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5장 여행자의 시선과 심상 지리
  • 2. 내면 들여다보기
  • 고뇌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내면 읽기
김희정

『표본실의 청개구리』나 『암야』 같은 염상섭(廉想涉, 1897∼1963)의 초기 소설에는 ‘여로형(旅路型)’ 구조를 갖는 것이 많은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만세전(萬歲前)』일 것이다.

『만세전』은 동경 W 대학 문과에 재학 중인 조선인 유학생 이인화(李寅華)가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동경에서 경성으로 귀국하여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다시 일본으로 떠난다는 것을 전체적인 구성으로 하고 있는데, 이 소설의 여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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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캐리커처
염상섭 캐리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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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 하숙집—W 대학 H 교수실—스카다니야(塚谷屋)—이발소—동경당—M 헌문전—×군의 집—하숙집—동경역—나고야(名古屋)—신호역 A 카페, C 음악 학교 기숙사, 여관—시모노세키(下關) 연락선—부산 선창—김천역—심천 정거장—대전역 플랫폼—시흥—용산역—남대문—집—동경

이 여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만세전』에서 이인화가 아내를 만나보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경성에 머무른 기간은 아주 짧은 데 비해, 경성에 도착하기까지의 여로는 매우 길다. 즉, 동경 하숙집을 떠나 경성에 있는 집에 도착하기까지 만 나흘이 채 안 되는 여정을 서술하는 데에만 1∼5장(약 148쪽)에 해당하는 지면을 할애한 반면, 경성 집에 머문 약 보름 동안은 불과 45쪽으로, 소설 전체 분량의 3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렇게 많은 지면을 여정에 할애하였을까? 그 이유는 동경에서 경성까지의 여로를 서술하는 데에 작가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염상섭은 ‘지체되는 여행’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던 것이다.531)박상준, 「지속과 변화의 변증법」, 『1920년대 문학과 염상섭』, 역락, 2000, 170∼171쪽.

