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5장 여행자의 시선과 심상 지리
  • 3. 제국주의와 조선인의 민족 심상 지리
  • 민족정기 세우기와 국토 순례의 길
김희정

최남선은 1909년부터 일제 강점기 말에 이르기까지 조선 각지 및 중국 둥베이(東北) 지역을 수차례 여행하였고 그 성과물로 『반순성기(半巡城記)』,541)최남선, 「반순성기(半巡城記)」, 『소년』 2권 7호∼9호, 1909.8∼10. 『평양행(平壤行)』,542)최남선, 「평양행(平壤行)」, 『소년』 2권 10호, 1909.11. 『풍악기유(楓嶽記遊)』,543)최남선, 「풍악기유(楓嶽記遊)」, 『시대일보』 1924년 10월 12일∼12월 20일(49회). 『심춘순례(尋春巡禮)』,544)최남선, 「심춘순례(尋春巡禮)」, 『시대일보』 1925년 3월 하순∼6월 28일자(77회). 『백두산 근참기(白頭山覲參記)』,545)최남선, 『백두산 근참기(白頭山覲參記)』, 한성 도서 주식회사, 1928. 『금강 예찬(金剛禮讚)』,546)최남선, 『금강 예찬(金剛禮讚)』, 한성 도서 주식회사, 1928. 『송막연운록(松漠燕雲錄)』547)최남선, 『매일신보』 1937년 10월 28일자∼1938년 4월 1일자. 등 많은 여행기를 남겼다.

『풍악기유』는 1924년 금강산을 다녀오고 나서 쓴 기행문으로 모두 2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금강산 기행은 분명한 목적하에 여행을 떠났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최남선은 『여지승람(輿地勝覽)』, 『와유록(臥遊錄)』 같은 여행 참고서를 지참하였으며, 영호 노사(映湖老師)를 길 안내자로 삼고 있다. 이들은 경원선 기차를 타고 철원을 지나 평강역에 내려 금강산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이 금강산에 대한 최남선의 태도이다. 그는 금강산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美)의 제국(帝國)에 통관시키는 천총(天寵)에 감사”하고, 금강산을 “온통 그대로 함유(涵濡)하고, 훈목(薰沐)하고 찬송하고 예배하는, 가장 순종하는 어린양”548)최남선, 「풍악기유」, 『육당 최남선 전집』 6, 현암사, 1951, 402쪽.이 되어 “순일 (純一)한 한마음”으로 “금강산에 귀명(歸命)”하고자 결심한다. 여기에서 최남선의 여행 목적과 태도를 느낄 수 있다. 그의 금강산 기행은 단순한 자연 여행이 아니라, 종교적인 순례자로서 금강산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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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 캐리커처
최남선 캐리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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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악기유』는 내금강의 초입인 영원동(靈源洞)과 백천동(白川洞)의 풍경에서 기행문이 끝나고 있으나, 그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즉, 금강산을 중심으로 하는 영원동, 백천동 일대가 고대(古代) ‘’교(敎)의 최고 성지였다는 점이다. 그에 의하면, “‘백천(白川)’이란 이름은 장안사(長安寺) 앞을 일컫는 말”이지만, “실상은 시왕봉(十王峰) 뒤에서 영원암 앞으로 흘러나오는 물”을 가리키며, 영원동은 “시왕동과 백천동 둘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라고 한다. 백천의 ‘천’은 ‘내’라는 의미로 ‘개울’을 뜻하고, ‘백’은 ‘’의 대자(對字)이다. 그러므로 백천은 고대 ‘’도가 신성시하던 신수(神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백천의 발원지는 백천동에 막다른 백마봉(白馬峰)인데, 이 ‘백마’란 것은 의주의 백마산, 부여의 백마강 등과 같이 ‘신산(神山)’ 또는 ‘신거(神居)’를 의미하는 고어(古語) ‘’의 대자이며, 백마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백천’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백마산과 백천은 고대 ‘’교가 매우 중시했을 신역(神域)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의 본래 이름은 ‘백천’이며, 지금의 이름은 도교와 불교의 외피(外皮)에 가려진 이름이라는 것이다.549)최남선, 「풍악기유」, 『육당 최남선 전집』 6, 현암사, 1951, 414쪽. 이와 같이 최남선이 조선의 영산(靈山)을 기행하는 의미와 목적이 불교나 도교의 외피 속에 묻혀 있는 조선 민족 신화를 밝혀내는 데에 있었던 것이다. 『풍악기유』 이후 금강산은 조선 민족의 고대 정신이 발현된 성지(聖地)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최남선은 왜 금강산을 조선 정신의 최고 전당으로 보았을까? 또 그것 은 금강산 여행과 어떠한 상관이 있으며, 금강산 기행을 통해 고대 ‘’도의 기원을 밝히는 일이 왜 그렇게 중요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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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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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은 1924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역사 학자의 길을 걸으며 단군(檀君)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 단군 연구와 금강산, 지리산, 백두산의 순례기는 깊은 관련이 있다. 조선 총독부는 1923년에 단군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교육 지침을 내렸으며, 1925년에는 조선사 편찬 위원회(朝鮮史編纂委員會)를 조선사 편수회(朝鮮史編修會)로 개편하고 단군 부정론자를 중심으로 한국사 편찬 사업을 재개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예를 들면 동양 사학자인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1865∼1942)는 ‘단군고(檀君考)’에서 단군 신화를 전설로 규정하면서, 단군의 역사와 실체를 부정하였다. 즉,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실린 단군 신화를 요괴망탄(妖怪妄誕)이 극에 달하였다고 평가하고, “단군의 사적은 원래 불설(佛說)에 근거한 가공의 선담(仙譚)”이라고 하면서 백두산의 신단수(神壇樹)를 인도의 마리야산(馬拉耶山)과 동일시한 승려의 허구라고 비판하였다. 같은 시기에 나카 미치요(那珂通世) 역시 같은 입장에서 ‘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1894)를 썼고, 이러한 시각은 이마니시 료(今西龍)의 ‘단군고(檀君考)’(1929)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550)조현설, 「동아시아 신화학의 여명과 근대적 심상지리의 형성」, 『민족 문학사 연구』 16권 1호, 민족 문학사 학회, 2000, 107쪽.

