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을 내면서
김문식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국왕이 통치하는 왕국(王國)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국가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었고, 왕국은 그중에서 매우 제한된 시기에 나타났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지만, 국왕이라는 존재가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삼국시대 이후이다. 고대 국가가 형성되는 시기에 삼한 지역에는 수많은 소국이 있었는데, 이들을 모두 국왕이 다스리는 왕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왕국이 존재했던 시기는 삼국에서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는 시기였고, 이후에 나타난 대한제국은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帝國)이었으며,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국(民國)이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 대상으로 삼는 시기는 국왕이 존재했던 삼국부터 조선까지이며, 현재 관련 자료가 집중적으로 남아 있는 조선시대를 주로 다루었다.

이 책에서는 ‘국가와 국왕’을 주제로 삼았지만 실제 내용은 ‘국왕과 왕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에 집중했다. 왕국의 시대에는 국왕과 왕실이 확대된 것이 국가이고, 가족 윤리가 확산되어 사회 윤리, 국가 윤리가 정립되었으므로 국왕과 왕실은 국가의 출발점이자 중심부에 해당한다. 또 한 왕국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꼽히는데, 국왕의 선조를 모신 종묘가 국가를 상징하는 공간이 되는 것은 왕국을 구성하는 백성들이 국왕의 선조를 자신의 선조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국왕과 왕실은 국가와 동일시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본문은 모두 다섯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주제는 국호(國號)와 국왕의 호칭(呼稱)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국가는 저마다 독특한 나라 이름을 가졌지만, 삼국시대 이후로는 기존의 국호를 다시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가령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며 정한 국호였고, 고려는 고구려, 조선은 고조선, 대한제국의 대한은 삼한(三韓)을 계승한다는 역사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정한 국호였다. 1948년에 신생 국가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할 때에는 고려 공화국, 조선 공화국, 한국이란 국호가 후보로 거론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예전의 국호를 활용한 것이었다. 장차 남북이 통일되어 통일 정부의 국호를 정할 때에도 조선, 고려, 대한이란 국호는 여전히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될 것이다.

국왕에 대한 호칭은 매우 다양한데, 국왕이 생전에 활동할 때는 물론이고 사망한 이후에도 새로운 이름이 계속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국왕의 호칭에는 어린 시절의 아명(兒名), 세자에 책봉될 때 정해지는 이름(名), 별칭인 자(字)와 호(號)가 있었다. 여기까지는 사대부도 가질 수 있는 호칭이었다. 국왕의 지위가 변화하면 봉작명(封爵名)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원자에서 왕세자를 거쳐 국왕이 되는 것이 기본이었고, 국왕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상왕(上王), 노상왕(老上王), 태상왕(太上王)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 밖에도 국왕의 공덕을 찬양하는 존호(尊號)가 있었고, 국왕이 사망한 후에는 시호(諡號), 묘호(廟號), 전호(殿號), 능호(陵號)가 추가되었다. 또한 조선이라는 왕국에서 대한제국이 되면서 연호(年號)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황제의 시호인 제호(帝號)도 만들었다. 유학은 사후 세계에 대한 관심이 약했기 때문에 사망한 인물을 최종적으로 평가할 때에는 호칭을 이용했는데, 국왕의 다양한 호칭은 그의 존엄성을 높이는 동시에 그의 행적을 평가하는 의미가 있었다.

두 번째 주제는 국왕을 계승하는 의식과 그 후계자이다. 국왕의 즉위식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는데, 선위(禪位)와 사위(嗣位), 반정(反正), 등극(登極)이 그것이다. 선위와 사위는 왕위가 정상적으로 계승된 경우를 말한다. 선위는 국왕이 생전에 후계자에게 미리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고, 사위는 국왕이 사망함과 동시에 후계자로 정해졌던 인물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다. 이에 비해 반정은 무력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국왕을 교체하는 것이고, 등극은 고종이 국왕에서 황제로 등극한 것을 말한다. 국왕의 즉위식이라면 성대하고 화려한 의식이 생각나지만, 이는 선위나 등극의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사위는 선왕의 국장(國葬)이 진행되는 동안 즉위식을 거행하였고, 반정은 반정군이 궁궐을 장악한 가운데 약식으로 거행하였기 때문이다.

