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5장 여행자의 시선과 심상 지리
  • 1. 계몽과 근대화 욕망으로서의 여행
  • 체제 순응과 근대화에의 욕망
김희정

1915년 9월 11일에 경성에서 조선 물산 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이후 ‘공진회’라 함)가 열렸다. 『매일신보(每日申報)』는 이번 공진회의 목적을 “시정 5년간 조선 산업의 진보를 전시하고 신구 시정(新舊施政)의 성적 여하를 비교 대조하여 생산품의 우열을 심사 고핵(審査考覈)하여 당업자(當業者)로 하여금 더욱 그 사업에 정려(精勵)하고 근검 역행(勤儉力行)으로써 시설의 개량을 도모하고 산액(産額)의 증진에 노력하여 조선의 부력(富力)을 배양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490)『매일신보』 1915년 7월 13일자. 그러나 실제 목적은 1907년에 개최하였다가 실패한 경성 박람회(京城博覽會)를 만회하려는 의도와491)朝鮮總督府, 『施政5年紀念朝鮮物産共進會報告書』 第1卷, 1915, 總說. 산업을 통한 조선인 동화, 일본인의 조선 투자 유치, 5년간의 조선 지배를 미화하여 일본 통치의 정당화를 꾀하려는 데 있었다. 즉, 일제는 시정 개정(施政改正) 노력의 성과물을 구체적으로 가시화하여 직접 눈으로 확인케 함으로써 조선 민중을 현란한 근대 문명으로 압도하고, 그 결과 근대화에 뒤떨어진 조선의 현실을 인식시켜 일본의 조선 통치를 옹호하려 하였던 것이다.492)김태웅, 「1915년 경성부 물산 공진회와 일제의 정치 선전」, 『서울학 연구』 18, 서울 시립 대학교 서울학 연구소, 2002, 141쪽. 따라서 조선 총독부는 공진회의 성공을 위해 『경성일보(京城日報)』, 『매일신보』, 『조선휘보(朝鮮彙報)』, 『신문계(新文界)』 같은 언론 매체나 잡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선전하였다.

특히, 조선 총독부는 출품의 대대적인 수집과 관람객 유치에 가장 큰 역점을 두었다. 각 지방 행정 조직과 민간 협찬회, 사회단체 등을 동원하여 조선인의 출품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으며, 쉽게 관람할 수 있도록 각종 편의 시설 제공 및 기차 운임의 할인 혜택 등을 마련하여 관람객 유치에 힘을 기울였다. 실제로 1915년 6월에는 공진회 관람 단체(共進會觀覽團體)가 조직되었으며,493)『매일신보』 1915년 6월 23일자. 9월 2일에는 각 도(各道) 각 군(各郡)의 공진회 관람단이 각각 출발하였다.494)『매일신보』 1915년 9월 2일자. 그로 인해 공진회를 보러 전국 각지에서 경성으로 상경하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공진회 개최 기간 동안 동원된 총 관람객 수는 무려 116만 6383명에 달하였다.495)『매일신보』 1915년 12월 1일자.

확대보기
공진회 보도 화보
공진회 보도 화보
팝업창 닫기

공진회를 소재로 한 소설에 백대진(白大鎭, 1892∼1967)의 『애아(愛兒)의 출발』이 있다. 공진회가 조선 전국에 있는 관광객 유치에 역점을 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진회를 선전하기 위해 쓴 소설은 대부분 지방에서 경성으로 상경을 하는 구조, 즉 ‘여행’이라는 성격을 띤 경우가 자주 보인다. 『애아의 출발』 역시 공진회 구경을 떠나려는 강원도 관람단 단장인 아버지와 아들 일웅이 나눈 대화를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다. 아버지는 아들을 경성에 데리고 가서 공진회를 보여 주고, ‘활지식(活知識)’, ‘활교훈(活敎訓)’을 얻게 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지금까지 배운 지식은 ‘실제의 학문’도 ‘실제의 지식’도 아니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확대보기
공진회 관람객
공진회 관람객
팝업창 닫기