이에 최남선은 시라토리의 비교 언어학적 방법론과 도리이의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과 단군론을 완성해 나간다. 즉, 원시 신앙의 한 형태로 분포한 ‘’은 원시시대의 중요한 사실을 시현(示現)하는 귀중한 증빙 자료인데, 조선에서 ‘(Pǎrk)’을 의미하는 ‘백(白)’ 관련 산이 많이 보이는 것은 ‘’도의 성산이 많이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조선어에서 ‘Pǎrk’은 단순히 광명을 의미하지만, 그 고의(古義)에는 신(神)·천(天) 등이 있고, 신이나 천은 그대로 ‘태양’을 의미하는 것으로써,551)최남선, 「불함문화론」, 『육당 최남선 전집』 2, 현암사, 1951, 45쪽. 거기에는 ‘’도라고 하는 종교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한다.

최남선이 주장하는 ‘불함문화권’이란 좁게는 조선과 일본 및 동부 지나(東部支那)부터 오키나와(琉球), 홋카이도(蝦夷), 만주, 몽골, 중앙아시아를 거쳐 발칸 반도를 포괄하는 지역을 가리킨다.552)최남선, 「불함문화론」, 『육당 최남선 전집』 2, 현암사, 1951, 61쪽. 고대에 이 불함문화권에서는 하늘(天)과 태양이 숭배(崇拜)의 대상이었으며, 각 지역마다 가장 높고 신령한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제사를 지낸 산도 역시 존숭(尊崇)의 대상이었다. 조선 반도에는 예로부터 ‘’도가 행해졌는데, 불함문화권의 고대인들은 그 산의 이름을 ‘’산이라 하였고, 백산(白山)은 그것의 한자식 표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 의미는 바로 조선의 단군 신화와 연결된다. “조선에서는 Pǎrk을 근원으로 하여 Pǎrkǎk으로도 되고, 전(轉)하여 Pulkun으로도, 단순히 pur로도 칭위(稱謂)”되었다고 하면서, ‘Pǎrk (Pǎrkǎn)’은 “불함문화의 중심임과 동시에 전부면(全部面)을 이루는 것”이며, “불함은 그 가장 오래된 자형(字形)에서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함문화의 전 내용을 이루는 종교가 조선에서 Pǎrkǎn(Pǎrk;pur)의 이름으로 호칭되었음이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최남선은 단군 신화에서 환웅이 강림한 ‘불함산’을 ‘불함’으로 해석하고 불함문화권의 중심지를 조선으로 보는 시각을 확대시켜 나간다.553)전성곤, 「‘동아시아 문화권’ 재구성과 최남선」, 『근대 ‘조선’의 아이덴티티와 최남선』, 제이앤씨, 2008, 141∼142쪽.

