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2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 제5장 여행자의 시선과 심상 지리
  • 3. 제국주의와 조선인의 민족 심상 지리
  • ‘조선적인 것’ 추구하기
김희정

최남선은 금강산, 지리산, 백두산 같은 조선의 국토를 ‘순례’하고, 그 결과물로 기행문과 기행 시조를 다수 남겼다. 이러한 기행문과 기행 시조는 최남선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식민주의자들의 조선 역사 폄하를 비판하고 조선의 민족의식을 함양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쓴 것인 만큼 말 그대로 여행 기록임과 동시에 학적 보고서에 가까운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최남선과는 달리 ‘조선적인 문화’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자신의 문학 속에 표현해 나간 작가도 다수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로 이태준, 정지용(鄭芝溶), 이병기(李秉岐)가 중심이 된 소위 『문장(文章)』의 작가를 들 수 있는데, 이들에게 보이는 상고주의(尙古主義)와 고전주의(古典主義)의 경향은 1930년대 중·후반 다양한 문화 담론 속에서 ‘조선적인 것’이라는 표상(表象) 체계를 이루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태준은 구인회(九人會)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면서 1930년대에 순수 문학을 지향했던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여행에 관해 특별한 경험과 추억을 가지고 있었는데, 『도보 삼천리』에는 그의 여행에 대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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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 초상
이태준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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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휴가가 있다면! …… 나는 시골 갈 여비로 경성역에 가 차표를 사는 대신에 양산으로 겸용할 검을 우선 하나 사겠습니다. 그리고 보지도 못할 어려운 외국 서적을 모양으로 사 드는 대신에 읽기 쉽고 재미있고 값도 싼 우리 잡지를 한 책 사고 정밀한 조선 지도 한 장과 일기 쓸 공책 하나와 소화제로 약간 약품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간단한 행구(行具)를 배낭 속에 넣어 등에 지고 양산을 받고 동소문 밖을 나서겠습니다. 옥수(玉水)가 굽이치는 비탈길을 걸으며 구름 자는 영(嶺)도 넘어 녹수청산(綠水靑山)의 관북 일대를 답사하겠습니다. 바위 밑에서 소낙비도 근궈 보고 밭고랑에 풀을 깔고 누워 하늘에 초롱별들과 동화 같은 꿈도 꾸어 보겠습니다. 정자나무 밑에서 농군들의 점심도 얻어먹어 보고 산골 큰애기가 고개 돌리며 떠 주는 바가지 물도 마셔 보겠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학교 학생을 만나면 그곳에서 강변 천렵도 차려 먹고 밤중에 배고프면 흔해 빠진 참외밭에 가 주인 모르는 신세도 지며 백 리도 내 다리로 천 리도 내 힘으로 걸어 영(嶺) 많은 관북 일대부터 한여름에 정복해 놓겠습니다. 그리고 내년 여름에는 영남 호서를, 후년 여름에는 관서 일대를 차근차근 내 발자국으로 정복하겠습니다.

나는 열다섯 살 때 여름에 안동현에서부터 문자대로 무일문(無一文)으로 백마, 남시, 선천, 정주, 오산, 영미, 안주, 숙천, 순천까지 걸어오다가 발목을 상하여 그만둔 일이 있습니다. 그때 풀밭에서 강변에서 또는 대장간에서 자던 일이며 날 옥수수 선 찬외로 배를 채우고 길가는 영감님과 집 지키는 할머니 혹은 애기와 이야기해 보던 것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추억들이여, 여러 가지 지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559)이태준(李泰俊), 「도보 삼천리」, 『학생(學生)』 제1권 4호, 개벽사, 1929.7, 52∼53쪽.