『만세전』은 1920년대 유학생들이 쓴 조선-동경 간 남행 열차의 여로 를 다룬 기행문이나 조선-만주 간 북행 열차의 여로에서 볼 수 있는 기행문과 상당히 다르다. 즉, 북행 열차의 여로를 보여 주는 기행문은 같은 동포를 보는 시각이 ‘나도 그 중의 하나’라는 동질감이 우세한 데에 비해, 남행 열차의 여로를 보여 주는 기행문은 일본 유학생들의 정체성이나 내면이 삭제되거나 조선 동포에 대한 수치심, 부끄러움 등으로 나타나며, 이 수치스럽고 부정하고 싶은 식민지의 가난한 주변인이라는 자아 정체성을 은폐하고픈 욕망을 전면에 드러낸다. 그러나 『만세전』은 남행 열차의 기행문에는 없는 서사와 관찰을 통해 동경-조선 간 기행문에서 애써 모른척 했던 ‘대상’이 면밀하게 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일본 유학생이 쓴 기행문과 비슷하게 평가하는 시각은 재고되어야 한다.532)차혜영, 「1920년대 해외 기행문을 통해 본 식민지 근대의 내면 형성 경로」, 『국어 국문학』 137, 국어 국문학회, 2004, 425∼426쪽. 다시 말해 『만세전』에는 동경에서 경성으로 가는 여로에서 타자에 대한 깊은 사고와 내면 성찰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즉, ‘지체되는 여행’은 주인공을 둘러싼 식민지하 조선의 현실과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깨달아 가는 과정에서 작가가 선택한 필연적 구조이고, 이를 통해 주인공의 내면을 면밀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염상섭이 ‘지체되는 여행’을 통해서 독자에게 보여 주고자 의도한 것, 즉, 주인공 이인화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당시 조선 유학생의 심상 지리(心象地理)는 어떤 것이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 목욕탕에서 우연히 엿들은 일본인들의 대화에서 촉발된 이인화의 자기 인식부터 살펴보자. 한 일본인 남자가 조선에 처음 가는 촌뜨기 일본인에게 돈을 쉽게 버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조선인을 ‘대만(臺灣)의 생번(生蕃)’보다 조금 나은 취급을 하지만, ‘요보’라533)‘요보’란 일반적으로 일본인들의 조선인에 대한 경멸, 조롱, 모욕의 의미를 담은 용어로 알려져 있는데, 윤소영에 의하면 ‘요보’는 조선인뿐 아니라, 중국인, 혹은 총독부의 방만한 근무 상태를 비판할 때, 그리고 재경 일본인들이 ‘문명적’이지 않을 때에도 사용하였다고 한다(윤소영, 「일본어 잡지 『조선 급 만주』에 나타난 1910년대 경성」, 『지방사와 지방 문화』 제9권 1호, 학연 문화사, 2006.5, 189쪽 참고). 멸시하는 교활한 일본인이다. 그가 자랑하듯 소개하는 쉽게 돈 버는 방법이란 조선인 노동자들을 속여 일본 각지의 공장과 광산으로 팔아넘기는 노동자 모집원이라는 직업이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사업이라고 자랑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인화는 ‘불쌍한 조선 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 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과 광산으로 몸이 팔리어 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부랑배의 술중(術中)에 빠져서 속아 넘어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조선의 현실 사회에 대해 무감각하였던 자신의 모습에 회의와 불안을 느낀다. 또한 조선인의 “일 년 열두 달 죽도록 농사를 지어야 반년짝은 시래기로 목숨을 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까……”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하는 의심이 날 만큼 나의 귀가 번쩍하리만큼” 조선의 현실을 몰랐으며, “설마 그렇게까지 소작인의 생활이 참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을 만큼 현실 감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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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쿠마루(德壽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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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화는 이지적이고 타산적이면서도 품은 이상이 없고, 감상적·유탕적 기분이 농후한 문학 지망생으로 일본에 있을 때에는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숙집 식모나 여자 주인과 농담을 주고받거나, 단골 카페에 가면 카페 종업원인 시즈코(靜子)나 P자를 불러내어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을 여유까지 있다. 그러나 연락선을 타고 그를 따라붙는 형사를 의식하면서 서서히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느끼기 시작하며, 목욕탕에서 하는 일본인의 대화를 들으면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계에 서 있는 자아(自我)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스물 두셋쯤 된 책상 도련님인 나로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생이 어떠하니 인간성이 어떠하니 사회가 어떠하니 하여야 다만 심심파적으로 하는 탁상의 공론에 불과한 것은 물론이다. 아버지나 조상의 덕택으로 글자나 얻어 배웠거나 소설권이나 들춰 보았다고 인생이니 자연이니 시니 소설이니 한 대야 결국은 배가 불러서 투정질하는 수작이요, 실인생, 실사회의 이면의 이면, 진상의 진상과는 얼마만 한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보면 내가 지금 하는 것, 이로부터 하려는 일이 결국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534)염상섭, 『만세전』, 문학 사상사, 2004, 60쪽.

일본인의 대화에 충격을 받은 그는 자신을 ‘책상 도련님’이라 자각한다. 인생이니 자연이니 시니 소설이니 하고 책 안의 인생을 들춰 보며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공상과 값싼 로맨티시즘”이라고 생각하며 도리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는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팔려가는 식민지 현실에 놀라고, 더 나아가 자신이 지망하는 문학 공부가 실제 인생이나 현실 사회와 너무 동떨어져 있음을 알고 의문과 불안을 느낀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자기 고백이 흘러나온다.

사실 말이지. 나는 그 소위 우국지사는 아니나 자기가 망국 백성이라는 것은 어느 때나 잊지 않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망국 백성이 된 지 벌써 근 십 년 동안 이제는 무관심하도록 주위가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었다.535)염상섭, 『만세전』, 문학 사상사, 2004, 54쪽.