국왕을 계승할 후보자는 어떤 경우이든 왕실의 가족 중에서 나와야 한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국왕은 사전에 자신의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를 결정해 두었는데, 국왕과 후계자의 관계가 부자간이면 왕세자(王世子), 조손간이면 왕세손(王世孫), 형제간이면 왕세제(王世弟)로 그 이름을 구분했다. 이들과는 별개로 대군이나 군이 국왕이 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국왕이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사망했거나 반정에 의해 국왕이 갑자기 교체되는 경우에 해당한다.

분명 국왕이 존재하지만 일정한 기간 동안 국왕의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 대리청청(代理聽政), 수렴청정(垂簾聽政), 분조(分朝)가 그것이다. 대리청정은 국왕 말년에 후계자가 국왕의 업무를 대신 처리하면서 실습을 해 보는 것이며, 수렴청정은 어린 국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왕실 어른인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국왕을 대행하는 것을 말한다. 분조는 전쟁과 같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왕세자가 별도로 구성된 조정을 이끌고 국가 위기에 대처하는 방안이었다. 국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것은 불가피한 경우이기 때문에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렇지만 국왕과 왕세자 내지는 왕대비 사이에 권력의 행사를 둘러싸고 미묘한 갈등이 발생하여 상호 충돌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세 번째 주제는 궁궐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다. 국왕 및 왕실 가족이 거주하는 궁궐은 외전(外殿), 내전(內殿), 침전(寢殿)으로 구분되었다. 외전과 내전은 국왕과 신하들이 만나는 공간이고, 침전은 왕실 가족의 사적인 공간이었다. 국왕과 신하들이 만나 국정을 의논하는 것은 대부분 편전(便殿)에서 이루어졌는데, 편전은 궁궐에 따라 외전에 있기도 하고 내전에 있기도 하다. 동궁은 국왕의 후계자인 왕세자를 위해 별도로 마련된 공간인데, 세자의 교육이나 호위를 담당하는 기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은 국왕이 주로 거주하는 법궁(法宮)과 별도의 이궁(離宮)이 있는 양궐(兩闕)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국왕이 되기 전에 거주했던 별궁(別宮)이나 지방의 휴식처로 마련한 행궁(行宮)도 있었다. 또한 왕실의 가족이 궁궐 밖으로 나와 거주하는 곳을 궁방(宮房)이라 하였다. 궁(宮)은 국왕의 생부가 거처하는 집이나 종묘에 모시지 못한 왕실 가족을 위한 사당을 말하며, 방(房)은 출가한 국왕의 자녀들이 거처하는 집을 말한다.

궁궐에는 국왕과 왕실 가족이 거처하고, 이들의 시중을 드는 궁녀와 내시가 살았다. 왕후는 왕실 가족을 대표하는 인물인데, 만백성의 어머니로서 사회의 음덕을 진작시키고 내명부(內命婦)를 통솔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졌다. 왕후가 가장 막강한 권한을 발휘하는 때는 국왕이 후계자가 없이 사망했거나 어린 국왕이 즉위했을 때였는데, 왕실의 어른인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된 왕후는 국왕의 후계자를 직접 결정하거나 대리청정을 하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왕후가 국왕의 정처(正妻)라면 후궁은 첩(妾)에 해당했다. 왕후가 왕실의 어른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면, 후궁은 왕후의 역할을 보좌하거나 대 행하는 역할을 했다. 왕후는 정상적인 간택(揀擇) 절차를 밟아서 결정되었지만, 후궁이 되는 길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고 후궁의 지위에도 차이가 많았다. 후궁으로 가장 출세하는 방안은 자신이 생산한 왕자가 국왕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에 후궁은 생전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아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국왕이 사망하면 후궁의 권력도 끝이 났고, 궁궐 밖으로 나와서 쓸쓸하게 거처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도성에 조성된 정업원(淨業院)이나 인수궁(仁修宮)은 궁궐에서 나온 후궁들이 거처하는 곳이었고, 육상궁(毓祥宮, 칠궁)은 국왕을 생산한 후궁들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특별히 조성한 사당이었다.

궁녀와 내시는 왕실의 살림살이를 담당한 실무자였다. 궁녀는 후궁과 함께 내명부의 주요 구성원이었는데, 왕후가 통솔하는 내명부의 상층부는 후궁이 차지했고 하층부는 궁녀가 차지했다. 궁녀는 10세 전후에 궁궐로 들어와 신랑이 없는 혼례식을 치르며, 본인이 모시던 주인이 사망하거나 본인이 사망하기 직전이 아니라면 평생을 궁궐에 머물며 살아야 했다. 이들은 최고위 궁녀인 제조상궁의 지휘하에 궁궐의 살림살이를 담당했는데, 각자가 맡은 분야의 전문인이자 지식인으로서 수준 높은 왕실 문화를 꽃피운 소중한 존재였다.

