동양인의 안목으로 보기는 놀”랐다고472)박승철, 「독일 가는 길에」 (3), 『개벽』 23, 1922.5, 109쪽. 한 점이나 룩셈부르크 공원의 남녀 나체상도 그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고 한 것이나 미술관에 가서 “그 중 이상한 것은 남녀 간에 비밀히 하는 그 부분을 가장 일목요연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동양 천지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이라고473)박승철, 「파리와 백림」, 『개벽』 24, 1922.6, 58쪽. 한 것에서 그가 서양의 미술 작품 속에서 받은 충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일상생활 속에서 적응된다. 곧 그는 선상에서 계속되는 수영에 대해 “남자며 여자며 아동들이 일정한 시간에 수영을 연습하게 되었나이다. 수영은 할 줄 모르나 구경만 해도 퍽 유쾌하외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나혜석은 기자와 대담하는 과정에서 동서양 사람들의 기질 차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재주야 동양 사람이 그네보다 질 것이 없지만 공부하는 데는 그네의 열심과 인내력을 참으로 따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리 동양 사람들은 공부를 하다가 조금만 잘하면 만족히 생각하고 조금 잘 못하면 아주 낙심을 하고 중지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디다. 내가 연구소에서 보아도 일본 사람은 무엇을 그리다가 마음대로 잘 되지 않으면 얼굴이 아주 변색이 되고 종이를 발기발기 찢으며 “다메다테마다(䭾目だてまだ)” 하고 붓을 흔히 던지지만 저 사람들은 결코 그러지 안습디다. 지금 안 되면 이따가 또 그리고 오늘 안 되면 내일 또 그려서 기어이 좋은 작품을 내고야 맙디다. 동양 사람 중에도 중국인이 그래도 꾸준히 나아가고 우리 조선 사람도 공부 중에는 꽤 참아 갑니다.474)「구미 만유(歐米漫遊)하고 온 여류 화가 나혜석 씨와 문답기」, 『별건곤』 22, 1929.8, 121쪽.

나혜석은 서양인과 동양인을 비교하고 다시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 을 비교하고 있다. 그는 서양인이 끈기가 있고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의욕이 강하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이라 생각하지만 조선인, 중국인, 일본인도 비교함으로써 이들 나라의 민족성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다. 특히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자질상 우수하다는 점을 은연중에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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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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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혜석은 서양 숭배자일지도 모른다. 그는 유럽에서 귀국한 이후의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요코하마에 도착한 때부터 가옥은 나무간 같고 길은 시구렁 같고 사람들의 얼굴은 노랗고 등은 새우등 같이 구부러져 있다. 조선 오니 길에 먼지가 뒤집어씌우는 것이 자못 불쾌하였고 송이버섯 같은 납작한 집 속에서 울려 나오는 다듬이 소리는 처량하였고 흰옷을 입고 시름없이 걸어가는 사람은 불쌍하였다. 이와 같이 활짝 피었던 꽃이 바람에 떨어지듯 푸근하고 늘씬하던 기분은 전후좌우로 바싹바싹 오그라들기 시작하였다.475)나혜석, 「아아 자유(自由)의 파리(巴里)가 그리워, 구미 만유(歐米漫遊)하고 온 후의 나」, 『삼천리』 4권 1호, 1932.1, 43쪽.

자유롭고도 풍요로운 생활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생활하던 그녀가 귀국하여 시댁 식구들과 부대끼며 살아갈 때 유럽 생활이 그 리울 수는 있겠으나 요코하마에 내리자마자 느낀 감정은 쉽게 납득할 수 없다. 특히 조선에 돌아온 이후의 감상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나 애정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전후좌우로 바싹바싹 오르라들기 시작”하였고 이 글의 제목처럼 자유로운 파리가 그리웠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나혜석을 보는 관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분명히 그녀는 많은 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페미니스트로서는 선구적이라 하겠으나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으로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태를 보였다.

어느 사회든 사회 계급이 분화되어 있는 것을 나혜석은 보지 못하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는 근대 관광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보여 주기 때문에 현지인과 소통하지 못한 예가 아닌가 싶다. 일상에서 관찰한 것과 일상을 떠난 국외자(局外者)로서 관찰한 것은 분명히 다르다. 이러한 점에서 나혜석은 상당한 기간 동안 유럽에 체류하였으나 생활인으로서가 아니라 관광자로서 살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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