이번 공진회엔 조선(朝鮮) 13도(十三道)의 물산을 각 사람으로 하여곰 출품케 하야 진열하고, 이 외(外)에도 조선에 대한 각종 사업이며, 기타(其他) 우리 조선 고유의 문물제도(文物制度)까지, 유루(遺漏)함이 업시, 각 방면으로부터 수집(蒐集)하야 진열해 놓고, 우리로 하여곰 보게 하야 생산 사업이며, 기타 국리민복(國利民福)될 사업을 장려하기 위하야 개최하는 회이다. 늬가 아는지 모르겟다마는 우리 조선이 소위 이십세기 문명에 대하야는 낙오자가 되엿다마는 우리 조선 재래의 문물이 찬연구비(燦然具備)함은 이 공진회로 말미암아 비로소 알 수 잇스리라. …… 공진회는 백사(百事), 만사(萬事)가, 우리 처세상(處世上), 혹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道)를 버셔남이 없이, 가장 신성하며, 또는 가장 가치 있고, 실익이 있는 생산물이며, 징고관(徵古館)인즉, 너는 아모조록, 이러한 주의와 감상을 가지고, 구경을 함이 좃컷다. 내가, 지금까지 배운 것은, 실제의 학문이 안이며 실제의 지식이 안인즉, 이때를 일으면, 또다시, 우리 대(代)에 볼난지도 모르겟다.496)백대진(白大鎭), 「애아(愛兒)의 출발」, 『신문계(新文界)』 3권 9호, 1915.9, 104∼105쪽.

아버지는 공진회를 통해 조선인은 자신들의 문물이 찬연구비함을 알게 될 것이며, 그와 동시에 공진회는 조선의 생산 사업과 기타 국리민복이 될 사업을 장려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서 조선의 낙오된 상태를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진회는 “가장 신성하며, 또는 가장 가치 있고, 실익이 있는 생산물”이었고,497)백대진, 「애아의 출발」, 『신문계』 3권 9호, 1915.9, 105쪽. 조선인으로서 적극 참여해야 할 사업이었다.

백대진은 『애아의 출발』 이외에도 『공진회 관람기』,498)백대진, 「공진회 관람기」, 『신문계』 3권 10호, 1915.10. 『공진회 일기』499)백대진, 「공진회 일기」, 『신문계』 3권 10호, 1915.10. 등을 써서 공진회 개최의 필요성과 효과를 선전하였는데, 이 소설은 그러한 작가의 주장을 그대로 아버지의 입을 통해 토해 내고 있다. 즉, 아버지는 작가의 의도를 대변하는 인물인 셈이다. 백대진은 『신문계』, 『반도 시론(半島時論)』, 『매일신보』의 기자, 간사, 무명회(無名會) 상임 간사, 나아가서는 조선 협회 이사, 『신천지(新天地)』의 주간으로 활동한 인물로, 일본이 조선을 개화 발전시켜 잘 살게 해 줄 수 있다고 믿었던 문명개화 지상론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애아의 출발』은 문명개화론자인 백대진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에 순응하고 협력하는 소설로 분류할 수 있다.

공진회를 소재로 한 또 다른 소설로 1917년 『신문계』에 발표된 벽종 거사(碧種居士)의 『경성 유람기(京城遊覽記)』를500)벽종 거사(碧鍾居士), 「경성 유람기(京城遊覽記)」, 『신문계』 5권 2호, 1917.2. 들 수 있다. 이 소설은 공진회 관람을 위해 경성에 올라 온 이 승지라는 인물을 통해 당시 문명화되어 가는 경성의 모습과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조선인이 어떻게 대응해 나가는지를 ‘여행기’라는 형식으로 그려 내고 있다.

『경성 유람기』는 공진회를 관람하려고 경성으로 가는 조선인 세 명(이 승지, 김종성, 어성룡)의 이야기를 대화 형식으로 풀어 낸 소설로, 첫 장면은 경원선 기차 안으로 이 승지와 김종성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이 승지는 “잠영거족(簪纓巨族)의 자제”로 “공명(功名)이 일신(一身)을 영화(榮華)롭게” 하고, “가산(家産)이 천석(千石)의 부요(富饒)”하였던 인물로,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시국(時局)이 변한 이후 “무용(無用)의 인물”이 되어 함경도 금성으로 내려가 사는 노인이다. 이 승지의 맞은편에 앉은, 양복을 입은 청년 김종성은 본래 이 승지의 가동(家僮)으로 노예의 신분이었지만, 이 승지가 낙향 한 후 동경에서 고학생으로 노력을 기울여 경제학과를 졸업하였고 이제 함흥군 금융 조합의 지배인이 되어 경성으로 출장을 가는 길이다. 어성룡은 장래 동경에 유학하여 대발명가(大發明家)가 되어 문명의 이기(利器)를 많이 발명하기를 소원하는 보통학교 학생이다. 이 승지와 김종성은 오래간만의 회포를 풀면서 대화를 나눈다. 이 둘은 청량리역에서 내린 후 전차를 타고 동대문과 종로를 거쳐 종각을 구경하고 숙소에 들어간다.