금강산에 대한 좀 더 본격적인 여행기는 1926년 두 번째 금강산 여행을 마치고 쓴 『금강 예찬』이다. 그는 ‘예찬의 권두에’에서, 금강산에 대해 세 가지의 기록을 작성할 계획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첫째는 ‘금강산의 학적 검토’를 위해 금강산을 네 개의 부면(部面)으로 나누어 네 종의 학리적(學理的) 견해를 시험하는 것이다. 둘째는 ‘금강 유람의 향도기(嚮導記)를 제 공’하는 것으로, 금강산 각 명승지의 배치, 구성, 요소, 특질, 역사적 유서, 유력상(遊歷上) 요건을 서술하여 일반 탐승객의 반려(伴侶)를 삼으려는 것이다. 셋째는 금강산에 대한 ‘고문헌의 휘찬(彙纂)’을 만들기 위해 “금강산의 도로 변천, 명호(名號) 전환, 생활상 투영, 감수상(感受上) 실증 등을 고찰”하는 것이다.

최남선이 『금강 예찬』을 저술한 목적은 두 번째, 즉 금강산 유람기를 제공하기 위함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지만, 그의 참 목적은 단순한 금강산 유람 안내기의 제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정체성의 상징인 금강산에 대한 신앙을 깨닫게 하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글은 『금강 예찬』의 서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최남선이 금강산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떠한 목적으로 썼는지 짐작하게 한다.

금강산은 조선인에게 대하여 단지 일 산수풍경(一山水風景)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심의(心意)의 물적 표상으로, 구원(久遠)한 빛과 힘으로써 우리를 인도하며 경책(警策)하는 정신적 최고 전당인 것입니다. 중간에 와서는 잠시 회폐(晦蔽)하였었읍니다마는, 조선인은 고래로 이 신비한 의취(意趣)를 가장 현명하게 영회(領會)하여, 진작부터 금강산을 신앙의 일 목표로 하여 가장 경건한 귀의를 바쳤습니다. 금강적이라 할 지도 원리하에서 조선신(朝鮮身) 급 조선심(朝鮮心)을 구원으로 발전하라 함은, 실상 우리 부모 미생전(未生前)부터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금강산은 우리가 구경할 무엇이 아니라, 때때 근성참배(覲省參拜)할 성적(聖的) 일 존재입니다. 아무 것보다 금강산을 먼저 깊이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며, 아무 일보다 금강 예찬을 일찍, 소중히, 정성스럽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조선에서 금강산을 못 보았다 함과, 조선인으로 금강산을 모른다 함은, 무엇이라는 것보다 일대 자기모멸이라고 할 것입니다.554)최남선, 「금강 예찬」, 『육당 최남선 전집』 6, 현암사, 1951,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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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구룡연
금강산 구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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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은 금강산을 단순한 자연물의 하나로 혹은 구경할 거리로 보지 않았다. 금강산을 조선인의 “심의의 물적 표상”으로, 먼 옛 조선의 “구원한 빛과 힘”으로 조선인을 인도하는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산은 조선인의 “정신적 최고 전당”인 동시에 “근성참배(覲省參拜)할 성적(聖的) 존재”이다. 따라서 조선인으로서 금강산을 못 보았거나, 모른다고 하는 것은 “자기모멸”에 이르는 행위라고 잘라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남선에게 있어 금강산은 종교이자 신앙이고, 『금강 예찬』은 금강산에 바치는 “지성(至誠)의 일제물(一祭物)”이었다.555)최남선, 「금강 예찬」, 『육당 최남선 전집』 6, 현암사, 1951, 161쪽.