이 글을 읽노라면 이태준이 얼마나 자유롭고 소박한 여행을 꿈꾸었는지 느껴진다. 그는 근대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한 기획된 여행과는 대조적인 여행을 이야기한다. 예를 들면 기차를 타고 유명 관광 명소를 여행 안내서를 따라 짜인 스케줄대로 뒤쫓는 식의 여행 방식이 아닌, 짜인 스케줄과는 관계없이 “백 리도 내 다리로, 천 리도 내 힘으로 걸어” 가면서, 느긋하게 조선 반도의 자연을 내 몸 전체로 구석구석 느끼는 여행을 말한다. 또한 관광 명소에서 느낄 수 있는 계획된 메시지보다는 걸어가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조선의 자연과 조선인의 정서를 여행의 추억으로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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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평양 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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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평양 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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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여덟 살에 철원 용담의 친척집을 떠돌며 유년 시절을 지냈다. 열네 살 되던 1918년에는 독립하려고 가출하여 함경남도 원산에서 객줏집 사환(使喚) 노릇을 하기도 하고, 같은 해 여름에는 인척(姻戚) 아저씨를 찾아가기 위해 안둥 현(安東縣, 현재의 단둥(丹東))에서 시작하여, 백마-남시-선천-정주-오산-영미-안주-숙천-순천까지 도보로 걸어간 적이 있는데,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성까지 오게 된다. 앞의 고백은 그때 무일푼으로 걷다가 발목을 삐어 그만두었던 일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유년기를 통해 서북 공간을 여행한 일은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오몽녀』는 두만강 근 처 서수라, 『아담의 후예』는 원산 부둣가, 『촌뜨기』는 평안북도 안악, 『바다』는 함경북도 이진 부근의 한 어촌, 『철로』는 함경남도 송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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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벽루
부벽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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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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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은 그의 소설 전체를 두고 볼 때, 자전적(自傳的) 성격이 강한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 『패강랭』은560)이태준, 「패강랭(貝江冷)」, 『삼천리 문학』 제1호, 삼천리사, 1938.1. 1930년대 후반 이태준이 직접 체험한 것을 소설화한 것으로,561)김도희, 「이태준 단편 「패강랭」의 항일 문학적 성격」, 『현대 소설 연구』 20, 한국 현대 소설 학회, 2003, 236∼237쪽. 주인공 현이 친구를 만나러 평양에 여행 가서 생긴 사건을 그린 소설이다. 박의 편지를 받은 현은 10년 만에 평양을 찾는데, 그동안 변한 평양의 모습에 놀라움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낀다. 전에 본 적이 없는 새 빌딩들이 들어섰고, 분묘같이 커다랗고 시뻘건 벽돌 건물인 ‘경찰서’가 생겼으며, 평양 여성들이 머리에 두르던 하얀 머릿수건은 이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날 박과 부의회원(府議會員)인 김, 그리고 현은 대동강 변의 요릿집인 동일관(東一館)에서 기생들과 술을 마신다. 친일적인 성향이 농후한 김이 계속 일본말을 쓰는 것이 비위에 상한 현은 결국 시국에 협력하는 소설을 쓰라고 충고를 하는 김에게 마시던 사이다 컵을 던져 버리고, “되나 안 되나 우린 이래 봬두 예술가다! 예술가 이상이다, 이 자식……”이라고 소리치며 나온다. 그러는 현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고, 번뜩이는 서릿발이 끼친 나뭇잎을 밟으면서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 즉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얼음이 올 것을 각오하라.”는 말을 떠올린다는 줄거리이다.

현에게 부벽루(浮碧樓)는 “이조의 문물다운 우직한 순정이 군데군데서 구수하게 풍겨 나오”는 장소이며, 대동강(大同江)은 조선의 유구한 맛을 느끼게 하는 장소이다. 현은 부여에 가서 낙화암(洛花巖)과 백마강(白馬江)을 바라보던 생각을 하며, “조선 자연은 왜 이다지 슬퍼 보일까?”라고 생각한다. 현의 눈에 보이는 평양의 변한 모습은 그 하나하나가 더욱더 우울하게 한다. 현을 슬프게 하는 것은 조선이 조선의 모습으로 있지 못하고, 조선인이 조선인으로 있지 못한 현실 인식에서부터 비롯된다. 즉 평양이 평양의 고유한 문화를 가질 수 없게 된 현실에 현은 서글픔을 느끼고, 조선인이 조선어로 글을 쓰고 가르칠 수 없게 된 상황에 낙망하는 것이다. 그러면 현이 생각하는 조선적인 것은 무엇일까? 조선적인 유구한 맛과 우직한 순정을 지닌 평양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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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뱃놀이와 기생
대동강 뱃놀이와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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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은 평양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늘 보기 좋았다. 현은 단순하면서도 흰 호접(蝴蝶)과 같이 살아 보였고, 장미처럼 자연스런 무게로 한 송이 얹힌 댕기는, 그들의 악센트 명랑한 사투리와 함께 ‘피양 내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아름다움을 제 고장에 와서도 구경하지 못하는 것은, 평양은 또 한 가지 의미에서 폐허라는 서글픔을 주는 것이었다.562)이태준, 「패강랭」, 『이태준 단편 전집』 2, 가람 기획, 2005, 178쪽.