내시도 왕실의 실무자였는데, 우리나라, 중국, 베트남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존재이다. 이들은 정상적으로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는 점에서는 궁녀와 구분되었는데,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거나 왕실 재정을 관리하고 궁궐의 대문을 지키는 등 국왕의 경호나 왕실의 살림살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내시는 국왕의 최측근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국왕의 총애를 믿고 세력을 부리거나 권력자와 결탁하는 경우도 나타났는데, 조선시대에는 내시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중국사에서와 같이 내시(환관)가 권력을 전횡(專橫)하는 경우는 없었다.

네 번째 주제는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왕국의 가장 존엄 한 존재인 국왕과 왕실 가족의 권위를 표현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주로 왕실의 의례, 복식, 의장을 통해서 나타났다. 왕실 의례는 유교적 이념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표현하는 방법인데, 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로 구성되는 오례(五禮)로 나타났다. 오례에는 혼례식, 장례식, 회갑 잔치, 사신의 영접과 같이 현대로 이어지는 의례가 있는가 하면, 국왕이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 왕비가 누에를 치는 친잠(親蠶), 국왕과 신하가 어울려 활쏘기를 하는 대사례(大射禮)와 같이 지금은 사라진 의례가 있었다.

왕실의 권위가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복식이었다. 국왕의 법복(法服)인 면복(冕服)은 복식에 수놓인 문양의 종류와 색채, 면류관(冕旒冠)에 사용된 구슬의 종류와 개수 등에서 다른 복식과 분명한 차이를 보였고, 왕후의 법복인 적의(翟衣)에도 문양과 옷감의 종류, 흉배(胸背)에 있는 용 문양의 발톱 수까지 뚜렷한 기준이 있었다. 왕실의 권위는 의장이나 도장으로도 나타났다. 왕실 가족의 행렬을 장엄하게 보이게 장식하는 의장에는 깃발, 양산, 부채 등이 있었다. 도끼, 칼, 창 같은 의장은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가진 국왕의 권력을 상징했다. 또한 왕실의 도장은 소유자의 지위를 보여 주는 대표적 상징물이었는데, 국왕에게는 용도를 달리하는 여러 종류의 도장이 있었고, 중국의 황제에게 받은 도장도 있었다. 중국의 황제가 준 도장에는 조선의 국왕으로 책봉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마찬가지로 국왕이 왕후나 왕세자를 책봉할 때에는 그 지위에 부합하는 도장을 주었고, 왕실 가족에게 새로운 존호를 올릴 때에는 이를 새긴 도장을 상징물로 주었다.

다섯 번째 주제는 왕실 의례에 나타나는 전례 음악이다. 유교 이념에 의하면 예(禮)와 악(樂), 즉 의례와 음악은 상보적인 관계에 있었는데, 의례가 질서를 위하는 것이라면 음악은 화합을 위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따라서 오례로 구성된 왕실 의례가 거행되는 자리에는 반드시 음악이 따랐는데, 이때의 음악은 음악 연주(樂), 노래(歌), 무용(舞)을 합한 것이다.

전례 음악을 담당한 전문 기관은 장악원(掌樂院)이다. 장악원의 제조는 예와 악에 능통한 문반의 관리가 임명되었고, 음악 감독인 전악(典樂)은 전문 음악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직책이었다. 장악원에 소속된 연주자에는 악공(樂工)과 악생(樂生)이 있었는데, 양인 출신인 악공은 아악과 문무(文舞), 무무(武舞)를 담당했고, 천인 출신인 악생은 당악과 향악을 담당했다. 무용수에는 무동(舞童)과 여기(女妓)가 있었는데, 인조반정 이후 국왕을 주인공으로 하는 외연(外宴)에는 여악(女樂)의 사용이 중지되었다. 남성과 여성을 동일한 공간에 두는 것을 배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전례 음악을 기록한 서적도 다양한데 악서(樂書)와 악보(樂譜)는 가장 전문적인 서적이고, 왕실 의례를 기록한 오례서(五禮書)와 의궤(儀軌)에도 관련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악서는 오례서와 함께 작성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는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함께 『악학궤범(樂學軌範)』이 작성된 것이나 『속오례의(續五禮儀)』와 함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악고」와 『국조악장(國朝樂章)』이 작성된 것이 이를 보여 준다. 악서가 작성될 때에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국왕과 신하의 만남이 중요했는데, 세종과 박연의 만남, 성종과 성현의 만남, 정조와 서명응의 만남을 통해 훌륭한 악서가 탄생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정치를 ‘예악(禮樂)의 정치’라 하는 것은 국가 체제의 운영이 의례와 음악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정치에서 의례와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조선의 국왕이 되려면 이에 관한 일정한 지식이 필요했고, 훌륭한 국왕으로 평가를 받으려면 국왕 자신이 의례와 음악에 관한 전문가가 되어야 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국왕 교육에는 의례와 음악에 대한 교육이 필수였고, 세종, 영조, 정조 같은 국왕은 스스로가 예악의 전문가가 되어 당대의 문물을 정리하는 성과를 남겼다.