일본 지식인들이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조선 민족의 정기를 세우고 ‘조선심(朝鮮心)’의 핵심을 지켜 내는 일은 단군 연구라는 학적 연구 성과뿐 아니라, 금강산·백두산·지리산 등의 국토 기행을 통한 ‘기행문’의 창작과 기행문 안에 시조(時調)를 삽입하는 형태인 ‘기행 시조’의 창작으로도 발현되었다. 그는 “조선에 있는 유일한 성립 문학(成立文學)”인556)최남선, 「조선 국민 문학으로의 시조」, 『조선 문단』 16, 조선 문단사, 1926.5, 4쪽. 시조야말로 조선인에게 가장 알맞은 문학의 형태이자, “조선 문학의 본류”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독자적인 문학 형태인 시조를 보존하고 부흥시키는 것 또한 조선심을 지켜 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단군 연구와 국토 여행, 그리고 기행문과 기행 시조는 연동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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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상에 선 최남선
백두산 정상에 선 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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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1924년 10월 12일에는 『풍악기유』를 『시대일보』에 연재하였으며, 다음해인 1925년 3월 하순 지리산을 순례하고 쓴 『심춘순례』를 『시대일보』에 연재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불함문화론’을 탈고하였으며, 이듬해인 1926년에는 ‘단군론’(1926.3.3∼7.25)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조선 국민 문학으로의 시조’를, 6월에는 ‘시조 태반으로의 조선 민성과 민속’을 『조선 문단』에 발표하였다. 7월 24일에는 백두산 순례에 오르고 그 기행문을 28일부터 ‘백두산 근참’이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였고, 8월에는 ‘단군굴에서’를 『동광』에 발표하였으며, 두 달 후인 10월 8일에는 『시조유취(時調類聚)』의 편집을 완료하였다. 이어 12월 1일에는 시조집 『백팔번뇌』를 동광사에서 간행하였다. 1927년 1월에는 ‘조선 민요의 개관(일문(日文))’을 『진인(眞人)』에 실었으며, 3월에는 ‘삼국유사 해제’를 『동광』에, 5월에는 『살만교차기(薩滿敎箚記)』를 『계명』에 발표하였다. 8월에는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일문)’을 『조선 급 조선 민속 (朝鮮及朝鮮民俗)』에 발표하고, 12월 8일 수양 강좌로 청년 회관에서 ‘돌멘 이야기’를 강연하였다. 1928년 1월에는 『중외일보』에 ‘단군 신전(神傳)에 들어있는 역사소(歷史素)’를 연재하였으며, 4월에는 『단군 급 기연구(檀君及其硏究)』를 『별건곤』에 실었고, 6월에는 ‘조선 유람가’를 『동아일보』에 기고하였다. 이어 9월 27일에는 중앙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조선의 문예 부흥기’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이렇듯 최남선의 조선심 세우기는 역사학, 언어학, 문학 강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럼, 기행 시조에 나타난 최남선의 ‘조선심’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최남선은 백두산행을 무사히 마친 것을 “단군 천왕의 영우(靈佑)”라고 감사하면서 『백두산 근참기』에 다음과 같은 시조를 실었다.