조선다움을 간직한 평양의 미란 “흰 호접과 같이 살아 있는 머릿수건”이었으며, “한 송이 장미처럼 얹힌 댕기”와 “평양인의 악센트 명랑한 사투리”로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피양 내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양 여인들의 머릿수건과 댕기, 평양 사투리가 사라진 것은 평양만이 갖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상실한 것이고, 현에게 아쉬움과 “폐허라는 서글픔을 주는 것”이다. 특히 ‘평양 기생’을 “조선의 국보적인 존재”라고까지 생각하는 현에게 있어 피곤해 보이는 영월의 모습에서 조선 문화의 위기감을 느낀다. 그는 영월이 “흰 저고리 옥색 치마, 머리도 가림자만 약간 옆으로 탓을 뿐 시체 애들처럼 물들이거나 지지거나 하지 않은” 순정한 자태를 하고 있지만, “웃은 지 오래인 눈 속은 그저 웃는 것이 옛 모습일 뿐, 눈시울에 거무스름하게 그림자가 깃든 것이나, 볼이 홀쭉 꺼진 것이나, 입술이 까시시 메마른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현은 조선 기생의 자존심을 영월이 지켜 주기를 바라지만, 영월이도 시류 속에서 혼자 버티기는 어렵다. 이미 기생 사회에는 유성기(留聲機)와 재즈, 댄스가 유행하며 이제는 창(唱)과 장고를 제대로 할 줄 아는 기생조차 드물다. 영월이도 평양 사투리보다는 서울말을 써야 하고, 젊은 기생들처럼 댄스를 출 수 있어야 먹고 살 수가 있는 것이다. 조선의 국보적 존재인 기생의 아름다움을 지키려다가는 생활을 해 나갈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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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뷰춤 추는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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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조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전임 강사에서 시 간 강사로 강등된 박은 “다니는 학교에서만 찌싯찌싯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전체에서 긴치 않게 여기는, 찌싯찌싯 붙어 있는 존재”로 묘사되는데, 박의 처지는 곧 현의 처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현은 박의 그런 “찌싯찌싯함”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울고 싶은 괴로움”을 느낀다. 그가 평양을 찾은 이유도 박을 위로하고픈 마음에서였다.

박이 시간 강사로 강등된 이유는 알려면 『패강랭』이 발표된 1938년 1월이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전해인 1937년 7월에는 중일 전쟁이 발발하였고, 일제가 소위 전시 체제하에 내선 일체(內鮮一體) 정책을 강행하던 시기였다. 1938년에는 조선 교육령(朝鮮敎育令) 개정으로 일본어 사용이 원칙으로 되고 조선어 사용 금지와 조선 역사도 교수가 금지되었다. 또한 신사 참배(神社參拜), 궁성 요배(宮城遙拜), 황국 신민화(皇國臣民化)를 비롯하여 전시 체제 국민 정신 총동원 운동이 진행되던 시기에 해당한다. 곧 조선인에게 자국의 정서와 문화가 들어 있는 모국어를 가르치기 어려워지고 일본어를 국어로 써야 하는 시대였고 이는 조선의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조선인이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조선어 대신에 일본어로 작품을 쓰고 식민지 정책에 협조하는 글을 쓰도록 강요받았다.