확대보기
남대문
남대문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종로
종로
팝업창 닫기

두 사람은 경성 구경을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는데, 이야기의 주제가 실로 다양하다. 기차를 발명한 스티븐슨의 생애부터 전기의 발견이 사람들의 생활을 유용하게 바꾸어 놓았다는 점, 경성 성곽의 파괴 및 보존, 서화계(書畵界)의 현황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화젯거리가 대화 내용으로 등장한다. 또한 어성룡이 숙박하는 중흥 여관(中興旅館)에 함께 묵으면서 이 승지는 어성룡에게 경성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면서 변화된 경성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경성의 학교, 병원, 치과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고, 유명한 건축물이나 관청의 위치를 소개하기도 하며, 경성의 건축물 현황에 대한 것까지 언급된다.

이튿날은 김종성과 남대문 시장, 박문 서관, 파고다 공원에 들르고 저녁에는 우미관(優美館)에서 활동사진을 구경한 후 명월관(明月館)에서 식사 를 한다. 그 과정에서는 영화와 연극 공연, 전기와 수도 시설의 개량, 수도와 위생, 기생의 조직 변화와 유망한 실업가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에 오른다. 셋째 날은 어성룡과 함께 창경궁 동물원을 구경하고 동물의 산지와 성질, 생활 상태를 살피며, 박물관에서는 옛 조선인의 미술과 공업을 탄복하고 식물원으로 가서 온실 속에서 배양한 세계의 각양각색의 꽃을 구경한다. 마지막 날에는 이왕직 미술 공장(李王職美術工場), 동아 연초 주식회사(東亞煙草株式會社)를 시찰하고 농잠구(農蠶具) 판매소에서 농사 개량이 급선무임을 깨닫는다. 경성 상회(京城商會)에서 주단(綢緞)을 바꾸고 화장품을 사서 귀가할 준비를 한다. 그리고 이 승지도 임옥(林屋) 양복점에서 양복을 맞추고 김학순(金學淳) 양화점에서 구두를 주문하고 이번 봄에는 손자를 경성에 유학시키기를 결심하는 것으로 『경성 유람기』는 끝을 맺는다.

확대보기
경성 우편국
경성 우편국
팝업창 닫기

20년 만에 경성에 온 이 승지가 본 경성은 “모두 생면목(生面目)”이다. 동대문에 도착하여 좌우 성벽을 헐어 광활한 도로를 개통하고 마차, 자동차, 인력거가 복잡하게 왕래하는 광경을 본 이 승지는 “실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며 감탄하고, “정신이 황홀”해 한다. 그러다가 “사 면을 두리번두리번 도라보다가 놀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성을 헐고 길을 낸 것을 보고 성문이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김종성은 “금일같이 문명한 시대에는 무용(無用)의 성곽을 둘 필요가 없으니 차라리 평탄한 도로를 열어 인마(人馬)의 복잡한 폐를 제하는 것이 좋”음을 주장한다. 일본이 조선 왕조 서울의 중심부를 제멋대로 마구 재단하는 모습을 이 승지는 단지 놀란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이 승지는 구시대의 상징이자 시대에 뒤떨어진 “무용의 인물”로서 신문물에 탄복하는 노인으로 그려지고 있는, 반면 김종성(金鐘聲)은 이름 그대로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종소리처럼 근대화의 물결에 탄 사람으로, 이전의 신분 제도에서 해방되어 실업계에 진출한 청년이다. 문명개화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이 두 사람의 신분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승지는 김종성의 유식함을 보고 감탄하고, 김종성은 이 승지에게 설명을 해주는 위치로 변화된 것이다. 이 두 사람 사이의 전도된 관계는 신문물을 배우면 하인이 양반보다 더욱 유능해질 수 있는 시대임을 암시한다. 예전의 신분 질서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관계이다.

그러면 『경성 유람기』를 쓴 의도는 무엇이며, 주제는 무엇일까? 결국 이러한 문제는 주인공 이 승지가 경성을 유람한 후에 무엇을 느끼고 결심하는가와 관계가 깊을 것이다. 이 승지가 경성 유람을 통해서 느낀 것은 이미 조선은 자신이 살아왔던 옛 조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새로운 시대감각(時代感覺)이 필요하다는 것과 다음 세대가 나가야 할 길은 바로 신학문을 배우고 조선의 문명개화에 발맞추어 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 이 승지는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낸다. 하나는 손자를 경성에 유학시켜 근대화를 배우게 한다는 것이며,501)벽종 거사, 「경성 유람기」, 『신문계』 5권 2호, 1917.2, 51쪽. 또 하나는 자신의 손녀를 총명하고 장래 유망한 어성룡에게 시집보내는 것이다. 결국 이 승지가 선택한 미래는 자손들에게 근대화·문명화의 환경을 제공하고 자신 또한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필사적으로 따라가는 것이었다.