온다고 간다 하나

게가 도로 게귈 뿐을

님의 해 안 쪼이는

어느 구석 잇겟다해

한 가지 그 품속에서

예라제라 하리오

지리산 천왕봉에

님의 신끈 글러 보고

금강산 비로봉에

허리띠를 만젓더니

백두산 장군봉두(將軍峰頭)에

입도 마처 보도다

버려서 외론 몸이

뉘 씨임을 몰랏더니

하누님 큰 대궐이

본대 내 집이란 말가

이뒤야 아무데간다

집 일흘 줄 잇스랴557)최남선, 「백두산 근참기」, 『육당 최남선 전집』 6, 현암사, 1951, 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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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근참
백두산 근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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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근참기』는 고대 ‘’도의 신성한 산이 백산임을 밝혀낸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백두산이 ‘백산’이라는 것을 밝혀낸 것은 그대로 그가 주장한 ‘불함문화론’의 핵심 전거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은 곧바로 조선인 자긍심의 고취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기행문에 삽입된 기행 시조에는 최남선의 그러한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앞의 시조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핵심 내용은 조선인의 내력과 조선인 정체성의 확인을 통한 조선 민족의 주체성 확립에 있다. 여기서 ‘님’은 ‘하나님’이자 동시에 ‘단군’을 의미한다. 백두산을 둘러보고 나니, ‘님’의 해가 닿지 않는 곳이 없고, 모두가 다 ‘님’의 품속임을 깨달았다는 것은 지리산, 금강산, 백두산 같은 조선 각지의 영산이 본래 단군이 다스렸던 지역으로 고대 ‘’도의 신성 지역이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인이 고대 ‘’도의 후손인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시조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외로운 나의 몸이 누구 씨인지 몰랐더니, 본래의 나의 집은 하누님의 큰 대궐일세”라는 부분 역시 조선인이 고대 ‘’도의 후손임을 깨달고, 조선인은 근본 뿌리가 하늘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음은 같은 『백두산 근참기』 속에 삽입된 ‘31절 대백두(大白頭) 대천지(大天池)의 탄덕문(嘆德文)’이다.

일심으로 백두천왕(白頭天王)께 귀명합니다

우리 종성(種姓)의 근본이시며

우리 문화의 연원이시며

우리 국토의 초석(礎石)이시며

우리 역사의 포태(胞胎)이시며

우리 생명의 양분이시며

우리 정신의 편책(鞭策)이시며

우리 이상(理想)의 지주이시며

우리 운명의 효모(酵母)이신

백두대천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합니다

세계의 서광인 조선국을 안흐섯든 품이시며

인류의 태양이신 단군 황조(檀君皇祖)를 탄육(誕育)하신 어머님이시며

그만 깜깜해질 세상이어늘

맨처음이자 가장 큰 횃불을 들엇든

봉수대(烽燧臺)이시며

휑한 벌판에 어대로 갈지

길이 끈키고 방향도 모를 때

웃둑이 소스사

만인 만세의 대목표되신

백두대천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합니다

“내가 여긔 섯기까지

내 겨드랑 밋헤와 무릅 알에와 발 압헤

뽑힌 백성 조선 사람 아닌 다른 아모의

궁둥이가 억지로 들어오거나 발자곡이 오래도록 멈을게 할 리 만무하리니

조선아, 조선인아

어떠한 사나운 비바람이 닥처올지라도

한때의 시련은 모를 법호되

결코 오랜 핍박(逼迫)으로써

너를 능학(凌虐)할 리 업슬 것을 미드라

내가 여기 섯노라” 하시는

하누님 백두대왕 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558)최남선, 「백두산 근참기」, 『육당 최남선 전집』 6, 현암사, 1951, 120∼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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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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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은 백두산을 “조선 종성의 근본”이며, “생명의 양분”이며, 천지를 “세계 최대의 시편”이요, 경전으로도 “세계 최대의 경전”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세상에는 “조선 사람보다 더한 민족적 강인을 가진 이가 없고, 조선 나라보다 더한 역사적 윤택을 가진 곳도 없”는데, 이러한 조선인의 질기고 꾸준한 생명의 원천이 바로 천지의 물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조선 민족은 태초부터 “인류의 태양이신 단군 황조를 탄육한 백두산” 정기의 기운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남선의 단군 연구, 기행 시조의 창작, 조선의 영산 기행은 조선 고대사를 밝히면서 조선 민족의 정기를 세우는 일임과 동시에 ‘조선심’의 핵심을 지켜 내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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