이러한 현실 인식은 일본에 있을 때에는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며, 일본에서 경성으로 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비현실적이라고까지 생각될 정도로 빈약한 주인공의 현실 인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중학교 때부터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어와 일본 생활에 익숙하며, 아직 학생이라는 한정된 환경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한일 병합부터 약 9년가량 지나 식민지라는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조선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시모노세키에서 형사에게 휴대품을 수색당하고, 부산에 도착한 후 형사에 이끌려 파출소로 들어갔을 때에는 자신이 비겁하다고 느낄 만큼 “막연한 공포와 불안에 말이 어눌해”지고, “말씨도 자연 곱살스러워지고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졌”으며, 식민지 백성이라는 인식이 더욱 강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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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잔교
부산항 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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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이인화의 시선은 일본화되어 가는 부산 거리와 조선인에게로 옮아간다. 부산에 도착한 이인화는 정거장에 짐을 맡겨 두고 부산 거리로 나서는데, 주변이 온통 일본인 거리로 바뀐 모습에 놀란다. 조선인의 단층집은 점차 일본인의 이층집으로 변화하고, 온돌은 다다미로, 석유불은 전등불로, 군아(郡衙)는 헌병 주재소(憲兵駐在所)로, 주막과 술집은 유곽(遊廓)으로 바뀌었으며, 전등과 전차가 개통되고 요릿집이 늘어났다. 어느 조선인이 “우리에겐 이젠 이층집도 꽤 늘고, 양옥도 몇 채 생겼다네. 아닌 게 아니라 여기엔 다다미가 편리해, 위생에도 매우 좋은 거야.”라고 하는 말을 듣 고, 이인화는 “누구의 이층이요, 누구를 위한 위생이냐.”며 비판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겉모습은 화려하며 번화해졌지만, 신문 대금, 전등값, 담뱃값, 찻값 등으로 여차여차하는 동안에 조선 사람의 집문서는 식산은행(殖産銀行)의 금고로 들어가서 새로운 주인을 만난다. 몇 백 년 동안 조상이 끈기 있는 노력으로 조금씩 다져 놓은 조선 땅을 다른 사람의 손에 내던지고 하나 둘씩 쫓겨 세간을 꾸려서 북으로 북으로 떠나가는 조선인의 모습은 가련한 “패자의 떼”이고 그 뒷모습에서 “쓸쓸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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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북항의 매축지
부산 북항의 매축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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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인화가 더욱 안타깝게 여기는 사실은 거리의 변화가 아니라 조선인의 바뀐 사고방식(思考方式)이다. 이인화는 부산의 한 국수집에서 아버지가 일본인이고 어머니가 조선인인 여자 아이를 만난다. 이 혼혈인 여자 아이는 “조선말보다는 일본말을 하고, 조선 옷보다는 일본 옷을 입”는다. 딸이면서도 조선 사람인 어머니를 모시기보다는 7, 8년 전에 헤어진 일본인 아버지를 찾아가겠다고 한다. 이를 본 이인화는 여자아이가 아버지를 찾아나서는 이유가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에 있다기보다 일본인 아버지 에게서 얻을 수 있는 “어떠한 이해관계”나 “타산”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라 파악한다. 여자 아이가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유가 조선이 일본보다 뒤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판단한 이인화는 “조선이 일본만큼 좋았으면 조선 사람인 것이 불명예스러운 것은 없을 테고, 굳이 아버지를 찾아가려는 생각도 안 하겠지?”라고 여자 아이에게 묻는다. 아버지를 미끼로 팔아먹는 험악한 일이 많으므로, “조선 사람에게 시집가는 것이 어떠냐?”고 권하지만, 여자 아이는 “조선 사람은 난 싫어요. 돈 아니라 금을 주어도 싫어요.”라고 하면서 강경하게 외면한다. 이인화는 일본인 거리로 바뀌어 가는 부산의 거리와 조선인이 되기를 거부하고 일본인이 되고자 하는 혼혈인 여자 아이를 보면서 씁쓸함을 느끼지만, 외국인이 조선인을 경멸하는 것이나, 같은 조선인이라도 조선을 경원시(敬遠視)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조선 사람은 날만 새면 자리 속에서부터 담배를 피워 문다.”거나 “아침부터 술집이 번창한다.”는 것, “겨우 입을 떼어 놓는 어린애가 엇먹는 말부터 배운다.”는 것, “주먹 없는 입씨름에 밤을 새고 이튿날 대낮에 야 일어난다.”는 것 등 조선인의 생활 습관 가운데 병폐로 간주하는 비판적인 인식에 동감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여자 아이를 불쌍하게 여기기보다는 “그 어미를 한층 더 가엾다고 생각”하는 이인화의 태도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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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 특급열차
경부선 특급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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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경성으로 가는 기차에 동승한 조선인 승객들을 바라보는 이인화의 시선과 심상은 어떻게 표현되는지 살펴보자. 이인화는 기차 안에서 갓쟁이를 만나고, 그에게 “머리를 왜 안 깎느냐?”고 묻는다. 갓 장수는 “머리만 깎고 일본어나 시대의 학문을 알지 못하면, 오히려 가는 데마다 시달리고 뺨 맞고 유치장 신세를 질 수 있다.”고 하면서, ‘요보’라고 천대를 받는 것은 그때뿐이니까 머리를 깎지 않고 차라리 천대받는 것이 낫다고 대답한다. 눈앞의 핍박을 면하기 위해서라면 무시와 천대를 받아도 상관없다고 하는 갓쟁이를 이인화는 비굴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은 비단 갓쟁이 한 사람에게 머물 뿐이 아니라 조선인, 조선 사회 전체로 확대된다. 조선 사람의 가장 유리한 생활 방도요, 현명한 처세술은 “공포, 경계, 미봉, 가식, 굴복, 도회, 비굴”이고, 이러한 생활 철학은 오늘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봉건적 성장과 관료 전제 밑에서 더께가 앉고 굳어 빠진 껍질”이며, 현재 조선의 생활은 “그 껍질 속으로 점점 더 파고들어 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한 조선인의 껍질은 그 모습을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낸다. 예를 들어, 조선인 헌병 보조원이 일본인 헌병보다 조선인을 더욱 가혹하고 무섭게 대하는 것이나, 조선인 역부(役夫)가 일본어를 써 가며 조선어를 못 들은 척하는 것 등이다. 이를 본 이인화는 “발길로 지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조선인의 비참한 생활은 더욱 심해져 간다. 대전역 플랫폼에서 보채는 아이를 업은 채 결박당한 조선 여자와 길을 잃을 것 같은 대구 기생을 목격하였는가 하면 나라를 짊어지고 나아갈 젊은 청년들의 얼굴은 “시든 배추 잎”처럼, “주눅이 들어서 멀거니 앉아 있”고, “빌붙는 듯한 천한 웃음”을 짓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정치적인 야망을 버리지 못하는 아버지와 그 주위를 맴돌며 처세하는 협잡꾼들을 바라보면서 복잡한 심정에서 소리치기도 한다. 이러한 조선의 현실을 바라보는 그는 한편으로 가엾고 처량한 생각을 하는 동시에, 소름 끼치도록 “분이 치밀어 오름”을 느낀다. 식민지로 인한 조선의 황폐함은 거리의 경관뿐 아니라, 조선인의 마음까지 황폐화시켜 삶의 목적도 상실하고 생기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조선을 ‘공동묘지(共同墓地)’로 은유화하는 데에까지 이른다.

