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23권 다양한 문화로 본 국가와 국왕
  • 제1장 나라 이름과 왕 이름에 담긴 의미
  • 1. 국호에 숨겨진 우리 역사
  • 문명과 국의 출현
신명호

국호(國號)는 나라 이름이라는 뜻이다. 국명(國名)도 나라 이름이라는 뜻이므로 국호는 국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호 또는 국명이 있으려면 당연히 국(國)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국은 언제 어떻게 나타났으며, 그 국호 또는 국명은 무엇이라 하였을까?

현재 우리나라의 국호는 대한민국이지만, 대한민국 이전에도 무수한 국호가 있었다. 예컨대 우리나라 역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古朝鮮)을 비롯하여 부여(夫餘·扶餘),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야(伽倻), 발해(渤海), 고려(高麗), 조선(朝鮮), 대한제국(大韓帝國), 임시 정부(臨時政府) 대한민국(大韓民國) 등이 있었다.

이들 국호는 각각 특정한 나라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국호가 다르면 나라 자체가 다르게 마련이다. 이에 비해 국호가 비슷하면 두 나라 자체는 비록 다르지만 두 나라 사이에 뭔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컨대 고조선과 조선, 고구려와 고려, 대한제국과 임시 정부 대한민국은 서로 다른 나라가 분명하지만 상호간에 관련성이 있었다. 즉 조선은 고조선의 옛 이름을 계승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고려는 고구려의 역사성을 계승하기 위해 고려라 하였으며, 임시 정부 대한민국은 일제에 멸망당한 대한제국을 독립시킨다는 의미에서 대한민국이라 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등장하는 국호 중에서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을 제외한 나라는 흔히 왕국(王國)이라고 하였다. 예컨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조선의 경우에는 ‘왕국’이라는 이름을 더하여 고구려 왕국, 백제 왕국, 신라 왕국, 가야 왕국, 발해 왕국, 고려 왕국, 조선 왕국이라고도 하였던 것이다. 이는 대한제국이 등장하기 이전의 우리나라 역사가 오랜 세월 왕국으로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왕국으로 이어지다가 대한제국 때에 ‘제국(帝國)’이 되었고 대한민국 때에 ‘민국(民國)’이 되었던 것이다.

국호 다음에 붙는 왕국, 제국, 민국은 그냥 붙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특징과 성격을 규정짓는 용어이다. 왕국은 왕의 나라, 제국은 황제의 나라, 민국은 국민의 나라라는 뜻이다. 즉 왕국, 제국, 민국은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표현하는 용어이다. 왕국, 제국, 민국이 등장한 순서로 본다면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민국 이전에 제국이 있었고, 제국 이전에 왕국이 있었다. 그러면 왕국 이전에는 어땠을까? 나라가 있으면 꼭 왕이 있었을까?

신라 왕국의 경우를 들어 생각해 보자. 신라 왕국의 모태는 경주평야(慶州平野)에서 성장한 사로국(斯盧國)이었다. 사로국은 처음부터 사로 왕국이었을까?

그런데 사로국을 사로 왕국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사로국의 특징과 성격이 왕국이라고 하기에 부적합하기 때문이다. 신라 왕국은 왕국이 되기 이전 오랜 세월을 사로국으로 존재하다가 어느 단계에서인가 신라 왕국으로 질적 변화를 하였던 것이다. 신라 왕국으로 변하였다는 것은 왕이 등장하였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제국에서는 황제가, 민국에서는 국민이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역사의 전개 과정으로 본다면 ‘국’, 즉 ‘나라’라고 하는 존재가 어느 시점에서인가 출현한 후, 역사의 진전에 따라 ‘왕’, ‘황제’, ‘국민’이 등장하게 되면서 그 나라들이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나라들, 즉 왕국, 제국, 민국으로 변화하였다고 하겠다. 그 같은 변화는 나라의 변화이기도 하고 역사적 전환이기도 하였다. 예컨대 사로국에 왕이 출현하면서 신라 왕국이 되는 상황을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확대보기
울진 봉평 신라비
울진 봉평 신라비
팝업창 닫기

지증왕 4년(503)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가 아뢰기를, “박혁거세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국명이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斯羅)라고도 하고, 혹은 사로(斯盧)라고도 하며, 또는 신라(新羅)라고도 불렀습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이를 국호로 삼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또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국가를 가지고 통치하는 사람은 모두 제(帝)나 왕(王)을 칭하였는데, 우리 박혁거세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 지 지금 22대에 이르기까지 단지 방언(方言)만을 칭하고 존호(尊號)를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가 한 마음으로 삼가 신라 국왕(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하니, 왕이 이에 따랐다.1)『삼국사기(三國史記)』 권4, 신라본기(新羅本紀)4,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사로국 사람들은 서력으로 503년에 이전의 사라, 사로, 신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나라 이름을 ‘신라’로 확정하고 아울러 당시의 권력자 지증에게 ‘국왕’이라는 존호를 올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그 이전까지 신라에는 국왕, 즉 왕이 없었다는 것이며, 따라서 그 이전의 나라는 왕국이라고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예컨대 그 이전의 국호로 쓰였던 사로, 사라, 신라는 그대로 부르거나 또는 사라국, 사로국, 신라국이라 부르는 것이 적합하고 사라 왕국, 사로 왕국, 신라 왕국으로 부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유는 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왕이 없던 시기의 사라국, 사로국, 신라국과 왕이 등장한 이후의 신라 왕국은 같은 나라이면서도 특징과 성격이 전혀 다른 나라라고 하겠다.

