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5장 여행자의 시선과 심상 지리
  • 1. 계몽과 근대화 욕망으로서의 여행
  • 근대적 의미의 ‘여행’을 권하다, 계몽과 지리학
김희정

최남선은 ‘쾌소년세계주유시보(快少年世界周遊時報)’에서 “여행은 진정한 지식의 대근원”이라고 하고, ‘여행하는 인간’ 즉, 탐험가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등 여행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조선을 짊어지고 나아갈 소년들에게 ‘여행’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이도록 당부하고 있다.

다만 얼마 동안 쇠강(衰降)하였던 여행성(旅行誠)을 갱기(更起)케 하야 그저 우리 소년만이라도 좀 활발하고 좀 쾌활하여 능히 남아사방(男兒四方)의 지(志)를 디딜 만한 사람되기를 권하고자 함이라. 나는 별로 여행의 덕을 송(頌)하지도 아니할 것이오 여행의 이(利)를 설하지도 아니하오리다. 그러나 나보다 삐콘스필드가 “여행은 진정한 지식의 대근원이라.” 한 말 한마디를 전하오리다. 바라노니 소년이여 울적한 일이 있을 리도 없거니와 있으면 여행으로 풀고, 환희한 일이 있거든 여행으로 늘이고, 더욱 공부의 여가로써 여행에 허비하기를 마음 두시오. 여러분에게 진정한 지식을 줄 뿐 아니라 온갖 보배로운 것을 다 드리리이다.476)최남선(崔南善), 「쾌소년세계주유시보(快少年世界周遊時報)」, 『소년』 창간호, 1908.11,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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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철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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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1908년 자신이 창간한 잡지 『소년』 창간호부터 여행에 주목하고 이를 권하고 있음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최남선이 ‘여행’을 강조한 이유는 소년들을 계몽하고 교육시켜서 조선의 근대화를 고취시키는 데 여행이 꼭 필요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고대에 ‘흥국민(興國民)’으로 활약하였던 조선 민족이 오늘날 쇠약해진 이유도 “여행의 감퇴”와 “모험과 경난(經難)을 싫어함”에 있다고 보았다. 조선 사람들은 “미친놈이나 금강산 들어간다.”, “팔도강산 다 돌아다니고 말 못할 난봉일세.”, “자식 글은 가르치고 싶어도 구경 다니는 꼴 보기 싫어 그만 두겠다.”라고477)최남선, 「쾌소년세계주유시보」, 『소년』 창간호, 1908.11, 74∼75쪽. 하며 여행을 천시하고 있는데, 그 결과 조선이 오늘날처럼 쇠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지식”과 “온갖 보배로운 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수양과 산행’에서도 ‘여행’을 “인생 수양에 갖가지로 요긴한 효익(效益)을 구비한 것”으로 말하면서, 여행 하나로 “풍부한 경험과 박대한 지식과 구비한 훈련을 얻어 낼 수 있으니 이만한 훈련이 다시 어디 있겠냐.”며 ‘여행’의 유익함을 강조하고 있다.478)최남선, 「수양과 산행」, 『청춘(靑春)』 9, 1917.7, 5∼6쪽. 실제로 최남선은 경부선 철도 노선을 중심으로 명승고적을 노래한 ‘경부 철도가(京釜鐵道歌)’나,479)최남선, 『경부 철도가』, 신문관, 1908.3.20. 세계 각국의 사정과 문화를 노래한 ‘세계 일주가(世界一周歌)’,480)최남선, 「세계 일주가」, 『청춘』 1호, 1914.10. 백두산, 두만강을 출발하여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산맥, 하천, 평야 등의 자연 풍경과 유적지 등을 노래한 ‘조선 유람가(朝鮮遊覽歌)’와 ‘조선 유람 별곡(朝鮮遊覽別曲)’481)「조선 유람가」는 1928년 6월 1일부터 10일까지 10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하였고, 단행본으로는 광복 후 1947년 8월에 동명사판으로 간행되었다. 신문에는 71절까지만 실렸는데, 단행본을 출판할 때에 1절을 삭제하고 10절을 더하여 80절에 따로 ‘별곡’ 20절을 추가하였으며, 내용에도 약간의 수정을 더했다(최남선, 『육당 최남선 전집』 6권, 현암사, 1973, 386쪽 참조). 등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창가(唱歌)도 많이 창작하였다.