나는 까닭 없이 처량한 생각이 가슴에 복받쳐 오르면서 한편으로는 무시무시한 공기에 몸이 떨린다. 젊은 사람들의 얼굴까지 시든 배추 잎 같고 주눅이 들어서 멀거니 않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빌붙는 듯한 천한 웃음이나 ‘헤에’ 하고 싱겁게 웃는 그 표정을 보면 가엾기도 하고 분이 치밀어 올라와서 소리라도 버럭 질렀으면 시원할 것 같다.

‘이게 산다는 꼴인가? 모두 뒈져 버려라!’ ……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 공동묘지다! 공동묘지 속에서 살면서 죽어서 공동묘지에 갈까봐 애가 말라 하는 갸륵한 백성들이다.536)염상섭, 『만세전』, 문학 사상사, 2004, 125∼126쪽.

이인화의 현실 인식은 ‘무덤’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무덤, 공동묘지, 죽음의 이미지는 이인화의 눈에 비친 식민지 조선의 참혹한 현실을 상징한다. 그러나 정작 조선인들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대표적인 예가 ‘공동묘지’에 대한 생각이 주인공과 형님을 비롯한 갓쟁이가 크게 다른 점이다. 형님과 공동묘지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는 아무 말도 못하던 그가 갓 장수와 이야기하며 공동묘지를 화제로 올렸을 때는 한참을 열을 내며 자기 속마음을 밝히고 있다.