결국 『경성 유람기』는 공진회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차 안이라는 낯선 공간이 등장한 것이나, 이 승지가 경험하게 되는 ‘유람’의 절차가 『신문계』의 조선 물산 공진회 기념호(1915년 9월)에 실린 ‘경성의 현상’에서 소개하는 정보나 항목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 벽종 거사가 사설이나 논설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해 나갔던 점을 비추어 볼 때, 『경성 유람기』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하여 저술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가 『경성 유람기』가 게재된 『신문계』의 중요한 필진이었던 점을 보면 『신문계』의 사상적 노선도 간과(看過)할 수 없다.502)권보드래, 「1910년대 ‘신문(新文)’의 구상과 『경성 유람기』」, 『서울학 연구』 18, 서울 시립 대학교 서울학 연구소, 2002, 122쪽.

『신문계』는 조선 총독부의 조선 통치 정책을 옹호하던 잡지 중의 하나로, 1913년 4월부터 1917년 3월까지 총 48권을 발행하다가 이름을 『반도 시론』으로 바꾸어 1919년 4월까지 모두 25권을 낸 잡지이다. 일본인 다케우치(竹內錄之助)가 발행 책임을 맡았고, 일선동화(日鮮同化)의 입장에서 친일적 색채가 뚜렷하였다. 필진으로는 백대진, 최영년(崔永年), 최찬식(崔讚植), 강매(姜邁), 벽종 거사 등이 있었다. 벽종 거사는 『신문계』의 중요한 필진으로, 『신문계』에 ‘세(歲)의 신(新)을 영(迎)하는 오인(吾人)은 필(必)히 오인(吾人)의 신(新)을 구하라’,503)벽종 거사 , 「세(歲)의 신(新)을 영(迎)하는 오인(吾人)은 필(必)히 오인(吾人)의 신(新)을 구하라」, 『신문계』 3권 1호, 1915.1 ‘가정의 모범을 작(作)할 가정박(家庭博)’,504)벽종 거사, 「가정의 모범을 작(作)할 가정박(家庭博)」, 『신문계』 3권 10호, 1915.10. ‘기차 발명자 스티븐슨의 소년시대’,505)벽종 거사, 「기차 발명자 스티븐슨의 소년시대」, 『신문계』 4권 3호, 1916.3. ‘광물질 비료는 하자(何者)’,506)벽종 거사, 「광물질 비료는 하자(何者)」, 『신문계』 4권 10호, 1916.10. ‘식물질 비료는 하자(何者)’,507)벽종 거사, 「식물질 비료는 하자」, 『신문계』 4권 11호, 1916.11. ‘자연육추(自然育雛) 급(及) 인공육추(人工育雛)’508)벽종 거사, 「자연육추 급 인공육추(自然育雛及人工育雛)」, 『신문계』 5권 1호, 1917.1. 등 자연 과학과 실업에 대한 글을 많이 발표하였다.

확대보기
『신문계』 광고
『신문계』 광고
팝업창 닫기

『신문계』에서 말하는 신문계(新文界)란 “야매(野昧)한 사회를 일변하여 문명한 세계가 됨”을 뜻하는 것으로, “학계 정도를 일변하여 물리 화학과 격치(格致) 경제와 천문 지문(地文)의 필요한 학술로 사해동포(四海同胞)를 교육하며 오주 종족(五洲種族)을 함영(涵泳)하여 일신월신(日新月新)에 진보케하면 신문계에 안녕행복(安寧幸福)이 있을 것” 이라고 주장한다.509)「신문계론(新文界論)」, 『신문계』 1권 1호, 1913.4, 5쪽. 『신문계』는 처음에는 한학(漢學)을 부정하고 실업(實業)을 주장하였지만, 민족주의와 그 직접적 표출인 무력의 증강이 힘을 잃고 난 후부터는 논조(論調)를 바꾸어 실업 진흥과 한학 부흥의 기류가 기묘하게 어우러진 노선을 폈으며, 벽종 거사는 『경성 유람기』의 이 승지를 통해, 바로 이러한 신문계의 새로운 노선, 즉 한학과 실업의 융합을 그려 나갔다.510)이에 대한 사항은 권보드래, 앞의 글, 115∼116쪽 참조.

그래서 1910년대에 제시된 ‘신문(新文)’의 한 축이 유학 전통이요 다른 한 축이 실업 정신이었다면, 이 승지가 대표하는 유학이라는 축은 김종성, 어성룡이 대표하는 실업이라는 축에게 일방적으로 제압당하고 있으며, 경성 유람 이후 ‘근대화에 대한 욕망’으로 극대화된 이 승지의 선택이야말로 조선 총독부가 공진회를 통해서 얻고자 하였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었다고 보기도 한다.511)권보드래, 앞의 글, 130쪽. 여하튼 벽종 거사는 이 승지를 통해서 식민지 체제에 순응적이고 협력하는 인간상을 만들어 제시한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