그러면 최남선은 왜 ‘여행’에 이토록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을까? 그 배경으로 근대 지리학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지리학은 19세기에 와서 증기선, 철도, 비행기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과 과학적 조사 방법의 발전, 식민지 를 효과적으로 경영하기 위한 필요 등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즉, 지리학은 제국(帝國)을 경영하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였고, 여행의 권유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한 근대 사회로의 필수 조건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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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모양에 비유한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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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모양에 비유한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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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활동의 모든 현상을 지역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인 지리학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소개되고 중요성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근대 계몽기에 이르러서이다. 구한말 개화기에 지리에 관한 글을 쓴 사람은 많았지만, 대부분 비전문가로 단편적인 활동에 그쳤던 점에 비해482)권혁재, 「개화기와 일제시대의 지리학과 지리 교육」, 『한국 교육사 연구의 새 방향』, 집문당, 1989, 250쪽. 최남선은 지속적으로 지리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지리학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은 일본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고등 사범부에 입학하여 전공으로 역사 지리과(歷史地理科)를 선택하였다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지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최남선의 태도는 자신이 창간한 잡지 『소년』의 지면 대부분을 지리에 관한 글로 채운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면 ‘봉길이 지리 공부’, ‘해상 대한사(海上大韓史)’, ‘우리가 뇌생(賴生)하는 지구성(地球星)’ 등을 연재하여 지도, 해상, 지구 등 천문과 지리에 대한 지식을 소개하였고, 『로빈슨 표류기』나 『거인국 표류기(걸리버 여행기)』 등의 모 험심을 길러 주는 외국의 여행 소설도 번역하여 실었다.

최남선이 지리학을 소개한 목적은 교육을 통해 근대적 세계관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국난(國難)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 ‘세계적 지식’이 필요함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최남선은 지리학이야말로 애국 계몽 운동(愛國啓蒙運動)의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세계적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여행’은 “풍부한 경험과 박대한 지식과 구비한 훈련”을 얻을 수 있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훌륭한 기회이며, 이 여행을 통해 ‘나’는 비로소 타자, 즉 근대화된 서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여행을 통해 얻게 되는 타자 인식은 자아 인식을 유도하고, 조선의 근대화 열망에 자극을 주는 중요한 기회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최남선이 여행을 권면한 까닭은 결국 조선 사회의 계몽과 근대를 향한 교육적 필요로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최남선의 지리적 교양과 국가 의식은 그의 문학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최남선은 『소년』 창간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싣고 있는데, 이 시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최초의 신체시라는 점에서 한국 근대시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이 작품은 모두 6연(聯)에 각 연이 7행(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형식 면에서도 삼사조(三四調)가 기본이던 옛 시의 형식을 깨트리고 칠오조(七五調) 내지 삼사오조(三四五調)의 새로운 형식으로 창작되었다. 다음은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첫머리이다.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린다, 부슨다, 문허 버린다

태산(泰山)갓흔 놉흔뫼, 딥턔갓흔 바위ㅅ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디 하면서

린다, 부슨다, 문허 바린다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483)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소년』 창간호, 1908.11, 2쪽.

이 시는 ‘바다’를 의인화하여 세상과 소년들을 향해 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바다’의 남성적 어조와 의성어의 사용은 바다 스스로가 지닌 큰 힘의 위용을 나타내며, 기존의 권력과 권위를 차례로 부정한다. 바다가 파괴하고자 하는 것들은 ‘태산 같은 높은 메, 집채 같은 바윗돌’,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력을 부리던 자’, ‘좁쌀 같은 작은 섬 손 뼘만 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는 자’ 등으로 표현되며, ‘바다’의 위력 앞에 선 이들은 한갓 힘없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 부정되지 않는 것은 오직 ‘하늘’과 ‘소년’, 이 둘뿐이다. ‘하늘’은 바다의 분신, 즉 바다와 같은 존재를 의미하며,484)김용직·박철희 편, 『한국 현대시 작품론』, 도서 출판 문장, 1981.8, 55쪽. ‘소년’은 ‘바다’와 뜻을 함께하여 새로운 조선 사회를 건설해 나갈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창간한 최초의 잡지의 이름을 『소년』이라고 붙인 점이나, 창간호에 소년의 훈도(訓導)를 창간 목적으로 하면서 “우리 대한을 소년의 나라로 하라”고 한 점을 보아도 그가 ‘소년’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소년』 창간호를 보면 그가 기대하는 소년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금(今)에 아제국(我帝國)은 우리 소년의 지력(智力)을 자(資)하야 아국(我國) 역사에 대광채(大光彩)를 첨(添)하고 세계 문화에 대공헌(大貢獻)을 위(爲)코뎌 하나니 그 임(任)은 중(重)하고 그 책(責)은 대(大)한디라. 본지(本誌)는 차책임(此責任)을 극당(克當)할 만한 활동적 진취적 발명적 대국민을 양성하기 위하야 출래(出來)한 명성(明星)이라. 신대한(新大韓)의 소년은 수예(須曳)라도 가리(可離)치 못할 디라.485)최남선, 『소년』 창간호, 1908.11, 표지.