부모를 생사장제(生事葬祭)에 예(禮)로써 받들어야 할 거야 말할 것 없지마는, 예로 하라는 것은 결국에 공경하는 마음이나 정성을 말하는 것 아니겠소? 그러니 공동묘지법이란 난 아직 내용도 모르지마는 그것은 별문제로 치고라도, 그 근본정신은 생각지 않고 부모나 선조의 산소치레를 해서 외화(外華)나 자랑하고, 음덕(陰德)이나 바란다는 것도 무슨 수작이란 것을 알아야 할 거 아니겠소. 지금 우리는 공동묘지 때문에 못 살게 되었소? 염통 밑에 쉬스는 줄은 모른다구 깝살릴 것 다 깝살리고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도 죽은 뒤에 파묻힐 곳부터 염려를 하고 앉았을 때인지. 너무도 얼빠진 늦둥이 수작이 아니오?537)염상섭, 『만세전』, 문학 사상사, 2004, 120쪽.

이인화는 부모나 선조의 산소를 통해 자신의 위신을 세우려는 조선인들이 무지한 것이며, 위선적이라고 답답함을 토로한다. 즉, 산 사람이 죽어 가는 현실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죽은 사람을 묻을 공동묘지법에 반대하는 조선인들의 가치관을 ‘겉치레’에 치우쳐 있다고 지적한다. 선조의 음덕을 바라는 마음도 결국은 선조나 부모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인한다고 비판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의 장례를 오일장(五日葬)으로 청주의 산소에 매장하자는 가족들의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사흘 만에 공동묘지에 매장한다.

『만세전』에서 보이는, 공동묘지 문제로 인한 조선인 사이의 갈등은 현 실적으로 닥친 문제이기도 했다. 조선 총독부는 1912년 ‘묘지 화장장 매장 급 화장 취체 규칙(墓地火葬場及火葬取締規則)’의 발포 이후, 1918년과 1919년 두 차례에 걸쳐 묘지에 대한 규칙을 개정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인들의 반발에 있었다. 공동묘지를 둘러싼 문제는 식민지화의 기초 작업인 토지 조사를 실시하면서 불거져 나온 것으로, 묘지를 산발적으로 쓰는 것이 총독부의 근대적 도시 개발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활한 식민지의 개발과 질서 유지를 위해 선산(先山) 이외의 묘를 공동묘지화할 계획이었으나, 조선인들의 반발이 심하였고, 그로 인해 총독부도 골치를 앓았다. 그 중 하나의 예로, 1914년 광희문(光熙門) 밖의 집장지(集葬地)를 둘러싼 분쟁을 들 수 있다. 이 분쟁의 발단은 이완용(李完用)에게 불하한 땅을 이완용이 이케다에게 매각한 후, 이케다가 이 땅을 개발하기 위해 분묘를 이장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러한 예는 이케다의 경우뿐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총독부는 “분묘를 둘러싼 분쟁이 많이 생기기 쉬운 것은 조선의 낡은 통폐(通弊) 때문”이라며 문제의 뿌리가 조선인들의 관습에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분쟁의 실제 원인은 먼저 국유 임야를 민간인에게 불하한 총독부의 조치에 있었고, 총독부가 공동묘지 제도를 시행한 이유는 소송을 막고 질서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지만, 분쟁은 총독부가 만든 묘지 규칙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538)다카무라 료헤이, 「공동묘지를 통해서 본 식민지시대 서울」, 『서울학 연구』 15, 서울 시립 대학교 서울학 연구소, 2000, 131∼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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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공동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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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화는 가난과 궁핍으로 사는 조선인의 현실을 공동묘지와 같은 삶이라고 표현하면서 공동묘지법에 반대하는 조선인들의 허례허식(虛禮虛飾)을 비판하고 있지만, 공동묘지법에 찬성하여 아내를 공동묘지에 묻은 행동은 결국 총독부의 식민지 개발에 협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공동묘지 속에서 살면서 죽어서 공동묘지에 갈까봐 애가 말라 하는 갸륵한 백성들”이라고 소리치며, 그들의 교활함과 비굴함, 허례 의식을 비판하고 있지만, 이들 조선인도 이인화 자신의 분신이다. 그는 동경에서 경성으로 가는 이 여정을 통해서 아무리 근대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일본인이 될 수 없는 조선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그것이 일본 여성 시즈코에게 이별을 고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인 아내와 일본인 시즈코에 대한 이인화의 심상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살펴보고자 한다. 부모가 정해 준 이인화의 죽은 아내는 조선의 구식 여성을 상징하는 반면, 시즈코는 근대 교육을 받은 신여성을 상징한다. 경성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이인화는 아내를 그저 사랑 없이 집안에서 맺어 준 관계로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내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접하고서도 바로 조선으로 가지 않고 여기저기 들르며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그러나 저러나 지금 이다지 시급히 떠나려는 것은 무슨 때문인가. 내가 가기로 죽을 사람이 살아날 리도 없고, 기위 죽었다 할 지경이면 내가 아니 간다고 감장할 사람이야 없을까? 육칠 년이나 같이 살아온 정으로? 참 정말 정이 들었다 할까? 입에 붙은 말이다. 그러면 의리로나 인사치레로? 그렇지 않으면 일가에게 대한 체면에 그럴 수가 없다거나, 남편 된 책임상 피할 수 없어서 나가 봐야 한다는 말인가. 흥! 그런 생각은 염두에도 없거니와, 그런 마음에도 없는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어디 있는가.539)염상섭, 『만세전』, 문학 사상사, 2004, 21∼22쪽.