친구 박의 처지, 기생 영월의 모습, 옛 모습을 잃은 평양 거리, 사라진 평양 여인의 머릿수건 등과 같은 현을 둘러싼 상황은 조선의 예술가로서의 현에게도 상당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그러는 가운데, 동일관의 술자리에서 “팔릴 글을 쓰라.”고 김이 현에게 충고하는 장면은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 김은 시대 형국에 맞추어 사는 인물로,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일본어를 쓰고, 술값이나 담뱃값은 아까운 줄 모르나 평양 여인들의 머릿수건은 경제상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즉, 그는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조선인’이나 ‘조선 문화’에서 찾지 않는다. ‘조선적인 것’에 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그에게 “실속을 챙기라.”, “방향 전환을 하라.”, “팔릴 글을 써라.”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라, 조선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라는 말과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자네들 이제부턴 실속 채려야 하네.”

하고 김은 힐긋 현의 눈치를 본다.

“어떻게 채려야 실속인가?”

“팔릴 글을 쓰란 말일세. 자네들 쓰는 걸 인제부터 누가 알아야 읽지 않나? 나두 가끔 자네 이름이니 좀 읽어 볼까 해두 요미 니쿠쿳데…… 도모 이캉……”

“아니꺼운 자식…… 너희 따윈 안 읽어두 좋다. 그래 방향 전환을…… 뭐…… 어디 가 글 쓰는 놈이 선견이구 어쩌구 하는구나? 똥내 나는 자식……”

“나니?”

김이 빨끈해진다. 김이 빨끈해지는 바람에 현도 다시 농담기가 걷히고 눈이 뻔쩍 빛난다.

“더러운 자식! 나닌 무슨 말라빠진……”

하더니 현은 술을 깨려고 마시던 사이다 컵을 김에게 사이다째 던져 버린다. 깨지고 튀고 하는 것은 유리병만이 아니다. 기생들이 그리로 쏠린다. 보이들도 들어온다.

“이 자식? 되나 안 되나 우린 이래 봬두 예술가다! 예술가 이상이다, 이 자식……”563)이태준, 「패강랭」, 『이태준 단편 전집』 2, 가람 기획, 2005, 188쪽.

김과 현이 벌이는 논쟁은 자신의 신념을 꺾고 시국에 협조해서 사는 삶과 생활이 힘들더라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삶의 갈등을 대비시키고, 식민지 자본주의의 침식과 ‘조선적인 것’으로 대치되는 전통 문화와의 팽팽한 대결을 잘 보여 준다. 다시 말해, ‘김’은 ‘돈-효율성-자본주의’ 논리를 대 표하는 인물로, ‘현’은 ‘미-조선적인 것-문화’의 논리를 상징하는 인물로 대칭되는 것이다.564)하정일, 「1930년대 후반 이태준 문학과 내부 식민주의 성찰」, 『배달말』 34, 배달말 학회, 2004,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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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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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강(貝江)’은 대동강의 옛 이름으로, ‘패강랭(貝江冷)’이란 ‘대동강이 차다’라는 의미이다. 소설 속의 대동강은 현의 쓸쓸함을 대변이라도 하듯 “너무나 차다.”, “물은 흐르나 소리도 없다.”, “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다.”와 같이 표현되고 있다. 김과 다툰 후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서 현이 떠올리는 것은 “이상견빙지”라는 말이다. 즉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얼음이 올 것을 각오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일제의 내선 일체 정책이 더욱더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그러한 삶의 위기 속에서도 각오해야 한다는 인식이 동시에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

『패강랭』은 시대 정국에 맞추어 조선의 국토도 사람도 문화도 모두 변화의 물결에 흘러가는데, 그 속에서 조선의 예술가로서의 자존심과 자긍심 을 지켜 내기 어려운 작가의 입장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주인공 현을 통해서 말하는 ‘조선적인 것’이란 조선의 자연을 포함한 문화 전반의 영역에 걸친 것이다. 즉, ‘조선적인 미’는 “유구한 맛”을 풍기는 대동강으로, “이조의 문물다운 우직한 순정”이 깃들어 있는 부벽루의 모습으로,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순정한 기생의 모습으로, 어려운 삶 속에서도 자국의 문화를 지키려는 예술가의 노력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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