최남선이 생각하고 있던 ‘소년’이란 조선 역사에 광채를 발하고 나아가 세계 문화에 공헌할 책임을 가진 자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을 계몽하고 선도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대양을 지휘하난 자는 무역을 지휘하고 세계의 무역을 지휘하난 자는 세계의 재보(財寶)를 지휘하나니 세계의 재화를 지휘함은 곳 세계 총체를 지휘함이오.”라고486)최남선, 「바다란 것은 이러한 것이오」, 『소년』 창간호, 1908.11, 37쪽.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세계를 지휘할 주체 역시 다름 아닌 소년인 것이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주제는 서구 문물의 도래와 더불어 소년의 시대적 각성 및 개화를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말하고 있는 주체가 ‘바다’라는 점이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뿐이 아니라 그의 초기 작품은 ‘바다’에 많이 집중되고 있는 만큼, ‘바다’의 이미지 또한 매우 중요한 함의를 담고 있다.

그는 ‘교남홍조(嶠南鴻爪)’에서, “우리 삼면이 바다가 둘린 대한 국민(大韓國民)-장차 이 바다로써 활동하는 무대를 삼으려 하는 신대한(新大韓) 소년은 공부도 바다에 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고, 유희도 바다에 구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487)최남선, 「교남홍조(嶠南鴻爪)」, 『육당 최남선 전집』 6, 현암사, 1973, 471쪽. 하면서, 소년이 해야 할 공부나 유희를 모두 ‘바다’에서 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최남선이 의미하는 ‘바다’는 어떠한 것일까?

바다는 가장 완비한 형식을 가진 백과사휘(百科事彙, Encyclopaedia)라. 그 속에는 과학도 있고 이학(理學)도 있고 문학도 있고 연극도 있을 뿐 아니라 물 하나로 말하여도 짠물도 있고 단물도 있으며 더운물도 있고 찬물도 있으면 산골 물도 있고 들 물도 있으며 동대륙 물도 있고 서대륙 물도 있어, 한번 떠들어 보면 없는 것이 없으며, 바다는 가장 진실한 재료로 이른 수양 비결이라. 자강불식(自彊不息)의 정신, 독립자존(獨立自存)의 기상, 청탁병탄(淸濁並呑)의 도량, 심활(深濶)한 흉차(胸次), 원대한 경륜(經綸), 홍원(弘遠)한 규모, 노동 역작(勞動力作), 향상 정진, 불편불비(不偏不比), 불교불오(不驕不傲), 용감 활발, 호장 쾌락(豪壯快樂) 등 온갖 덕성을 다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사행(事行)에 나타내니 바다는 입으로 말하는 자가 아니라, 일로 말하는 자요, 말로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몸으로 가르치는 자라 한 번 대하여 보면 큰 감화를 받지 아닐 이 없으리라. 이에 알괘라, 바다는 학술가, 수양가 할 것 없이 다 보아야 할지로다.488)최남선, 「교남홍조」, 『육당 최남선 전집』 6, 현암사, 471쪽.

여기에서 최남선은 바다를 “가장 완비한 형식을 가진 백과사휘” 즉 모든 학문을 다 아우르는 ‘백과사전’에 비유하고 있다. 또한 바다는 “수양의 비결”이기도 하며, “자강불식의 정신”이나 “독립자존의 기상”을 포함한 서구의 근대 과학과 근대정신(近代精神)에의 “향상 정진”, “용감 활발”, “호장 쾌락” 등의 온갖 덕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바다는 학술가나 수양가를 구분하지 말고 다 경험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남선이 “큰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넓은 것을 보고자 하는 자, 기운찬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끈기 있는 것을 보고자 하는 자는 가서 시원한 바다를 보아라.”고 권하는 이유는 바다가 “응당 너희들이 평일에 바라던 바보다 이상”을 줄 것이며, “크게 너희들의 협애(狹隘)한 소견과 미소(微小)한 기우(氣宇)를 깨우쳐 줄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최남선에게 ‘바다’는 좁은 울타리를 지키며 낡은 인습을 반추(反芻)하는 일과 반대되는 공간을 뜻하였으며, “하늘과 같이 넓게 트인 공간”이었다. 또한 ‘바다’나 ‘하늘’이 갖는 공간은 물리적인 넓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 통하는 길을 의미하였고, 나아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힘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즉, 최남선에게 있어서 ‘바다’는 우리 겨레의 새 국면 타개를 위해서 든든한 활동 무대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489)김용직·박철희 편, 앞의 책, 55∼56쪽.

최남선은 미래를 짊어지고 나아갈 소년들에게 조선뿐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도 통용될 만한 기대와 이상을 부여하고, 그를 위해 소년들을 교도하고 계몽하려 하였다. 과거의 좁은 세계관을 타파하고 그 이상을 세계로 향하여 진정한 지식과 보배로운 가치를 얻는 데 필요한 것은 세계 지리를 바탕으로 한 ‘여행’이었던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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