그러나 결국 이인화에게 아내의 죽음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미래에 대한 방향을 전환하는 중대한 계기가 된다. 경성에 오면서 보고 들은 조선의 현실과 자아 정체성에 대한 사색이 아내의 죽음이라는 계기를 통해 조선인으로 살 미래에 대한 결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때에는 죽거나 말거나 될 대로 되라고 냉담하였”던 그였지만, 막상 아내가 죽고 나서는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것 같고 지난 일에 대한 뉘우침과 함께 아내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생긴다. 또한 귀향하기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일본에 의해 침식당해 가는 조선의 현실을 보았을 때, 비로소 이인화는 조선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무덤’이라고 절규하는 가운데에도 자신이 있을 곳은 조선뿐이며, 조선인으로 살아갈 것을 결심한다. 이러한 이인화의 결심은 동경 가는 길에 시즈코에게 들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그녀에게 결별을 선언하는 이별의 편지를 보내기에 이른다.

나도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될 책임을 느끼고 또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야 할 의무를 깨달아야 할 때가 닥쳐오는가 싶습니다. …… 지금 내 주위는 마치 공동묘지 같습니다. 생활력을 잃은 백의의 백성과 백주에 횡행하는 이매망량(魑魅魍魎) 같은 존재가 뒤덮은 이 무덤 속에 들어앉은 나로서 어찌 ‘꽃의 서울’에 호흡하고 춤추기를 바라겠습니까.

…… 소학교 선생님이 사벨(환도)를 차고 교단에 오르는 나라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까? 나는 그런 나라 백성이외다. ……

우리 문학의 도는 자유롭고 진실된 생활을 찾아가고 이것을 세우는 것이 그 본령인가 합니다. 우리의 교유, 우리의 우정이 이것으로 맺어지지 않는다면 거짓말입니다. 이 나라 백성의, 그리고 당신의 동포의 진실된 생활을 찾아 나가는 자각과 발문을 위하여 싸우는 신념 없이는 우리의 우정도 헛소리입니다.540)염상섭, 『만세전』, 문학 사상사, 2004, 158∼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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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교사
일본인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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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즈코에게 보내는 이별 편지는 이인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개진서(開陳書)이기도 하다. 자신이 “소학교 선생님이 환도를 차고 교단에 오르는 나라”의 ‘백성’임을 외면한 채, 시즈코와 연애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문학의 도’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식민지 현실에서 문학 이외의 어느 분야도 자유롭고, 진실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인화에게 ‘문학의 도’라는 것은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관계없이 각각 자유롭고 진실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스로의 길을 구할 책임과 의무”에 대한 발견은 “자유롭고 진실한 생활을 찾고, 이것을 세우는 것”에 있으며, 이는 곧 문학도로서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었다. 문학에서만이 진정한 평등과 자유가 실현될 수 있으며, 이것은 조선인 한 쪽만의 노력이 아니라 쌍방의 노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즉, 조선인과 일본인이 “진실한 생활을 찾아나가는 자각과 발문을 위해 싸우는 신념 없는” 우정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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