확대보기
영일 냉수리 신라비
영일 냉수리 신라비
팝업창 닫기

국과 왕국의 가장 큰 차이는 왕의 유무였다. 왕은 국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은 다음에 출현하였다. 마치 신라의 경우 신라 왕국이 출현하기 전에 이미 사라국, 사로국, 신라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왕이 등장하기 이전의 ‘국’, 즉 나라는 무엇일까?

나라는 ‘국(國)’이라고 하는 중국의 한문을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다. 중국의 국이라는 한문 글자를 우리 조상들이 ‘나라’로 이해하였다는 의미이다. 우리 조상들이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인가 ‘나라’라고 하는 정치체를 조직하고 그것을 ‘나라’라고 불렀던 것이다.

‘나라’는 ‘나’와 ‘라’가 합쳐진 말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는 나(那), 라(羅), 야(倻) 등의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예컨대 서나(徐那) 또는 관나(貫那)의 ‘나’, 서라(徐羅)의 ‘라’, 가야(伽倻)의 ‘야’ 등이 그것이다. 이 ‘나’, ‘라’, ‘야’ 등으로 발음되는 단어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벌’, 즉 넓은 평지를 뜻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넓은 평지인 ‘나’, ‘라’ 등에 정착하고 모여 살게 되면서 수많은 ‘나’와 ‘라’가 출현하고 이런 ‘나’와 ‘라’들이 서로 간의 정복이나 통합을 거쳐 ‘나라’로 진전하였던 것이다.2)노태돈, 「삼국시대의 부(部)에 관한 연구」, 『한국사론』 2, 서울 대학교 국사학과, 1975 ; 전호규, 「고구려 초기 나부 통치 체제(那部統治體制)의 성립과 운영」, 『한국사론』 27, 서울 대학교 국사학과, 1992 ; 이희준, 「대구 지역 고대 정치체(政治體)의 형성과 변천」, 『영남 고고학』 26, 영남 고고학회, 2000 ; 이청규, 「국(國)의 형성과 다뉴경 부장묘(多紐鏡副葬墓)」, 『선사와 고대』 14, 한국 고대학회, 2000 ; 이현혜, 「한국 초기 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의 정치체(政治體) 수장(首長)에 대한 고찰」, 『역사학보』 180, 역사학회, 2003. 따라서 기원으로 따지자면 ‘나라’의 출현은 사람들의 정착과 밀집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사람들의 정착과 밀집은 농경문화(農耕文化)와 직결되었다. 농경문화 이전 단계에서는 먹을 것을 찾아 끝없이 헤매야 하였다. 그 같은 상황에서 정착이나 인구 밀집은 불가능하였다. 그런 단계가 바로 석기시대의 수렵이나 채집과 같은 단계였다.

확대보기
농경무늬 청동기-앞면
농경무늬 청동기-앞면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농경무늬 청동기-뒷면
농경무늬 청동기-뒷면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농경무늬 청동기-부분
농경무늬 청동기-부분
팝업창 닫기

그러나 농경문화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매지 않고 한 곳에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농경을 위해서는 넓은 평지가 필요하므로 사람들은 넓은 평지에 정착, 밀집하게 되었다. 여기에 청동기, 철기 등의 도구가 출현하면서 농경문화는 더욱 발전하고 사람들의 정착과 밀집도 더욱 확대되었다. 취락(聚落), 촌락(村落), 부락(部落), 읍락(邑落) 등이 바로 농경문화의 발전에 따라 사람들이 정착, 밀집한 곳이었다. 이런 취락, 촌락, 부락, 읍락 등을 중심으로 출현한 원초적인 정치체가 이른바 ‘나’ 또는 ‘라’였던 것이다. 역사의 진전에 따라 ‘나’와 ‘라’는 ‘나라’로 확대되고 그 나라에 다시 ‘왕’이 출현함으로써 ‘왕국’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한국의 역사에서 ‘나라’의 등장과 ‘왕국’의 출현은 그 자체가 중요한 역사적 변화를 의미한다. ‘나라’가 등장하고 ‘왕국’이 출현하면 당연히 국호, 즉 나라 이름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역사 기록으로 본다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최초의 국호는 고조선이다. 고조선은 ‘옛 조선’이란 말이므로 국호만 따지면 ‘조선’이 된다. 이 고조선 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형성되었는지 또 어느 시점에서 왕국으로 진전되었는지는 현재도 합의된 결론을 도출해 내기 어렵다. 그렇지만 고조선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등장하는 국호라는 사실 자체에는 이론이 없다.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만주와 한반도에는 수많은 나라가 등장하였다. 예컨대 삼한(三韓) 지역에 등장하였던 나라들 중에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된 나라 이름만 해도 78개국이나 된다. 만주 지역에도 무수한 나라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나라 중에서 왕국으로까지 성장하여 만주와 한반도의 패권을 다툰 나라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였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