그렇다면 예악의 정치에서 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상하의 지위를 구분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모든 제도가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는 사회였다. 가령 존호의 경우를 보면, 국왕이 받을 수 있는 존호의 글자 수와 왕후가 받을 수 있는 글자 수, 왕세자가 받을 수 있는 글자 수에 차이가 있었다. 또한 국왕과 왕세자의 관복에는 면류관과 장복(章服),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가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었지만, 이를 장식하는 문양의 종류와 색채, 구슬의 개수에 분명한 차이를 두었다.

심지어는 궁중 잔치에서 올리는 술잔의 수에도 차이가 있었다. 국왕과 왕후에게 올리는 술잔은 아홉 잔, 왕세자와 세자빈에게는 일곱 잔이 기본이었는데,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에게는 아홉 잔의 술잔을 올렸다. 조선의 국왕과 중국 사신에게 올리는 술잔 수가 같다는 것은 이들이 동등한 지위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조는 1795년에 화성에서 생모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를 위한 회갑 잔치를 거행하면서 혜경궁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잔치에서 혜경궁에게 올린 술잔은 일곱 잔이었는데, 세자빈의 지위에 있는 혜경궁에게 왕후에게 올리는 아홉 잔을 올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예악에서 악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상하가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의 제도를 보면 삼재(三才)를 구성하는 천지인(天地人)의 조화와 음양의 조화를 중시했다. 우선 국왕의 왕(王) 자는 권력을 상징하는 도끼의 모양을 본뜬 상형 문자인데, 이는 천지인을 꿰뚫어 다스리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또한 왕실 의례에서 제사를 모시는 대상은 천신(天神), 지기(地祇), 인귀(人鬼)로 구분되며, 제례 음악을 구성하는 등가(登架), 헌가(軒架), 악무(樂舞)는 각각 천지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음양의 조화는 복식과 음악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예기(禮記)』에서 “상의는 오색의 정색(正色)을 사용하고 하의는 간색(間色)을 사용한다.”고 했는데, 정색은 양을 상징하고 간색은 음을 상징한다. 국왕의 법복에서 제일 위에 있는 면류관은 흑색으로 하고 제일 아래에 있는 버선과 신발은 홍색을 사용하는데, 적색은 정색이고 홍색은 간색에 해당하여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진다. 음악에서는 음양의 합성을 중시했다. 가령 사직 제례악에서 등가에서는 응종궁(應鐘宮)의 선율을 연주하고 헌가에서는 태주궁(太簇宮)의 선율을 연주하는데, 응종궁은 음려(陰呂)에 해당하고 태주궁은 양률(陽律)에 해당한다. 그런데 등가는 천=양에 해당하고 헌가는 지=음에 해당하므로, 결국 제례악이 연주될 때 등가와 헌가에서는 음양의 합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를 보면 조선의 예악 정치는 음양의 조화, 천지인의 조화와 상생을 꿈꾸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예악의 정치가 이루어진 조선시대를 ‘국가와 국왕’이라는 측면에서 조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집필자들이 모여 주제를 분담한 다음에 각자의 원고를 작성했는데, 이를 합쳐서 보니 부분적으로는 중복되는 내용이 있고, 해석상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집필자들은 이 책을 통해 조선 왕실의 다양한 문화를 보여 주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으로 자부하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이라는 국가의 실체를 좀 더 정밀하게 해석해 나가고자 한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조선시대의 왕실 문화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다면, 집필자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겠다.

2008년 12월

단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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